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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뉴스]  폭로(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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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08-20 13:20:35

 

영화 [폭로]는 개봉 당시 작품의 완성도가 기대이하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실패작 취급을 받았지만 상업적으론 성공했다. 미국에서 1994년 12월 9일 개봉한 이 작품은 5천 5백만불의 예산을 투입하여 자국에서 8천 3백만불 이상을 벌어들였다. 월드 박스오피스를 더하면 2억불이 넘는 흥행작이었다. 1994년 미국 연간 박스오피스에서 14위를 차지했다. 배우들과 제작진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은 흥행 결과였다. 한국에선 1995년 1월 14일 개봉하여 서울에서 268,380명을 동원하며 양호한 성적을 냈다. 1995년 국내 개봉한 외화, 한국영화 통털어 16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외화로는 13위다.  

 

 

1990년대 후반 즈음에 신작 홍보차 가진 인터뷰에서 마이클 더글라스는 지금까지 같이 연기한 여배우들 중 누가 가장 상대하기 편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데미 무어라고 답했다. 그때 난 세편의 작품에서 함께 한 캐서린 터너라 말할 줄 알았다. 로브 라이너 감독의 [어퓨굿맨]촬영 당시 현장에서 톰 크루즈와 충돌이 있었다는 데미 무어가 마이클 더글라스에겐 최상의 영화 상대역으로 남았던 작품은 배리 레빈슨 감독의 1994년작 [폭로]다. 그 당시 헐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던 마이클 크라이튼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소설은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 판권이 팔려 영화가 개봉됐던 1994년도에 출간됐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쥬라기 공원]으로 인기가 치솟았던 때라서 그의 소설들은 영화 판권 경쟁이 치열했다. 존 그리샴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인기였던것같다.

 

그래서 영화 [폭로]는 최상의 제작진과 배우들로 조합되었다. 그 당시에도 헐리우드 거물급 인사였던 마이클 더글라스와 [어퓨굿맨]과 [은밀한 유혹]이 연달아 흥행 대박이 나면서 A급 영화 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데미 무어, 그리고 [레인맨][벅시]등으로 명장 대접을 받았던 배리 래빈슨 감독, 앤니오 모리코네의 사운드트랙까지 어느것하나 빠지는게 없는 기획이었다. 결과적으로 흥행에도 성공했고 소재로 인한 논란을 부추겨 화제몰이에도 수완을 발휘했지만 영화의 완성도가 기대만 못해서 영화 자체로는 실망스러웠다.

 

마이클 더글라스나 데미 무어는 [폭로]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데미 무어가 1996년작인 [스트립티즈]로 그 당시 여배우 최고 출연료 기록인 1,250만불을 받을 수 있었던데에는 [어퓨굿맨][은밀한 유혹][폭로]가 연속으로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인데 데미 무어는 자신의 격상된 상품가치를 확실히 파악하고 적당한 시점에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다. [스트립티즈]는 [폭로]개봉 이후, [나우 앤 덴][주홍글씨][주어러]가 연달아 말아먹기 전에 출연계약서에 서명한 작품이었다.

 

골든 라즈베리를 또 받아야하긴 했지만 개봉 당시엔 [스트립티즈]로 추락한 이미지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줬던 [지 아이 제인]도 [스트립티즈]이전에 계약한 작품이라 무리없이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엉성한 영화였지만 그 영화가 개봉 당시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데는 데미 무어의 삭발투혼과 엄청난 양의 체력단력 덕분이있다. 데미 무어의 열연은 인정받을만했는데 골든 라즈베리까지 준건 심한 처사였던것같다. 데미 무어의 배역에 대한 투자와 열정은 전년도 [커리지 언더 파이어]에서 걸프전 참전 여군으로 나왔던 멕 라이언의 체력단련과 연기를 배냇짓으로 격하시킬 정도였다.       

 

 

 

포스터로 자주 쓰인 성폭행 장면의 스틸들. [폭로]는 공식 포스터를 제작하기 위해 별도의 화보 작업을 하진 않은것같다.

 

 

 

 

[폭로]시사회장에서 데미 무어와 마이클 더글라스. 워렌 비티, 아네트 베닝 부부도 참석했다.

