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라라랜드: 이 영화는 과연 걸작일까 (스포)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 <인사이드 르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블로그에 쓴 글이라 반말체임을 양해바랍니다.
1. 윤리적 성취가 배제된 걸작도 걸작인가
좋은 예술가들은 윤리의 측면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현재 시대의 질서를 불편하게 만든다. 현재 시대의 질서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긍정하는 작품은 시대와 역사를 정체시킨다. 이런 맥락에서는 나치 시대의 선전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행복을 찾아서>같은 영화는 감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불편하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라라랜드>의 기술적, 장르적 성취는 분명 걸작이다. 무용과 음악, 미술, 촬영의 아름다움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려 이룬 성취는 뮤지컬 영화의 역사를 한 단계 진전시켰다. 단지 장르영화의 미덕을 지켰다면 걸작에 의문부호가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라라랜드>가 채택한 스타일과 서사의 윤리적 문제가 과연 성취인지 질문해보자면 걸작이란 결론에 물음표가 달린다.
다미엔 차젤의 전작 <위플래쉬>가 기술적 완성도와 별개로 우리를 불편하게 했던 윤리적 지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범재가 천재의 경지로 오르는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정치적 올바름과 거리가 걸었고 우리의 환상을 거역했고 배신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진실임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은폐하던 환상을 횡단하여 불편하고도 보편적인 삶의 진실을 대중에게 선사했다. 진실이 중요하다. 예술작품이 전하는 삶의 보편적 진실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우리의 뇌리에 지혜로 남아 우리의 삶을 확장시킨다.
2. 할리우드가 자본주의에 부역하는 방식
이런 측면에서 그의 신작 <라라랜드>는 전작에 비해 기술적 성취는 한층 도약했지만, 윤리적 성취는 한참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의 질서인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하고, 자본주의의 그림자와 삶의 진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독립적인 예술가에서 할리우드에 취직된 감독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할리우드가 품고 있는 예술가들 중 누군가는 자본주의에 부역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본주의를 공격하기도 한다. <라라랜드>는 명백히 전자에 속한다. 영악한 이 영화는 할리우드 음악영화사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패착은 반복하지 않았다.
뉴욕 인디뮤지션의 잿빛 삶을 키치하게 포장해낸 <비긴 어게인 (2014)>을 오색찬란한 서부 석양의 테마파크(~랜드)으로 옮기면서, 뉴욕 인디 포크뮤지션의 처절한 생존기를 날 것 그대로 그려낸 <인사이드 르윈 (2013)>이 대중들에게 선사한 불편함은 반복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 하다. 도시, 음악, 청춘남녀, 가난, 성공이란 키워드가 <비긴 어게인>, <인사이드 르윈>, <라라랜드>를 관통한다. 2013년과 2014년, 2016년의 이 영화들은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를까.
2-1. 인스타그램 같은 음악영화
대도시에서 음악하는 청춘들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서 <라라랜드>는 <인사이드 르윈>을 배제하고 <비긴 어게인>을 답습한다. 마치 인스타그램같은 음악영화라고 할 수 있다.
<비긴 어게인>의 여주인공 '그레타'는 뉴욕의 엄청난 집세와 고물가의 생활에 그리 고통받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는다. 게다가 성적으로 안전한 남자'친구'들이 조건없이 자신을 도와준다.
<라라랜드>의 '미아'는 파트타임 카페직원이면서 자가용(!) 프리우스(3만불)를 몰고, 이브닝 파티를 밥먹듯 다닌다.
<인사이드 르윈>의 무명 뮤지션 '르윈'은 반대다. 한겨울에 코트도 없이 기타와 단벌로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노숙자처럼 살아간다. 한국에서도 지방 출신이 홍대로 상경해 전업 뮤지션으로 산다면 룸메이트 없이 혼자 홍대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인사이드 르윈>은 대도시에서 활동하는 무명 인디뮤지션의 삶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대중에게 알려준다. 도시는 예술가에게 너무나 비싸고 비참한 세계다. 죽음이 주변에 도사리고, 예술계는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 난무하며, 연인에겐 낙태 문제가 현실이다. 도시에 대한, 뮤지션에 대한 욕망을 불러 일으키기는커녕 소멸시키는 영화다. 드라마틱한 인생의 반전도 없고, 춥고 암울하고 지루한 삶이 엔딩까지 지속된다.
<라라랜드>의 주인공들에게는 <비긴어게인>처럼 정신적 고통을 겪을지언정, 경제적 고통은 절대 엄습하지 않는다. 할리우드는 고통스런 현실을 철저히 은폐한다. 여기서 달콤하고도 위선적인 환상이 한 번 창조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도시 청춘들의 삶은 오색찬란한 인스타그램(리뉴얼된 새 앱 아이콘 컬러와 라라랜드의 색감이 유사하다)과 대개 일치하지 않는다. 새로 뽑은 외제차가 리스/할부라거나, 고급레스토랑 인증샷은 초대권 혹은 쿠폰이라거나, 예쁘게 지내는 듯한 커플/애완동물은 사실 문제투성이라거나, 해외여행은 저축을 탈탈 털거나 카드빚으로 갔다고 자백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화려하게 필터처리가 된 프레임을 통해 프레임 밖의 우중충하고 누추한 삶은 은폐한다. 서로가 진짜가 아닌 거짓된 삶을 자랑하고 그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2-2. '주인의 꿈'을 선물하는 영화
자본주의는 극소수 자본가 외에 모든 이들을 자본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주인은 노동하지 않는다. 노동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노동계급의 궁극적 지향점은 불로소득의 삶인데 모두에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주인의 꿈을 먹고 살아간다. 대중들은 자신들을 노예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롭고 가능성이 무한한 주인이라고 교육을 받고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주인들의 삶을 미디어에 진열해놓고 대중이 욕망하고 꿈꾸길 유도한다. '모두가 뭐든 될 수 있어! Everyone, Can be everything! (주토피아)'라고 최면을 걸지만, 곧 마술은 풀리고 만다. 그러나 돈이 있으면 아주 잠시 주인이 될 수 있다. 백화점에서, 도로 위에서, 레스토랑에서도 VIP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뒷감당이 따르는 값비싼 손실과 대가를 치뤄야 한다.
