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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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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2-14 01:47:26


데이빗 린치
 
데이빗 린치는 관객을 깨우치는 일종의 계몽가이다. 동시대의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영화와 TV로 그는 사람의 꿈 속으로 들어간다. 린치는 드넓은 무의식의 공간 속 욕망을 프로이트와 라캉에 비추며, 화가답게 인물들의 선을 긋는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의 정점이라 봐도 될 〈블루 벨벳Blue Velvet, 1986〉을 내놓은 이후 많은 이들은 그가 더 나아갈 곳이 있을까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걱정을 비웃다시피 텔레비전의 역사상 가장 드높은 성취 중 하나라 불릴 만한 〈트윈 픽스Twin Peaks, 1992〉를 찍었고,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린치는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 1997〉를 통해 새로운 경지로 뛰어넘는다. 그는 카프카의 소설을 경유해 미국의 풍경화를 그리는 동시 분열하는 주체의 욕망을 꿈으로 엿보고, '영화'에 대한 전무후무한 성찰/실험을 선보인 것이다. 이때 주목해야할 것이 린치는 성찰과 실험을 다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양면의 얼굴처럼 한 스크린에 붙어 있는 이 둘은 〈로스트 하이웨이〉와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 2001〉의 뫼비우스의 띠를 표방한 구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오늘 소개할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린치는 관객에게 이렇게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예언하듯이 보여준다. 이 예언은 필름의 마지막과 디지털의 시작을 알리는 2001년, 새로운 세기의 시작인 그 동시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시대의 성찰을 통해 남은 족적은 때에 따라 영원한 동시대성을 얻게 되며 그것이야 말로 위대한 예술의 증거라 할 수 있다.[1]


줄거리

1부: 아름다운 여인이 탄 자동차가 멀홀랜드 드라이브 위를 달리다 갑자기 멈춘다. 앞에 앉은 운전사가 총을 겨누며 차에서 내리라 협박하는 순간, 반대편의 질주하는 차량을 들이받는다. 피 범벅이 된 여자는 살아남고 차에서 기어나와 눈 앞에 보이는 꿈의 도시, 로스앤젤레스로 걸어간다. 반면, 다음날 로스앤젤레스에 여배우를 꿈꾸는 '베티' 또한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다. 영화계 종사자인 이모가 잠시 집을 비울 동안 베티가 머물며 오디션을 볼 예정이라 한다. 이때 피범벅이 된 여자는 몰래 숨고 있다가, 집에서 나오는 어떤 여자를 보고 그 집 안으로 들어가 숨는다. 알고보니 그 집은 베티 이모의 집이었고, 베티는 여인이 샤워하는 도중 처음으로 만난다. 이모의 친구라 생각한 베티는 대수롭게 생각하지만, 이모와 통화하니 머무는 친구가 없다고 얘기하자 베티는 의심스럽게 여기고 여인에게 묻는다. 자신을 리타라 부르는 여인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울며 밝힌다. 베티는 마치 미스터리에 빠진 듯한 리타를 도와주겠다 결심하고 단서를 찾기 위해 리타와 함께 가방을 뒤척인다. 마치 필름 느와르 영화를 보는 듯, 팜므 파탈 여성의 가방 안엔 엄청난 양의 돈과 어떤 열쇠가 있었다.

다음으로 영화는 윙키스 레스토랑으로 무대를 옮기며 '댄'이라는 남자의 고백을 들려준다. 댄의 친구는 왜 여기서 만나자고 했냐 물어보며, 댄은 창피하다는 듯이 꿈 때문이라 고백한다. 댄은 지금까지 두 번 꿈을 꾸었고, 두 번 다 밤이 되기 전 윙키스에서 친구가 두려움에 빠진 표정으로 카운터에 서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말하며, 어떤 얼굴이 벽 너머 보였다고 한다. 결국 댄은 오늘 윙키스에 오자 부탁한 이유가 그 얼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라 밝힌다. 마치 꿈 재현을 약속했다는 듯이, 카운터에 있는 친구가 보이는 순간 부터 댄의 꿈이 그대로 재현되고, 그는 벽에서 튀어나온 어떤 얼굴을 보고 사망한다.

