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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글]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1964) 제작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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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10-10 21:41:02

 

(자신이 조각한 조각상을 사랑하게 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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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여자들을 박대하고 기피했던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독신을 고집한다. 대신 상아로 완벽한 모습의 아름다운 여인 조각상을 만들어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인다. 피그말리온은 실물 크기로 제작한 갈라테이아 조각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아프로디테 축제일에 피그말리온은 이 여인상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조각상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의 마음을 헤아린 아프로디테는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갈라테이아는 인간이 되었고 피그말리온은 사람이 된 조각상과 결혼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는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우리 영화 [그대안의 블루](1992)에서도 여주인공 유림 역을 맡은 강수연의 대사에서 소재로 인용되었다. 역동적인 여자 이미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매번 실패하고 마는 디자이너 호석이 좌절하자 위로한답시고 한다는 말이 "호석씨는 현실의 여자들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조각한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 같아요." 근데 이 영화에서 강수연이 대사를 잘못 읽어서 피그말리온을 피그밀리온이라고 한것이 실수다.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 신화는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피그말리온 신화에 영감 받아 만든 창작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알란 레이 러너와 프레드릭 로위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을 각색한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이다.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 공연으로도 유명하지만 1964년 동명 뮤지컬 영화로 만들어진 뒤에는 영화가 더 유명해졌다. 나중에 게리 마샬 감독의 [귀여운 여인]에서 [마이 페어 레이디]의 설정과 이미지를 몇 장면 차용하기도 했다.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창녀 비비안이 에드워드와 경마장에 갔다가 정체가 탄로나 의기소침해지는 부분도 그렇고 고가의 옷을 입으며 사교계 숙녀로 거듭나는 과정이 [마이 페어 레이디]와 유사하다. 극장 개봉시엔 삭제됐지만 dvd출시되면서 복원된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을 보면 비비안은 에드워드와 지내는 사이에 같이 창녀 일을 하는 룸메이트 일로 자신이 사는 빈민촌에 잠시 방문했다가 무안을 당하는 장면도 있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도 히긴스에게 화가 난 일라이저가 히긴스의 집을 뛰쳐 나와 런던의 빈민굴로 들어갔다가 겉도는 자신을 발견하는장면이 있다.   

 

 

 

(집필중인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그는 신화 속 피그말리온의 결말에 반기를 들고 희곡을 쓰기로 결심했다. 조지 버나드 쇼는 1913년 희곡 [피그말리온]을 완성하였고 1914년 이 작품을 초연시켰다. 초연은 호평을 받았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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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 결말을 탐탁치 않아 했다. 그가 제기한 첫 불만은 왜 조각상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가? 였다.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인간이 된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인간이 되고 난 후에 피그말리온의 바람대로 결혼을 하는 과정에서 갈라테이아의 주관은 철저히 무시된다.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에게 결혼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는다.

 

조지 버나드 쇼가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한 [피그말리온]은 1913년 5막 짜리 희곡으로 탄생했고 1914년 초연됐다. [마이 페어 레이디]란 제목으로 개작한 뮤지컬과 달리 원작 희곡에선 히긴스 교수와 일라이자가 맺어지지 않는다. 일라이자는 거만하고 끝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희긴스를 떠나 프레디와 연결된다. 이치상 맞는 결말이긴 했다. 일라이저는 누구나 탐내는 사교계 꽃이 됐고 히긴스는 늙고 괴팍하다. 일라이저가 히긴스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일라이저는 히긴스보다 훨씬 젊고 잘 생겼으며 예의 바른 프레디란 신사가 있다. 일라이저는 절박한 마음으로 언어교습을 받기 위해 히긴수를 찾았지만 히긴스는 그걸 가지고 한낱 쓰레기같은 내기로 일라이저를 농락했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이 발각됐을 때도 미안한 기색이 별로 없다. 그러니 일라이저 입장에선 아쉬울게 없는 입장이다.

 

 

(연극 [피그말리온]초연 당시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이자 연출가인 허버트 비어봄 트리. 그는 조지 버나드 쇼가 제시한 결말을 임의대로 바꾸어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열린결말로 마무리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이에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지만 대중은 허버트 비어봄 트리의 주관적 해석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실제 공연 당시 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히긴스 교수 역의 허버트 비어봄 트리는 연극 배우이자 연출가이기도 했다. 그는 일라이자와 히긴스가 연결될 가능성을 내포하는 연기를 보여주며 독자적인 해석을 덧붙였다. 조지 버나드 쇼는 화를 냈지만 허버트 비어봄 트리는 그것이 관객이 진정 원하는것이라며 자신의 판단력을 믿었다. 허버트 비어봄 트리는 도리어 조지 버나드 쇼에게 관객이 진짜 원하는 결말은 이런것이라며 자신이 해석한 결말에 힘입어 작품이 성공할것이라고 장담했다. 허버트 비어봄 트리의 공인지는 모르겠지만 연극 [피그말리온]은 흥행에 성공했고 훗날 영화로도 제작됐다.  

 

 

(국내에선 여러 판본의 원작 희곡이 출간됐다. 그 중 열린책들에서 발간한 희곡 [피그말리온])

 

 

(해외에서 발간된 희곡 [피그말리온]. 허버트 비어봄 트리의 자체 해석에 심기가 불편해진 조지 버나드 쇼는 책으로 출간된 [피그말리온]의 작가 후기에서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가 왜 이루어질 수 없는지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며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

 

조지 버나드 쇼는 후에 희곡이 책으로 나왔을 때 작가 후기에서 일라이저와 히긴스가 연결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애슐리 윌크스로 유명한 레슬리 하워드는 1938년 영화로 각색한 [피그말리온]에서 주인공을 맡아 베니스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크라이테리온에서 출시한 영화 [피그말리온]특별판 dvd표지. 레슬리 하워드는 이 작품의 주연과 공동 연출을 맡았고 각색을 담당은 조지 버나드 쇼는 1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다.)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1938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안소니 애스퀴스와 공동 연출한 레슬리 하워드는 주인공 히긴스 역도 맡았는데 그는 이 역할로 제6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각색을 맡은 조지 버나드 쇼는 1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받았다.   

