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스포츠) 앙드레 더 자이언트. 거인으로 남기 위해 죽음을 택한 자.
*. 이 글은 지난 4월 미국의 HBO에서 방영이 된 Andre The Giant 다큐멘터리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 감상했는데, 그 내용이 마음에 들어 공유하고 싶었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요약 및 각색을 했습니다. 몇몇 정보와 관련해선 사실 관계를 찾아보고 수정한 바가 있지만, 그 정확성에 대해선 100% 확신하지 못합니다. 덧붙여 영어를 안 쓴지 하도 오래돼 듣기에 문제가 있을 텐데도 자막 없이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바, 본문에 오류가 많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 글에 적힌 내용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금물입니다.
1946년 파리에서 동쪽으로 6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 몰리앙, 마을 주민 모두가 서로를 알고 있는 이 동네 어느 농가에서 앙드레 루시모프가 태어났다. 앙드레의 형인 앙투안느의 말에 따르면 그곳은 제빵사, 도살업자, 식료품 잡화상 등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평범한 농촌 공동체였다.
1955년 19세의 나이에 앙드레 루시모프는 이미 210cm, 140kg을 돌파한 상태였다. 10대 중반까지만 해도 축구선수로 활동했으나, 15세부터 몸이 끝을 모르고 커지는 바람에 럭비로 활동 영역을 바꿔야만 했다. 당시 앙드레가 운동하던 지역에선 럭비와 프로레슬링이 같은 체육관을 썼다. 앙드레 루시모프의 말이다. “우리는 같은 체육관에서 함께 운동했습니다. 어느 날 한 레슬러가 부상을 당했어요. 그들의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죠. 대체선수를 구하지 못했던 모양이니까요. 그들이 제가 와 요청했습니다. ‘한 경기 뛰어줄 수 있나요?’ 전 ‘아뇨. 링 위에 올라가본 적이 없어요’라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괜찮아요. 우리는 체육관에서 당신의 운동능력에 대해 이미 봤으니까요. 그냥 와서 해보세요’라 말하더군요.”
앙드레 루시모프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전 아버지처럼 가업을 이어 농사꾼이 될 생각이 없어요. 뭔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요. 모두가 아는 그런 존재, 아무나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다고요.”
앙드레 루시모프는 커리어 초기에 장 페리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여기에서 Ferre는 불어로 벌목꾼과 연결이 된다. ‘위대한 벌목꾼’으로 불린 프랑스 민담 속 주인공의 이름이 페리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모나코로, 다시 일본으로, 그 활동영역을 거치면서 앙드레 루시모프가 장 페리로, 장 페리는 다시 몬스터 루시모프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1971년에 이르러 앙드레 루시모프는 북미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몬트리올 교외에서 첫 경기가 열렸다. 당시 그는 225cm, 188kg으로 더 자라있었다. 그를 부르는 이름은 프랑스 알프스에서 온 거인이었다. 장 페리 자이언트는 업계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일주일에 5일, 지금도 살인적 스케줄을 자랑하는 업종이지만 당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였다, 매일마다 각지에서 3-5천 명의 인파가 공연을 보러 왔다. 여담으로 서커스의 토막 공연으로 시작된 프로레슬링, 서커스 특성상 난쟁이들도 선수로 출전했다. 노골적이면서도 기괴한 장면이 연출됐다. 지금도 자칫 정도를 넘어서면 인권문제로 불거질 수 있는 이러한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프로레슬링이 서커스의 한 축을 담당함으로써 생존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이 쇼에서 앙드레는 핵심이었다. 그를 필두로 프로레슬링 세계는 더 나은 환경과 조건을 꿈꾸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70년대 미 프로레슬링계는 32개 단체로 분할된 상태였다. 각 단체는 각자의 스타를 보유하고 있었고, 각 지역방송은 자신들과 거래를 하는 각각의 단체의 쇼만을 전송했다. 전국구 스타가 존재할 수 없었던, 그런 존재 자체가 없던 시절이다.
