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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사랑의 시대(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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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7-08-05 06: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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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Commune], '공동체'란 뜻을 갖고 있다. 국내에선 다소 엉뚱해 보이기도 하는 [사랑의 시대]란 제목으로 바뀌었는데 원제와 너무 거리가 먼 한글제목이어서 영어제목과의 연관성이 있나 싶어 찾아봤다. 없다. 영어제목이 [Commune]이고 덴마크 제목이 [Kollektivet]인것같다. [사랑의 시대]는 해외판 제목이 [Commune]과 [Kollektivet]로 두개가 뜨는데 [Commune]은 영어라서 한번에 뜻풀이가 됐지만 [Kollektivet]는 단어만 검색되고 뜻을 찾을수가 없다. [Kollektivet]가 덴마크어인지 아니면 유럽쪽에서 쓰는 단어인지를 모르겠다. 정확한 뜻을 알고 싶어서 어학사전에서 [Kollektivet]를 찾아봤지만 검색결과가 없다. 해외 원제가 두개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코뮌]보다 [Kollektivet]가 앞서 있어서 [Kollektivet]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싶었다.     

 

[코뮌]이 [사랑의 시대]로 변형된걸 보면서 일본에서 바꾼 서양영화의 달짝지근한 제목을 다시 한글로 번역했던 예전 단관 시절의 외화 제목들이 떠올랐다. [사랑의 시대]란 감상적인 제목이 지극히 일본풍의 외화작명으로 느껴진다. 단순하고 간결한 외화 제목을 감상적인 제목으로 고치는게 일본의 외화 영화를 대하는 고질적인 특징이 아니겠나. [사랑의 시대]란 유행가 제목같은 국내 제목은 아마도 '공동체' 생활로 사회의 규범을 벗어나 폴리아모리 정신을 계승하여 '사랑의 의미와 새로운 가치관을 확립하려 했던 특정집단이 지내온 옛 시대'를 줄인것같다. 이렇게 보면 국내 제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바로 보고 났을 때는 괜찮은 작품인건 알겠는데 대체 왜 국내에선 [공동체]라는 원제를 두고 [사랑의 시대]란 제목을 달고 나왔는지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 적합한 제목선택은 아닌것같다. 번역된 [공동체]가 멋없게 느껴졌다면 어차피 볼 사람만 보는 소규모 배급의 다양성 유럽 영화이니 [코뮌]으로 개봉하는게 더 나았을것이다. 한 시절 불었던 히피정신의 유행같은 바람으로 특정 집단이 특정 기간 동안 겪었던 공동체 생활의 모순을 남녀관계를 중심으로 담아낸 극히 제한적인 설정의 내용을 광범위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사랑의 시대]로 변형시킨것은 극의 전개를 봤을 때는 가당치도 않은 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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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생인 토마스 빈터베르그는 7살부터 성인이 된 19살까지 실제로 덴마크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는 공동체 생활을 하던 12년의 기간 동안 부모의 이혼을 겪었지만 부모가 이혼한 뒤에도 공동체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랑의 시대]에는 공동체 생활을 주도한 에릭과 안나 부부가 남자의 불륜으로 이혼을 하게 되지만 이혼 뒤에도 부부였던 남녀는 한 지붕 밑에서 동거를 지속한다. 여자는 남자의 불륜 상대였던 여자까지 공동체 생활로 끌어들여 그들 공동체 생활의 신념을 유지하려 한다. 이들 공동체의 일원 중에는 9살이 되면 죽을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소년인 빌라스가 중요한 역할로 나온다. 극의 배경이 1970년대 덴마크이고 이혼하게 되는 부부의 설정이나 9살짜리 소년이 등장하는것을 보면 감독의 어린 시절 공동체 생활의 경험담이 극에 상당 부분 녹아든것같다. 빌라스나 주인공 부부의 묘사에서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는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만 봤을 때는 배경을 꼭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공동체 생활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부의 생활 문화로 자리 잡혀 있다. 주류문화가 아닐 뿐이다. 미국에는 약 50만명 정도가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국내에도 공동체 생활 문화가 있다고 한다. 멀게는 가출팸 문제도 공동체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공동체 생활이란것이 확실하게 규정된것도 아니어서 공동체 생활을 구분짓는 기준이 모호하다. 영화에서처럼 자발적으로 공동체 생활에 동의해서 계약과도 같은 관계를 맺게 되면 그것이 영화에서 말하는것과 같은 공동체 생활이 되는것일까?