 

 

(신문에 실린 [마이 페어 레이디]의 공연 광고. 1956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는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을 각색한것으로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브로드웨이 초연 사운드트랙 표지. 브로드웨이 초연에선 렉스 해리슨과 줄리 앤드류스가 공동 주연을 맡았다.)

(거리에서 꽃을 파는 일라이저를 연기한 줄리 앤드류스의 모습)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주연을 맡은 렉스 해리슨과 줄리 앤드류스는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83년 만들어진 영화 [리타 길들이기]의 포스터. [피그말리온]의 또 다른 각색물이며 영화 이전에 동명의 연극이 먼저 선보였다. [마이 페어 레이디]의 경우처럼 무대극의 성공을 발판 삼아 영화로 개작되었다.)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또 다른 제목의 연극으로도 개작되었는데 그것은 1980년 6월 런던의 웨어하우스 극장에서 초연된 [리타 길들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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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연극열전2의 일환으로 재공연된 국내판 [리타 길들이기]. 이 작품 국내 초연 때 주연을 맡은 윤주상과 최화정은 17년 만에 조우하여 같은 작품으로 한 무대에 섰다.)

 

(구 원더스페이스 극장에서 공연된 2008년도의 [리타 길들이기]에서 윤주상과 최화정은 관록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국내에서 1991년 윤주상, 최화정 주연의 2인극으로 올려져 큰 성공을 거두었던 작품이며 2008년에도 연극열전2의 일환으로 국내 초연 주역진이 다시 모여 재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최화정은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을 받았는데 그녀가 지금까지 배우 생활 하면서 유일하게 연기로 받은 상이었다. 이 작품은 이후에도 국내에서 여러차례 재공연 됐고 전도연과 이태란같은 연예인 출신들이 리타 역에 도전하기도 했다.

 

국내판의 가장 최신 [리타 길들이기]는 연일 매진사례로 스타파워를 제대로 증명한 공효진 주연의 [리타]. 2014년 공연됐다. [리타]로 제목을 줄여 재공연한 공효진의 [리타 길들이기]는 2008년 연극열전2로 선보여 큰 인기를 모은 [리타 길들이기]보다 예매율이 좋았다. 연극 데뷔작으로 이 작품을 택한 공효진 주연 때는 더블캐스팅이 강혜정이었는데 취소표를 잡아야 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던 공효진 회차와 달리 강혜정 출연회차는 잔여석이 남아 돌아 특별히 반값 이하의 할인률이 추가됐다.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 [리타 길들이기]에서 주연을 맡은 마이클 케인과 줄리 월터스. 줄리 월터스는 연극 [리타 길들이기]의 초연 배우이다. 그녀는 실질적인 영화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영화 [리타 길들이기]로 오스카 주연상 후보 지명이 된다.)

 

연극 [리타 길들이기]는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가 그랬던것처럼 몇 년 지나지 않아 무대극의 성공을 발판 삼아 동명 영화로도 제작됐다. 1983년 루이스 길버트 감독의 연출로 영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리타 길들이기]에는 원작 초연에서 주연을 맡은 줄리 월터스가 영화에서도 같은 역으로 출연하였는데 그녀는 이 작품에서의 열연으로 이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부문에 첫 후보 지명이 된다. 영화 [리타 길들이기]는 줄리 월터스의 실질적인 영화 데뷔작이었다. 줄리 월터스가 영화계에서 인지도가 거의 없었는데도 그 당시 파격적으로 영화에까지 주인공 역으로 기용된데에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영향이 있었을것이다. 같은 줄리인 줄리 앤드류스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초연에 올라 호평을 받았지만 인지도가 낮다는 이유로 동명 영화의 캐스팅 후보에선 제외됐는데 만약 줄리 앤드류스가 무대극에서처럼 영화에서도 일라이자를 맡았다면 결과가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영화판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일라이저로 섭외된 오드리 헵번. 줄리 앤드류스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영화사 간부들은 스타를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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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은 1964년도에 부피 강박증에 빠져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모양으로 완성된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 시큰둥 했다. 그들은 특히 여주인공 캐스팅에 불만이 많았다. 애국심이 강하고 전통을 중시하며 보수적이었던 그들은 목소리 대역을 쓰면서까지 일라이저를 연기한 오드리 헵번을 달가워 하지 않았고 뮤지컬 영화에서 직접 노래 부르지 않는 배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캐스팅에 대한 불만은 영화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172분이나 되는 이 대작 뮤지컬 영화는 주연 여배우가 노래를 직접 부르지 않았다는것 외에는 문제될게 없는 근사한 작품이었다.

 

사실 주연 여배우가 노래를 직접 부르지 않은것을 지나치게 걸고 넘어진 면이 있다. 그 당시에는 뮤지컬 영화에서 목소리 대역을 쓰는 일이 흔했다. 그 당시 오드리 헵번이 목소리 대역 문제로 트집 잡혀 유난히 가혹한 대접을 받았던것은 무대극 초연 배우인 줄리 앤드류스의 실제 나이가 일라이저 역에 더 가까웠고 영화 매체로 소비되기에 흡잡을데 없었던 외모와 실력을 갖추었는데도 스타파워에 밀렸기 때문이다. 오드리 헵번은 줄리 앤드류스보다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스타였다. 그러나 일라이저의 관건인 노래에서 뒤쳐졌으니 문제다. 사람들 눈에는 노래를 할 수 없는 배우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남의 배역을 가로챘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건 오드리 헵번의 잘못이 아니다. 오드리 헵번은 끝까지 [마이 페어 레이디]의 노래를 직접 부르고 싶어 했다. 반대한건 제작진들이었고 오드리 헵번의 가창력은 반대할만한 수준이었다.  