 

 

 

 

 

개봉 당시 여성 상사가 남자 부하를 성폭행한다는 역발상 설정으로 논란과 화제를 모았던 [폭로]는 시의적절한 소재를 다루어서 흥행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1994년은 이런 류의 소재가 영화로 만들어질만한 적당한 시점이었다. 좀 더 일찍 기획됐어도 좋았을만한 소재였다. 영화가 지나치게 이 부분만 자극적으로 포장시킨게 흠이긴 하지만 이미 여권운동의 활성화 덕분에 대거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의 일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나왔었다. 작품 전면에 내세운건 아니지만 [메인 이벤트][베이비 붐][나인 투 파이브][워킹걸]같은 영화들이 달라진 시대상과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동시대적으로 잘 파악하여 담아냈던 수작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이 나온지는 1994년 기점으로도 오래된 일이었다. [그대안의 블루]가 1992년도에 개봉하여 논쟁을 야기시켰던 한국에서라면 모를까 미국에선 일하는 여성을 화두로 삼는건 뒤떨어지는 기획이었고 그 이상의 담론을 펼쳐야 했다.

 

[폭로]는 성폭행이란 소재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점은 아쉽지만 20년전 작품인 [폭로]가 아직까지도 여성이 가해자 입장에서 남자 부하를 성폭행, 성희롱하는 사회적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으로 언급되는것을 보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바라보는 시각은 20년 전에서 별로 발전하진 못한듯싶다. 중요한건 여성이 성폭행범의 가해자 입장인게 아니라 그걸 통한 권력의 역학관계인데 [폭로]는 잿밥에만 더 관심을 가진 작품이었다.

 

[폭로]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을 지나치게 과장되고 극단적인 괴물처럼 그렸다고 여성단체에서 비난을 쏟아부었던 작품인데 그렇게 으르렁거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 작품에서 마이클 더글라스의 직장 상사로 나온 데미 무어는 그렇게까지 단세포적 악녀로 그려지지 않고 그녀 역시 직장 내 권력관계에서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을 받는 인물로 그려진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져 남자 부하를 둔 여자 상사가 늘었다지만 여전히 직장의 권력은 남자들이 갖고 있다는것을 영화는 결말부에 보여줌으로써 일하는 여성을 대하는 사회적 모순을 보여준다. 극중 데미 무어는 한번 실험을 해본것뿐이다. 방법이 저질이긴 했지만 만약 그녀가 남자였다면 직장에서 해고되는 일까진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능력있는 여자라 다른 직장으로의 이직이 수월하게 풀릴것을 예고하긴 했지만 다른 곳을 가더라도 여자가 남자들이 하는것과 같은 행동을 일삼으면 호들갑스러운 사건이 될것이다.

 

마이클 더글라스는 강한 여자에게 당하는 역할을 자주 즐기는 배우인데 [위험한 정사][장미의 전쟁][원초적 본능]에 이어 [폭로]에서도 강한 여자한테 위협 받는 위축되고 좌불안석인 중년 남성을 섬세하게 연기해 특별한 재미를 안겨줬다. 그는 [폭로]이후에도 [퍼펙트 머더]에 출연하여 부와 명예를 가진 여자에게서 느끼는 중년 남성의 불안감을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너무 적역이라 때론 이런 배역이 물리는 감은 있지만 이런 배역을 마이클 더글라스만큼 잘 하는 배우도 없다. 귄워적이고 부덕한 사업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마이클 더글라스가 이런 배역을 연기했기 때문에 대조 효과도 크고 말이다. 여자 해적이 나오는 [컷스로트 아일랜드]에도 출연할뻔했다가 촬영 직전에 지나 데이비스와 비슷한 출연 분량이 아니란 이유로 하차했는데 주로 강한 여자 배역이 상대역으로 나오는 작품에 끌리나보다.

 

데미 무어는 저 당시 국내의 심은하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영화 속에선 청순한데 실제로는 드세고 잘 노는 이미지. 그래도 [폭로]에서의 남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위협적인 여자상사 연기는 빼어나게 잘 소화했다. 출연작 중 후진 작품이 많고 파티광 이미지가 강해서 연기력에 비해 저평가된 배우다.