이 와중, 영화는 느닷없이 애덤 케셔라는 영화 감독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스튜디오로 불려온 그는 마피아같은 두 남자에게 협박을 받는다. '카밀라 로즈'라는 여배우를 신작에 캐스팅하라고. 반사적으로 그는 이 협박에 몹시 불쾌히 반응하며 나가는 도중 그들의 차를 부수기에 이른다. '미스테리 맨'을 연상시키는, 거울 너머 미지의 남자가 지시함에 따라 애덤 케셔를 향한 음모론 같은 현실이 다가온다. 여기서 영화는 한 번 더 좌회전을 한다. 뜬금없이 불량해보이는 두 남자가 등장하고, 둘은 잡담을 하며 웃는다. 안부를 묻는 듯한 둘의 대화는 알고보니 한 남자가 미지의 주소록을 얻기 위한 계략이었고, 그는 상대방을 죽인다. 암살 후 자살처럼 꾸미려던 그의 계획은 실수로 총이 발사되며 꼬이고, 계획에 없던 살인을 한 후 화재 경보 알람이 울려 놀라며 탈출한다.


다시 애덤 케셔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는 집에 돌아온 그는 바람 피는 아내를 발견하고, 불륜 상대로부터 자기 집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다. 호텔에서 머무는 그는 모든 자산 사용이 정지되었고 카우보이를 만나라는 안내를 받는다. 카우보이는 신작에 '카밀라 로즈'를 기용하라 협박하며 잘하면 한 번, 잘못하면 두 번 만날 것이라 말한다. 이때 베티와 카밀라는 리타가 당했던 사고를 추적하고 '다이앤'이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디션에서 베티는 섬뜩할 정도로 멋진 연기를 펼치고 다른 배우, 감독과 관계자들을 매혹시킨다.

여기서 관계자는 베티와 애덤을 소개시켜 준다고 하며 두 이야기가 교차하게 된다. 이때 처음으로 스트린에 등장하는 '카밀라 로즈'를 애덤은 파격적으로 캐스팅하며 불가항력과도 같은 음모론에 굴복한다. 오디션이 끝난 후 베티와 리타는 전화부에서 본 이름 '다이앤 셀윈'을 찾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고, 심지어 몰래 들어간다. 이상한 악취를 맡고 두려움과 불안함에 쌓여 집을 둘러보는 그들은 한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화들짝 놀란 리타는 비명을 지르고 그녀의 입을 베티가 막는다. 다음 장면에서 리타는 갑자기 머리를 자르기 시작하고, 베티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다; '너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어. 내가 하게 해줘'. 그녀는 리타에게 금발 가발을 씌우고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고 속삭인다. 이어서 같은 침대 위 잠을 청하는 둘은 관계를 갖고 잠을 청한다.

이때, 마치 귀신에 홀린 듯이 리타가 잠에서 깨어나 반복해 되뇌인다. 'Silencio. No hay banda. 가야 할 곳이 있어.' 그들은 택시를 타고 '클럽 실렌시오'로 간다. 웅장한 무대 위 남자가 올라 외친다; '밴드는 없다. 그러나 밴드 소리가 들린다. 이 모든 것이 녹음이며 환상이다.' 이 말을 듣고 천둥번개 소리가 들리니 베티는 부르르 떤다. 이어서는 한 여인이 등장해 'Llorando'를 부른다. 외국어로 노래를 부르는 여인을 보며 베티와 리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공연에 사로잡힌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여인이 쓰러지며 립싱크였음이 밝혀지지만, 여전히 리타와 베티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녀가 쓰러지는 직후, 베티는 파우치에서 파란 박스를 발견하고 리타와 함께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다. 파란 열쇠로 파란 박스를 열려는 순간, 베티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박스가 열리며 리타는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베티의 이모가 방을 둘러본다. 영화는 이때 다이앤의 방으로 배경이 바뀌고 카우보이가 등장해 '일어날 시간이야'라 속삭인다.


2부: 아까 우리가 본 다이앤의 방이 등장하고 1부에서 본 여자가 짐을 가지러 온다. 그파란 열쇠를 본 다이앤은 깜짝 놀란 듯 보이고, 여자가 떠난 후 '리타'를 환영으로 본다. 그런데 이애 '카밀라'라 부른다. 몇 번의 카메라 이동 후 영화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카밀라가 다이앤에게 결별을 선언하는 순간이 등장한다. 세트장에서 행복해보이는 애덤 케셔와 카밀라를 보고 질투하는 다이앤은 다음 장면에서 울부짖으며 혼자 자위하고 밤에 애덤 케셔와 카밀라의 파티를 참석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카우보이를 보고, 애덤과 카밀라의 결혼 발표를 들은 후 분노에 가득차며 영화는 다시 시점을 이동한다. 1부에서 본 청부 살인업자에게 카밀라의 사진을 보여주며 꼭 부탁한다 말하는 다이앤은 현재로 돌아온 시점에서 1부의 본 노년 부부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권총으로 자신을 쏜다. 이렇게 영화는 클럽 실렌시오로 돌아가 'Silencio'의 속삭임으로 끝난다.