 

 

(오드리 헵번의 가창력이 별볼일 없다는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던 워너사는 오드리 헵번 몰래 노래 대역 배우로 마니 닉슨을 고용했다. 마니 닉슨은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조역을 하기도 했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나탈리 우드, [왕과 나]의 데보라 카의 노래 대역을 한것으로 더 유명하다. 마니 닉슨이 노래 대역 작품 중 가장 유명한것은 뭐니뭐니 해도 오드리 헵번을 대신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였다. 그녀는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dvd코멘터리에도 참여했다.)

 

 

(오드리 헵번의 노래를 들을 수 없지만 오드리 헵번의 이름은 표기된 [마이 페어 레이디]의 사운드트랙 표지. 오드리 헵번은 직접 노래를 부르길 간절히 원했으나 묵살당했다.)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일라이저의 노래는 마니 닉슨의 목소리를 빌려 썼다. 그래도 출연료는 최고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박탈감을 느끼게 됐고 반사적으로 줄리 앤드류스를 응원하게 됐다. 영국에선 그런 현상이 더욱 심해서 캐스팅 논란이 일면서도 흥행에 성공했던 미국과 달리 박스오피스에서 실패했다. 영국인들은 [마이 페어 레이디]가 영국에서 나온 [피그말리온]을 각색한 작품이고 브로드웨이 초연 때도 영국 배우인 렉스 해리슨과 줄리 앤드류스가 열연한 작품이라는것을 잊지 않았다. 배경도 영국 런던이었다. 오드리 헵번도 국적은 영국이었지만 혈통은 달랐다. 생전의 오드리 헵번은 영국인으로서의 자부심 같은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영국인들에겐 그 당시 우리 배우라고 여긴 줄리 앤드류스가 당연히 영화에서도 일라이저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줄리 앤드루스가 연기한 일라이저는 유명했다.  

 

 

(줄리 앤드류스는 인지도가 낮다는 이유로 영화에는 캐스팅 되지 못했으나 대역 배우를 섭외하면서까지 오드리 헵번을 출연시켰던 [마이 페어 레이디]는 그 때문에 촬영 내내 잡음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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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적임자는 줄리 앤드류스였다. 오페라풍으로 작곡된 뮤지컬 넘버는 오드리 헵번이 소화할 수 없는 음역대였지만 성량이 풍부하고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던 줄리 앤드류스는 일라이저가 완수해야 할 연기와 노래 모두 다 탁월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역에 도가 튼 배우였다. 무대극이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데에는 줄리 앤드류스의 공이 무엇보다 컸다. 렉스 해리슨이 영화에서도 히긴스 교수 역을 맡은 상황에서 인지도에 밀려 캐스팅 제의조차 받지 못한건 줄리 앤드류스에게 굴욕적인 일이었고 주변에서 보기엔 초연 배우에 대한 예의가 아닌듯 싶었다. 졸지에 캐스팅에서 밀려 버린것처럼 보인 줄리 앤드류스는 사람들의 동정을 받았다. 오히려 줄리 앤드류스 본인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난리였다. 

 

 

(172분의 상영시간으로 만들어진 대작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무대극보다 상영시간이 길었고 규모는 커졌다.)

 

영화는 70mm 파나비전 형태로 제작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그 해 워너의 야심작이었며 아카데미 공략용으로 철저하게 기획된 뮤지컬 대작이었다. 이런 영화에서 영화계에선 무명이나 다름 없었던 줄리 앤드류스를 작품의 타이틀 롤로 세워진 여주인공 역에 출연시키기엔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영국과 달리 그 당시 미국 영화계는 뮤지컬 영화에서 목소리 대역을 쓰는것이 흔한 일이었다. 워너는 스타 캐스팅에 욕심을 냈다.

 

1960년대에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가 기획 됐을 때는 여전히 뮤지컬 영화가 대세였고 목소리 대역은 영화매체니까 넘어가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원하는 캐스팅으로 조합할 수 있었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 앞서 1960년대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목소리 대역을 썼지만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드리 헵번이 이 작품에 캐스팅 됐을 때 사람들은 원작 뮤지컬이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지 알고 있었기에 누구도 오드리 헵번이 [마이 페어 레이디]의 넘버를 [화니 페이스]에서처럼 자기 목소리로 부를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오드리 헵번만 그걸 몰랐을 뿐이다.  

 

영화는 사교계 숙녀로 변신한 일라이저의 모습이 등장하는 부분 부터는 원작 뮤지컬의 화려한 요소를 더욱 더 극대화시켜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꾸며진 패션 화보가 된다. 이런 영화에서 그 시절 최고의 패션 아이콘이었던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다면 효과 만점일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평생 지기였던 지방시가 손수 제작한 영화 속 의상은 오드리 헵번 덕을 톡톡히 봤고 [마이 페어 레이디]의 상징적인 요소가 됐다. 오드리 헵번은 그 시절 당대 최고의 헐리웃 스타였고 워너는 그 이름 값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었다.

 

스타성은 돈으로 증명된다. 오드리 헵번이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받은 출연료는 100만 달러였다. 그때까지 오드리 헵번이 받은 영화 출연료로 최고액이었다. 이는 전년도에 여배우로는 처음으로 100만 달러를 받아 화제가 됐던 [클레오 파트라]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에 이은것이며 그 당시 오드리 헵번이 영화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증명해주는 객관적인 수치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했을 때 오드리 헵번의 스타성은 정점에 이르렀고 이 작품을 기점으로 하향세를 탔다.

