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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비밀은 없다(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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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4 01:32:34

감독의 전작인 미쓰 홍당무가 8년이나 지난 작품이었다. 이번에 이경미 감독의 신작인 비밀은 없다를 보고 나서 새삼 이경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미쓰 홍당무의 개봉년도를 실감했다. 나온지 꽤 지난 작품이라곤 인식하고 있었지만 2010년대 이전에 나온 작품일것이라고는 체감하지 못했다. 시간 참 빨리 가는것이기도 하지만 8년 전에 개봉한 미쓰 홍당무가 체감상으론 고작해야 2~3년 정도 지난 구작처럼 느껴지는것은 그만큼 이 작품이 남긴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일것이다. 개봉 당시 한번 보고 두번 이상 찾지 않은 작품인데도 등장인물들과 장면 곳곳이 떠오르는것을 보면 확실히 개성있는 데뷔작이었다.

 

블랙 코미디 스타일의 미쓰 홍당무와는 정반대의 스릴러 장르를 취하고 있는 비밀은 없다를 보면서 미쓰 홍당무가 자주 생각났다. 두 영화가 추구하는 장르는 전혀 다르지만 비밀은 없다에서 미쓰 홍당무의 흔적을 찾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경미는 비밀은 없다를 만들면서 미쓰 홍당무의 크고 작은 요소를 적극적으로 재활용했다. 이경미가 기지 넘치는 데뷔작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비밀은 없다는 미쓰 홍당무를 가지치기해서 스릴러 장르로 탈바꿈시킨듯한 느낌을 극의 구석구석에서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학부모와 바람을 피우는 미모의 젊은 여교사, 따돌림 당하는 사춘기 소녀, 그 소녀와 연대감을 주고 받는 여주인공, 여선생과 따돌림 당하는 소녀의 사나운 대립관계,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고 예의바른 말쑥한 남자주인공이 파헤쳐 보면 부도덕한 사생활과 개차반스러운 성격으로 뭉쳐 있는 속물 설정,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조목조목 인물과 상황을 분석하는 추리 구성 등 스릴러 비밀은 없다에 있는 극중 요소와 갖가지 설정은 미쓰 홍당무에도 다 있는것이다.

 

미쓰 홍당무는 흥행엔 성공하지 못했지만 소수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컬트 영화로 자리 잡은 작품이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컬트영화로의 자리매김은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개봉 당시부터 감지됐었는데 영화가 8년의 세월을 먹는 동안 잊혀지지 않고 컬트영화 분위기를 풍기며 수시로 언급되고 있다. 미쓰 홍당무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경미 감독이 첫 영화의 흥행실패에 위축되지 않고 부디 자신의 개성을 살려 차기작을 내놓기를 오매불망 기다린 관객들이라면 비밀은 없다도 만족스러울것이다. 미쓰 홍당무에서 선보인 독특한 개성과 기괴한 분위기, 오묘한 배역 성격 등이 스릴러인 비밀은 없다에서도 개성적으로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밀은 없다는 호불호가 갈릴 작품이다. 현재 이 작품에 대한 반응이 엇갈리고 있는데 평단의 반응은 미쓰 홍당무 때처럼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다. 반면 관객들의 반응에선 온도차가 갈린다. 이 역시도 미쓰 홍당무 때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운 반응이다. 비밀은 없다에 대한 극명한 온도차는 미쓰 홍당무도 개봉당시 겪었었고 지금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업영화 기획 안에서 전형적인 충무로표 스릴러 외피를 쓴 비밀은 없다가 주류 영화계에서 비교적 낮은 예산으로 감독의 개성을 살려 작가주의로 나갔던 미쓰 홍당무 보단 일부 관객들의 반감을 더 살것이다.

 

미쓰 홍당무는 외양부터가 정형화된 코미디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개봉 당시엔 손예진 같은 영화스타가 나온 작품도 아니어서 무개성적인 제목 만큼이나 몰개성적인 스릴러 설정을 쓰고 있는 비밀은 없다 수준으로 불특정 다수 관객들의 유입률이 낮은 작품이었다. 그만큼 반응은 다소 엇갈리긴 했지만 극명하게 갈리는 분위기가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비밀은 없다는 줄거리만 봐서는 미쓰 홍당무라는 개성적인 작품을 데뷔작으로 내놓은 이경미 감독이 도무지 실력발휘할 여지가 없어 보이는 작품이다. 흔하디 흔한 스릴러, 완성도를 보장 못하는 손예진 주연작, 뻔한 자녀 실종 설정 등 한국 스릴러물에서 툭 하면 꺼내 드는 진부한 실종사건 스릴러 설정은 다 갖춘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 정도로 판에 박힌 스릴러 설정을 가지고 과연 이경미가 이경미만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 기대 반, 우려 반이 됐던것이다. 개봉 전 이 작품에 대한 기대는 딱 두가지였다. 처음 받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에 개의치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간 용기에서 보이는 작품에 대한 어떤 확신, 그리고 이경미의 손길이 묻은 스릴러라는 점이다. 덧붙여 요즘 한국 상업 영화치곤 도전이라 할만한 짧은 상영시간에 대한 기대도 한몫했다. 비밀은 없다는 미쓰 홍당무처럼 한국영화의 평균상영시간보다 10~20분 정도 짧다. 미쓰 홍당무가 100분이었고 비밀은 없다는 102분이다. 더 늘릴 수도 있었는데 102분으로 추린걸 보면 스릴러다운 속도감에 주력하지 않았나, 하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촬영한지 한참 된 작품이라 후반작업 기간이 여유있었는데도 100분 남짓으로 줄인것에 스릴러물에 대한 자신감도 엿보였다.