현실 혹은 꿈?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내가 처음으로 본 린치의 영화다. 이것은 린치의 〈현기증Vertigo, 1958〉으로서 갈색머리 여자와 금발 여자가 등장하는 '영화'에 대한 미로다. 선형적인 흐름의 기존의 서사를 거부하고 두 갈래의 이야기로 거듭 진행되더니 끝에 매듭을 지은 뫼비우스의 띠랄까. 여기서 린치는 현대 영화를 뒤집는다. 들뢰즈는 현대 영화를 두고 시간-이미지의 영화이자 견자의 영화로 정의했고, 린치는 이 둘을 중간에 뻔뻔하게 바꿔치기해 관객들이 긿을 잃게 만든다. 같은 이미지(인물)이 보이는 데 다른 시간이 흐르고, 같은 시간에 다른 이미지가 등장하며 견자는 행위자가 되고 행위자는 견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이야기를 풀어보자.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이것은 어느정도의 구멍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 영화의 이야기를 나눠 설명하고픈 욕망이 드는 이유는 이것이 린치가 의도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가장 흔히 통하는 설명이자 내가 (그나마) 동의하는 설명은 1부가 환상이며, 2부가 현실이라는 것이다. 즉, 다이앤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채워지지 못한 욕망이 채워도록 하기 위해 꾼 환상의 꿈이다. 줄거리를 보면 알다시피 1부는 뜬금없이 서사의 주인이 계속 바뀌며 연결 고리가 없는 듯한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주의깊게 듣고 보면 이 이야기들이 연결되있음을 알 수 있다. (1부 전체의 중심이 리타와 베티의 이야기라 보면) '댄'의 이야기는 꿈의 두려움과 윙키스로 연결되고, 애덤의 이야기는 후에 직접적으로 교차하며, 청부 살인업자와 친구의 이야기는 가장 관련없어 보이지만 유심히 들으면 그들이 '자동차 사고 일화'를 두고 웃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렇게 가느란 선에 의해 연결된 이야기들로 린치는 1부에서 우리의 무의식을 건드린다.

2부에 이르자, 같은 인물/배우가 등장하는데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린치의 게임이 우리에게 명백해지고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아까 베티였던 여자가 다이앤이라 불리고, 관객에겐 리타의 형상이 보이는 순간 다이앤은 '카밀라'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린 기억을 더듬는다. 1부에서 '리타'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영화 〈길다Gilda, 1946〉의 포스터 속 리타 헤이워스의 이름을 보고 따온 것이었다. 타자의 이름을 빌려와 맺어진 1부와 2부의 희미한 연결고리는 윙키스에서 종업원의 명찰에 '베티'가 새겨있음을 보고 확신으로 굳게 된다. 여기선 이름/자아의 혼재 뿐만 아니라 시간의 혼재도 내포되어 있다. 1부와 달리 2부는 현재-과거1-과거2-현재를 오간다.

이런 혼재가 말해주는 것은 결국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자리 바꾸기의 영화라는 것이다. 1부 댄의 이야기 이후로 윙키스는 두 번 등장한다. 1부엔 베티와 리타가, 2부엔 다이앤과 살인청부업자가 정확히 같은 테이블에 착석한다. 이때 1부의 '댄'은 계산 카운터에 서 있고 그 모습을 보는 것은 다이앤이다 인물들이 자리를 바꾸는데, 이것은 전이와 혼재가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베티가 앉았던 자리엔 살인청부업자가, 리타가 앉았던 자리엔 다이앤이, 댄의 친구가 서있던 자리엔 댄이 서있다. 댄은 친구가 계산 카운터에 서 있는 모습이 꿈의 시작이라 했으며, 여기서 그 자리에 서있는 댄을 보는 것인 다이앤이다. 댄이 '그 얼굴'을 꿈 밖에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 순간, 우린 거의 반사적으로 '그 얼굴'을 볼 것이라 예상한다. 그리고 2부로 전환된 후, 우린 꿈 밖에서 그 얼굴을 본다.


