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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라라랜드: 이 영화는 과연 걸작일까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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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12-09 15:26:28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 <인사이드 르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블로그에 쓴 글이라 반말체임을 양해바랍니다.



1. 윤리적 성취가 배제된 걸작도 걸작인가

 좋은 예술가들은 윤리의 측면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현재 시대의 질서를 불편하게 만든다. 현재 시대의 질서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긍정하는 작품은 시대와 역사를 정체시킨다. 이런 맥락에서는 나치 시대의 선전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행복을 찾아서>같은 영화는 감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불편하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라라랜드>의 기술적, 장르적 성취는 분명 걸작이다. 무용과 음악, 미술, 촬영의 아름다움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려 이룬 성취는 뮤지컬 영화의 역사를 한 단계 진전시켰다. 단지 장르영화의 미덕을 지켰다면 걸작에 의문부호가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라라랜드>가 채택한 스타일과 서사의 윤리적 문제가 과연 성취인지 질문해보자면 걸작이란 결론에 물음표가 달린다.


 다미엔 차젤의 전작 <위플래쉬>가 기술적 완성도와 별개로 우리를 불편하게 했던 윤리적 지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범재가 천재의 경지로 오르는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정치적 올바름과 거리가 걸었고 우리의 환상을 거역했고 배신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진실임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은폐하던 환상을 횡단하여 불편하고도 보편적인 삶의 진실을 대중에게 선사했다. 진실이 중요하다. 예술작품이 전하는 삶의 보편적 진실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우리의 뇌리에 지혜로 남아 우리의 삶을 확장시킨다.

 

 

2. 할리우드가 자본주의에 부역하는 방식

 이런 측면에서 그의 신작 <라라랜드>는 전작에 비해 기술적 성취는 한층 도약했지만, 윤리적 성취는 한참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의 질서인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하고, 자본주의의 그림자와 삶의 진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독립적인 예술가에서 할리우드에 취직된 감독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할리우드가 품고 있는 예술가들 중 누군가는 자본주의에 부역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본주의를 공격하기도 한다. <라라랜드>는 명백히 전자에 속한다. 영악한 이 영화는 할리우드 음악영화사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패착은 반복하지 않았다.


 뉴욕 인디뮤지션의 잿빛 삶을 키치하게 포장해낸 <비긴 어게인 (2014)>을 오색찬란한 서부 석양의 테마파크(~랜드)으로 옮기면서, 뉴욕 인디 포크뮤지션의 처절한 생존기를 날 것 그대로 그려낸 <인사이드 르윈 (2013)>이 대중들에게 선사한 불편함은 반복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 하다. 도시, 음악, 청춘남녀, 가난, 성공이란 키워드가 <비긴 어게인>, <인사이드 르윈>, <라라랜드>를 관통한다. 2013년과 2014년, 2016년의 이 영화들은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를까.

 

 

2-1. 인스타그램 같은 음악영화

 대도시에서 음악하는 청춘들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서 <라라랜드>는 <인사이드 르윈>을 배제하고 <비긴 어게인>을 답습한다. 마치 인스타그램같은 음악영화라고 할 수 있다.


 <비긴 어게인>의 여주인공 '그레타'는 뉴욕의 엄청난 집세와 고물가의 생활에 그리 고통받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는다. 게다가 성적으로 안전한 남자'친구'들이 조건없이 자신을 도와준다.

 <라라랜드>의 '미아'는 파트타임 카페직원이면서 자가용(!) 프리우스(3만불)를 몰고, 이브닝 파티를 밥먹듯 다닌다.


