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오역/비추] 빌 브라이슨의 어떤 책
개인적으로 좋은 번역이란, 그것이 번역인지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지 않지만 가끔
그런 글을 봅니다. 일본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은 서양 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번역이니 문제가 있을 법한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특히 에세이)을 읽을 때면 그것을 번역
이라 느끼지 않고 (착각이겠지만) 작가의 어투까지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번역을 해서 참 좋아했습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 브라이슨의 책도 번역서로 처음 접했는데, 그 때에는
별로 번역이란 느낌을 갖지 않고 글 자체에 몰두할 수 있어 아주 좋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개인적
으로 좋아하는 주제인 언어, 역사, 문화를 한꺼번에 다룬 브라이슨 책의 번역서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
산책』을 읽으면서는 좋은 번역서를 읽을 때와는 정반대의 느낌을 가져 참 힘들고 안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오역이 너무 많아서 읽다 말다, 오역 체크를 하다 말다, 하며 긴 시간 동안 읽다보니 좋은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끝낸 것이 아쉽습니다. 아래의 사례는 일부입니다. 원본을 가지고 비교해서 보면 잘못된 부분을 더
잡을 수 있겠지만, 그럴 만큼 정성도 없고 해서 그냥 읽어도 표시가 나는 것들만 일부 체크해봅니다. 그러나
이런 오역에도 불구하고 책 자체는 꽤 흥미롭습니다. 물론 그의 다른 책들만큼 유머나 잔재미가 가득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미국 역사나 문화, 언어에 대해 이렇게 재미있게 쓴 책은 별로 없다고 생각
합니다.
79쪽. ~ [독립선언서] 서문은 18세기 산문 문제의 표본이었다. (-> 문체. 이 정도는 약과인데 자주 나와서
대표적인 것으로 뽑아봅니다.)
105쪽. [1789년 미국 초대 정부 출범 때] 불행히도 단 여덟 명의 상원의원과 13명의 하원의원이 첫 날
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원은 남은 26일 뒤에야 정족수가 모였고,...(~ 만이 첫날에 참석했다가 아닐까?)
122쪽. 유통되는 돈의 종류가 워낙 많아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상황은 이전보다 크게 나아졌다. 식민지 시대
동안 영국은 식민지에서 통용되는 영국의 정식 화폐를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139쪽. 1863년 11월 19일에 게티즈버그의 작은 도시 펜실바니아에서 열린 남북전쟁 전사자들을 위한 공동
묘지 기념식에서 만큼...(이런 오류는 계속 나오는데 일관적이지도 않다. 캘리포니아주 로스 엔젤레스라고도
한다.)
184쪽. 영국인, 프랑스인처럼 네델란드인 역시 인도식 이름을 받아들여 자기들 입에 더 맞는 이름을 빚어
냈다. (-> 인디언식 혹은 미 대륙의 원주민식)
185쪽. 텍사스의 와코(Waco)는 스페인어 Hueco로, 키 웨스트(Key West)는 Cayo Hueso로, 미시간의 밥
룰리(Bob Ruly)는 Bois Brule에서 출발했다.(로->에서)
202쪽. 『최후의 전쟁(Last Stand)』으로 유명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는 유서 깊은 ~ (커스터가 이런
제목의 책을 쓴 건 아니지...)
428쪽. 포드는 ‘한정판’ 머큐리 모나크를 정상 가격보다 낮은 250달러에 출시했다. 그러나 동일 모델의
자동차에서 250달러어치의 부품을 빼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마 “정상 가격보다 250
달러 낮은 가격에”겠지? 1975년에서 1980년까지 제조되어 팔린 차 가격으로는 너무 낮은 거 아니야?)
495쪽. [미식축구 역사에 대한 얘기 중] 하지만 그 충돌로 노트르담은 아미(Army)를 35대 13으로 이겼고...
(‘아미’라는 대학교가 있다고 생각한 건가? 육군사관학교라 해야지.)
526쪽. 미국이 1950년대에 해외 지원에 쏟아 부은 500만 달러 중 90%가 군사적인 목적에 쓰였다. (-> 50억,
혹은 500억 달러는 아닐까? 1950년대에 한국에 지원한 것만 해도 500만 달러는 넘을 것 같은데... 1948-1951
년 사이 유럽 재건을 위한 마샬 플랜에 130억 달러를 지원했는데...)
555쪽. 1921년 할리우드는 추문으로 들썩거렸다. 패티 아버클과 윌리엄 데스몬드 테일러라는 감독이
성적으로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 원문을 안 봐서 조심스럽지만, 번역하면서
내용이 뭉뚱그려진 듯. 위 문장에서는 두 사람이 한 사건에서 죽은 것 같지만, ‘패티 아버클 사건’은 1921년
5월 아버클이 주최한 파티에 참석했던 여성 Virginia Rappe이 사망한 뒤 아버클이 성폭행한 뒤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았던 유명한 사건. 아버클 자신은 이후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하고 1933년에 죽었다. 테일러 감독은 1922년 자택에서 의문의 시체로 발견되었고 사건은 여전히
미결이다.)
578쪽. 비행기는 약 760킬로미터 상공을 시속 160킬로미터로 날다가 인디애나폴리스, 세인트루이스, 캔사
스, 위치타, 웨이노카, 오클라호마에 착륙했다. (-> 요즘도 보통 비행기는 1~2만 미터 상공 정도를 나는 게
아닌가? 캔사스, 오클라호마가 도시 이름처럼 되어있다.)
590쪽. 부정적인 뜻을 가진 ‘juvenile delinquency’(미소년 비행)가 뉴스 지면을 채우고...(-> 미성년 비행(/
범죄), 소년 비행(/범죄)
598쪽. 19세기가 다가올 무렵에 시내 전차가 개발되면서 그로 인한 교외가 형성되었고,... (-> 20세기가
다가올 무렵 혹은 19세기가 끝날 무렵이 아닐까...)
그런데 출판사 관행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아마 브라이슨의 번역서에 ‘발칙한’이란 형용사가 붙은 것이
[~ 유럽 산책]이었던 것 같은데, 원어와는 상관없이 ‘섹시한’ 제목을 쓴 것인데 이게 대박(?) 나면서 이후
다른 책들도 원제와 상관없이 대부분 ‘발칙한’을 넣었습니다. 출판사가 다른 곳인데도요. 이게 저작권이나
특허가 없으면 아무나 붙여도 되는 것이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겠지요?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은 거의 처음
번역서의 공적 같은데 다른 출판사나 번역자가 이걸 따다 써도 무방한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붙일 때도
원 제목과는 상과 없었지만 이후에도 원 제목과 상관없이 ‘발칙한’을 붙이는 것을 보고 갸우뚱했습니다.
덧붙여서 이 책을 끝내고 나서, 처음 바람을 일으켰던 번역자의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잘 합니다.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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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책 참 땡겼는데.. 안 사길 잘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