 

 

국내 개봉 전엔 번역제인 [폭로]보단 원음을 그대로 살린 '디스클로저'란 제목으로 자주 소개됐다.

 

 

데미 무어의 첫 등장. 운동으로 다져진 각선미가 멋지다.

 

 

[원초적 본능]에 이어 다시 한번 화끈한 남성 구강 성교 연기를 보여준 마이클 더글라스.

 

 

마이클 더글라스와 데미 무어가 벌이는 격렬하고도 용감한 섹스 연기는 별다른 신체 노출이 없음에도 관능적이고 위협적이며 대단히 인상적인 명장면을 탄생시켰다. 이 성폭행 장면이 하도 강렬해서 영화 [폭로]의 포스터는 전부 영화 스틸컷을 이용했다.   

 

 

"누구도 날 이런식으로 대하지 않았어. 내 입에 그걸 쳐 넣다가 윤리의식이 생기다니!"

열 받은 메러디스 존슨을 두고 톰은 지독히도 여성폄하적인 대답으로 응수를 하며 메러디스 존슨의 자존심을 뭉개버린다.

"정 섹스를 하고 싶다면 여기 있는 와인병하고 하라고"

 

 

 

동성애를 통한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편견은 남녀 역할이 전복된듯한 설정의 [폭로]에서도 여과없이 그려진다. 톰은 승진에서도 밀리고 여자 상사한테 성폭행을 당한것도 모자라 남자 상관한테까지 희롱을 당하는 악몽에 시달린다. 그야말로 최악의 직장 생활이다. 도날드 서덜랜드가 뽑아낸 역겨운 혓바닥 클로즈업이 소름끼친다.

 

 

 

이것은 첨단의 세계로 가는 지름길일까? 가상현실 체계를 도입하면서 회사 내 사원들간의 경쟁은 더욱 더 살벌해진다. 격변하는 1990년대의 사내 풍경. 

 

 

데미 무어는 [폭로]의 흥행 성공으로 그녀의 머리카락 길이가 길면 영화가 망한다는 징크스를 깰 수 있었다. 그러나 [폭로]이후 긴 머리로 출연했던 [주홍글씨][스트립티즈][나우 앤 덴][주어러]가 연달아 망했다가 삭발하고 출연한 [지 아이 제인]이 주간 박스오피스에서 2주 연속 1위를 하면서 다시 머리카락 길이 논쟁(?)이 불붙었다. [지 아이 제인]이후 데미 무어는 고집스럽게 긴 머리를 고수하고 있는데 만약 그녀가 다시 예전처럼 쇼커트를 하면 흥행작이 나올 수 있을까? 데미 무어는 21세기 들어 제대로 된 영화 흥행작이 단 한편도 없다.    

 

 

 

영화 자체가 마이클 더글라스 같다. 마이클 더글라슨느 강한 여자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속빈 강정같은 남자 배역을 수시로 맡아왔고 [폭로]에서의 연기는 자기 복제였다. [퍼펙트 머더]에 이르고 나면 자기복제의 정점을 볼 수 있다. 당시엔 이런 식의 마이클 더글라스 연기를 너무 자주 봐와서 물리고 질렸는데 그만큼 마이클 더글라스가 이런 연기를 굉장히 잘 한다. 시간이 흐르고 보면 지겹다기 보단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영화 자체도 그렇다. 무난하게 만들어진 헐리우드 영화의 안일함과 느긋한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데미 무어의 악녀 연기 변신도 성공적이었다. 적당히 자기도취에 빠져 나태한 와중에도 데미 무어의 악녀 연기는 손색이 없다. 내가 이 영화를 여러번 본 이유도 데미 무어의 연기 때문이었다. 후반부 조정회의 장면에서 진상이 밝혀지자 그녀는 자포자기 상태로 사실을 실토하지만 뻔뻔한 자신감은 잃지 않는다.

 

(톰의 변호를 맡은 여성 변호사 알바레즈) :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 몇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합의에 의한 성관계의 정의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메러디스 존슨(이하 존슨) : 양자가 원하는 관계죠.

 

알바레즈 : 테이프에서 샌더스 씨가 몇 번이나 안 된다고 했죠?

