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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게]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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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1-24 14:48:52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좋았던 10편입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2016)


나에게 올해의 영화는 홍상수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다. 여기서 홍상수는 '안다'라는 말과 '죽음'의 공존을 씨름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다른 사람이 '안다'고 말해 남녀는 싸우고, 여자가 떠나자 남자는 다친다. 떠나간 여자는 '안다'는 이름의 기호를 거부하며 자신을 비우지만 죽음의 시간에 갇힌 남자는 그녀와 함께 걸을 수 없기에 그녀가 지나간 곳의 흔적을 쫓아다닌다. 신기루를 쫓는 듯한 여정 속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좌절하던 남자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죽음의 시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순수'한 영화다. 홍상수의 남자들에게서 수도없이 보고 들은 '앎'의 대사들("내가 널 아는데 ~")을 밀어내고 다시 0으로 돌아가 시작하려는 영수의 자세를 긍정한다. 이 깨달음을 얻은 그는 민정을 당신이라 부르고, 드디어 그녀와 함께 걸으며 열린 문 너머에 위치하게 된다. 이 지점에 끝났다면 완전히 순수했을 영화는 끝에 때묻는다. 잔 후 일어나니 홀로 남아있는 영수의 숏으로 영화는 미궁에 빠지고, 카메라의 위치에서 씬으로 입장하는 '당신'의 모습은 마치 유령같다. 영수는 수박을 먹여주는 그녀에게 의미심장하며 슬퍼보이는 한 마디를 건넨다; "고마워요". 과연 이 모든 것은 영수의 꿈일까?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절망의 흐느낌일까, 아니면 영수가 '당신이 당신인 것'을 인정하고 나와 너의 거리를 긍정하는 꿈을 꾸는 것이기에 희망일까. 그는 죽음을 극복해 유령과 함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죽었기에 함께하는 것일까.



 

〈자객 섭은낭 刺客聶隱娘〉 (2015)


허우 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은 놀라운 걸작이다. 그는 〈자객 섭은낭〉의 프롤로그에서 '나약한' 마음을 지닌 여성 자객을 보여준다. 스승은 한 번의 성공과 한 번의 실패를 기록한 그녀로 하여금 가혹한 임무를 거쳐 그 연민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허우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실패를 바로 예견했으리라 믿고, 그대로 영화는 그녀가 임무를 '거부'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여기서 섭은낭은 자신을 감춘다. 임무를 수행하거나 목욕을 하기 위해 감춘 자신의 육신은 자객으로서의 임무를 할 때만 드러난다. 누구의 육신을 제거할 때만 자신의 육신이 인정받을 수 있는 가혹한 질서에 놓인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연민의 길을 택하며, 이 길을 영화는 힘껏 긍정한다. 섭은낭의 진정한 첫 '거부'가 이뤄진 후 (전계안을 죽이지 않은 순간) 마경소년의 손에 치유받는 순간, 홀로 물에 몸을 담궜던 전반부와 달리 그녀의 육신은 암살 없이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런 뚜렷한 제스처의 반대편에 〈자객 섭은낭〉의 이상한 속성이 있다. 그말인즉슨, 이 영화는 볼수록 더 희미해지고 잡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볼수록 이야기의 줄기는 자취를 감추지만 섭은낭의 육신은 자취를 드러낸다. 인간됨을 통해 육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된 섭은낭은 마지막에 이르러 마경소년이라는 짝을 되찾는 순간 처음으로 미소를 내비친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Sully〉 (2016)