 

 

(오드리 헵번과 절친했던 지방시가 만든 의상은 오드리 헵번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고 [마이 페어 레이디]의 상징이 되었다.)

 

 

(게리 마샬의 [귀여운 여인]에서 차용하기도 했던 경마장 장면은 다채로운 의상으로 두 눈을 압도시킨다.)

 

오드리 헵번은 워너사가 100만 달러를 들여 모셔 온것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해줬다. 그녀의 이름이 새겨지면서 영화는 더욱 화제가 됐고 제작과정부터 시작해서 정식 개봉 때까지 수시로 언급될 수 있었다. 워너사가 오드리 헵번 몰래 마니 닉슨에게 목소리 대역을 맡긴것이 들통난것도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으로 요긴하게 써먹었다.

 

 

(사교계의 꽃으로 거듭난 일라이자)

 

 

(촬영 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렉스 해리슨과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은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작품에 성실히 임했고 최선을 다했지만 영화사의 제지와 본인 능력의 한계로 목소리 대역을 쓰면서 이 작품에 참여한 인력 중 유일하게 건진게 없었다. 영화는 성공적이었지만 남의 배역을 뺏었다는 누명을 썼고 목소리 대역을 쓰면서 반쪽짜리 연기를 했다는 자괴감을 느꼈다. 여론도 배역을 맡지 못한 줄리 앤드류스 편이었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의 드라마 연기는 호평을 받았지만 노래를 직접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한 평가가 어려웠다. 이런 분위기에 휩쓸린 아카데미 측은 보란듯이 오드리 헵번을 여우주연상 후보에서 제외시켰고 오드리 헵번은 속상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다.

 

 

(브로드웨이 초연 때도 히긴스를 연기한 렉스 해리슨은 [마이 페어 레이디]로 생애 첫 오스카 트로피를 받았지만 후보에도 못 오른 오드리 헵번은 축하만 해줄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 8개 부문이나 수상한 [마이 페어 레이디]의 수상 기념 사진에서 오드리 헵번만이 유일하게 빈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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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페어 레이디]는 예상대로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총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면서 그 해 최다 부문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작품상을 비롯해 8개 부문을 수상하며 시상식을 휩쓸었다. 오드리 헵번의 여우주연상 후보 문제로 논란이 일었던 여우주연상 부문은 공교롭게도 [마이 페어 레이디]를 놓치고 [메리 포핀스]를 선택한 줄리 앤드류스에게 돌아갔다. 수상 직후 찍은 오스카 기념 사진에서 오드리 헵번만 트로피 없이 다른 수상자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자신이 후보에 오르지 않았다고 시상식에도 불참했던 [타이타닉]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달리 시상식에 참석하면서 시상식 후보를 두고 일어났던 잡음을 불식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그 당시 오스카 기념 사진에서 오드리 헵번의 모습은 웬지 처량 맞아 보였다.

 

 

(3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드리 헵번의 쓸쓸한 모습은 6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톰 크루즈 만큼이나 안쓰러웠다. 남이 받은 트로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톰 크루즈. 사진은 [레인맨]으로 두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더스틴 호프만의 모습)

 

1989년 아카데미에서 [레인맨]이 작품상을 받았을 때 톰 크루즈가 [레인맨]에 함께 출연하여 혼자만 후보에 오르고 상까지 받은 더스틴 호프만의 오스카 트로피를 만지고 찍은 기념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에서 톰 크루즈가 얼마나 측은해 보였는지 모른다. 오드리 헵번도 비슷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영화 흥행에 이바지 했음에도 욕은 욕대로 먹고 혼자만 소외된 모습이 안쓰러웠다. 같은 원작을 두고 무대극으로 변환했다가 영화용으로 각색된 [리타 길들이기]에서 무대극 초연 배우인 줄리 월터스가 여주인공으로 출연할 수 있었던데는 아마 이런 전력이 상기 됐기 때문일것이다. 사실 [리타 길들이기]는 굳이 원작 무대극 캐스팅에 휘둘릴 필요가 없었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고음역대를 요구하는 대극장용 오페라풍 뮤지컬이었고 [리타 길들이기]는 소극장 희곡이었으니 말이다.

 

줄리 앤드류스는 [마이 페어 레이디]가 영화로 제작 됐을 때 일라이저를 다시 맡는다것은 애시당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당시 영화계에서 무명이었고 [마이 페어 레이디]는 대작 규모로 제작될 영화였다. 물론 영화에서도 일라이저를 연기하고 싶어하긴 했지만 크게 바라진 않았다. 훗날 인터뷰에서 줄리 앤드류스는 남들이 생각하는것만큼 영화에서 일라이저를 맡지 못해 속상하고 억울하진 않았다고 한다. 영화용 캐스팅이라는것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오드리 헵번이 목소리 대역을 썼다는것이 밝혀지면서 여론이 들끓었고 줄리 앤드류스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됐다. 무대극에서와 동일한 배역으로 렉스 해리슨은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줄리 앤드류스만 배제된것을 사람들은 안타깝게 여겼다. 그 결과 줄리 앤드류스는 [마이 페어 레이디]가 개봉한 해에 [메리 포핀스]에 출연해 그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오드리 헵번이 참석함으로서 촌극을 만들어냈다. 상 받은 줄리 앤드류스와 후보에도 못 오른 오드리 헵번이 함께 있는 모습은 기자들 카메라의 집중 세례를 받았다. 

 

 

([메리 포핀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리 앤드류스. 그리고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닌 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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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회 시상식에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던건 줄리 앤드류스를 축하해주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이었다. 오드리 헵번은 속상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시상식에 참석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오리지널 일라이저를 연기했던 줄리 앤드류스의 오스카 수상을 축하해주었다.)