Mulholland Dr.

필름 느와르와 뮤지컬 코미디가 공존하는 이 기괴한 영화를 돌아보기 위해 제목부터 살펴보자. 〈Mulholland Drive〉는 헐리우드 사인이 뚜렷히 보이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도로다. 여기서 린치가 꿈의 공장 헐리우드와 그 역사를 끌어옴은 명백하다. 제목의 두번째 단어인 Drive, 이는 도로를 뜻하는 동시에 충동을 의미한다. 이때 프로이트의 두 충동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난 린치가 이것을 의도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충동에는 욕망이 있다. 욕망이 만든 미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다음으로 영화의 오프닝 쇼트를 볼 차례가. 이 쇼트는 영화를 처음 볼때 그 진가를 알 수 없다. CG를 입히는 그린 스크린 같은 배경을 두고 느닷없이 춤의 향연이 흘러나온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야 우린 이것이 후반부에 다이앤이 우승한 지르박 경연대회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녀는 이 경연대회 우승을 통해 연기를 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의 연장에서 봤을 때, 이 쇼트가 흥미로운 것이 다이앤/베티가 춤추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유령같은 형상으로 떠오르고 보이지 않는 관객에게 박수 갈채를 받는다. 즉, 플래시백으로 위장한 이 쇼트는 기억에 욕망을 투영한 '유령'의 출현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결국 기억과 욕망의 접합이라는 린치의 고백과도 같은 쇼트라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환상-현실의 순서로 놓인 1부-2부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내가 이 순서를 택한 첫 이유는 논리의 끼워맞추기였다. 그러나, 다시 보면 영화가 이 논리를 유추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여기서 우린 그 이유를 서사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주체의 욕망이 타자를 통해 꿈에서 재현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첫 이유는 시간이다. 1부의 서사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지만, 2부는 이와 달리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비선형적 흐름을 따른다. 1부엔 2부에 부재한 (선형적) 서사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음 이유는 서사의 주체다. 1부는 자라나는 나무 가지처럼 서사의 주체가 여러 갈래로 퍼지는 반면, 2부는 오직 다이앤만이 주체라 할 수 있다. 이는 인물들의 교차하는 시점 쇼트에서도 엿보인다. 1부엔 베티와 리타, 경찰 등 다양한 캐릭터의 시점 쇼트가 번갈아 등장하지만, 2부엔 다이앤의 시점 쇼트만 허락된다.

이때 여기서 시점 쇼트를 주목하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분열한 1부의 서사의 희미한 주체라 할 수 있는 '베티'의 시점 쇼트들은 마치 유령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카메라가 유영하는 듯한 움직임이 유령의 시선처럼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떠나디는 쇼트의 역쇼트로만 '베티'의 시점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 Los Angeles'의 뜻이 무엇인가, 바로 '천사들의 도시'다. 꿈의 도시에서 천사가 되고 싶었던 다이앤은 유령으로나마 꿈 속을 헤메고 있는 것이다. 우린 유령의 이야기를 보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에서 린치는 두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찍어 실재와 환상을 배반했다. 이것이 우리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첫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서사 속 시간의 흐름에서의 일차원적 배반에 멈추지 않고, 영화 문법 상으로도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꿈 같은 1부는 선형적 시간 흐름을 따르지만, 현실 같은 2부는 과거와 현재를 계속해 오간다). 꿈으로 들어가기 전, 소위 말해 '잠들기 시점 쇼트'는 역쇼트가 부재해 누구의 시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후반부의 시작 때문에 다이앤의 것이라 추측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1부의 꿈에 입성한 후 등장하는 모든 시점 쇼트는 역쇼트가 뒤따라 시선의 주체가 밝혀진다. 반면, 2부에서 다이앤이 카밀라를 봤다고 착각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다이앤→카밀라→다이앤 순으로 흘러가는데, 그녀가 지금까지 헛것을 보고 있었다는걸 알아차리며 표정이 어두워지는 역쇼트는 카밀라의 자리에 위치한 다이앤이다. 이 쇼트는 문법을 통해 욕망과 자아의 혼재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쇼트라 할 수 있다.