 

존슨 : 제 팬티가 찢겨나가는 걸 듣느라 잘 못 들었어요.

 

알바레즈 : 31번, 31번 이죠. ‘안돼‘는 안 된다는 뜻이죠?

 

존슨 : 가끔 안된다는 말은 정복당하고 싶단 의미죠. 하지만 요즘은 안 통해요. 요즘은 관계를 갖기 위해선 UN의 중재가 필요하니까요.

 

알바레즈 : ‘안돼‘는 안 된다는 뜻이죠. 여성들한테 그렇게 가르치죠? 남자라고 해서 다르나요?

 

존슨 : 정말 멈추고 싶다고 하는데도 할 때는 문제 없는 줄 알아요?

 

알바레즈 : 그래서 화가 났나요?

 

존슨 : 물론이죠, 누구나 화나죠.

 

알바레즈 : 여성들에게 어느 순간에나 멈출 수 있다고 가르치잖아요?

 

존슨 : 안 된다고 하면서 진심은 반대인 적 없나요, 알바레즈 씨?

 

알바레즈 : 실제 삽입 행위 직전까지...

 

존슨 : 그도 할 의향이 있었어요 테잎이 그 사실을 바꾸진 않죠.

 

알바레즈 : 중요한건 당신이 회의 주관자였단 거죠. 시간도 당신이 정했고 와인도 당신이 준비했고 문도 당신이 잠궜어요. 서비스를 요구 했는데 안 하자 화가 난 거죠. 그래서 대가를 치루게 하겠다고 결심한 겁니다. 말도 안 되는 고소로 그를 몰아내려고 한 거예요. 당신은 권력 있는 여성도 남성 못지 않단 걸 보여준 거죠.

 

존슨 : 날 도마 위에 올려놓을 거면 그 이유에 대해 솔직해져 보죠. 전 성적으로 적극적이에요. 당신은 그 사실을 감당 못하죠. 태초부터 늘 있던 일이에요. 가리고 숨기고 잠궈 놓고 열쇠를 버리는 거죠. 여성도 남자처럼 일하고 똑같은 몫을 받는데 잠자리에선 여전히 누워서 해주길 바래야 해요? 천만에요.

 

원어와 함께 들어야지만 대사의 묘미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이 부분의 대화가 무척 인상적이어서 이 영화를 비디오로도 구매했고 나중에 dvd로도 추가구입했다. 메리더스 존슨은 악녀지만 차별 받는 악녀다. 그녀의 행동은 여권신장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파렴치한 짓이었지만 남자들의 세계에선 아무일도 아닌것처럼 벌어지는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 여성에게 대입하자 파직으로 이어진다.

 

미국에선 1994년에 개봉 됐던 영화 [폭로]는 1995년 국내 개봉 당시 성폭행 장면에서 일부 장면이 삭제됐다가 후에 dvd로 출시되면서 복원됐다. 복원판의 노출 수위는 1995년 삭제판과 비슷하지만 성적 긴장감이 높아졌다. 노출 없이도 긴장감 넘치는 섹스장면을 연출한것이 백미였다. 극장판이나 비디오판에서는 그 만큼의 묘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강간 장면에서 데미 무어가 신랄하게 뱉어내는 "내 입에 그걸 쳐넣다가 윤리의식이 생기다니!"같은 대사는 명대사였다.

 

 

개봉 당시엔 후반부에 잠깐 나오는 가상현실 장면이 신기했다. CG기술의 과도기에 만들어진 그 시절만의 영상 혁명. 원작자인 마이클 크라이튼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가상현실을 통해 밥그릇 싸움을 하는 주인공들. 달라진 시대상을 예언한 묘사였지만 가상현실 체계는 아직은 20년 전 작품인 [폭로]에서 그려낸만큼 발전하진 않았다. [론머맨]이나 [코드명J]등도 [폭로]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가상현실 소재의 작품들이다.

 

 

가상현실 속에서 마주한 메러디스 존슨을 보고 톰은 정말로 기겁한다.