 

(3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탈락된건 오드리 헵번으로서는 굴욕적인 대우였지만 그래도 오드리 헵번은 이미 11년 전에 줄리 앤드류스가 받은 여우주연상을 [로마의 휴일]로 받았다. 사진은 2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 감격한 오드리 헵번의 모습. 토니상 여우주연상을 받게 해준 연극 [온디네]공연을 브로드웨이에서 끝내자마자 [온디네]분장도 지우지 못하고 [온디네]의상 그대로 입은 상태에서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줄리 앤드류스가 오드리 헵번은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그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이유는 [마이 페어 레이디]에 캐스팅 되지 못했다는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동 작용으로 해석 됐다. 줄리 앤드류스는 상은 [메리 포핀스]로 받았지만 수상 당시엔 출연하지도 않은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받은것처럼 보였다. 그걸 노리고 아카데미가 여우주연상을 준것일 수도 있다. 이 해 작품상을 [마이 페어 레이디]가 받았고 줄리 앤드류스와 브로드웨이 초연에 함께 했던 렉스 해리슨이 히긴스 교수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상황이 그랬으니 수상자들끼리 다들 모여 기념사진을 찍을 때 렉스 해리슨과 함께 선 줄리 앤드류스가 [메리 포핀스]가 아닌 [마이 페어 레이디]로 상을 받은것같은 착시 현상이 일어나게 된것이다.

 

 

([메리 포핀스]국내 개봉 당시의 포스터. 줄리 앤드류스는 [메리 포핀스]에서도 훌륭했지만 이 작품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받을 수 있었던데는 영화판 [마이 페어 레이디]에 캐스팅 되지 못한것에 대한 반동 작용이 컸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놓쳤지만 디즈니의 [메리 포핀스]에서의 열연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리 앤드류스. 그녀는 오드리 헵번에 밀렸다는 이유로 냄비처럼 달아오른 동정론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진짜 실력으로 상을 받은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줄리 앤드류스의 수상은 수상 당시에도 호사가들의 입방아를 찧게 만드는것이었다. 사람들은 오드리 헵번에게 밀린 줄리 앤드류스의 수상으로 새로운 신데렐라 탄생을 보고 싶어했다. 아카데미측은 그저 줄리 앤드류스에게 상을 주고 싶었던거지 [메리 포핀스]의 줄리 앤드류스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수상 당시에도 이것때문에 말이 많이 나왔고 수상 직후 줄리 앤드류스에게 무례하게도 이를 직접 물어보는 기자도 있었는데(마이 페어 레이디 dvd 부가 영상 참고) 줄리 앤드류스는 자신의 실력으로 수상한것이라 믿고 싶다고 소견을 밝혔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흘러 줄리 앤드류스가 회고하길, 아마도 그 당시 사람들의 반동 작용 때문에 자신이 [메리 포핀스]로 여우주연상을 받을 수 있었던것같다고 인정했다. 줄리 앤드류스가 [메리 포핀스]에서도 훌륭하긴 했지만 그래도 줄리 앤드류스가 진짜로 여우주연상을 받아야 했던 영화는 [메리 포핀스]가 아닌 다음 해 출연한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다. 나는 지금도 종종 줄리 앤드류스가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 혼동한다. 만약 전년도에 [메리 포핀스]로 여우주연상을 받지만 않았다면 줄리 앤드류스는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형평성을 고려한 아카데미가 표를 분산시킨것이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뮤지컬 영화 [메리 포핀스]에서 줄리 앤드류스)

 

(그러나 진정 줄리 앤드류스가 상을 받아야 했던 작품은 [메리 포핀스]가 나온 이듬해 출연한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 역이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지나치게 형평성을 고려하여 상을 분배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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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건 줄리 앤드류스 보단 오드리 헵번이었다. 영화판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인공 출연은 줄리 앤드류스에겐 그림의 떡이었기 때문에 박탈감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은 졸지에 남의 배역 훔쳐갔다는 죄를 뒤집어 쓴데다 애초 약속과 달리 목소리 대역을 쓸것이란 통보를 촬영 중간에 받아 충격이 컸다. 오드리 헵번은 모두가 무리로 봤지만 [마이 페어 레이디]의 넘버를 직접 소화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뮤지컬 영화와 무대용 뮤지컬 출연 경력이 모두 있었다. 노래를 잘 부르는건 아니지만 보컬레슨을 받는다면 극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는 오드리 헵번 본인의 판단이었고 보컬레슨으로 단기간에 연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오드리 헵번은 브로드웨이의 [지지]초연 주역이기도 하고 다수의 뮤지컬 경력이 있었지만 노래보다 춤이 앞서는 배우였고 노래 실력은 Moon River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녀가 출연했던 뮤지컬들도 노래 실력이 관건인 작품은 아니었다. 오드리 헵번은 고음의 성악 발성이 필요한 [마이 페어 레이디]의 넘버를 소화하기엔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는 배우였다.

 