그럼 린치가 이렇게 두 서사를 접합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제작 과정에서 알려졌다시피 이 영화는 원래 TV 파일럿으로 시작한 영화다. ABC 방송국이 제작을 거절하자 시간이 지난후 CANAL+의 도움으로 2부에 해당하는 분량을 촬영해 한 영화로 완성된 것이다. 즉, 한 영화를 둘로 나눴다는 표현보다, 두 이야기를 붙여 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며 인물들은 갑자기 서로 이름을 바꾸고, 서로의 이야기와 욕망을 옮기며 1부가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렇게 붙여진 두 서사는, 결국 영화가 죽어가는 셀룰로이드가 만들어낸 일종의 다층적 거울이라는 린치의 고백이다. 같은 사람이 연기한 다른 인물 속 거울이 있고, 그들 서로의 관계에 거울이 있으며 이는 결국 영화 가운데 거울이 있는 것이다. 이 거울을 통해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타자가 자아를 대체하며 이미 거쳤던 곳을 다시 찾는다. 비슷하면서 다른 반복이 이뤄지는데, 실재는 (1부) 죽고 환상은 (2부) 살아난다.

관객이 나름의 논리와 개연으로 1부와 2부를 연결지음에도 불구하고 린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한쪽의 손을 들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두려울 수 밖에 없는 두번째 대목이다. 당연하게도 거울처럼 비춰진 두 서사는 공존할 수 없다. 같은 이미지가 다른 결과로 이어지고 다른 시간을 차지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겠나. 그런데 린치는 뫼비우스의 띠의 접합점에서 영화를 마무리지음으로서 두번째 서사가 끝나는 동시에 첫 서사를 되살린다. 다시 말하면, 우린 이 뫼비우스 띠에 갇힌 것이다. 결국 같은 곳을 지나지만 도착하지 못하는 이의 여정으로서 영화를 보는 우리는 두 서사의 주인공들과 같은 처지인 셈이다.

린치는 이렇게 두 서사의 간극을 벌여놓고 우리가 그 공백을 메꾸려 하길 바란다. 심지어 영화가 개봉했을때 '이 영화를 풀 수 있는 단서 10가지'라는 글을 게재했을 정도다. 허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이 그의 게임이자 함정이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두 서사 중 하나를 택하지 않는다. 즉, 답하기 거부했다는 것으로서 풀수 없는 퍼즐, 답이 없는 판도라의 상자를 만든 셈이다. 그리고 린치는 우리에게 인터뷰로 말하기 전, 힌트를 모은 글을 제시하기 전 영화 안에서 우리에게 저 퍼즐을 풀라고, 저 상자를 열라고 말한다. 이 제안이 영화 속에서 메타적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는 행위는 '열쇠를 찾는 것'이다. 1부에서 베티의 이모와 리타, 2부에서 다이앤이 그랬듯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열쇠를 찾는다. 열쇠는 무언가를 여는 물건으로서 '해답'이라는 개념에 많이 빗대 쓰인다. 그러나 여기서 열쇠를 찾는 인물들의 운명은 어떤가? 역으로 길을 잃거나 죽음에 다다른다. 린치는 우리가 길을 잃고 허우적 거릴 것을 알기에 열쇠를 찾으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관객은) 서사에 갇힌 주인공들과 같은 입장을 자처하는 셈이다. 그는 우리가 길을 잃음으로서 기억에 맞닿이고 욕망을 되돌아봄으로서 결론적으로 다가올 디지털 시대의 영화를 찾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해답을 찾고 헤매는 행위는 인물에서 관객으로 전이됨을 볼 수 있다. 〈트윈 픽스〉와 달리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서사를 잡고 있는 미스테리가 없다. 처음에 애덤은 음모론을 파헤치려 하고, 베티는 리타의 정체를 알아내려 하지만 1부의 중간에 두 목적은 없어지고 탐정 놀이는 끝난다. 이때 이는 영화 속 인물들에게만 해당하는 바이다. 아니, 영화 속 인물 간 탐정 놀이가 없어지는 즉시 우리들은 탐정 행세를 한다. 즉, 이 영화는 관객의 자리로 인해 완성되는 영화다. 앞의 이야기를 되풀이하자면 이야기/서사를 만들고 싶어하는 관객의 욕구가 메꾸는 구멍이다.