미네소타폴리스에서 활동하던 앙드레 루시모프의 이름은 폴리시 자이언트였다. 시카고에서 활동하면서 그 이름은 앙드레, 더 자이언트 프렌치맨로 바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프로모터가 ‘앙드레, 더 자이언트로 팬들이 발음하기 쉽게 기억하기 쉽게 심플하게 갑시다’라 말하면서 불멸의 이름이 만들어졌다.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한 단체에서 6주 내지 7주 만을 활동하고 다른 협회로 가 쇼를 펼쳤다. 뉴욕, 당대 레슬링계의 큰손 빈스 맥마흔 시니어는 아들(빈스 맥마흔)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친구와 반드시 손을 잡아야만 해! 거대한 몸뚱이, 즉 특별한 사나이야!” 빈스 시니어는 앙드레와 죽이 잘 맞았다. 자이언트의 손 사이즈는 로랜드 고릴라의 그것과 비슷했다. 앙드레의 발 크기는 무려 22로 일반 성인 남성의 9보다 2배 이상의 크기였다. 참고로 22는 샤킬 오닐의 발 크기와 같으며 대략 400-410mm이다. 빈스 맥마흔 시니어는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가치와 그 쓰임새를 세상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한 지역에서의 너무 잦은 노출은 그 몸에 대한 팬들의 신비감을 금세 떨어뜨릴 것이기에 다른 단체로 임대를 수차례 보낸 이유다.
프로레슬링을 공중파에서 다루지 않던 시절, 프로레슬링이 케이블에서도 다뤄지지 않던 시절, 당연히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거인의 사진과 소문을 통해서만 앙드레를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전설이었다. 달변가가 아니고, 때로는 어눌한 모습도 보였지만, 그의 세상과의 소통창구가 입이 아닌 몸이었으니 상관없었다.
헐크 호건은 자신의 중학생 시절, 앙드레 더 자이언트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말한다. 성인 남성의 머리가 한 인간의 가슴에 간신히 걸치는 장면을. 전차를 끄는 힘센 말의 엉덩이와 다리를 보는 듯하던 한 거인의 탄탄한 하반신을. 모두가 자신들의 마을에 거인이 나타나길 학수고대했다. 당대 레슬러 중 쇼의 매진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선수였다.
빈스 맥마흔이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모습에 대해 말했다. “그는 매우 친절했습니다. 먼저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상처 입히지 않았죠. 다만 누군가가 룰을 어길 때, 다시 말해 ‘누가 당신의 보스인가’를 알려줘야만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앙드레 더 자이언트에게 그런 유형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헐크 호건이 거인의 또 다른 모습에 대해 얘기한다.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자신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타인의 커리어를 이끌어주고 크게 만들어줄 수 있는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고요. 따라서 그의 선택은 이 업계에서 절대적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당신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업계에서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며, 그에게 펀치조차 날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앙드레는 그 누구보다 컸고, 그 누구보다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두가 업계의 규칙을 준수하게끔 이끌었습니다. 이 업계는 터프가이들의 터가 아녔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터프가이 행세를 한다면? 곧장 손을 봐줬습니다.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진심으로 마초맨을 싫어했는데, 랜디는 그와 경기가 잡힐 때마다 ‘그가 나를 진짜 때리지 않을까?’ 걱정하곤 했답니다.”