워너는 오드리 헵번을 캐스팅 하기 위해 노래를 직접 부른다는 오드리 헵번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척 했지만 비밀리에 마니 닉슨에게 오드리 헵번의 목소리 대역을 맡기고 연습에 들어갔다. [왕과 나]의 데보라 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나탈리 우드의 목소리 대역을 맡은 적이 있었던 마니 닉슨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오드리 헵번 목소리 대역으로 뽑히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비밀서약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녀는 약속대로 자신이 오드리 헵번의 대역 배우라는것을 발설하지 않았지만 오드리 헵번이 붕어 노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드리 헵번 귀에까지 이 같은 사실이 들어가자 대책을 세웠다. 처음에 오드리 헵번은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부를것이라고 했고 영화사의 만류가 강하자 중간지점을 모색해 자신이 부를 수 없는 음역대만 대역을 쓰는 방향으로 우회했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마니 닉슨의 목소리를 빌린 오드리 헵번의 연기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오드리 헵번은 촬영 중에 계속 목소리 대역 논란이 일자 부분 대역을 쓰는것 뿐이라고 일축시켰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워너는 또 한번 오드리 헵번의 의견을 들어주는척 하다가 묵살하고 일라이저가 부르는 모든 노래를 마니 닉슨의 목소리로 대체하였다. 마니 닉슨은 오드리 헵번이 [마이 페어 레이디]를 촬영하고 있는 사이사이에 비밀리에 전달된 오드리 헵번의 노래가 녹음된 레코딩을 들으면서 최대한 오드리 헵번의 억양과 노래 부르는 속도를 맞춰서 별도로 레코딩을 했다. 그렇게 해서 영화 속에서 덧입혀진 마니 닉슨의 목소리는 진짜로 오드리 헵번이 부른것처럼 입모양과 노랫말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렇게 만들어질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오드리 헵번은 중간 조율 지점에서 부분 대역을 쓴다고 얘기했다가 소란만 더 크게 일으킨 꼴이 되었고 자신의 스타성을 권력인양 행사하며 남을 이용해 먹으려는 파렴치한으로 오해를 받게 됐다. 마니 닉슨의 남편까지 나서자 사태는 더욱 더 복잡하게 꼬였다.  

 

마니 닉슨의 남편은 오드리 헵번이 말한 사실과 다르다며 자신의 아내를 추켜세웠지만 결과적으로 마니 닉슨의 입장만 난처하게 만들어 버린 폭로였다. 주연 여배우가 노래를 잘 못해서 사건이 이 지경까지 갔으니 결국엔 노래 잘 하고 연기 되는 줄리 앤드류스에 대한 부제만 커져 버렸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캐스팅 당시부터 촬영 종료, 영화 개봉 후에도 오드리 헵번의 목소리 대역 논란은 끊이질 않았다. 아카데미가 12개 부문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를 후보에 올려놓고도 치사하게 여우주연상 부문에 오드리 헵번을 누락시킨건 그만큼 그 당시 분위기가 안 좋았단 얘기다. 자신이 직접 부른 노래를 사용할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오드리 헵번이 [마이 페어 레이디]촬영장에서 처음 목소리 대역을 쓸것이란 통보를 받았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영화 촬영을 하면서 화를 냈고 격앙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촬영장을 이탈했다. 이틑 날 촬영장에 복귀해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촬영에 임했지만 그녀는 이 일로 크게 상처를 받아 이후에 출연한 작품들에서 [마이 페어 레이디]때와 같은 캐스팅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노래 대역을 한건 오드리 헵번만이 아니었다. 프레디 역의 제레미 브렛도 촬영 중간에 노래 대역을 쓴다는 통보를 받고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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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도에 국내 출시된 [마이 페어 레이디]의 복원판 스페셜에디션 dvd의 부가영상을 보면 오드리 헵번이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직접 부른 노래를 들을 수 있는데 보컬레슨으로 [화니 페이스]때보단 나아졌지만 [마이 페어 레이디]에 어울리는 성량도, 음색도 아니었다. 아이같이 째지는 특유의 목소리로 [마이 페어 레이디]의 넘버를 소화하는데 솔직히 못 들어줄 수준이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에게 위안이 되는 사실은 목소리 대역 굴욕은 오드리 헵번만이 처한 상황이 아니었다는것이다. 프레디 역의 제레미 브렛도 오드리 헵번처럼 워너에 속았다. 그 역시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부르는 줄 알았으나 나중에 대역을 쓸것이란 통보를 받고 절망했다. 그래도 다행이 워너 필름 창고에서 소실될 뻔한 [마이 페어 레이디]의 자료를 발견하고 수십억원을 투자해 복원 작업을 해서 그 당시 오드리 헵번이 최선을 다해 불렀던 Wouldn't It Be Loverly와 제레미 브렛과 함께 한 Show Me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마니 닉슨의 깨끗한 음색에 비하면 형편없는 노래 실력이었지만 오드리 헵번의 꾸밈없는 음색이 일라이저가 꿈꾸는 동경에 진솔함을 부여해준다. 마니 닉슨의 목소리로 덧입혀진것과 비교해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이걸 보고 있으면 진 켈리의 [사랑은 비를 타고]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반면 노래 부르는데 재주가 없었던 렉스 해리슨은 무대극에서처럼 직접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은 히긴스가 불러야 할 노래들은 성악 발성을 요구하는 일라이저의 노래와 달리 대사처럼 처리 됐기 때문이다. 히긴스가 부르는 넘버들은 선율 자체는 매력적이지 않지만 극과 붙으면 효과적인 장치가 된다. 극중 언어학자인 히긴스 교수는 과학적인 방식을 도입하여 각종 억양과 언어를 분석하는 사람이다. 그는 언어를 가지고 놀 수 있다. 코크니 사투리가 심한 일라이저를 가르치는 상황에서 대사를 치듯이 부르는 노래들은 언어학자로서 히긴스의 능력을 보여주는 요소다. 또한 히긴스만이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서 그의 건방지고 오만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200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라이센스 초연된 오디뮤지컬컴퍼니의 [마이 페어 레이디]는 김소현을 도약시킨 공연이었지만 완성도는 영화만 못했다.)

 

 

(히긴스 역을 원캐스트로 연기한 이형철은 이 작품이 뮤지컬 데뷔작이었는데 연기력은 둘째 치고 이 역을 하기엔 너무 젊었다.)

