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게] DC는 더이상 가망이 없는 걸까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하기에 앞서, 제가 마블에겐 뭔가가 있구나, 처음 느낀 계기부터 말하는 게 순서일 것 같네요. 그건 바로, 토르의 감독을 케네스 브래너가 맡았을 때부터였습니다. 케네스 브래너가 누군가요, 한 때는 제2의 오손웰즈로 불리웠던, 세익스피어 영화 전문가이자 정통파 연기자, 그러나 사실 연출자로는 살짝 한물 간, 그런 감독 아니었습니까. 우리식으로 따지면 정통 사극 연출가라고 할 수 있겠죠. 헐리우드 상업영화 연출경력이 거의 없는 이런 감독에게 슈퍼히어로 영화를 맡긴다?
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캐릭터’만 확실하게 챙겨라. 나머지는 ‘우리’가 커버한다. 즉, 토르라는 중세에서 튀어나온 듯한, 구식말투를 쓰는, 뭔가 연극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인물을 관객들에게 나름 설득력 있게 구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특유의 분위기와 캐릭터만 책임지고 맡아라. 그럼, 특수효과나 다른 시리즈와의 일관성이나 상업영화로서의 때깔 같은 것들은 그 분야 전문가들을 통해 지원하겠다. 뭐, 제 억측일 수도 있죠. 그러나 마블의 다른 시리즈 감독들도 같이 살펴보면,
아이언 맨 첫 편의 감독은 그동안 배우이자 주로 코미디 영화를 연출해왔던 존 파브로가 맡았죠. 위트 넘치는 토니 스타크의 ‘캐릭터’를 확실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입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봤어요. 빤들빤들한 아이언 맨 수트의 금속질감처럼 뺀질뺀질한 캐릭터와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선택. 퍼스트 어벤저의 감독은?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특수효과 전문가 출신이자, 레트로풍 모험물을 연출해왔던 조 존스톤이 맡았죠. 그가 특수효과를 담당했던 클래식 스타워즈 시리즈나, 이전에 연출했던 로켓티어, 영 인디아나 존스, 주만지 등을 보면 그런 특색이 드러납니다. ‘고전적’이라는 느낌과는 다른 의미에서 ‘복고적’ 분위기. 이렇게, 서로 다른 장르의 전문가들을 모아 각기 다른 분위기,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캐릭터들을 효과적으로 만들어냈죠.
또 하나 의미있는 사실은, 조 존스톤을 제외하면 둘 다 배우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아니, 단순히 배우출신을 넘어 배우로서 경력이 빵빵한 분들이죠. 그건 다른 걸 다 떠나서 최소한, 자신이 연기하거나 연출하는 캐릭터가 관객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지 남보다 훨씬 민감하고, 또 그것을 구현하는데 다른 감독보다 더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물론 퍼스트 어벤저의 감독 조 존스톤은 배우출신이 아니죠. 앞서 말한 것처럼 미술감독 출신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캡틴 아메리카’가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럴 필요도 없구요. 캡틴 아메리카는 각기 개성 넘치는 다른 캐릭터들을 포괄하는 버팀목, 그 자체로 캐릭터라기보다는 하나의 ‘무대’로 기능하는 면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베테랑 미술감독 출신에게 앞으로 펼쳐지게 될 어벤저스 세계의 첫 무대 세팅을 맡기는 것이 적합했다.고 하면 이것 역시 제 억측일까요?
어쨌든, 마블은 코믹스의 팬들이 영화화를 통해 원하는 것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구요. 우리가 ‘굳이’ 익숙한 코믹스의 주인공들을 영화에서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뭘까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최소한 슈퍼히어로 커스텀을 입은 인물들이 간지 철철 넘치는 화면발 속에서 화끈한 액션을 펼치는 것을 보고 싶어서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은, 내가 예전부터 만화책, 혹은 에니메이션을 통해 즐겨왔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살아 있는 생생한 ‘캐릭터’로 내 눈 앞에 형상화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더불어 그렇게 ‘캐릭터’가 제대로 구축되었을 때, 예컨대 극히 현대적이고 시니컬한 아이언맨과 중세에서 뚝 떨어진 듯한, 뭔가 어리숙하고 시대착오적인 토르가 한 장면 안에 놓여질 때 주는 시각적이고 심리적인 ‘긴장감’과 상호작용이 흥미롭게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DC와 워너의 행보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다시 슈퍼맨 리턴즈 이야기로 돌아와 보죠. 슈퍼맨 리턴즈에는, 그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를 떠나, 배트맨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고유의 분위기가 가득 했었습니다. 영화적으로 우아했고, 멍청하리만큼 낙관적이고 따스한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영화 안에서, 비록 어린아이 같이 찌질할 망정, 슈퍼맨은 캐릭터로서 입체적으로 살아있었습니다. 전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리부트를 하려했다면, 그 느낌을 살려야했다고요. 그래야 어둡고 주도면밀하고 차가운 배트맨의 세계와 한 화면 안에서 부딪혔을 때 긴장감이 형성될 수 있었을 겁니다.