70/80년대 초,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프라임 타임. 미국, 캐나다, 유럽, 호주, 일본 등 프로레슬링의 팬이라면 세상의 모두가 앙드레 더 자이언트를 알았다. 앙드레는 자신의 영역을 초월한 존재였다. 그는 프로레슬링이 생긴 이래, 선대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에 가있었다. 이미 70년대에 드라마와 영화 등 다른 영역으로 진출했다. CG가 없던 시절, CG가 필요 없던 진짜 거인이 아니었던가. 당대 최고의 인기 토크쇼였던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도 출연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한편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여자들에게 있어서 자석과도 같은 존재였다. 릭 플레어는 장난스럽게 말한다. “그는 지름 24mm 반지를 착용한 남자야. 뭘 더 얘기해줄까? 400-410mm 사이즈의 신발을 신었지. 뭘 더 알고 싶어?”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다. 경기가 끝나면 늘 파티를 열었다. 매번 7,000칼로리에 달하는 알코올을 마셔댔다. 맥주 20-25병, 와인 4병, 폭탄주 등등. 릭 플레어는 “그 양반 하루에 맥주 106캔을 마시더라고. 그래, 106캔. 그게 앙드레 더 자이언트야”라 증언한다. 또 다른 이는 “그 양반 와인을 사랑했지. 와인 한 짝을 가져와서 마시더라고”라 말한다. 앙드레는 영화 ‘프린세스 브라이드’에 출연했는데, 감독 롭 라이너는 웃으면서 회상했다. “앙드레는 보졸레 누보를 스무 병 마셨어요. 과장이 아니야. 그냥 마셔버렸어요.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전설적인 술꾼이었답니다.” 주연 배우 캐리 엘위스는 그가 술독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 이유를 말한다. “언젠가 ‘왜 그리도 많은 술을 마시는 건가요?’라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앙드레의 대답은 ‘가만히 있으면 등, 목, 무릎 등이 너무 아파서야’였어요.”
그 시절이기에 사람들은 믿었다. “거인의 손가락이 당신 허리보다 두껍다고.” “오, 그래?” 실제로는 성인 남성의 손가락 세 개가 그의 반지 안에 들어가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빈스 맥마흔은 사람들에게 “앙드레는 82개의 이를 가졌다고”라 말했고, 사람들은 역시나 그 말을 믿었다. 사람들은 그가 두 개의 심장과 2열의 치아를 갖고 있다는 소문까지도 믿었다.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365일 중 300일 간 쇼를 위해 전 세계를 누볐다.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 여정은 고역이었다. 일례로 도쿄를 향하는 14시간 동안, 비행기에선 의자가 너무 작아 제대로 앉아있지 못했고, 화장실조차 너무 작아 갈 수 없었다. 평상시는 어땠을까? 차가 너무 작아 운전하는 게 불가능했다. 식기도 너무 작아 먹는 데 늘 어려움을 겪었다. 생전에 앙드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사람들은 말이죠, 그래, 장님을 위해 뭔가를 바꿔요. 절름발이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거대한 사람들을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설계되지 않은 공간에 우리 자신을 맞추는 수밖에 없답니다. 살아간다는 거, 쉽지 않은 일이에요.”
하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사람들의 시선과 행동이었다. 설사 앙드레 더 자이언트를 모른다고 해도, 그는 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람들은 그의 옷자락을 잡았고, 그의 손을 붙잡았으며, 늘 그 거대함과 사진을 찍길 원했다. ‘우리와는 다른 차원에 있는 기이한 존재다.’ 업계를 벗어난, 일반인들의 시선은 늘 그랬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처럼, 그는 상처를 입었다.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보통 사람의 사이즈가 됐으면 하는 꿈이 있어. 보통 사람들처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자동차를 몰고, 술을 마시러 바에 가고,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앙드레 더 자이언트에겐 딸이 있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공연을 하러 갈 때면, 쇼가 끝나고 딸을 찾아갔다. 자신의 부인과는 많은 말을 안 했다. 다만 딸에겐 자상했다.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은 채 그녀와 많은 말을 나눴으니까. 어머니는 자식이 프로레슬링 업계와 연결되는 걸 꺼렸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성인이 된 딸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 업계는 사람의 진을 빼는 곳이잖아요. 완전히요. 제가 아버지를 필요로 할 때, 아버지는 제 옆에 계시지 않았지만, 서운하고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이해해요.”
시간이 가며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몸무게가 226kg을 넘어섰다. 말단비대증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전 초월적인 존재가 아녜요. 평범한 인간입니다. 신이 주신대로 살다 가는 거죠.” 지노 브리토는 앙드레가 했던 말을 회상한다. “길을 가다 뭔가에 부딪히게 되면, 난 넘어질 거야. 그게 다야.”