갈수록 뚜렷해지는 허우의 육신과 달리 이스트우드의 육신은 분열한다. 이스트우드의 초기 서부극인 〈평원의 무법자〉와 〈창백한 기수〉 등의 무법자가 알고보니 유령이라는 설정에서 드러나는 육신의 분열은 결국 그에게 영화가 유령과의 숨박꼭질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달리 말하면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장르의 시간성을 자신의 육신에 새기는 것과 (그 육신에 유령성을 부여함으로서) 신화의 증발을 보여주는 것이 동시에 벌어지는 모험인 셈이다. 그런데 〈설리〉는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르다. 설리는 다른 이스트우드의 육신처럼 '확신'(달리는 행동)과 '분열'(플래시백)을 거치는데, 항상 둘은 붙어있다. 마치 자신의 육신이 유령이 되어감을 느낀 것처럼, 플래시백을 거친 설리는 항상 달린다. 이와 같이 플래시백-달리기의 연속인 〈설리〉는 마지막에 '예외'를 맞이한다. 설리가 청문회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영웅이라 인정받은 장면에 등장하는 플래시백은 유일하게 온전한 것이이다 (그래서 플래시백이 끝난 후에도 설리는 달리지 않는다). 이때 플래시백은 앞과 현저히 다른 대구를 보인다. 허드슨강의 기적과 관련된 모든 플래시백은 숏의 연쇄로 볼때 설리의 머리에서 시작되지만, 그의 머리에서만 나올 수 없는 다양한 주체를 등장시켰다. 이와 달리 마지막의 온전한 플래시백은 청문회 자리에 착석한 모든 사람이 소리를 들으며 시작하지만, 오직 기장실 안의 설리와 제프만이 주체로 등장한다. 이런 '예외'적인 플래시백의 출현은 이스트우드로선 괴작이라 칭할 만큼 이상한 불균질한 것인데, 이로서 그는 미국사회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것일까. 결국 〈설리〉의 신화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소리로만 제시된 재현의 악몽의 불안이 소리에 부합한 조종석과 비행기의 이미지로 얻어 치유되는 과정인 마지막 플래시백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이스트우드는 공동체의 불안을 떠 맏은 설리의 육신으로 하여금 분열시켜 유령이 되는 과정을 거치게 한 후, 마지막에 이르러 (처음 자신의 악몽처럼 소리만 들은) 공동체에게 유령의 이미지를 통해 신화를 완성시킨다. 허나 〈설리〉의 '예외'는 이 영화가 등장한 시기와 연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온전한 감동에 그칠 수 없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 The BFG〉 (2016)


 

〈설리〉가 올해의 '불투명'한 영화라면, 스필버그의 〈BFG〉는 내재한 불투명함을 투명하게 만드는 영화다. 고아원에서 시작한 소피는 어느새 궁전을 집으로 삼고 있고, 이상하게 여겨진 '납치'의 뒤엔 끔찍한 비화가 숨겨있었다. 이렇게 구름으로 가득 차 불투명한 〈BFG〉는 꼬마 거인의 투명한 제스처로 소녀의 꿈을 긍정해 빛을 밝힌다. 이때 영화를 관통하는 제스처라 함은, 바로 소피의 안경을 챙기는 것이다. 〈BFG〉에서 소피는 처음 등장할때 안경을 끼지 않고 있다. 그녀가 처음으로 안경을 쓰는 순간은 책을 읽기 위해, 창 밖을 보기 위해였고, 이후 거인과 함께 밖의 창문에서 아이의 꿈을 엿볼 때, 처음으로 꿈이 모인 방에 들어갔을 때, 강으로 뛰어들어 꿈의 나무 세계로 들어가 꿈을 잡을 때 안경을 쓴다. 이를 제외한 상황일 때 (특히나 악몽과도 같은 '식인' 거인들이 등장하는 장면들) 그녀는 안경을 벗어 놓는다. 〈BFG〉의 여러 장면에서 우린 거인이 그녀의 안경을 (식인 거인으로부터) 보호하고, 챙겨주는 순간을 목격한다. 즉, 이 영화에서 (좋은) 영화를 보는 것/꿈을 꾸는 것과 연관될 순간들에 그녀는 항상 안경을 쓴다. 그렇기에 항상 소피의 안경을 조심스레 챙겨주는 이 거인의 투명한 제스처야 말로 좋은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구름을 걷혀주는 〈BFG〉 가장 아름다운 요소다.