 

히긴스는 언어를 가지고 놀듯이 단어로 구성된 가사도 쥐고 흔들려는것이다. 이 작품은 2008년 국내에서 라이센스 초연을 가졌는데 그 당시 히긴스 역은 엉뚱하게도 뮤지컬 경력이 일천했던 이형철이었다. 노래를 불러야 하지만 잘 부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역이라는걸 잘못 이해한 공연 기획사가 배우 본인도 의아해 한 캐스팅 제의를 한것이다. 당시 이형철의 문제는 노래가 아니라 나이였다. 그는 히긴스 교수 역을 하기엔 너무 젋었고 나이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연기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히긴스는 극중 일라이저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로 설정됐는데 국내 공연에선 이걸 깨고 많아 봐야 30대 초중반쯤으로 해놓으니 배역의 깊이가 떨어져 버렸다. 일라이저와 히긴스를 유사 부녀관계처럼 보이는것이 아닌 연인처럼 보이기 위해 히긴스의 나잇대를 낮춰 놓은것같은데 그러다보니 독신을 고집하다 괴팍하게 늙어버린 히긴스의 외로움이 부각되지 못했다.

 

 

(브로드웨이 초연과 영화판에서 히긴스를 연기한 렉스 해리슨은 오드리 헵번 만큼이나 노래 실력은 그저 그랬지만 노래를 잘 할 필요가 없었던 배역이라 오드리 헵번과 같은 논란은 피할 수 있었다. 그는 히긴스를 훌륭하게 연기했다.)

 

렉스 해리슨은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노래 연기를 동시 녹음한 배우다. 뮤지컬 영화는 사운드트랙을 먼저 녹음하고 현장에선 후시 녹음한 곡들을 틀어놓고 립씽크를 하는게 일반적인 제작 방식이다. 그러나 대사처럼 처리된 히긴스의 곡은 립씽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렉스 해리슨은 라이브 연기를 고집했다. 그의 판단은 맞았다. 이 작품에서 언어의 배열, 구문의 흐름은 굉장히 중요하다. 히긴스의 노래들은 후시 녹음으로 맞추기 어려웠고 입모양과 노랫말이 어긋나면 이야기의 균형이 깨져버릴 위험이 크다. 렉스 해리슨은 옷에 무선 마이크를 장착하고 촬영하면서도 노래를 직접 불렀고 최종 완성물에서도 현장에서 동시 녹음한것을 사용했다. 그의 연기가 다른 배우들보다 실감나게 느껴진다면 라이브로 부른 노래의 도움이 컸다.

 

 

(히긴스에게 언어 교정 교육을 혹독하게 받고 있는 일라이자)

 

언어를 다룬 영미권 작품이라 라이센스 공연에선 한계가 있었다. 특히 극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하는 The rain in Spain stays mainly in the plain를 한국어로 했을 때는 어떻게 해도 원어의 묘미를 재현할 수 없다. 스페인의 평원에는 비가 내린다 라는 뜻인데 원어에서 이 뜻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히긴스가 일라이저의 코크니 사투리를 지우기 위해 비슷한 음절의 단어를 배열해서 훈련용으로 만든 문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스페인의 평원에는 비가 내린다 라는 말은 발음하기 어려운것이 아니다. 그러니 라이센스 공연에서 일라이저가 어렵게 이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고 환희에 들떠 I Could Have Danced All Night을 부르는 장면은 구문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없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올바른 언어 사용과 발성법을 작품 전반에 걸쳐 전개하고 있으며 이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대사와 노래의 연결 지점이 탁월한 뮤지컬이다. 이런 부분에 집중해서 보는것도 극 중 오드리 헵번이 입은 화려한 의상을 구경하는것만큼이나 즐거운 부분이다.      

 

영화 제작 당시와 개봉 직후엔 오드리 헵번의 목소리 대역 논란 때문에 오드리 헵번의 연기는 온당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영화는 흥행에서나 비평계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오드리 헵번도 자신이 받았던 역대 출연료를 갱신하며 스타성을 증명했지만 유일하게 이 작품이 받은 영광을 즐기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보여준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기는 비록 마니 닉슨의 목소리를 빌려썼다 해도 변질될 수 없는 감동이라는것을 사람들은 인정했다. 이 작품은 여전히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이며 스튜디어 제작 시스템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대형 뮤지컬이었다.

 

 

(세트장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오드리 헵번과 조지 큐커 감독)

 

시대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고 이 작품과 이듬해 나온 [사운드 오브 뮤직]이후로 3시간에 육박하는 대형 뮤지컬 제작은 더이상 시도되지 않았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헐리우드 스튜디오 제작 시절의 마지막 황금기에서 그 시절 각 분야의 장인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 낸 고풍스러운 예술품이었다.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라 이름 붙여진 완벽한 여인 조각상을 만들었고 [마이 페어 레이디]의 제작진은 완벽에 가까운 대형 뮤지컬을 만들었던것이다. 앙드레 프레빈의 편곡은 오리지널 무대 음악을 압도하고 의상을 담당한 지방시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숙성 됐으며 오드리 헵번의 미모는 거지꼴을 하고 있어도 후광이 난다. 무대극을 영화 변환하는데 있어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조지 큐커의 연출력은 만개했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모든 분야가 최고였고 최상의 효과를 냈다.  

 

 

(스페인의 평원에는 비가 내린다! The rain in Spain stays mainly in the plain. 드디어 빈민촌 억양을 버리고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게 된 일라이자는 기쁜 마음에 들떠 I Could Have Danced All Night! 밤새도록 춤이라도 추고 싶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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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작품이라도 무대극과 영화는 별개다. 영화에 맞는 캐스팅이 있고 무대에 적합한 캐스팅이 있는것이다. 원년 구성 배우라고 영화에까지 출연할 필요는 없다. 영화 [렌트]의 실패 지점 중 하나가 브로드웨이 캐스팅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다. 노래 실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외모로 보나 그 당시 줄리 앤드류스가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오드리 헵번이 출연함으로써 얻은것도 많다. 일단 이 영화를 이렇게 패셔너블하게 만들 수 있었던 공은 오드리 헵번 덕분이다. 극 중 일라이저가 사교계 꽃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더욱 흥미진진해질 수 있었던것도 오드리 헵번의 옷 맵시와 꼭 맞는 스타일링의 힘을 받았다. [마이 페어 레이디]가 200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첫 라이센스 공연을 했을 때 일라이저의 의상 컨셉은 1964년도에 지방시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오드리 헵번을 위해 만들어준 디자인에서 착안된것들이다. 그러고보니 [마이 페어 레이디]가 국내에서 공연 됐던 해에 연극 [리타 길들이기]도 공연 했다.    