 

 

 

당시 관객들이나 소재의 선정주의를 믿고 호기심에 이 영화를 찾는 사람들은 전부 실망감을 표했다. 에로틱 서스펜스물로 소개가 됐지만 스릴은 약하고 딱 한번 나오는 중요한 섹스 장면에서조차 주인공들이 모두 옷을 입고 나오기 때문에 야한걸 기대하고 보는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기본기로 뚝딱 만들어낸것같은 공산품의 실용성과 매끈함이 나름의 미덕으로 작용되는 작품이다. 풍성한 자본을 바탕으로 남녀관계의 힘을 묘사한 점은 지금 봐도 신선하고 가상현실 부분은 그 시대의 유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런면에서 [폭로]는 대단히 인상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반 페미니즘 영화라고 욕을 먹었지만 메러디스 존슨의 일 하는 능력만은 살려 두어 그 시절 발전된 여권신장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는 결말 처리도 찝찝한것 만큼이나 신선하다.   

 

존슨 : 자랑하러 오지 않아서 이상했어요.


샌더스 : 하찮은 일이지. 파일을 가지러 온 거요.

 

존슨 : 사람들이 당신을 과소평가했죠.

 

샌더스 : 고맙소, 메리디스.
 

존슨 : 난 제외하고요. 당신은 정정당당하게 이겼죠. 용기를 잃은 건 사장이에요. 사장과 필이 당신을 무능력자로 해고하자고 했죠. 그런데 내가 해고 당하다니.

 

샌더스 : 피해자 역할은 처음인 것 같군. 유일하게 남은 당신 장점이지.
 

존슨 : 당신들 게임을 했을 뿐인데 벌은 내가 받은 거죠. 상관 없어요. 방금 1시간 동안 일자릴 제안해 온 데가 열군데가 넘어요. 10년 후 이곳을 사러 와도 놀라지 말아요.

 

샌더스 : 당신이 함정에 몰릴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해봤소?

 

 

밑도끝도없이 추락했다가 극적으로 기사회생한 기적의 일주일. 성폭행건으로 불려간 조정회의에선 승소하고 직장 내에선 성공적으로 복직을 하고 희대의 악녀도 무찔렀고 가정의 평화도 되찾은 톰. 그러나 그의 행복이 오래갈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지금은 국내에서 절판된 마이클 더글라스의 원작 소설은 영화 개봉 무렵에 국내에서도 출간됐다. 당시 서점에 가면 [쥬라기 공원][떠오르는 태양][콩고]등 마이클 크라이튼이 제공한 원작 소설을 매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폭로]도 소재 자체가 워낙에 화제였기 빠르게 번역됐다. 분량상 굳이 분책을 하지 않아도 됐지만 장삿속으로 상,하권이 나뉘어 출간됐다. 원작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절판되고 개정판이 기획되지 않는것은 아쉽다. [폭로]가 개봉했을 당시 사람들이 날을 세웠던것은 원작에선 전개의 일부로 등장하는 여자 상사의 부하 남자 직원 성폭행 소재를 이야기 전면에 내세워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건드리는데에만 집중했다는 죄목이었다. 원작이 집중하고 있는 요소는 당시 과학계에서 한참 화제가 되고 있었던 가상현실이었다. 영화에선 극 후반부에 잠깐 등장하는 구성이지만 원작에선 이야기 전체를 지배하고 있고 성폭행 소재는 극적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기능성 도구였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항상 이야기보단 소재에 더 관심을 쏟은 작가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소재 중심주의로 치닫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서사는 소재를 돋보이게 해주는 도구였고 관심은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소재였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이야기를 읽는다기 보단 보고서를 읽는 기분이 들때가 많았고 문체는 건조했다. 소재를 차용하는데 있어 남들보다 앞서있는 감각은 뛰어났지만 이야기 꾼으로서의 매력은 떨어졌다. 그러나 영화 소재로는 요긴하게 활용됐다. 그가 내세운 기발한 소재와 상상력에서 발생시킨 수많은 오류를 뒤로 하고 본다 하더라도 말이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폭로]에서 가상현실에 주목한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영화 업자들에겐 가상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집어 넣은 여자 상사의 남자 부하 직원 성폭행 소재가 더 관심을 끌 수 밖에 없었다. 1990년대 중반은 에로틱스릴러가 각광을 받았던 시기였다. [폭로]의 여상사 남직원 성폭행 부분은 모든 이들을 단박에 주목시킬 수 있는 재료였다. 개봉 당시에나 개봉한지 20년이 넘은 지금에나 [폭로]는 여자 상사가 악랄한 방식으로 남자 부하 직원을 성희롱, 성폭행 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어서 영화적인 평가가 무색해져 버린감이 있다.

