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글] 쿠르베 LP 감상회 초대 이야기
1.
내 나이 스무살.
아직은 LP판이었다. 최고는 워크맨이었다.
테이프에 짜깁기한 노래들은
멜로디가 문장을 쓰고 리듬이 문단을 나눈 한 통의 편지였다.
쉬운 사랑은 없던 시절,
노랫말은 누군가 내 마음 속에 들어와
몰래 훔쳐보고 나서야 쓰는 줄로만 알았다.
2.
사랑은 '깊은 밤을 날아서' 어린애들 놀이같이 다가왔다.
매일매일은 동네 아이들이 귀엽게 보이던 '좋은 날'이었다.
입맞추고 싶은 듯 그려있는 '장미빛깔 그 입술'에 차 한잔을 권했으며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선물하곤 했다.
최고의 생일선물은 라디오 신청곡이었다.
권진원의 'Happy birthday to you'가 흐르던 어느날,
이슬비까지 내리면 기적이었다.
이별은 감히 생각도 못했기에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아직은 들리지도 않았다.
3.
시대는 바뀌었다.
연말연시에 바른손 카드를 고르던 설렘은 없어졌다.
카카오톡으로 쉬운 대화를 건네고,
숫자1이 지워지기만을 기다린다.
억지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렀던 김광진의 '편지'는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
기나긴 침묵 대신
네, 아니오란 대답을 숫자1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천적들의 득새는 버거웠다.
워크맨은 벌써 5년전에 종의 멸망을 맞이했다.
낡은 책상 서랍 속의 테이프는 돌아갈 곳을 잃었다.
LP도 그렇게 함께 갇혔다.
4.
어느덧 중년이다.
부장은 멀고 대리는 까마득하다.
과장의 역할은 늘 과장되어 있다.
이맘때의 길은 언제나 후회로 정체중이다.
누군가는 왼쪽 길을 선택했음에 속도를 줄이고
누군가는 가던 길을 벗어났음에 뒤돌아본다.
수시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어디까지 왔는지 모르기에
어디까지 갈지도 고민이다.
5.
길을 헤멜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치 판단이다.
6.
모처럼의 연휴다.
일상은 오랜만의 텅빈 도로다.
위치 판단에 좋은 기회다.
일상에서 커브를 틀자.
크게 왼쪽으로 돌아보자.
윈도우를 열고 창밖으로 손을 내밀자.
갑작스런 유턴에 가족과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자.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자.
7.
볼륨은 최대한 높이자.
28평 아파트는 방음이 안되서 힘들었다.
사내정치에 라인을 잘못탄 심장은 언제나 쪼그라 들어있다.
스피커의 볼륨을 가슴이 터지도록
오른쪽으로 돌리자.
그만큼 핸들은 왼쪽으로 크게 돌리자.
8.
음악은 직선이 아니다. 커브다.
멜로디도 커브다.
쿠르베도 커브다.
볼륨을 최대한 높였으면
가능한한 커다란 커브를 그려보자.
커브가 끝나는 곳,
그곳에는
아직 음악이 있다.
그 시절의
플라스틱에 줄을 그은 촌스러운 음악이 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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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입니다. 2016년 2월 10일 오후 느즈막~저녁 맥쥬 꽐라전 / 쿠르베 LP 음악 감상회]
2016-02-10 05:38:38
왜... 눈물이 핑 돌까요.
2016-02-10 05:46:26
세상에, 이 글을 읽고 나니 막 가고 싶어지는군요.
2016-02-10 08:07:33
글을 읽다보니 머리 속에 뭔가 그림이 확 그려졌습니다 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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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간결하면서 맛깔나는 춤추는대카피선님글.. 언급되어 있는 노래들 쿠르베같은 좋은 스피커로 들어보고 싶네요.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