 <인사이드 르윈>의 무명 뮤지션 '르윈'은 반대다. 한겨울에 코트도 없이 기타와 단벌로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노숙자처럼 살아간다. 한국에서도 지방 출신이 홍대로 상경해 전업 뮤지션으로 산다면 룸메이트 없이 혼자 홍대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인사이드 르윈>은 대도시에서 활동하는 무명 인디뮤지션의 삶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대중에게 알려준다. 도시는 예술가에게 너무나 비싸고 비참한 세계다. 죽음이 주변에 도사리고, 예술계는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 난무하며, 연인에겐 낙태 문제가 현실이다. 도시에 대한, 뮤지션에 대한 욕망을 불러 일으키기는커녕 소멸시키는 영화다. 드라마틱한 인생의 반전도 없고, 춥고 암울하고 지루한 삶이 엔딩까지 지속된다.

 

 <라라랜드>의 주인공들에게는 <비긴어게인>처럼 정신적 고통을 겪을지언정, 경제적 고통은 절대 엄습하지 않는다. 할리우드는 고통스런 현실을 철저히 은폐한다. 여기서 달콤하고도 위선적인 환상이 한 번 창조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도시 청춘들의 삶은 오색찬란한 인스타그램(리뉴얼된 새 앱 아이콘 컬러와 라라랜드의 색감이 유사하다)과 대개 일치하지 않는다. 새로 뽑은 외제차가 리스/할부라거나, 고급레스토랑 인증샷은 초대권 혹은 쿠폰이라거나, 예쁘게 지내는 듯한 커플/애완동물은 사실 문제투성이라거나, 해외여행은 저축을 탈탈 털거나 카드빚으로 갔다고 자백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화려하게 필터처리가 된 프레임을 통해 프레임 밖의 우중충하고 누추한 삶은 은폐한다. 서로가 진짜가 아닌 거짓된 삶을 자랑하고 그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2-2. '주인의 꿈'을 선물하는 영화

 자본주의는 극소수 자본가 외에 모든 이들을 자본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주인은 노동하지 않는다. 노동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노동계급의 궁극적 지향점은 불로소득의 삶인데 모두에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주인의 꿈을 먹고 살아간다. 대중들은 자신들을 노예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롭고 가능성이 무한한 주인이라고 교육을 받고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주인들의 삶을 미디어에 진열해놓고 대중이 욕망하고 꿈꾸길 유도한다. '모두가 뭐든 될 수 있어! Everyone, Can be everything! (주토피아)'라고 최면을 걸지만, 곧 마술은 풀리고 만다. 그러나 돈이 있으면 아주 잠시 주인이 될 수 있다. 백화점에서, 도로 위에서, 레스토랑에서도 VIP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뒷감당이 따르는 값비싼 손실과 대가를 치뤄야 한다.


 대중은 자신의 비루한 삶을, 진실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무언가'가 비루한 삶을 은폐해줘야 한다. '무언가'는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먹고 자란 거대한 욕망의 환상이다. 강력한 정치집단에, 명문스포츠팀에, 영화와 게임 속 슈퍼히어로와 자신을 동일시하면 비루한 나는 은폐될 수 있다.

 주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삶이 역사 속에 흔적도, 의미도 없이 사라질 것을 직감하고 있다. 그래서 타자로부터 내 삶의 의미가 있음을 응답받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SNS에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음'을 PR하듯이 흔적으로 남긴다. 평범한 일상도 특별함으로 환원시킨다. 불편한 결과(진실)는 유예되어야 하고, 그 과정의 실패와 좌절은 다 사실상 성공이라고 환원시켜야 한다. 색채 없는 삶에서 색채 가득한 의미를 갈구하는 대중들에게 <비긴 어게인>은 (거짓된) 색채를 선물했고, <라라랜드>는 거기에 더해 색감을 극대치로 올린다. LA에서의 비루한 삶과 사랑은 사기적인 시각예술로 재탄생한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꿈이 좌절되고, 사랑이 비틀대는 희미한 청춘들에게 <라라랜드>의 경악스럽게 오버된 색채는 할리우드가 현실을 은폐하는 위선적이고 달콤한 응답이다.