〈캐롤 Carol〉 (2015)


불투명한 표면 아래 투명한 제스처의 수사를 담은 올해의 또 다른 영화는 토드 헤인즈의 〈캐롤〉이다. 표면과 내면의 긴박한 숨박꼭질에서 말을 주저하는 인물들은, 주저하지 않는 손짓과 눈빛으로 말의 자리를 대신한다. '남자의 눈'을 철저히 배제하는 〈캐롤〉는 편지에 나온 표현처럼 (기차 트랙 같이) '하나의 원'을 그리는 투명한 운동의 영화다. 영화 내내 유리, 창문 등 여러 표면으로 가려지지는 욕망을 모으는 이 운동이 가시화되는 방식은 시선이다. 서사에서 테레즈와 캐롤이 가까워진 순간이 그녀가 카메라로 캐롤을, 세상을 보기 시작한 순간과 일치함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자신의 렌즈로 그녀를 보기 시작한 순간 시작된 이 원운동은 끝에서 그 아름다운 작용-반작용을 선보인다. 〈캐롤〉의 마지막 숏-역숏을 자세히 보면, 테레즈를 보는 캐롤의 시선과 달리 캐롤을 바라보는 테레즈의 쇼트는 전적인 시점 쇼트이다. 카메라가 자신의 눈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이 작용-반작용은 종착점을 찾는 셈이다. 여기서 토드 헤인즈는 영화의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수 많은 작용 중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찾고, 바라보게 해주는 눈이 되는 것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 싶다.

 


 

〈훌리에타 Julieta〉 (2016)


〈훌리에타〉는 건조한 톤에서 느껴지는 것과 달리 알모도바르의 가장 어두운 영화 중 하나다. 그것이 엘리스 먼로의 문학을 가져왔기 때문일까?라고 하면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 마치 그는 그녀의 소설을 가져왔다고 말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차용했다 느껴질 정도로 원 소설과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고뇌는 한참 뒤로 밀려나 있으며, 신부님과 같은 주요 캐릭터는 아예 배제되어 있다. 되려, 이 영화가 어두운 것은 마드리드가 중심에 놓여서라고 봐야한다. 〈훌리에타〉는 근래 알모도바르 영화 중 눈에 띌 정도로 '마드리드'에 대한 언급이 잦다. 알모도바르는 "프랑코와 그의 시대에 대한 나의 복수는 그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의 80년대 작품들엔 마드리드의 존재감이 매우 작다. 이런 그는 90년대에 들어 〈비밀의 꽃〉과 〈라이브 플레시〉를 통해 프랑코-마드리드의 공간과 역사를 육체에 새긴다. 두 작품을 거친 알모도바르의 마드리드는 변했다. 더 이상 마드리드에서 여성은 연대하지 않으며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딸과 어머니의 화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귀향〉). 이처럼 〈훌리에타〉 또한 젊은 훌리에타가 등장하는 시기(극 중 80년대 후반)에 마드리드의 존재감은 전무하지만, 십여년이 지나 그녀의 딸이 자란 후 마드리드는 지속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어두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영화는 가시화된 죽음과 비가시적인 죽음 보다도 딸이 떠나는 순간에 어두워지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선 딸이 떠나는 순간을 자세히 봐야한다. 딸이 휴가를 위해 집 문을 나가는 순간 드러나는 행위, 즉 정지한 누군가를 뒤로 하고 문 밖으로 나가는 행위는 〈훌리에타〉에서 두 번 더 등장하는데, 모두 남겨진 사람은 가시화된 죽음을 겪는다 (기차에서 만난 이상한 남자와 소안). 문 너머로 걸어간 딸에게 남겨진 훌리에타는 '어머니'로서 죽는 셈이다. 그녀는 12년 뒤 '죄의식'의 전이로 덕분에 다시 딸을 만나리라 꿈꾼다. 알모도바르에게 헤테로 에스파냐는 '어머니'라면 죄의식이 옮기는 잔혹한 연대다.