히치콕과 린치

이쯤에서 히치콕의 〈현기증〉을 가져오고 싶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분명히 린치의 〈현기증〉이다. 아니, 달리 말하면 이것은 히치콕의 반대편에 선 (것으로 보이는) 영화다. 〈현기증〉에서 스코티는 매들린과 사랑에 빠진 후 주디를 매들린처럼 바꾼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두번째 기회'라 칭하며 결국 죽음으로 내몬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보이는 것'에 있어 그 정반대처럼 느껴진다. 베티가 리타에게 금발머리 가발을 씌우는 장면에서 린치는 우리에게 알아차리라고 외치는 셈이지만, 이 전에도 눈치를 주고 있다. 〈현기증〉에서 히치콕은 킴 노박이 촬영 당시 브래지어를 입지 않았고 그로 인해 트뤼포가 그 형상의 육체성에 대해 얘기했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리타-카밀라의 육체성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절대 우연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현기증〉이 매들린→주디의 서사라면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주디→매들린의 서사다. 히치콕 남자의 네크로필리아적 욕망은 린치 여자의 꿈에서 재현됨으로서, '두번째 기회'이자 '결과'가 먼저 오고 그 원인이 그 꼬리를 쫓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히치콕의 반대편에 선것 '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현기증〉과 마찬가지로 〈멀홀랜드 드라이브〉 또한 견자의 영화에서 시작해 행위자의 영화로 끝나며, 둘 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난다. 린치는 히치콕을 품는 동시에 배반하는 이미지로 우리를 계몽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히치콕을 품은 다른 방식은 〈싸이코Psycho, 1960〉를 표방한 것과 오브제의 사용이다. 고다르가 지적했듯 '영화는 어둠 뒤 잔상처럼 남는 빛의 흔적을 보게 해 주는 것'이고 '단순한 오브제에 매혹으로 그 안을 보게 해주는 것'이 히치콕의 영화라 할 수 있다[2]. 히치콕이 오브제의 매혹으로 깊이를 보여주는 것은 유운성이 말한 영화의 속성과 매우 밀접해있다. '영화적인 것이란 결국 물성(物性)과 감각이다. 조금 달리 말하자면 물성을 통해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3] 이 영화에 등장하는 파랑 박스와 열쇠는 형용 불가능한 대상인 '꿈과 현실의 경계'에 어떤 물성을 부여한다. 두 오브제는 각각 자신이 속한 서사와 그 서사 속 무드와 부합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꿈 같은 1부는 무척이나 영화같다. 50년대 코미디를 보는 듯한 클로즈 업과 대사를 남발하며 필름 느와르를 연상시키는 설정들이 난무하다. 그런 1부에서 등장하는 오브제는 플라스틱 열쇠다. 반면, 2부는 매우 무겁고 파편화된 현실의 기억 같이 느껴진다. 그에따라 2부의 오브제는 쇠로 만들어진 열쇠다. 다시 〈싸이코〉로 돌아오면, 이 영화도 그처럼 두 서사로 나눠져있고, 한 배우가 (여기선 전체적인 서사의 지배 하에) 다른 인물을 연기하며 같은 장소를 다른 사람이 방문하고 영화의 전환점으로 돌아가 끝난다는 것이 닮아있다. 또한 영화의 시작부터 지속되는 추락의 모티프가 마지막엔 상승의 모티프로 전환된다는 것 또한 같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1부는 하강하는 카메라로 시작해 전환점에서도 파란 박스로 카메라가 빠지고, 마지막엔 유령 같은 형상이 '떠오르며' 영화가 끝난다. 〈싸이코〉도 배경의 설정 쇼트로 시작해 호텔 방 안으로 하강해 들어가는 카메라로 시작하고, 늪에 '빠지는' 자동차가 전환점이며 늪에서 자동차를 올리는 작업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욕망의 도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인물들은 타자와 자리를 바꿈으로서, 우리에게 투영된 욕망을 엿보여준다. 헐리우드에서 다이앤의 욕망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뛰어난 배우로서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것, 결국 대중에게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싶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녀는 카밀라라는 타자를 원한다. 이런 욕망은 베티에게 다른 형식으로 전이되는데, 이는 1부의 리타와 2부의 리타-카밀라의 위치가 다르다는 점에서 봐야한다. 카밀라는 다이앤의 욕망이 투영된 타자로서 두 행동/장면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먼저, 베티는 〈현기증〉에서 그랬듯이, 리타의 머리를 (자신과 같은) 금발 머리로 바꾼다. 그 다음엔, 애덤 케셔와 베티가 만나는 장면이다. 애덤 케셔는 2부에서 카밀라와 결혼하는 대상임이 밝혀진다. 1부에서 케셔와 베티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베티와 애덤 사이 서로의 고정된 시선을 오가고, 말없이 상대방을 지켜보는 클로즈업 쇼트가 연달아 등장한다. 이건 마치 40년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에서 볼 법한, 첫눈에 반한 사랑처럼 찍혔다.