 

짧은 상영시간에서 기대되는 속도감 있는 스릴러물은 아니다. 이야기가 다양하고 얽히고설킨 인물들을 오가며 사건을 추적하는 방법도 풍부해서 미성년자 관람불가용 스릴러로 화끈하게 돌진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쓰 홍당무 만든 감독다운 개성을 사이사이 덧붙이느라고 속도감이 제어될때가 많다. 스릴러의 속도감을 살짝 포기한 대신 감독의 일관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좋게 말하면 개성이고 나쁘게 보자면 뜬금없고 생뚱맞은 분위기가 수시로 흘러 나온다.

 

손예진이 공부하는 머리가 없고 과거에 가수를 꿈꾸며 좀 놀던 여자라는 설정도 그렇고 행방불명된 딸이 엄마를 닮아 비행청소년이었다는 묘사 등이 미스테리 추적 구성 내에서 엉뚱한 정서로 파고든다. 극은 심각한데 시침 뚝 떼고 치는 산통 깨는 대사들 때문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해지는 지점이 많다. 미쓰 홍당무의 연장선격인 분위기로 보면 신경질적으로 막나가는 오묘한 엇박자이지만 전작에 대한 이해없이 접근한다면 정체불명의 괴작으로 느껴질만하다. 나는 개성으로 읽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도식적인 실종 스릴러 설정, 미스테리 추적 구성 내에서 이만한 개성으로 엮어내기도 어렵다. 뜬금없는 대사들과 인물들의 돌발 행동 등이 어둡고 우울한 극의 분위기에 환기 작용도 된다. 급우들의 회상을 통해 사실은 따돌림을 당했고 사생활도 복잡한 딸의 비밀스러운 일화들을 전개시키는 방식이 나카시마 테츠야의 갈증을 연상시킨다.

 

또한 극 내내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신경질적인 엇박자로 스릴러의 속도감은 다소 갉아먹고 있어도 지루한것없이 몰아치는 힘은 유지하고 있다. 차근차근 깔아 놓은 미스테리에 대한 밑밥도 설득력이 있고 복잡한 인물관계도의 연결고리도 촘촘하다. 범인에 대한 연막 설정, 결말까지 종잡을 수 없이 흐르는 구성도 탄탄하다. 여기에 감독 특유의 기묘한 분위기로 극을 감싸안으며 개성있는 미스테리 스릴러물의 윤곽을 또렷이 드러냈다. 의외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재미를 노리고 일부러 도식적인 설정과 무개성적인 제목을 쓴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소문대로 손예진은 훌륭했다. 폭주하는 손예진의 광기가 매력적이다. 더이상 보여줄게 있을까, 싶었던 배우였고 지난 몇 년 동안 틀에 박힌 연기만 보여줬기 때문에 큰 기대는 없었다. 스릴러에 처음 출연한것도 아니고 말이다. 손예진은 백지 같은 배우라서 잠재력을 끄집어낼 수 있는 감독과 작업했을 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데 많은 영화에서 그러질 못했다. 손예진에게 배역 분석을 전적으로 맡기면 굉장히 정형화된 연기가 나오는데 지난 몇 년간 손예진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가 내내 그랬다. 비밀은 없다에서 손예진의 다른 얼굴이 나온건 감독의 역량 덕분인것같다. 자꾸 고만고만한 영화에서 고만고만한 감독들의 지도로 소모되는 느낌이 컸는데 모처럼만에 이경미 감독이 손예진의 잠재력을 감지하고 확실한 지도와 주문으로 그동안 감춰져 있던 손예진의 파괴력을 끄집어낸것같다. 연말 시상식의 여우주연상 후보가 보인다. 영화의 기묘한 분위기와 손예진의 광기어린 연기를 보면서 상업영화로만 소비되며 묻히는게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국제 영화제의 비공식 부문에 출품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언론에서 손예진만 언급돼서 김주혁에 대한 반응이 아쉬웠는데 영화를 보니 김주혁은 조연급이다. 미쓰 홍당무처럼 비밀은 없다도 결국엔 여자들의 얘기, 여자들의 유대감을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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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Updated at 2016-06-24 07:33:39

올해 영화중 평이 가장 상반되는 영화라서 도저히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심야로 보고 왔습니다ㅋㅋ 간단평 남기려고 했는데 이거 보니 안써도 될거 같네요. 엄청 공감!!!!입니다. 홍보 방향이 진짜 아쉬워요.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는 예측가능성을 줘야 몰입에 방해가 안될텐데 세븐데이즈나 추격자 같은 범죄 스릴러를 기대하고 간 사람들은 상당한 거부감을 가질 수 밖에 없을거 같습니다. 지구를 지켜라처럼 홍보 미스로 후대에 무덤속에서 발굴되는 수작 컬트영화가 되지 않을지ㅠ 암튼 리뷰 재밌게 읽었습니다. 어휘도 쉽고 리듬도 좋아서 술술 읽혀버리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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