 <미생>이 직장인들에게, <국제시장>이 산업화 세대에게 색채를 입혀줬듯, <라라랜드>는 냉혹한 자본주의 도시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LA랜드라는 꿈과 환상의 세계의 주민임을, 주인임을 인증해준다. 이 도시에서의 가난도, 실패도, 트러블도 영화 속 그들처럼 겪는 과정일 뿐, 결과는 아닐거라며 위안한다. 영화가 끝나면 LA의 젊은 커플들과 관광객들은 영화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실제 영화 촬영지인 석양의 뒷산과 한밤의 천문대를 방문하여 '우리도 그들처럼',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꿈을 현실에서 이룰 것이다.

 

 

2-3. 기존 질서에 선택받길 원하는 주인공

 <라라랜드>의 주인공 '미아'는 명백히 오늘날 청년들의 모습이다. 기존 질서에 선택받으려 노력하고, 선택받는 것을 통해 인생을 단번에 역전하고 싶어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비극 중 하나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은 기존 질서에 선택받아야 살 수 있다고 믿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다들 취직, 공모전, 오디션에서 선택받으려 하지, 서태지같은 자생적 인물은 어째서인지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자본주의가 정한 질서를 이탈할 경우, 경제적-사회적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는 공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라라랜드>의 두 주인공은 선택받길 기다리는 질서에서 이탈해 스스로 자립을 했을 때 작은 해답을 얻는다. 우리가 주인이 되려면 기존 질서를 나와 자신의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가 품은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진실의 지점일 것이다. 이대로 끝났다면 아마 이 시대의 질서를 거스르는 윤리적인 작품이 되었겠지만, 결국 엔딩에서 '미아'는 '기존 질서에 선택받아 성공한 인생'으로 귀결되고, '세바스찬'은 기존 질서를 이탈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했기에 '미아'를 잃는다. 자신의 재즈 클럽을 열었어도 연주자로 성공했다기보다는 경영자로 성공한 것으로 보이므로 꿈은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위선적인 엔딩은 대중의 무의식에 어떻게든 각인이 될 것이다. 그래. 우리는 오디션과 밴드 세션맨에서만 해답을 얻을 수 있는거야-라고. 전작 <위플래시>에서 주인공 앤드류는 스승 플래처라는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며 천재의 경지에 결국 도달했다는 점에서 <라라랜드>와 큰 차이를 보인다.

 
 

3. 걸작임을 확신하면서 걸작임을 질문해보는 것에 대하여

 <라라랜드>를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술적 성취만으로는 걸작이다. 그러나 윤리적으로는 시대에 정체되어 있고, 러브스토리는 70년 전의 <카사블랑카>를 반복하고 있다. <위플래쉬>는 스승에게 'Fuck you'를 날리는 당돌한 천재소년의 작품으로 보이고, <라라랜드>는 메신져스의 세션맨으로 사는 것이 철든 거라고 항변하는 속물이 된 세바스찬을 연상시킨다.

 좋은 예술가들은 윤리를 통해서 현재를 미래로 진전시키는 역사적 힘을 가지고 있다.

 미래는 현재의 붕괴를 전제로 한다. 좋은 예술가들은 현재가 붕괴될 수 있는 균열점을 정확하게 현미경으로 포착하여 대중에게 매혹적인 필터를 끼운 볼록렌즈로 제시한다. 현재의 균열은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진보적인 작품은 불편하고, 그 불편함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기에 달콤하다. 다미엔 차젤의 신작 <라라랜드>에서는 그런 달콤한 불편함이 사라졌다. 대신 다른 불편한 달콤함이 별점 하나를 가득 채운다.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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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4
2016-12-09 07:47:36

어쩌면 팩트 폭력으로 느껴질 정도로

날카롭고도 날카로운 글 너무나 잘 보았습니다.

 

걸작이지만, 불편한 달콤함을 남기는 인스타그램의 정점 같은 영화..

