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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녹터널 애니멀스: 톰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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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2 03:45:20


 

   단도직입적으로 이 작품은 복수에 관한 영화이다. 자신의 가족을 파멸시킨 범인이게 응징을 가하는 내용을 담은 스릴러이다. 그런데 그 복수 방법이 굉장히 독특하다. 소설 속 복수극을 통해 전 남편 에드워드가 그것을 읽는 현실 속 인물 즉 전 부인 수잔에게 심리적 복수를 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물리적 복수와는 그 근본부터가 틀리다. 좋게 말하면 고상하고 지능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소심하고 나약한 지식인 남자의 한심한 헤살로 볼 수 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에드워드의 이 소심하고 나약한 복수가 의외로 수잔의 심리적 약점을 정확하게 꼬집으며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죄책감에 빠지게 만드는 신묘함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수잔은 에드워드에게 무슨 잘못을 했고 에드워드는 또 왜 이런 식으로 구차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를 한 것일까

   일단 이 작품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잘나가는 미술관 관장이자 성공한 사업가 남편을 둔 전형적인 부르주아 여인인 수잔은 현재 중년의 위기에 봉착한다. 한 때 전도유망했던 화가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선택한 남편이 지금 현재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꿈과 전 남편 에드워드를 배신하면서까지 얻은 부와 명예를 포기할 수 없는 수잔은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한 체 하루하루 공허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수잔에게 전 남편 에드워드가 자신의 첫 번째 소설을 그녀에게 보낸 다음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난데없는 전 남편의 에드워드의 부탁에 수잔은 당혹스러워 하지만 이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 하고 그의 소설을 읽는다. 하지만 수잔은 가족을 잃고 파멸한 소설 속 토니의 이야기가 바로 자신 때문에 가족을 잃은 전 남편 에드워드의 속내임을 알고 이내 깊은 죄책감에 빠져든다.

   본격적으로 작품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녹터널 애니멀스다. 하지만 이 작품의 원작 제목은 토니와 수잔이다. 상당히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제목이다. 영화가 왜 원제인 토니와 수잔 대신 녹터널 애니멀스 즉 야행성 동물들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다. 뭐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원제가 토니와 수잔인 것이냐 것이다. 에드워드와 수잔이 아니라 말이다. 즉 실제 인물인 수잔의 짝으로 실제 인물인 에드워드를 내세우지 않고 가공의 인물인 토니를 내세웠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글의 후반부에 드러날 것이다.

   일단 수잔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보자. 그녀는 한 때 속물적이고 탐욕스러운 부르주아 부모를 증오하며 나는 절대 그런 저질 부모를 닮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강화시키기라고 하듯이 가난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에드워드를 남편으로 맞이하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수잔의 신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어머니는 결국 세상의 모든 딸들은 엄마를 닮는다고 일갈하면 수잔을 나무란다. 즉 수잔 너도 지금은 큰 소리 치지만 머지않아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바로 꼬리 내리고 자신과 같은 속물적인 부르주의의 길을 걸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어머니는 이 결혼은 최종적으로 실패해 남편 에드워드에게 상처만 입힐 것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권유한다. 허나 수잔은 그런 어머니의 권유를 물리치고 에드워드와 결혼한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예언이 옳았다는 듯이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그것을 견디지 못 한 수잔은 자신이 그렇게 혐오해 마지않았던 속물적인 어머니 즉 부르주아의 삶을 선택한다. 그 때 바람을 핀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고 그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수잔은 에드워드의 아기를 지워버린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수잔은 자신의 초심을 너무 쉽게 버릴 정도로 나약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전 남편 에드워드도 만만치 않게 나약한 인물이다. 아내가 버젓이 바람을 피우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기를 지웠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거기에 대해 별다른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그냥 물러난다. 정말이지 나약함을 넘어 무기력하기까지 한 못난 인물이다.

   만약 여기서 수잔이 좀 더 자신을 믿고 남편 에드워드를 믿고 기다렸다면 혹은 에드워드가 사랑의 순수함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현실에서 이룩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면 둘은 이렇게 허무하게 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현실의 벽을 핑계로 자신의 신념을 너무 쉽게 버렸다. 결국 이 둘을 둘러싼 문제의 근원은 그들 자신의 나약함에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전 남편 에드워드가 전 부인 수잔에게 자신의 첫 번째 소설인 녹터널 애니멀스를 보내면서 작품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영화 속 소설 이야기인 녹터널 애니멀스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나약하고 소심한 주인공 토니는 시골 불량배에게 아내와 딸이 강간, 살인되는 끔찍한 일을 겪는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토니가 너무도 무기력하게 당했다는 것이다. 토니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보낸다. 그러면서 이 사단이 일어날 동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자신의 나약함을 저주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사건을 수사하던 보안관이 그에게 범인을 직접 처단하자는 제인을 한다.