 

[폭로]는 여권 운동의 활기가 빚어된 최종판격인 작품이다. 여권 신장의 발전 안에서 당면할 수 있는 직장 내 남녀관계의 서열관계를 파고듦으로써 이 세계에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만든것이다. 여상사의 남자 부하 직원 성폭행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소재이며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황색 저널리즘을 타고 천박하게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던 무렵에 이 작품이 나왔다. 그 시대에 발 맞춰진 사회 문제이자 동시대의 흐름을 탄 영화 소재였다. 1970년대 초중반부터 발전된 여권 운동은 1980년대 숙성단계를 거쳐 [워킹 걸]같은 발랄한 작품이 나올 수도 있었고 199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숙이 됐다. [폭로]에서 데미 무어가 연기한 메리더스 존슨은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나이가 밝혀지지 않지만 대략 그 당시 데미 무어와 비슷한 30대 초반의 여성이다.

 

1960년대 초 태어나 여권운동의 활기 속에 1970년대에 고등교육을 받았고 여권 운동이 자리를 잡아가며 여성 중역들이 회사의 한 자리씩을 차지하던 1980년대에 대학을 나온 여성이 메리더스 존슨이다. 그녀가 회사에 입사해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해 회사의 중역으로 성장한것은 어릴 때부터 받아온 주입식 교육과 여권 신장을 높이기 위한 사회 분위기에 힘 입은 바 크다. [폭로]가 영화로 만들어진 1994년 무렵이면 이런 여자가 아직 미혼인 상태에서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며 회사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나이가 된다. 영화는 메리더스 존슨을 통해 이 시절 직장 남성들에게 불안감과 공포를 조성시킨다. 동시에 똑 부러지게 일 처리는 잘 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여자 상사가 권력을 휘두르려 했을 때 발생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그려낸다. 메리더스가 목표로 삼은 톰 샌더스는 그로 인해 지옥같은 일주일을 보낸다.  

 

톰 샌더스가 승강기 안에서 밥에게 동성 키스를 당하는 악몽을 꾸듯 이 작품에서 메리더스 존슨의 모든 등장은 톰에겐 끝나지 않을것같은 악몽으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폭로]는 그 시절 발전된 여권신장의 사회적 분위기를 보여주는게 목적이 아닌 남성들의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에 대한 위기의식과 공포를 묘사한 작품이다. 당시엔 권력을 가진 여자가 남자를 희롱하는 설정에 도취돼 소재주의로 점칠된 얄팍한 상술의 영화로 보였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요즘 이 영화를 보면 의도치 않게 남성들의 불안감이 영화 내내 짜증스럽게 깔려 있다.   

 

[폭로]는 권력을 가진 여자를 최악의 방법으로 묘사했지만 모순적이게도 이 작품의 뒤바뀐듯한 남녀관계 설정은 현재 상황에 대입해 봐도 어색할게 없다. 여전히 직장 내 능력있는 여자들은 회사에서 살아 남으려면 남자들에 비해 몇 배 이상 노력해야 하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편견의 대상이 된다. 여권운동이 활발하던 때는 사회적 분위기를 틈타 승진을 노리고 성공할 기회도 얻었지만 여권운동은 얼마 안가 시들시들해졌고 한때의 유행처럼 변질된감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폭로]가 나왔던 시절보다 지금이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성공을 보장하기 어렵게 됐다. 그 시절 여성 중역들은 시대 분위기를 탈 수 있었기에 지금보단 기회가 많았던것같다. [폭로]의 소재는 여전히 화두로 세울만하고 여자 상사가 남자 부하직원을 성폭행 한다는 설정은 지금에서도 중심부로 내세울만한 사건으로 인지된다. 권력을 가진 여자를 안 좋은 방향으로 전개시킨 영화가 [폭로]지만 여권신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나아진건 없다. 여전히 여권신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별도의 운동을 해야 여자의 사회적 성공이 성립될 수 있는 세상이다.

