[정성글] 익명으로 쓰는 중고거래 경험담
그 시절 일기장에 썼던 글을 토대로 이 글을 남깁니다.
거래 전후 내용까지 쓰다보니까 글이 아주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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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경험담]
당시엔 학생이라 부모님께 허락을 안 맡고 집에 택배를 시키면 눈치가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방학이 돼서 택배 받을 시간도 있고 용돈도 있겠다, 어떤 영화의 한정판DVD를 사고 싶어서 중고장터에 올라온 글을 보고 첫 중고거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택배거래를 하기로 하고 쪽지로 이름과 주소, 우편번호를 보냈는데 그 분이 자신도 같은 지역에 살고 있다면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제가 약간 소심한 면도 있고 직거래를 하면 어디에서 만나서 어떻게 해야되는지 검색도 하고 알아봤는데 저한텐 직거래가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서 괜찮다고, 택배거래로 하자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직거래로 하면 택배비를 안 내도 되고, 자신이 보고서(뭘 보겠다는 건진 모르겠습니다.) 네고를 해줄수도 있다고 다시 쪽지를 보냈습니다. 제가 괜찮다며 택배거래 그대로 하자고 하니까 그 분이 알겠다고 했고 DVD를 택배로 보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전 그분이 말씀하신 택배비 4000원도 더해서 DVD값을 보냈습니다.
며칠 후 DVD가 도착했는데 택배가 아니라 등기가 왔습니다..ㅎㅎ 등기라고 붙여진 스티커를 보니까 2천 몇십원 하더라고요....... 판매자 분은 저한테 우체국 택배비를 받아놓고 등기를 보내셨던 겁니다. 태어나서 등기를 받아본 건 그게 첫번째였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정판DVD에 있어야 하는 구성품 하나도 없더라고요. 처음 거래할 때 한정판DVD 외관 사진 한장만 받아놓고, 구성품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 안 한 제 잘못이라 생각하고 이것도 그냥 넘어갔습니다. 첫 중고거래라 제가 뭘 몰랐습니다.,ㅎㅎ
그런데 제가 그 DVD를 받고 하루가 지난 뒤 그 분한테서 다시 쪽지가 왔습니다. 왜 연락이 없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DVD 잘 받았다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근데 그 판매자가 구성품 중에 뭐 하나 없지 않느냐고 묻는 쪽지를 또 보냈고, 받고 싶으면 자신이 마침 볼 일이 있어서 가까이 있으니까 어디로 오면 줄 수 있다고 만나자고 합니다. 전 그게 꺼림칙했기 때문에 안 받겠다고 했고 그걸로 거래를 마쳤습니다.
[두 번째 경험담]
아웃케이스가 있는 어떤 블루레이를 사고싶었는데 돈이 얼마 없었고 검색해보니 인터넷 서점에서 사는 것보다 중고장터에 택배비까지 더해도 더 저렴한 미개봉품이 있었습니다. 전 그걸 사기로 했고 판매자분과 연락을 마쳤습니다.
며칠 후 택배가 도착했고 상자를 개봉해보니 딱 한장의 에어캡으로 블루레이를 대충 한 바퀴 둘러 주셨더군요. 포장이 부실하긴 해도 벌어지지 말라고 테이프는 붙여줘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테이프 접합부위에 칼을 대려는 순간 검정색의 뭔가가 보였습니다.
테이프에 실수로 머리카락 한 가닥이 붙은 게 아니었습니다. 머리카락인 줄 알았던 그것들은 체모였고 한두개가 아니었습니다. 투명 테이프에 그정도의 체모를 붙이다니 의도는 모를 일이지만 저는 매우 찝찝했습니다. 굳이 확인해야하는 버릇이 있어 조명에 비춰보니 체모가 있는 부분의 테이프 찐득이에 지문도 찍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만 체모를 붙인 테이프를 받는 건가 싶었는데, 며칠 뒤에 글이 올라온 걸 보니 같은 판매자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택배를 받은 회원님(이 분은 남자)도 계시더군요. 블루레이는 멀쩡했기 때문에 물티슈로 비닐을 한 번 닦아내고 도서관 책 소독기에 갖고 가서 소독을 해왔습니다. 이 블루레이가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는데 볼 때마다 찝찝해집니다.
[세 번째 경험담]
이번엔 스틸북 구매 경험담입니다. 정가보다 배는 되는 가격이었지만 구하기 꽤 어려웠던 스틸북이 미개봉으로 나와서 구매를 결심했습니다. 판매글에 다른 스틸북과 나란히 놓인 사진 한장과 미개봉, 상태좋음이라는 문구를 보고 입금을 했더니 판매자분이 그날 바로 택배를 부쳐줘서 다음날 바로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미개봉인 채로 비닐을 뜯지 않고 상태 확인을 했는데 비닐 안쪽으로 엄청난 흠이 보였습니다. 구하기 어려운 스틸북이어도 이런 상태로 소장할 수는 없겠다고 판단해서 판매자분한테 택배를 받았는데 흠이 있으니 환불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물론 아직 비닐을 뜯지 않았고 흠을 발견한 즉시 연락드리는 거라는 말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문자로 계속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안 된다고만 하십니다. 사진을 보내겠다고 하고 미개봉인 상태 그대로인데 왜 안되느냐고 했는데 그래도 계속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보낸 건 양품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혹시 택배비 문제 때문인가 싶어서 제가 택배비를 부담해서 보낼테니 환불 부탁드린다고 몇 번이나 문자를 보냈는데 더이상 답장도 안 보내주셨습니다.
그 후 너무 답답하고 환불받고 싶어서 문자 대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문자로 했던 것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화를 내더군요. 그래서 거의 울먹거리면서 환불해달라고 했는데 그 분이 일이 급하다며 끊으라고 합니다. 십 분쯤 후 문자가 한 통 와서 확인해보니 접촉사고 현장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러고 저한테 너때문에 나 방금 사고났다고 합니다.
한참 후에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전화를 먼저 건 건지, 판매자분이 저한테 전화를 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년'자 들어가는 온갖 소리의 욕을 합니다. 제가 계속 환불을 요구하니 결국엔 어쩔 수 없단 듯이 한숨을 쉬면서 알겠다고 했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온갖 년 소리를 들은 게 너무 억울하고 슬퍼서 울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나한테 욕을 하지? 진짜 나때문에 사고가 난 건가? 혹시 찾아오면 어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문자와 전화로 연락을 한 끝에 택배를 부치고 환불도 받았습니다. 이 때의 기억이 너무 안 좋아서 이후로는 중고거래를 하지 않고 블루레이 프리오더에 집착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제가 별것 아닌 상황들을 괜히 민감하게 받아들여 찝찝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위의 경험들은 평생 못 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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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ㄷㄷ 테이프에 체모는 방바닥에 있는 먼지나 털 청소하던 박스테이프를 사용한 걸로 마무리 지읍시다. 안 그러면 너무 무서워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