라캉은 이렇게 분열하는 주체를 타자의 욕망과 연결지어 상상계와 상징계를 경유한다. 이런 분열하는 주체는 서사의 그것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난다. 1부엔 리타의 리무진으로 시작해 베티의 이야기가 나오더니 갑자기 애덤의 이야기로 바뀌고 느닷없이 무서운 마피아가 등장한다. 다시 말하면, 서사의 주체가 한 명이 아니며, 분열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 반면, 2부는 다이앤의 죽음까지 모든 장면에 다이앤이 있다. 즉, 다이앤이 보고 듣고 존재한 순간에만 서사가 존재함으로서 주체가 '희미하게' 있다. 여기서 말하는 '희미함'은 이 서사가 안정되지 못하고 타자의 욕망과의 화해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한 시간성의 부재가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중심점 같은 실재계를 분명히 밝히지 않음으로서 부재한 타자의 질서를 따르는 영화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의 '반복'을 끌어와야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결국 반복의 영화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의미에선 50년대 헐리우드 영화를 되풀이해 만들어낸 동시대성이기도 하다. 영화 내에선 크게 두 가지의 반복이 있는데, 하나는 같은 장소를 반복해 방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대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허나, 이때 반복의 주체가 항상 다르다는게 이 영화의 함정이다. 1부에서 간 곳을 2부에서 다시 방문하고, 1부에서 읊은 대사를 2부에서 되뇌인다. 타자에 의한 이런 반복 다시 한번 이 영화가 타자의 욕망을, 타자의 질서 하에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반복되는 영화 속 1부가 2부와 달리 선형적 서사를 따르는 이유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반복이 두려운 다이앤은 환상에서 반복을 벗어나기 위한 선형성을 갖추는 셈이다. 같은 말의 반복, 어디서 본 듯한 장소와 들은 듯한 말을 듣는 것은 결국 데자뷰이며 이것은 영화 속 인물들의 말과 생각에서 관객에게 번진다 (프로이트가 데자뷰를 두고 억압된 욕망이 무의식적 환상과 즉각적으로 맞닿았을 때 일어난다 했던 점을 떠올리면 된다).

흔히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두고 뫼비우스의 띠에 빗대 표현한다. 뫼비우스의 띠는 어떤 형태를 지녔는지를 보자. 뫼비우스의 띠에서 한쪽의 뒷면을 따라가면 결국 다른쪽이 앞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한쪽의 꿈을 따라가면 다른쪽의 현실이 나오고, 한쪽의 현실을 따라가면 다른쪽의 꿈이 등장하는 영화다. 그러면 이번엔 뫼비우스의 띠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자; 일직선의 띠 가운데를 한 번 꼬아돌린 후, 양 끝을 연결시키면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수 있다. 이때 양 끝이 만나는 곳은 '접합점'이자 '전환점'이 되는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이 접합점은 '클럽 실렌시오' 장면이다. 여기서 우린 실재와 부재의 혼재에 빠지게 되고, 린치는 영화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신체와 소리의 분리