대중은 자신의 비루한 삶을, 진실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무언가'가 비루한 삶을 은폐해줘야 한다. '무언가'는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먹고 자란 거대한 욕망의 환상이다. 강력한 정치집단에, 명문스포츠팀에, 영화와 게임 속 슈퍼히어로와 자신을 동일시하면 비루한 나는 은폐될 수 있다.
주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삶이 역사 속에 흔적도, 의미도 없이 사라질 것을 직감하고 있다. 그래서 타자로부터 내 삶의 의미가 있음을 응답받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SNS에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음'을 PR하듯이 흔적으로 남긴다. 평범한 일상도 특별함으로 환원시킨다. 불편한 결과(진실)는 유예되어야 하고, 그 과정의 실패와 좌절은 다 사실상 성공이라고 환원시켜야 한다. 색채 없는 삶에서 색채 가득한 의미를 갈구하는 대중들에게 <비긴 어게인>은 (거짓된) 색채를 선물했고, <라라랜드>는 거기에 더해 색감을 극대치로 올린다. LA에서의 비루한 삶과 사랑은 사기적인 시각예술로 재탄생한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꿈이 좌절되고, 사랑이 비틀대는 희미한 청춘들에게 <라라랜드>의 경악스럽게 오버된 색채는 할리우드가 현실을 은폐하는 위선적이고 달콤한 응답이다.
<미생>이 직장인들에게, <국제시장>이 산업화 세대에게 색채를 입혀줬듯, <라라랜드>는 냉혹한 자본주의 도시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LA랜드라는 꿈과 환상의 세계의 주민임을, 주인임을 인증해준다. 이 도시에서의 가난도, 실패도, 트러블도 영화 속 그들처럼 겪는 과정일 뿐, 결과는 아닐거라며 위안한다. 영화가 끝나면 LA의 젊은 커플들과 관광객들은 영화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실제 영화 촬영지인 석양의 뒷산과 한밤의 천문대를 방문하여 '우리도 그들처럼',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꿈을 현실에서 이룰 것이다.
2-3. 기존 질서에 선택받길 원하는 주인공
<라라랜드>의 주인공 '미아'는 명백히 오늘날 청년들의 모습이다. 기존 질서에 선택받으려 노력하고, 선택받는 것을 통해 인생을 단번에 역전하고 싶어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비극 중 하나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은 기존 질서에 선택받아야 살 수 있다고 믿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다들 취직, 공모전, 오디션에서 선택받으려 하지, 서태지같은 자생적 인물은 어째서인지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자본주의가 정한 질서를 이탈할 경우, 경제적-사회적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는 공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라라랜드>의 두 주인공은 선택받길 기다리는 질서에서 이탈해 스스로 자립을 했을 때 작은 해답을 얻는다. 우리가 주인이 되려면 기존 질서를 나와 자신의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가 품은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진실의 지점일 것이다. 이대로 끝났다면 아마 이 시대의 질서를 거스르는 윤리적인 작품이 되었겠지만, 결국 엔딩에서 '미아'는 '기존 질서에 선택받아 성공한 인생'으로 귀결되고, '세바스찬'은 기존 질서를 이탈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했기에 '미아'를 잃는다. 자신의 재즈 클럽을 열었어도 연주자로 성공했다기보다는 경영자로 성공한 것으로 보이므로 꿈은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위선적인 엔딩은 대중의 무의식에 어떻게든 각인이 될 것이다. 그래. 우리는 오디션과 밴드 세션맨에서만 해답을 얻을 수 있는거야-라고. 전작 <위플래시>에서 주인공 앤드류는 스승 플래처라는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며 천재의 경지에 결국 도달했다는 점에서 <라라랜드>와 큰 차이를 보인다.
3. 걸작임을 확신하면서 걸작임을 질문해보는 것에 대하여
<라라랜드>를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술적 성취만으로는 걸작이다. 그러나 윤리적으로는 시대에 정체되어 있고, 러브스토리는 70년 전의 <카사블랑카>를 반복하고 있다. <위플래쉬>는 스승에게 'Fuck you'를 날리는 당돌한 천재소년의 작품으로 보이고, <라라랜드>는 메신져스의 세션맨으로 사는 것이 철든 거라고 항변하는 속물이 된 세바스찬을 연상시킨다.
미래는 현재의 붕괴를 전제로 한다. 좋은 예술가들은 현재가 붕괴될 수 있는 균열점을 정확하게 현미경으로 포착하여 대중에게 매혹적인 필터를 끼운 볼록렌즈로 제시한다. 현재의 균열은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진보적인 작품은 불편하고, 그 불편함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기에 달콤하다. 다미엔 차젤의 신작 <라라랜드>에서는 그런 달콤한 불편함이 사라졌다. 대신 다른 불편한 달콤함이 별점 하나를 가득 채운다.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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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팩트 폭력으로 느껴질 정도로
날카롭고도 날카로운 글 너무나 잘 보았습니다.
걸작이지만, 불편한 달콤함을 남기는 인스타그램의 정점 같은 영화..
그래도 너무나도 달콤해서 2회차 보러 가려고 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