 

국내에 수두룩하게 퍼져 있는 고시원 문화는 어떨까. 이것도 공동체 생활이라면 공동체 생활인데 말이다. 하숙집 문화는? 이것 역시도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의 동의 아래 자발적으로 하숙문화의 규칙을 따르며 공동 생활을 하는것인데 이렇게 한 지붕 밑에서 각 방을 쓰며 공동으로 살아가면 개인의 자유는 어느 정도 침범당할 수 밖에 없고 개성도 죽일 수 밖에 없다. 아파트 생활도 공동 주거 형태라서 단독주택에서 살 때처럼 행동할 수는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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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대저택을 상속 받은 부부가 이런저런 사람들을 면접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는것에 특별한 개성을 발견할 순 없었다. 남녀 각각 10명이 한 집에서 각 방을 쓰며 같이 살긴 하지만 같이 산 뒤 특별히 같이 사는것 자체로 혼란을 겪거나 충돌하는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특정 시절의 공동체 생활을 말하려는것에는 무리가 있다. 만약 아이, 청소년 포함해서 남녀 10명이 한 방에서 같이 살며 혼음하고 [몽상가들]처럼 모든것을 공유하며 비정상적인 생활 방식을 이어간다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보장 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의 모순이 부각될 수 있겠지만 작품은 그렇게 흐르지도 않는다.

 

[사랑의 시대]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집단은 특별한 '공동체 생활'을 한다기 보다는 평범한 하숙문화로써 봐야할것이다. 에릭과 안나 부부의 대저택에 들어온 일원은 에릭과 안나 부부가 무료로 숙소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형편상의 이유로 하숙문화를 받아들인것도 있다. 에릭과 안나 부부가 상속 받은 대저택은 집도 크고 방도 많다. 기껏해야 부엌과 거실 정도만 공유하며 독립된 개인공간을 보장 받는 생활을 하는것인데 이걸 가지고 공동체 생활이라 하며 공동체 생활에서 파괴되는 개인의 상실감을 보여준다는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설정이라면 굳이 공동체 생활과 연계시킬 필요도 없었다. 공동체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한 가정의 부부사이 문제일 뿐이다. 더군다나 부부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 존재도 공동체 생활에 소속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집 안 밖에서 맺어진 불륜 때문이다.

 

감독은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던 공동체 생활의 경험을 살려 '공동체 2부작'이라 짓고 [더 헌트]와 신작 [사랑의 시대]를 내놓은것인데 두 작품이 맺고 있는 연작의 유기성은 느끼기 어렵다. [사랑의 시대]는 [더 헌트]에서 느낄 수 있었던 평화로운 공동체 마을 집단이 내재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폭력성이나 이중성을 통한 보편적인 공감대 형성을 일으키진 못하고 있다. 감독은 공동체 생활이란 큰 그림을 깔고 극을 시작했지만 막상 보면 특별할것도 없는 공동체 생활이어서 설정의 범위를 확장시키지도 못했고 괜히 특이한것처럼 보이려고 온갖 설정을 깔아두며 이야기를 쥐어 짜내는 통에 구성은 들쑥날쑥하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개되는게 아니라 감당 못할 주제를 펼치기 위해 무리하게 끼워 맞춘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남자의 불륜을 집어 넣어 이야기의 전환점을 마련하려 한것같지만 남편의 여자친구와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설정으로 공동체 생활의 혼란을 그리려는것은 별로 좋은 발상이 아니었다. 남편의 불륜녀와 같이 사는걸 공동체 생활로 풀어낼 필요가 없었다. 이건 그들 가정만의 특별한 상황이지 공동체 생활 때문에 발생되는 균열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체 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그려내고 싶었다면 공동체 생활 내부에서 문제를 제시했어야 했다. 남편의 외도녀가 아무 거리낌없이 공동체 생활의 일원으로 합류하는것도 황당하다. 거기다 에릭의 불륜으로 이야기가 전환되면서 극이 설정한 공동체 생활의 앙상블도 흐지부지됐다.

 

에릭의 불륜이 나오고 난 뒤부턴 이야기가 여주인공 중심으로 편중되면서 감독이 그려낸 공동체 생활이란 밑그림이 흐릿해진것이다. 감독은 각본을 쓰면서 안나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안나 부분을 애초 계획했던것보다 확장시킨데다 촬영을 하면서 안나 역의 트린 디어홈의 호연에 힘입어 비중도 커졌다. 공동체 생활의 모순을 말하고자 하면서 중반을 넘어가면 정신이 나간 안나 중심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극의 균형이 망가진다. 에릭과 안나 부부의 딸 프레아의 이성친구 문제도 극에서 들떠 있고 공동체 생활에 대한 비관으로 느닷없이 자연사 하는(심장병을 앓고 있다곤 하지만) 9살 소년 빌라도의 죽음도 뒤늦게 주제에 대한 책임으로 구겨 넣은 설정이라 부자연스럽게 튄다.

 

공동체 생활이나 폴리아모리에 대한 냉소와 비판에는 대체로 공감이 가지만 감독의 주제의식이 설정에 부합하지 못하는 까닭에 이야기에선 내내 겉돈다. 그러나 애초의 비중보다 훨씬 커진 안나 역의 트린 디어홈의 절절한 연기와 광기는 베를린 영화제의 여우주연상 수상이 아깝지 않게 인상적이고 강렬해서 여주인공의 열연을 보는 만족감은 크다. 덴마크 최초의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아무리 서양 사람이라곤 하지만 피부나 주름을 보고 당연히 50이 넘었는 줄 알았는데 1972년생, 사십대 중반 밖에 안 됐다. 여주인공 외모를 보면서 국내나 헐리우드 배우들의 엄청난 피부 관리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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