 

〈내셔널 갤러리 National Gallery〉 (2014)


조금 방향을 틀어, 전혀 다른 작가인 프레더릭 와이즈먼을 보자. 와이즈먼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는 40년을 넘게 수많은 영화를 만들었고, 모두 자신만의 엄격한 규칙을 따라 찍는다. 그는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동의한 피사체만 영화에 포함시키고, 회상/재현 장면을 넣지 않고, 배경 음악을 비롯한 인공적인 소리와 내레이션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카메라가 개입하는 인터뷰 또한 배제하며, 와이즈먼의 영화에선 사람의 이름 혹은 지위를 설명하는 인위적인 자막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는 카메라를 들고 일부가 된 공간의 이미지와 소리만 찍는 사람이다. 이 규칙을 통해 와이즈먼이 해내는 작업을 요약하면 본인이 찍는 시설/제도를 일종의 지식의 장으로 삼고, 그 장이 속한 시간과 공간을 통해 일종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라 할 수 있을 테다. 이때 '감각'은 육체와 육체가 맞닿는 〈권투 도장〉 같은 예도 있지만, 가장 빈번이 등장하는 '감각'은 '보는 것'이다. 이 '보는 것'의 감각은 '지식'의 기능과 현저히 다르다. 앞서 말했다시피 다른 다큐멘터리의 영화엔 항상 등장하는 자막이 왜 와이즈먼의 영화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별도로 인물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와이즈먼의 영화를 보고 나면 관객은 영화에 등장한 수 많은 이름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이런 감각의 모티프는 〈내셔널 갤러리〉의 중심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내셔널 갤러리〉에도 미술관장, 큐레이터, 복원가 등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과연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마치 수많은 초상화에 비춰진 얼굴처럼 우린 여러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된다. 〈내셔널 갤러리〉의 마지막은 응시의 감각이 전이되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시퀀스다. 두 육체가 '역동적'인 발레를 선보이고 어둠으로 퇴장하자 영화는 수많은 초상화'만'을 보여준다. 이 순간 관객의 위치는 바뀌고, 그림이 우릴 보는 것이다.




〈프랑코포니아 Francofonia〉 (2015)


소쿠로프의 〈프랑코포니아〉는 〈내셔널 갤러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박물관을 소환한다. 와이즈먼에게 영화는 눈 앞에 현존하는 것을 촬영해 감각을 깨우는 것이라면, 소쿠로프는 무언가가 소멸하는 과정을 찍는 것이야말로 그것의 윤곽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본다. 그 과정을 찍은 〈프랑코포니아〉는 세 무대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 현대에 놓인 소쿠로프의 방, 영상 통화로 보이는 배-방주, 마지막으로 2차 대전 (및 기이한 시간을 점유하는) 루브르 박물관이다. 이를 시간으로 배치해보자. 가장 앞에 놓일 루브르 박물관 장면엔 항상 마리안느와 나폴레옹의 망령이 등장한다. 원래 루브르 박물관은 여러 왕들이 약탈/수집한 역사의 모음이었고 프랑스 혁명을 거쳐서야 공공의 것이 되었다. 소쿠로프에게 문명의 역사는 폭력과 아름다움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것이며, 그 공간으로 대표된 루브르, 그리고 루브르에 나타나는 프랑스의 역사는 결국 서구(문명)의 역사다. 이 문명을 지키기 위해 비슷한 양상의 두 남자가 협력하는 것이 2차 대전의 시퀀스다. 몰래 레지스탕스를 도운 프랑스 사람과 나치가 공존한 공간이기도 한 루브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 둘이 자리를 떠남으로서 수호해줄 사람이 없어진다. 영화상으로 가장 앞에 놓였고 시간상으로 가장 뒤에 오는 현대의 시퀀스에서 소쿠로프는 문명을 담은 방주의 항해사와 영상 통화한다. 계속해 가라앉을 것처럼 위태로운 배의 모습을 본 그는 과거를 다시 돌아보며 실패의 역사를 알리는 엘레지를 썼을 것이다.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 クリーピー 偽りの隣人〉 (2016)