그래도 너무나도 달콤해서 2회차 보러 가려고 해요 +0+

1
2016-12-09 08:29:49

 ?...

1
2016-12-09 08:56:12

전 이 영화 매우 좋았는데, 이런 글도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2016-12-09 09:07:18

와. 추천합니다!!!

2016-12-09 09:12:37

잘 읽었습니다. 추천합니다.

1
2016-12-09 09:13:25

하.. 뭔지 모를 아쉬움 때문에 답답했는데,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7
2016-12-09 09:20:10

잘 봤습니다. 다만 자본주의가 비판받아야만 하고 가진자가 덜 가진자의 피를 빨아 먹는건지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항상 성공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지만 그들 대부분도 오랜 준비끝에 행운이라는 요소가 맞아떨어져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미아도 결국 세바스찬의 조언대로 1인 연극을 선보임으로써 그동안의 대책없는 희망에서 현실적인 타협점은 무언지 생각해보게 된 계기라고 하면 시스템에 채택되기로 노선을 바꿨다고 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꿈을 , 캐릭터를 바꿈으로서 그동안의 노력이 운을 만나 결실을 맺은건지.. 사실 오디션에서도 그동안의 같은 모습만
보였다면 또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2
Updated at 2016-12-09 09:48:58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자체가 사실 사실성하고는 거리가 멀죠 중요 장면과 대사를 노래로 처리해버리는 건 현실적이지가 않으니까요 오히려 주인공들이 자기의 꿈대로 성공을 했다면 더 판타지에 불과한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아예 둘 다 완전히 실패하게 하고 싶었다면 그걸 굳이 뮤지컬을 선택해서 보여줬을지 의문이구요

이 영화의 결말은 오히려 차젤레가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꿈대로 살기는 정말 쉽지 않다는 걸요

기본적으로 라라랜드는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영화라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뮤지컬 영화를 찍고 싶었던 감독이 맘먹고 찍은 장르영화죠 고전에 대한 오마주도 상당하구요 사실 뮤지컬 영화가 아니었다면 스토리는 진부하고 뻔하죠

2016-12-09 14:14:10

저도 여기 공감합니다
이미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시점에서 여기서 지적하는 문제들을 장르 특성상 내포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9
Updated at 2016-12-09 10:05:0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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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
Updated at 2016-12-09 10:23:20

윤리적 성취라고 할 정도로 문제가 있던 영화였나요.

자본주의 계급 얘기는 윤리로 들이밀 지적 사항도 아닌데.

뭐, 걸작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윤리적 성취라고 하니까 뭐가 있었지 하는 의문이 들긴 하네요.

