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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케네스 로너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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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2-19 01:43:46

1.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봤다. 듣던 대로 훌륭한 작품이었다. 마치 잔잔한 강 위에서 낚시를 하며 그동안 묵혀놨던 자신의 속내를 조금 씩 서로 건네며 위로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케이시 애플렉이 있다.

 

2.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과거 큰 사고로 아이를 잃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신의 고향을 떠나 외롭게 사는 리가 형의 죽음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치유에 관한 작품이다.

 

3. 이 작품은 아이를 잃고 절망의 늪에 빠진 체 허우적거리는 리의 현재와 한 때 행복했던 과거와 지금의 불행의 원인인 과거를 교차로 보여주며 그가 과연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섬세하지만 집요하게 쫓아간다.

 

4. 여기서 리와 조카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는 아이를 잃은 아버지이다. 조카는 방금 아버지를 잃은 고아이다. 물론 어머니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남남이다. 그런 점에서 조카는 실질적으로 고아이다. 아이를 잃고 절망의 늪에 빠진 리, 아버지를 잃고 슬픔에 빠진 조카. 누가 봐도 유사 부자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이 구도는 아주 자연스럽게 과연 이 둘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삼촌, 조카 관계를 넘어 최종적으로 부자 관계로 갈 수 있을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싫든 좋든 이 둘의 절망과 슬픔의 원인은 각자 자신의 자식과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이고 마침 지금 여기 서로의 그 빈 공백을 메워 줄 상대방이 나타났으니 작품이 그런 식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수순이다.

 

5. 그런 점에서 리의 형 조는 상당히 세심한 인물이다. 유언을 통해 조 자신을 대신해서 동생 리가 조카의 후견인, 즉 사실상 자기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혼자 남겨질 아들의 배려뿐만이 아니라 역시나 마찬가지로 혼자 남겨질 동생 리를 구원해주려는 형의 따뜻한 배려이다. 그러니까 형 조는 동생 리가 자기 아들의 후견인, 아버지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아이를 잃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기를 바란 것이다.

 

6. 문제는 리의 상처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리에게 있어서 고향 맨체스터는 지옥 그 자체이다. 자신의 실수로 아이를 잃고 그 결과로 아내와도 이혼한 그에게 고향 맨체스터는 잊고 싶은 기억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는 억지를 부리며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조카를 데리고 가려 한다. 하지만 조카는 자신의 삶을 둘러 싼 모든 것이 있는 맨체스터를 떠나는 것을 거부한다. 이렇게 리 입장에서는 떠나는 것이 맞지만 조카 입장에서는 떠나지 않는 것이 맞는 이 어긋난 상황에서 작품은 아주 차근차근 이 둘의 간격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7. 하지만 이 작품은 흔히 이런 유의 작품이 의례 가는 쉬운 길을 포기한다. 서로 각자의 가족을 잃은 두 남자가 서로가 서로의 빈자리에 스스로 들어가 유사 부사 관계를 맺고 행복해졌다는 결말 말이다. 대신 작품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심연을 지긋이 응시한다.

 

8. 초반부 리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작업녀에 대해서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대신 자신을 흘깃 쳐다보는 한 남자에게 시비를 걸며 싸운다. 이게 리의 현재 상태이다. 여자에게는 무관심하고 자기에게 뭔가 안 맞는 남자는 닥치고 시비 걸어 싸우는 것 말이다. 때문에 리가 상처를 딛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 상황을 개선시켜야 한다그런 점에서 남녀를 대하는 리의 이 행동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그가 진정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롭게 거듭났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리의 마음 속 변화를 측정하는 일종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실제로 작품은 그런 리의 상태와 그에 대한 반작용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리와 조카가 길을 지나갈 때 한 남자가 리에게 시비를 걸고 그는 바로 분노를 하며 그 남자와 싸우려도 한다. 그 때 조카가 나서서 막는다. 거기에 더불어 조카는 자신의 여자 친구 어머니와 삼촌 리를 붙여준다. 거기에 대해서 삼촌 리도 조카에게 팔려던 배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되돌려 준다.

 

9. 이렇게 작품은 끊임없이 삼촌 리와 조카가 서로 하나 씩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서히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과정을 섬세하게 나열한다. 하지만 각자 둘에게 결정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리의 앞에 전처가 등장한다. 새로운 남편과 아기를 동반하고 말이다. 조카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아간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변해버린 모자 관계를 견디지 못 하고 결별을 선언한다. 한마디로 이 둘은 퇴로가 완전히 막힌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리는 참으로 애꿎게도 술집에서 초반 조카의 중재로 간신히 싸움을 면했던 남자와 기어이 다시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는 꽤나 상징적이다. 아무나 붙잡고 싸우려는 삼촌 리를 저지하려는 조카의 노력이 깨졌기 때문이다. 이건 그동안 리와 조카가 힘겹게 쌓아올린 관계의 탑이 무너졌다는 일종의 징표이다.

 

10. 결국 리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조카를 입양 보내고 자신은 다시 고향 맨체스터를 떠난다. 형 조가 동생 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거의 강제적으로 행한 유언의 효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어설픈 화해와 회복이 아닌 과거의 상처라는 천형을 짊어지고 묵묵히 견뎌내야만 하는 한 남자의 서글픈 모습에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그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그래서 어쩌면 평생을 달고 갈 수도 있는 그것을 끌어안고 말이다. 그런 다음 작품은 넌지시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다. 당신은 이 남자를 이해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들은 주춤한다. 장르적 환상에 기댄 안정적인 결말이 아닌 결국 상처 회복에 실패하고 도망치듯이 떠나는 한 남자의 날 것 그대로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들은 너무 안전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11. 마지막 서늘한 방식으로 관객의 자리를 없앤 이 작품은 감정적 동일시에 의한 이해의 방식을 거부한다. 대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진 한 남자를 지근거리에서 넌지시 바라보기만 한다. 그저 그냥 그렇게 조용하지만 처연하게 바라만 봐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감정적 동일시에 의한 공감과 이해 대신 고통에 빠진 한 남자의 몸부림을 그저 보여주며 타인의 삶, 그것도 상처 입은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의 불가능함을 설파하며 영화 보기의 윤리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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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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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8 18: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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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
Updated at 2017-02-18 20:02:51

일단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탁월한 해석입니다. 적극 동의합니다. 솔직히 리의 입장에서 그 정도만 해도 많이 발전한 겁니다. ^_^

2017-02-19 01:06:53

글솜씨며 시선이며 늘 저의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
내일 영화보고 읽을게요.

WR
2017-02-19 01:27:31

영화 재밌게 잘 보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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