‘맨 오브 스틸’을 처음 보고 느낀 건, 이건 ‘슈퍼맨’이 아니다. 라는 거였습니다. 그 영화를 즐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제가 본 것은, 슈퍼맨 커스텀을 차려입은 또 하나의 액션히어로였지, 슈퍼맨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설정에 목을 매는 코믹스 마니아는 아닙니다. 영화적 재창조, 당연히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있는 법입니다. 굳이 ‘슈퍼맨’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면 그 영화 안에는 ‘슈퍼맨’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저의 불만은, ‘이것은 나의 슈퍼맨이 아니라능’ 같은 땡깡이 아니라, 내가 생각했던 슈퍼맨 캐릭터가 그 영화 안에 없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아무런’ 캐릭터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저스티스 리그’를 위한 포석이었다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됐습니다. 그 결과 ‘배트맨 v 슈퍼맨’은 ‘배트맨’과 ‘슈퍼맨 옷을 입은 배트맨’이 싸우는 영화가 되버렸습니다. 혹은, 축구경기장에서 피아식별을 위해 선수들이 팀별로 각자 다른 색의 유니폼을 입듯, 그저 각자 배트맨과 슈퍼맨의 커스텀을 걸쳐입은 누군가의 싸움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배트맨과 슈퍼맨이 싸운다 할 때, 그들이 왜 싸우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싸운다’는 바로 그 자체가 중요하죠. 어차피 우리는 그 이벤트를 기다려 왔고, 결국 그들이 화해할 것이며, 적에 대처하기 위해 힘을 합칠 것을 압니다. 그저 적당한 이유 하나 던져주면 우린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대하는 건, 싸우는 이유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아니라, ‘실감나는’ 서스펜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서스펜스는, 세심하게 구축된 입체적인 캐릭터가 맞부딪혔을 때 비로소 형성됩니다.
실제로, 우리는 현실 속에서 자주 싸웁니다.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싸우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죠. 서로 살아온 문화가 다르고,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고, 사소한 오해가 쌓여서 싸웁니다. 때로는 별 일 아닌 문제로 죽자사자 싸우기도 합니다. 어차피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오해로부터 촉발된 싸움을 납득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심리적 설득입니다.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하지만, 세심하게 구축된 캐릭터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배트맨 v 슈퍼맨’은 아까운 시간을, 그닥 논리적이지도 않은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는데 대부분 허비하고, 또 허탈하게 마무리합니다. 눈꼽만큼의 긴장감도 형성되지 않습니다. 하여간 뭔가 서로 대단한 이유가 있어 싸우는 것처럼 설정했으니, 싸움을 마무리하기 위해선 억지로라도 마무리할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겠죠.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어쨌든, 그 특유의 ‘설명’에 대한 집착은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제 생각이지만,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각 캐릭터들의 전사(前史)가 그닥 필요 없는 영화입니다. 있어서 나쁠 것 없지만, 없어도 별 상관없죠. 그런데 이 영화는 또 그걸 구구절절 촌스럽게 읊어대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슈퍼맨이나 배트맨의 경우와는 달리,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캐릭터 개개인의 면모가 스팩트럼처럼 나열될 필요가 없어요. 비록 평면에 칠해진 단색일지라도 그냥 각기 색깔이 뚜렷하고 독특하면 그걸로 됩니다, 그 맴버들을 하나하나 수집하듯 모으는 게 이런 영화를 보는 재미죠. 때문에, 이런 류의 영화에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주된 쾌감은 ‘컬렉션’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 영화에서 적과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이벤트는 팀을 형성해가는 과정이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서로 뒷통수 치기가 핵심이여야 해요.
예컨대, 아이언 맨 1편은, 토니 스타크가 아이언 맨이 되어 적과 싸우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아이언 맨 수트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얘기잖아요. 물론 적이 등장하고 적과 대결하고 무찌르지만, 그보다 핵심이 되는 이벤트는 수트를 개량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아이언 맨을 보며 느낀 쾌감의 대부분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을 무찔러야 하니까 아이언맨 수트를 만드는 게 아니라, 아이언 맨 수트를 만들 명분이 필요하니까 적이 필요한 겁니다. 그걸 마블은 잘 알아요. 마치 다 큰 성인이 건프라를 사는 이유가 만들어서 가지고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그 과정을 즐기기 위해서인 것처럼 말입니다.
마블은 이런 슈퍼히어로물을 기대하는 관객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를 잘 알고, 적당히 비틀고, 적절히 배치할 줄 압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게 뭐고, 적당히 해도 되는 게 뭔지 잘 압니다. 그런데 DC는 관객이 뭘 원하는지는 커녕, 자기네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조차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부디 벤 애플렉의 배트맨 만큼은 잘 뽑혀나오길 바랍니다. 제가 아는 벤 애플렉은 그래도 캐릭터 구축에는 재능이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부디, 저스티스 멤버가 모두 모인 영화를 무사히 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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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는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다 (뭘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것 같다)' 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저 저스티스리그 만들고 싶어서 막 찍은 것 같단 생각이 들었고, ' 이정도면 되겠지?' 하며 수어사이드 스쿼드 흉내만 내는 어린이용 영화 같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