   소설 내용만 보면 흔하디흔한 스릴러 소설이다. 문제는 이 소설 속 내용에 수잔이 아주 깊이 공명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소설 속 내용이 수잔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그녀의 죄의식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무엇이 그런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소설 속 인물과 현실 속 인물을 대비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수잔이 에드워드의 소설에 강한 감정적 동일시를 한 이유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소설 속 주인공인 토니는 말하나 마나 저자이자 수잔의 전 남편인 에드워드 본인이다. 그리고 이 둘의 공통점은 결정적일 때 자신의 나약함으로 말미암아 가족을 송두리 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이어서 나약한 심성 때문에 주저하는 토니에게 직접 범인을 처벌하자는 보안관은 차마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못 하는 소심한 토니, 에드워드의 또 다른 자아이다. 그리고 토니의 아내와 딸은 명백하게 수잔과 낙태로 사라진 그들 부부의 아이이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것이 없다. 문제는 그렇다면 토니와 딸을 죽인 범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이게 조금 복잡하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범인은 에드워드에게서 가족을 빼앗은 수잔의 현재 남편인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에드워드가 이 소설을 통한 영향력을 온전히 전 부인인 수잔에게만 적용한다는 것이다. 즉 이 소설은 오직 수잔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개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에드워드가 진정으로 복수하고 싶은 상대는 그녀의 현 남편이 아니라 지금 이 소설을 읽는 수잔이라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수잔은 자신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잔혹한 방식으로 에드워드를 배신했다. 그렇게 본다면 토니의 아내와 딸을 죽인 범인도 역시 수잔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더욱이 수잔이 스스로의 의지로 아이를 낙태한 점과 소설 속 범인이 딸을 강간 살해하는 점이 묘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역시나 토니가 죽여야 하는 복수 상대는 수잔이다. 그러니까 토니, 에드워드는 나를 극한의 고통으로 몰고 간 악당은 다른 누구도 아닌 수잔 당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토니의 아내와 딸은 에드워드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수잔과 낙태당한 아기이고 그런 그들을 죽인 범인은 현실의 행복을 위해 에드워드의 아기를 낙태하고 배신한 변절자 수잔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에드워드의 의도는 명확하다.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가상의 소설을 통해 수잔이 자신에게 저지른 죄악을 섬세하게 재배치해서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죄책감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련한 피해자인 에드워드의 자리에 토니를, 에드워드를 배신하기 이전의 순수했던 수잔의 자리에 토니의 아내와 딸을, 이후 안정적인 삶을 위해 에드워드를 배신한 변절자 악녀 수잔의 자리에 토니의 아내와 딸을 강간 살인한 범인을 집어넣은 것이다. 이렇게 수잔 면전에 시원하게 욕 한 번 하지 못 한 나약하고 소심한 에드워드는 고심 끝에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적의 복수를 찾은 것이다. 더욱이 이 복수의 도구로서 소설은 그 자체로서도 수잔에게 심한 압박을 가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수잔도 한때 화가를 꿈꾸는 예술인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부르주아 삶을 위해 화가라는 예술 창작자의 꿈을 포기한다. 그에 비해 에드워드는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만의 예술 창작품인 소설을 완성한다. 수잔의 열등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치밀한 방식으로 복수극을 연출한 에드워드는 그것에 만족했을까.

   이 지점에서 위에 언급한 원제인 토니와 수잔에 대해서 말해야 할 거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토니와 수잔은 조금 이상한 제목이다. 토니는 소설 속 가상 인물이고 수잔은 현실 속 실제 인물이다. 그러니까 가상 인물과 실제 인물을 한 쌍으로 묶은 것이다. 여기서 일반적인 상식을 들이밀면 에드워드와 수잔 즉 현실 속 실제 인물들끼리 짝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작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 이 작품의 진짜 속내가 내포되어 있다.