2016-12-09 10:28:53

엠마스톤 베스트

18
Updated at 2016-12-09 10:37:44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이 글에 썩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영화가 아예 현실을 외면했는가 하면, 그것도 의문입니다. 미아는 여차저차 해서 할리웃 안으로 들어선 뒤 거기서 할 일이 없으니 카페 알바를 할 뿐 애초부터 빈곤한 가정 출생처럼 그려진 바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녀에게 부잣집 남자친구까지 있다는 것도 영화는 굳이 숨기지 않아요. 미아가 굳이 프리우스를 타는 걸 보여준 건 어쩌면 미아와 세바스찬의 차이를 더욱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리고이브닝 파티 이야길 하셨는데 이브닝 파티는 인맥 쌓고 할리웃 사람들에게 눈도장 찍기 위해서 거의 반억지로  가는것으로 묘사되죠.) 현실에 미아 같은 사람이 없나요? 적지 않죠. 영화는 미아의 정반대 상으로 세바스찬을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세바스찬의 경우 영화 초장부터 'PAST DUE'가 대문짝만하게 쓰인 고지서가 등장하고, 가족의 골칫거리이며, 간신히 잡은 직장에서도 잘리기 일쑤에, 알바를 위해 맘에 들지도 않는 음악을 연주하고 보컬에게 홀대당하기도 합니다. 키이스와의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나름 좋은 음악 학교를 나온 것 같은데도 말이죠. 심지어 키이스의 밴드에 들어가는 것도 경제적 문제로 미아(와 그녀의 가족)의 눈치를 보다가 내린 결정이죠. 음, 차라리 둘이 결말에서 이룬 성공까지의 고행이 너무 덜 나와서 쉽게 처리된 게 아니냐는 비판이라면 그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역시 장르적 성격에 썩 적합하지 않으니 어느 정도 용인 가능한 선이라고 봅니다. ("자신의 재즈 클럽을 열었어도 연주자로 성공했다기보다는 경영자로 성공한 것으로 보이므로 꿈은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셨는데, 애초에 세바스찬은 연주자로 성공하길 바란 바가 없었습니다. 재즈 역사의 의미 있는 클럽을 되찾고 거기서 재즈 연주자들이 타협 없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는 장을 보존하는 것 자체가 목표였죠. 그런 의미에서 셉은 자신의 꿈을 본질 그대로 이뤘습니다.) 
또한 모든 영화가 자본주의의 병폐를 이야기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현실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 영화의 역할이 될 수도 있지요. 한 쪽에 <인사이드 르윈>이 있다면 다른 한 쪽에 <라 라 랜드>가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게다가 <라 라 랜드>가 대놓고 오마주를 바치는 장르가 경제적 공황, 전쟁 등 현실의 문제에 지친 관객들이 도피처로 택했던 3, 40년대의 할리웃 뮤지컬, 전쟁의 상흔을 최대한 빨리 극복하고자 했던 5, 60년대 할리웃, 프랑스 뮤지컬 장르란 걸 생각해 보면 <인사이드 르윈>의 노선을 타지 못했다고 타박하는 것이 조금은 무리라고 느껴집니다. 이걸 '윤리의 문제'라고 지칭할 수 있는지도 문제이고요(제가 알기로 평론가들이 으레 어떤 영화에 '카메라의 윤리'를 말하는 지점은 조금 다른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글 도입부에 "단지 장르영화의 미덕을 지켰다면 걸작에 의문부호가 붙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신 만큼, 이 영화가 추구하는 장르영화의 미덕이 <인사이드 르윈>과는 다른 위치에 놓여 있으므로 더욱 부당한 비판이라 생각합니다. 똑같이 음악 영화의 카테고리 안에 묶이더라도 애초에 <인사이드 르윈>은 3~60년대 뮤지컬 장르와는 애초에 궤를 달리 하니까요. 
개인적으로 <비긴 어게인>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건 영화가 주류를 까는 포지션을 취하면서도 정작 서사를 꾸려가는 방식이나 연출 및 음악의 지향점이 정확하게 주류 안에 포섭되어 버리는 모순적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라 라 랜드>가 <비긴 어게인>을 옮겨 왔다 할 정도로 모순적인 부분이 있었는가 하면, 개인적으론 잘 모르겠네요.
물론 이 영화에 대고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부족하다고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이 영화가 추구하는 장르적 관습 자체가 할리웃이 기존 질서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요. 대부분의 장르 영화에 가능한 비판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나치 시대의 선전 영화에까지 비교해 가며 '윤리'를 문제삼는다 하면 조금 과한 비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p.s. "자본주의 사회의 비극 중 하나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은 기존 질서에 선택받아야 살 수 있다고 믿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다들 취직, 공모전, 오디션에서 선택받으려 하지, 서태지같은 자생적 인물은 어째서인지 등장하지 않는다."  라고 하셨는데, 서태지가 이식해 온 장르들은 이미 더 큰 자본판인 미국에서 뒤늦게 가져온 것들이었습니다. 단지 우리나라 안에서만 생소한 것들이었죠. 더 큰 시장에서 흥한 아이템들을 시장 개방이 덜 된 곳으로 가져와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서태지야말로 자본주의를 더 잘 이해하고 그에 걸맞는 성공 방식을 획득한 인물이라 보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서태지의 실력을 폄하할 의도는 없습니다만.)