    

[폭로]는 개봉 전부터 소재 때문에 시끌시끌했고 개봉 후에도 영화 자체의 완성도보단 선정주의에 그친 소재로 논란이 됐다. 일부 단체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이 영화를 비난했던 이유는 능력 있는 여성을 비하하고 섹스에 굶주린 여성으로 묘사했다는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끝내 패배하고 직장에서 해공 당한다. 그런데 이게 논란거리가 될까? 달라진 세상에 맞추어 그에 맞는 소재를 취사해 만들어진 한편의 영화일 뿐이다. 이 영화는 이런식의 전개를 탈 수 밖에 없다. 권력을 가졌고 능력도 있는 여자가 남자 부하 직원을 성폭행하다가 실패하는 악녀로 그려 권선징악으로 처벌 받는것이 어떻게 반 페미니즘이라고 몰아세울 수 있을까.  

 

그러면 메리더스 존슨이 그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끝내 살아남아 직장내에서 자기 자리를 고수하고 끝나야 한다는것인가. 오히려 이 영화가 찝찝한 이유는 여성비하적인 태도가 아니라 메리더스 존슨의 결말이다. 그녀는 옛 애인이었던 톰과 섹스를 하려다 실패한것에 자존심이 상하여 약한 여성이라는것을 악용해 도리어 오히려 톰이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고소해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녀의 최종 목표는 톰을 회사에서 해고시키는것.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기 위해 회사 중역들과 변호사를 대동하고 조정회의를 하다가 톰을 불러 섹스를 하려다 실패한 상황의 녹음 테이프가 발각되면서 그녀의 작전은 실패한다. 그녀는 조정회의에서 지고 체면도 구긴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직장에서 쫒겨나진 않는다. 이 영화의 각색에서 문제점이 발견되는것도 이 지점이다.

 

성폭행 사건이 극의 대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상황인데 성폭행의 진범이 밝혀졌는데도 처벌이 안 된다. 메리더스 존슨이 회사에서 해고되는 이유는 비리를 저지른게 발각됐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폭행을 해서 쫒겨난게 아니라 능력 미달로 자격을 박탈당한것이다. 여기서 원작이 집중적으로 다뤘던 가상현실이 양념처럼 등장하는데 성폭행으로 시작해서 가상현실로 매듭이 지어지다 보니 이야기 중심이 오락가락한다. 성폭행 소재에 욕심이 났다면 결말부 처리는 성폭행 소재에 맞게 바꿨어야 했다. 

 

더욱이 문제는 메리더스 존슨이다. 대체 그녀가 잃은건 뭘까. 조정회의는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니 망신은 좀 당했겠지만 언론에 대서특필 될리도 없고 그녀 전체 회사 경력에선 작은 티끌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부와 명예는 별로 망가진게 없다. 비록 톰이 다니는 회사에선 해고를 당했지만 톰이 그토록 원하던 메리더스 존슨의 자리로 승진을 하고 메리더스 존슨이 물러났을 때 그녀는 이미 여러군데의 기업에서 임원 제의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할것이고 다시 톰의 회사로 들어올 가능성도 높다. 조정회의에선 패배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일 잘 하는 여성 중역으로 인정 받고 있다. 악몽은 끝나지 않은것이다.

 