   이미 다 말했지만 이 모든 사단의 근원은 에드워드와 수잔 둘 모두의 나약함에 기인한 것이다. 현실의 어려움과 제대로 대면도 하지 않고 회피한 수치스러운 나약함 말이다. 그래서일까 에드워드는 자신을 배신한 수잔에게 복수를 하고 싶지만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다. 아니 못 한다. 직접 대면하기에는 자신의 나약함에 의한 수치가 너무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자신을 대신해서 수잔에게 복수할 중간 대리자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수잔의 치부를 담은 소설이다. 어떻게 보면 그냥 수잔 면전에 욕 한 번 시원하게 하면 그만일 수도 있는 사안에 대해서 에드워드는 끝끝내 직접 대면이 아닌 간접 대면을 통해 복수를 한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알 수 있다. 즉 토니와 수잔이라는 원제의 의미는 에드워드와 수잔이라는 현실 속 직접 대면을 통한 복수를 하기에는 그가 너무도 나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토니라는 가상의 인물을 중간 대리자로 내세워 수잔에게 간접 복수를 한 것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논란의 핵심인 결말에 대해서 말해보자. 소설 속 주인공인 토니의 상황에 깊이 공명한 수잔은 자신의 지난날을 되짚으며 에드워드에 대한 죄책감에 힘들어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에드워드를 통해 지금의 위선적인 부르주아 생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수잔은 일말의 서광을 꿈꾸며 식당에서 에드워드를 기다린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끝끝내 식당에 나타나지 않는다.

   액면 그대로 보면 참으로 복수로서는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다. 상대방에게 한껏 희망이라는 꿈을 불어넣어준 다음 등 뒤에서 바늘로 찔러 터뜨린 것이다. 전형적인 어린아이 식 복수다. 하지만 이 효과는 아주 크다. 왜냐하면 수잔은 에드워드를 만나지 못 함으로서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그녀 자신의 삶에서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출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수잔에게 있어 에드워드와의 만남은 단순한 속죄가 아닌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 걸까.

   여기서 다시 한 번 에드워드의 소설을 읽는 수잔의 모습을 보자. 이미 위에서 설명했지만 소설 속 악당은 변절한 배신자 수잔이다. 하지만 수잔은 소설 속 토니와 그의 아내와 딸에게 감정이입한다. 토니와 딸의 시체로 등장했을 때 수잔은 즉각 똑같은 모습으로 잠자고 있는 딸에게 전화한다. 또한 아내와 딸을 잃고 슬퍼하는 토니의 샤워 모습과 수잔 자신의 목욕 모습이 똑같은 구도로 공명한다. 이렇게 수잔은 에드워드를 사랑하는 예전 수잔과 에드워드를 배신한 지금의 수잔이라는 명백한 두 모습 중 오직 전자에게서만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즉 수잔은 자신의 나약함에 의한 배신을 애써 외면한 다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순수한 시절의 수잔에게만 집착한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수잔도 소설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으로서만 복수를 할 수 있는 소심하고 나약한 에드워드와 마찬가지로 그녀 자신도 이 모든 사단의 근원인 나약함을 직시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마지막 수잔이 에드워드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을 때 굉장한 혼란을 느끼며 힘들어 한다. 이미 자신은 에드워드 소설을 통해 반성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수잔의 착각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그녀는 희망이라는 출구를 모두 봉쇄당하는 고통을 받는다. 수잔으로서는 에드워드의 소설을 통해 이전의 순수한 수잔으로 돌아와 그와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그 마지막 희망의 끈을 에드워드가 무참하게 자른 것이다. 만약 이것이 에드워드가 모두 다 염두 한 것이라면 그는 가히 심리적 복수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결론은 이거다. 자신의 나약함을 직시하지도, 정면 대결하지도 못 한 소심함에 의한 현실적 타협은 자신의 진짜 삶을 갈아먹어 종국에는 그것을 텅 빈 공허로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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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7-01-12 03:57:43

예고편 보고 볼까말까 싶은 영화였는데, 써주신 내용을 보니 영화가 더 보고싶어졌습니다. 원작 소설도 궁금하고요.
상세한 줄거리를 알게 되면 보기도 전에 김이 샐 수도 있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WR
2017-01-12 15:34:41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2017-01-13 01:02:24

영화보다 리뷰가 더 재미있게 느껴지긴 오랜만인거 같습니다ㅋㅋ 어떤 안경을 끼고 봐야할까 고민만 하다가 영화가 끝나버렸는데 심리적 측면이나 정신분석의 틀로 바라본 해석이 너무 신선하고 공감이 가네요

WR
2017-01-13 04:01:16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_^

2017-01-18 02:11:37

대단히 멋진 해설입니다 bb 전 영화를 다 감상한 후에도 많이 난해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본 글을 읽고나서야 감상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 ㅎ 감사합니다 :)

WR
2017-01-18 04:31:32

좋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_^

2017-09-17 12:44:47

멋진 글입니다. ^^

WR
2017-09-17 15:07:42

좋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_^ 

2017-09-17 15:30:59

영화 끝나고 뭐지 하면서 벙 쪘네요. 뭔가 결말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훌륭한 글입니다!

WR
2017-09-17 15:40:29

원작 소설 토니와 수잔 읽으시면 작품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실 겁니다. ^_^ 

2020-11-19 00:13:38

오늘 우연찮게 넷플릭스로 이제서야 보고 해석이 필요해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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