2016-12-09 13:06:57

저도 이 의견에 공감합니다.

2
2016-12-09 10:33:05

뮤지컬 장르가 댄스 인 더 다크 하기 힘들죠

4
Updated at 2016-12-09 11:42:56

그러니 제목이 <라라랜드>겠죠. '꿈의 나라', '비현실적인 세계'를 뜻하는 LA의 별명입니다. 전체 내러티브와 전혀 상관 없는 화려한 오프닝 시퀀스는 "지금부터 여러분은 꿈과 환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라는 선언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이 영화는 꿈과 환상입니다. 현실은 절대 이렇지 않으니 주의하세요."라는 경고문이죠. 그런 면에서 <라라랜드>의 비현실성이 작품의 가치를 깎아내린다는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좋습니다. '라라랜드'라는 황홀경의 이면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아마 저는 너무 쉽게 감동받고 싶었나 봅니다. 미아와 세바스찬이 충분히 노오오오력 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은 훨씬 가혹하고, 그들에게는 운도 따랐다는 사실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고, 달달한 러브스토리에 인생의 모든 회환을 얹혀보내려 했지요. 

 

눈을 감고 참선하는 와중에 달달한 잡생각에 빠지려는 순간 등짝위로 떨어지는 죽비같은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2016-12-09 11:36:13

예 저한텐 걸작.

2
2016-12-09 11:51:23

우선 위플래시에 대해서 언급하신 거에 저는 사실 다른 의견인데,

'범재가 천재의 경지로 오르는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애초에 주인공은 천재 혹은 천재라 불리우는 괴물이었고 두 괴물이 만났을 때 충돌하며 생기는 에너지에 대한 과정이 영화의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결코 스승이 범재를 키워내는 과정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
Updated at 2016-12-09 12:26:32

모든 이야기에는 어울리는 양식이라는 게 있습니다. 예술에서 주제와 양식이 어우러질 때 윤리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2016-12-10 02:28:53 (222.*.*.241)

매우 동의합니다. 

11
2016-12-09 12:28:05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비꼬고 공격해야만 걸작이 될 수 있다는 편견도 이제는 좀 올드한 오피니언이죠.

애초에 영화의 초점이 그쪽에 맞춰져 있지도 않았는걸요.

 

"메신져스의 세션맨으로 사는 것이 철든 거라고 항변하는 속물이 된 세바스찬" 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인생 아닌가 싶네요. 

결국 세바스찬이 클럽을 열 돈을 벌어 꿈을 이루게 된 것도, 좋으나 싫으나 메신져스 덕분이었으니 일각에서는 꿈을 이루기 위한 초석이라고 볼 수도 있는거고, 충분히 철든 거라고 말할 수 있겠죠.

 

글쓴이의 순수한 입장 얼마든지 이해하고 환영합니다만, 모든 걸작 음악영화가 <인사이드 르윈> 같다면 음악영화는 죽어 나갈겁니다.

저 역시 <인사이드 르윈>을 <라라랜드> 보다 우위에 두고 아끼지만, 두고두고 다시 볼 작품은 후자일 것 같습니다.

예술작품이 전하는 삶의 보편적 진실,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영화만이 뽐낼수 있는 마법같은 거짓말도 때로는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라라랜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대한 몽타쥬와 같이 아름답도록 완벽하게 만들어진 거짓말이라면 영화를 걸작에 반열에 올려도 어색하지 않을거라는 확신을 주네요.

1
Updated at 2016-12-09 13:34:29

전 금주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합니다. 그렇지만 아래 댓글 의견들에서도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더군요.

어떤 영화가 뛰어난지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 가치기준에 따라 다 다르기 마련이니까요.