'No hay banda', 밴드는 없고 앞으로 들릴 모든 것은 녹음된 것이라 미리 예고함에도 불구하고Llorando를 노래하는 여인을 보는 베티와 리타는 감동에 빠지는데, 이 모습은 마치 영화를 보는 우리같다. 여인은 쓰러지고, 결국 지금까지 본 것이 환상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에도 여전히 그녀들의 눈물은 흐르고 있다. 영화임을 알지만 여전히 몰입하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즉, 클럽 실렌시오는 모순으로 가득찬 공간으로 주체의 전제조건을 위협하는 곳이다. 이때 기억해야할 것은 이곳을 오게 된 것이 홀린 듯한 리타의 말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리타의 의지는 개입되어 있지 않음이 명백하므로 이것은 그녀의 무의식에서 나온 초대다. 여기서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전제가 다시 불려오며 환상에 실재가 침입하는 공간으로의 초대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이 공간은 침입의 순간이기 때문에 상징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디제시스의 연속을 부정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클럽에서 클라이맥스 같이 작용하는 Llorando 공연의 비밀은 생각할수록 머리를 괴롭히고 끝이 없어보이는 터널 같던 이 질문이었다. 그리고 내게 이 질문에 문을 열어준 것은 지젝이었다. 그는 이 장면과 영화의 중반부에 나온 뮤지컬 오디션 장면을 두고 라캉을 끌어들였다. 립싱크하는 여성의 퍼포먼스는 결국 신체와 소리의 분리다.[4] 애덤 케셔의 뮤지컬 영화 오디션 장면은 처음부터 자세히 보지 않아도 립싱크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관계의 역전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신체로부터 소리가 나온다는 믿음이 배반된 것이다. 앞의 환상은 사실상 소리를 통해 신체가 나온 것이다. 지젝은 여기서 이 목소리를 라캉의 '오브제 아' 개념에 적용된다고 한다. '오브제 아'로서의 목소리는 두 여인에게 주이상스를 느끼게 한다. 여기서 Llorando의 가사를 보면, 떠나간 사랑, 일종의 결핍에 대한 울부짖음이다. 베티와 리타가 느끼는 주이상스는  '오브제 아'의 상실을 깨닫는 순간 생기는 것이며, 이로써 환상은 무너지고 1부를 지배한 주관성도 붕괴된다. 이는 역으로 실재를 더욱 확고히 굳히는 역할을 한다. 욕망은 더욱 확실해 지고, 결국 실재계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같은 장면에서 베티가 파랑 박스를 발견한다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결국 '현실'로 돌아간 후에도,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듯이 영화는 진행된다. 이때 이 장면과 영화의 마지막을 아우르는 한 마디가 있다. 'Silencio'(침묵). 이것은 조용하다와는 다른 뜻이다. 침묵은 결국 '말'이 없다는 것인데, 모두 테이프로 녹음된 소리라는 의미에서 결국 맞는 말이다. 영화에서 침묵을 논하면 브레송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결국 유성영화가 발명한 것이 '침묵'이라 했다.[5]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결국 린치의 디지털 시대에 대한 예언이 아닐까. 셀룰로이드는 죽고 환상은 깨졌다.

[1] 허문영, 《<젊은 날의 링컨>에서 출발하다》
[2] 장-뤽 고다르, 〈Histoire(s) du cinéma〉
[3] 유운성,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 (11.15)
[4] 슬라보예 지젝, 『Bodies without Organs』
[5] 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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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05-07 00:22:30

책보다가 잠시접고 읽기시작했는데 다른책을본듯하네요.잘읽었습니다..추천!!

2016-05-07 02:27:21

잘 읽었습니다 영화 다시 보면서 이글도 다시 한번 더 읽어봐야겠군요

2016-05-07 22:06:51

블루레이로 재감상하기전에 읽어 두어야 겠어요. 워낙 난해한 작품이라서;; 양질의 글 감사합니다^^

2016-05-08 02:47:18

잘 읽었습니다. 궁금한 게 실렌시오(침묵)가 그런 의도였다면 왜 스페인어로 말 하였을까요...?

WR
2016-05-08 22:59:42

앗 이럴수가 거창하게 제목을 지어놓고 정작 그 얘기는 안 적었네요ㅠㅠ 제 생각에 그것은 클럽 실렌시오의 초대가 리타의 무의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리타가 이름을 따온 '리타 헤이워스'의 과거를 끌어냄으로서 이뤄진다고 보구요 (리타 헤이워스는 스페인계 혼혈입니다).

2016-05-08 17:34:01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로스트 하이웨이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2016-05-09 14:09:28

동감합니다. 인물의 매력과 부분적이지만 의외로 드라마적인 몰입으로 관객을 끌어들인후 린치를 가하는 방법.

2016-05-11 12:48:57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서 극찬을 하면서 8시간동안 설명할 수 있다고 했었는데 저역시 처음볼때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난해한 구조에 고개를 저었지만 계속 찾아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더군요.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걸작임에 틀림없는 추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인랜드 엠파이어는 다시 도전할 엄두가 안납니다. 난해의 끝을 보여주거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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