 

 

(촬영 중 조지 큐커 감독의 지도를 받고 있는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은 당대 최고의 패셔니스타 답게 거리의 꽃파는 여자보단 사교계 숙녀를 연기하는것을 더 좋아했다.)

 

주연 남자 배우가 영화 쪽보단 공연계에서 이름이 더 알려진 상황에서 대형 뮤지컬로 기획된 작품에 인지도가 낮은 배우로만 구성할 수는 없었다. 오드리 헵번의 섭외는 워너로썬 최선의 타협안이었다. 뮤지컬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만 대역을 쓴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차피 무대극도 아니고 영화로 만들어지는것인데 목소리 대역 좀 쓰면 어떤가. 댄스 영화에서 고난이도의 안무를 소화해야 할 때 대역을 쓰면 별 말이 안 나오면서(플래시 댄스의 제니퍼 빌즈의 경우는 개봉 초반에 자신이 춤을 다 췄다고 속였기 때문에 욕을 먹었던것이고) 유독 뮤지컬 영화에서 목소리 대역을 쓰면 평가절을 당한다.  

 

 

(비록 노래는 대역을 썼지만 이 작품은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으로 항상 꼽히고 있으며 영화 속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는 진솔했고 감동적이었으며 훌륭했다. 뮤지컬 영화에서 남의 목소리로 노래 연기를 대신했다고 해서 평가절 당해도 충분한 연기는 결코 아니었다. 마니 닉슨이 뮤지컬 영화에서 목소리를 빌려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나탈리 우드, [왕과 나]의 데보라 커는 오드리 헵번과 달리 그 작품들로 호평을 받았고 데보라 커는 오스카 후보에도 올랐다. 오드리 헵번은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하면서 상처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이 페어 레이디]로 오스카 후보 지명조차 받지 못했던 오드리 헵번의 연기는 재평가를 받았다.)

 

[쉘부르의 우산]같은 작품은 무려 송스루 형식을 빌린 뮤지컬 영화였는데도 카트린느 드뇌브의 노래는 전곡 다 대역 배우가 했다. 이걸 가지고 카트린느 드뇌브가 비난 받지는 않았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이렌는 야곱은 폴란드의 베로니크로 나올 때는 대사 연기까지 다른 배우의 목소리로 대신했고 성악도로 나오는 베로니크의 목소리도 대역을 썼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 이렌느 야곱의 연기는 훌륭했고 그녀는 이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전적으로 제 때 맞춰 제대로 대처를 못한 워너의 홍보 담당을 탓해야 한다. 오드리 헵번의 노래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면 그것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공지하고 시작했어야 했다. 영화사가 우유부단하게 대처한 바람에 줄리 앤드류스는 불쾌한 동정을 받았고 오드리 헵번은 거짓말쟁이가 됐으며 마니 닉슨을 고자질쟁이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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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6-10-09 13:46:11

 깊이와 흥미가 공존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디피대문감이네요...

2016-10-09 15:43:28

EBS에서 방영해주는 영화를 보고 한동안 엄청 빠져서 관련 자료를 찾아봤던 기억이있네요...

장문의 글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10-09 16:15:01

예전부터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라 좋은 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정발 블루레이가 풍부한 서플을 삭제하고 본편만 발매되어서

너무 안타깝네요.

Updated at 2016-10-09 17:12:38

엄청 정성 들이신 글인데 옥에 티가 있네요. 허버트 비어봄 트리의 사진이 잘 못 되었습니다. 저건 허버트 비어봄 트리 사진이 아니고 캐롤 리드 ([제 3의 사나이]의 감독인 그 캐롤 리드) 사진입니다. 캐롤 리드는 허버트 비어봄 트리의 사생아였고 트리라는 성을 받지 못 했지요. 나이든 다음의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얼굴이 무척 닮았습니다.

WR
2016-10-09 17:22:28

지금 알았네요. 좀 이따 교체할게요. 지금 밖이라서요.

2016-10-09 18:30:30

우와...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16-10-10 00:00:02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6-10-10 07:16:09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분이신가요? 잘 읽었습니다.

2016-10-10 09:45:11

이런 뒷이야기 정말 좋습니다. 단숨에 읽었네요. ^^

사실 '마이페어레이디'는 오드리헵번 영화중에 '전쟁과평화' 다음으로 재미없게 본 영화인데,

글을 읽고나니 '메리포핀스', '귀여운여인'과 함께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귀여운여인' 설명부분에 오타가 있네요.(창녀 --> 창년) ㅡ.ㅡ;

WR
2016-10-10 21:39:51

사실 '창년' 말고도 본문에 오타와 비문이 꽤 있죠. 나머진 장문이다 보니 발생빈도가 높은 애교로 넘어가주심이...

2016-10-10 11:56:26

 재미난 이야기 감사합니다. 

Updated at 2016-10-10 20:56:23

패밀리 가이의 스튜? 목소리를 저 남자 주인공에서 일부 따왔다고 하던데.. 글 잘 읽었습니다

2016-10-10 18:26:12

와~ 이건 추천 안 할 수가 없네요. 머드님의 정성스러운 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2016-10-11 21:20:49

이런글에는 무조건 추천입니다. 굉장하십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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