저같은 경우에는 걸작의 기준이 현실에 대입해봤을때 맞아 떨어지는 지수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런 기준으로 봤을때 라라랜드는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에 비해서 떨어지는것 같습니다.

위플래쉬에서는 경쟁이 극도로 요구되는 사회서의 생존방식을 리얼하게 보여준 반면에 라라랜드는 자본주의 기득권이 얘기하는 노오력하면 성공한다의 요지아래 각자 꿈을 이뤄내는 (사랑과 별개로) 결말로 가기에는 그들의 노력이 맛깔난 거짓말 (인스타그램 비유가 정말 적절하다고 느낍니다) 의 수준밖에 묘사가 안됐습니다.

라라랜드를 장르영화적인 관점으로 봤을때, 요구하는 요소들을 최상의 경지로 만족시켜주는 작품입니다.

그렇지만 장르영화틀을 넘어 시대적 클래식으로 자리잡는 걸작으로 평가하기에는 라라랜드만의 독보적 오리지널티가 부족한것 같습니다. 뮤지컬 장르라는 제약때문에 발목이 묶인것은 이해됩니다만, 스토리가 혁명적으로 보이는 요소도 없었고, 메세지가 듣도보도 못한 뉴타입인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위플래쉬는 뉴타입으로 느껴질만큼 신선했습니다) 결말도 익숙한 정도로 끝낸것도 이 영화가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로 기억되기에는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8~9점대의 높은 점수를 줬고 보는내내 넋이 빠져서 감상했는데 이번 아카데미 작품상에서는 아마 라라랜드 보다는 문라이트가 탈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지향하는것을 따라가면서도 지금보다 훨씬 더 현실밀착적인 결말과 스토리를 보여줄 여지가 느껴져서 더더욱이나 아쉬움이 큽니다. 현실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 영화의 역할인데 이왕이면 맛깔난 거짓말에서 그치지 말고 맛깔난데 어쩌면 현실이 될수도 있는 의견까지 스토리가 나아갔다면 영화가 전작 위플레쉬를 뛰어넘은 작품이 될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모든 고전들은 시대를 넘어 현재까지 영향을 끼쳐서 고전으로 살아남았으니까요. 이 영화가 황홀경의 경험을 시켜주는 아주  맛있는 상품이지만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건강식같은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 잊혀지고 있는 옛가치들을 현시대의 요소들로 완벽하게 부활시킨 작품이라는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정말 좋은 영화지만 시대를 대변하는 걸작으로 남을지는 의문이 드는 영화였내요.

 

Updated at 2016-12-09 14:16:03

 예전 뮤지컬 영화처럼 화려하고 노래좋고 사랑타령하는 단순한 영화는 아니라고 봤습니다

형식적인 부분에서 예전의 미학으로 표현한것 뿐이지, 저변에 깔린 메세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될수 있는 다채로운 영화죠 (위플래쉬보다 더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내용이 완전 달라지는 영화입니다,  아름다운 미장센과 음악만 떼어놔도 발군이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위플래쉬와 더불어 일과 사랑에 대한 감독의 냉소적 태도에 대한 영화라고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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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9 15:33:38

걸작이라고 환호하는 평도, 그 반대에 이런 평도 <라라랜드>에게는 약간 버겁다고 봅니다. 별 생각없이 장르에 충실한 영화니까요.
이런 평은 이를테면, 김연아 선수 경기를 보러가서 '에이 김연아가 슛을 안하네, 별로네'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Updated at 2016-12-09 20:47:46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라라랜드는 그냥 옛날 뮤지컬 영화에 대한 감독의 장르적인 애정이 드러난 영화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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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6-12-09 18: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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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9 23:55:41

공감하고 추천합니다

2016-12-12 14:23:27

상대적으로 프렌시스 하와 비교를 하면 괜찮을까요?

다른 시각적인 접근에 의한 평도 나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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