영화가 마지막으로 메리더스 존슨의 얼굴을 담을 때는 톰이 메리더스 존슨에게 당신이 실패할것이란걸 몰랐소? 라고 말을 할 때이다. 이때 메리더스 존슨은 수치심과 증오, 짓밟힌 자존심을 얼굴에 담아내지만 그뿐이다. 그녀에게 이 사건은 개인적 보복의 과정이었을 뿐이고 보복이 결국 성공하진 못했지만 잃은것도 별로 없다. 재기라고 할것도 없이 다른 회사로 이직해 능력을 발휘하면 된다. 결국 회사는 능력있는 인재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영화의 문제는 각색의 흐름이 중간에 길을 잃었다는것이고 스릴러 임에도 전개가 느슨해서 지루하다는것이다. 메리더스 존슨이 되려 자신이 성폭행 당했다며 고소하고 톰이 변호사를 알아보는 등의 초반부를 지나고 나면 영화는 느리게 진행된다. 소재 자체는 신선했지만 거기에서 정체되고 만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괜찮게 봤다. 나른하고 치밀하지도 못하고 결말도 찝찝하게 처리되지만 전반적인 영화의 정서가 좋았다. 배리 레빈슨의 범작이자 마이클 더글라스의 하향세를 예고했던 작품이지만 뭐랄까, 이 영화는 1급 제작진들이 손놓고 만든 때깔 좋은 공산품 냄새가 난다. 정성과 성의는 보이지 않지만 자신들의 기본기를 믿고 발로 만든것같은데 그럼에도 제법 흥미와 재미, 기술적 완성도를 보장해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그런 헐리우드 상업 영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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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08-20 01:11:54

 멋지군요!

이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한 글은 처음 접합니다. ^^

 

개인적으로는 소재도 소재지만, '영화 음악의 신' 엔니오 모리꼬네께서 음악을 맡았다는게 가장 호기심이 땡기는 작품이었죠.


2016-08-20 01:37:52

'그걸 쳐넣다가 윤리의식이 생기다니' 는 정말 제 머리 속에서는 생각조차 못할 명대사 였습니다.

2016-08-20 03:00:55

내공이 느껴지는 고퀄리티 글 잘봤습니다. 거의 영화잡지 특집코너 수준이네요. 과거 상당히 재밌게 본 영환데 소설은 클라이튼 답게 가상현실 위주였군요.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2016-08-20 09:13:35

 일단 추천했습니다. 올려주시는 글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거지만 머드님도 뭐하시는 분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런데 폭로는 국내에 소개될 때 제 기억으론 디스클로져라는 원제목으로 소개된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당시는 영화소개채널이 뭐 비디오산책(당시 제목은...), 로드쇼, 스크린, 키노 정도 뿐이었지만 원작 소설이 국내에 폭로로 팔리고 있어서인지 폭로로 소개됐지 않았나 하는 기억이...^^ 틀리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 기억으로는 극장에서는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SKC에서 출시된 VHS는 둘 사이의 섹스장면이 슬로우모션처리를 해서 많이 삭제가 됐던 기억이 나네요. 나중에 DVD로야 원판 그대로를 볼수 있었던...

Updated at 2016-08-20 09:35:21

소설도 영화도 둘다 폭로로 개봉한 거 맞습니다. ^^

2016-08-20 10:43:11

머드님은 개봉되기 전 각종 매체에 소개됐을 때의 제목명을 말씀하신 거겠죠...^^

WR
2016-08-20 13:24:33

그런가요? 제가 당시 접한 영화 기사들에선 죄다 디스클로져라고 소개가 돼서...원작의 국내 번역본은 [폭로]란 제목으로 1994년 4월에 출간되긴 했죠. 절판 뒤 틈틈히 찾다가 중고서점에서 운좋게 구입했어요.  

2016-08-20 13:27:16

머드님 기억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영화잡지들은 국내개봉명 정식으로 정해지기 전까지는 자기들이 적당히 제목을 붙였으니까요.

Updated at 2016-08-20 09:37:08

이거 개봉이 95년 1월은 맞는데 25일 전이었습니다.
왜 기억하냐면 제가 25일에 입대했고 직전에 마지막으로 본 영화였거든요.
롯데월드 시네마에서 봄. ^^
원작자 마이클 크라이튼이 남주 역에 마이클 더글라스가 원작 설정보다 넘 늙었다고
반대했는데 당시 마이클이 젤 잘 나갈때라 제작사에서 밀어 붙였죠.

WR
2016-08-20 13:26:47

수정했습니다. 1995년 1월 14일에 개봉했군요. 당시 신문광고에 공지된 1월 28일 개봉은 2차 개봉관 개봉일 기준이었나 봅니다. 천호시네마에선 1월 28일 날 개봉했나 봐요.

2016-08-20 12:32:23

이때 데미 무어 정말 이쁜데다 너무 섹시했었죠.

최고의 명장면인 저 겁탈씬 처음 봤을때 침이 절로 넘어가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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