 

올해의 가장 무시무시한 영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크리피〉다. 그는 여기서 영화가 곧 경계에 대한 유희에 다름 아님을 다시 한번 선보인다. 〈밝은 미래〉와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접촉을 통해, 〈큐어〉와 〈카리스마〉에선 최면과 나무라는 매개체로 침범받은 경계는 〈크리피〉에 이르러 허물어지기 위해 대단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다. 여기서 경계의 침범-감염은 기체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여러 기요시의 영화에 경계의 표상이었던 '커튼'이 이리도 요란히 움직이는 순간, 우린 다카쿠라의 커튼이 바로 니시노의 집과 연결된 방향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감염/유혹을 주도하는 니시노는 계속해 붙어있는 ㄷ자형 집을 찾는다). 이렇게 유혹하는 감염이 완료되는 것이자 내러티브에서 가시화되는 방법은 '주사'의 침투다. 그렇다면 왜 〈크리피〉의 마지막에 '감염'이 완료된 다카쿠라는 강아지 막스가 아닌, 니시노를 총으로 쏜 것일까? 여기에 〈크리피〉의 진정한 공포가 숨겨있다. '악'이나 '살의'(라고 쓰지만 사실 정의하기 힘든 무언가인) 기체가 담겨진 주사를 맞고도 다카쿠라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다카쿠라는 원래 그런 인간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는 니시노의 짝패다. 영화 내내 조금씩 힌트로 주어진 둘의 유사성은 다카쿠라가 총을 쏘는 순간에 정점을 찍는다. 〈크리피〉라는 파국의 진정한 공포는 감염으로 침범받을 '경계'가 있는 줄로만 알았던 인물 사이 경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L'ombre des femmes〉 (2015)


 죽음을 앞에 둔 상반된 이미지가 있다.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문명의 근심이란 짐을 지닌 남녀는 죽음의 이미지와 맞닿인 후 재결합 해야'만' 했다. 반대 편에 선 나루세의 〈흐트러진 구름〉에서 두 남녀는 어긋난 파토스가 억지로 그어진 선으로 연결지어진 후, 죽음의 이미지와 만날 때 함께 할 수 없다. 가렐은 문명의 사유와 개인의 사유, 반대된 것으로만 보였던 테제의 화해를 〈여인의 그림자〉에서 이뤄낸다. 이 영화는 '개인의 단위'에서 오래된 남녀 욕망의 불평등한 역사를 사유하는 영화다. 언제나 그랬듯이 가렐의 남자는 '걷는' 행위에 매혹되어 외도하는데, 부인이 외도함을 알게 되자 화를 내며 시선이 맞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인정하다 시피 바로 앞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애써 피한다. 헤어진 둘은 떨어진 공간에서 프레임 내 시선의 화해를 겪고 (이때 여자의 쪽에서 섹스의 소리가 들림은 절대 우연이 아닐 것!)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가짜-레지스탕스 노인의 역사와 남성-욕망의 역사가 포개지며 남자는 장례식에서 죽음을 응시한다. 떨어진 시선의 화해와 자신의 편집으로 다큐멘터리를 '살릴' 수 있다한 여인의 대사를 통해 예고되었던 화해 또한 가렐 다운 '걸음걸이'의 매혹으로 이뤄진다. 죽음/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를 쓰길 바라는 가렐의 제스처는 올해 극장에서 목격한 가장 아름다운 기적이었다.



이 외에도 좋았던 작품


동주 (이준익)

에브리바디 원츠 썸!! (리처드 링클레이터)

다가오는 것들 (미아 한센-러브)

헤이트풀 8 (쿠엔틴 타란티노)

램스 (그리머 해커나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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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017-01-17 23:36:07

지금 김혜리 기자 팟캐스트 듣고 있는데 선정 작품이 비슷하신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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