80년대 초,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발목 부상으로 해리스 박사를 찾았다. 그는 앙드레가 일명 거인병에 걸린 환자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만일 수술을 했다면 병을 치료할 수 있었을까?’ 박사는 “그의 이마, 코, 턱 등은 과도하게 자라있었습니다. 그의 발목은 일반 성인의 무릎 크기였죠. 내분비학자로서 의견을 말씀드리죠. 당장 수술을 했다면, 말단비대증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겠지만, 최소한 억제하거나 약간의 개선은 가능했을 것입니다”라 말한다. 뉴욕의 의료팀은 ‘앙드레가 40까지 살면 기적이다’라 말했다. 하지만 이 거인은 수술대에 올라가는 걸 거부했다. ‘프로레슬러로서의 커리어를 망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82년이 되자 빈스 맥마흔은 아버지로부터 프로레슬링 사업을 물려받는다. 이 야심만만한 사업가는 케이블 TV의 부상을 감지했다. 미 전역의 스포츠로 확장되는 걸 꿈꿨고, 그 현실화를 위해 뛰었다. 각 지역의 슈퍼스타들을 자신의 단체로 스카우트했다. 마초맨, 티토 산타나, 무라코, 릭키 ‘더 드래곤’ 스팀보트 등등. 북동부로부터 시작된 WWF, 새로운 시대를 원했기에 새로운 영웅이 필요했다. 일전에 빈스 맥마흔 시니어는 테리 진 볼레아에게 이름을 지어줬다. 바로 ‘헐크 호건’이었다. 테리 진 볼레아가 헐크 호건이 돼야만 하는 이유를 물었다. 빈스 시니어의 답변은 계산적이었으며 예리했다. “우리는 모든 민족 타입을 갖고 있지. 미국 원주민계, 이탈리아계 미국인, 폴란드계 미국인 등. 나아가 각각의 민족을 상징하는 이름 또한 갖고 있어. 헐크 호건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을 상징한다네.”
레슬링 업계에서 슈퍼스타가 된 헐크 호건은 록키 3에 출연했다. 그는 35년 전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당시까지도 레슬링은 특정인들만이 소비하는 콘텐츠였습니다. 그런데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던 영화 시리즈, 그것도 당대 최고의 액션 배우 중 한 명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작품에 출연할 수 있던 것입니다. 레슬링에 관심이 없던, 레슬링을 모르던 대중이 록키를 번쩍 들어 올리는 초인적인 힘을 지닌 Thunderlips(헐크 호건 역)의 힘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대박이 났고, 헐크마니아도 폭발했죠.”
앙드레는 기뻐했다. 후배의 성공을 진정 자랑스러워했다. 업계의 모두가 알게 됐다. ‘이제 헐크 호건이 골든 보이다.’ 영화, 만화, 뮤직 비디오 등 모든 콘텐츠가 이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상징을 요구했다. 프로레슬링은 젊고 야심만만한 수장 빈스 맥마흔의 지휘와 헐크 호건이란 아이콘을 통해 메인스트림으로 나오게 된다. 85년에 열린 레슬 매니아 I이 그 증명서였다. 앤디 워홀, 무하마드 알리 등 각계 슈퍼스타들이 현장을 찾았고, 프로레슬링의 미학을 찬양했다. 프로레슬링의 새로운 장이 열렸고, 과거와 작별을 고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1987년에 디트로이트 풋볼 경기장에서 열린 레슬매니아 III. 9만 3천 장 이상의 표가 팔려나갔다. 그 직전,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빈스 맥마흔에게 말했다. “전 끝났어요. 몸의 고통을 이겨내기가 힘들어요.” 빈스는 말한다. “앙드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 사나이였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어요.” 헐크 호건의 비상과 그와의 대전은 앙드레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됐다. 앙드레는 은퇴를 미뤘다.
레슬매니아 III 이전, 그러니까 프로레슬링이 아직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하던 때, 과거와 미래의 상징은 이미 몇 차례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이 업계가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온 시점, 다수의 팬들은 둘의 경기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모두가 바란 시나리오, 바로 앙드레 더 자이언트란 무적의 악당과 골든 보이 헐크 호건의 시합 말이다. Piper's Pit이란 세그먼트에서 그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앙드레는 업계의 미래를 위해 악당으로 기꺼이 턴 힐(선한 역할에서 악역으로 변하는 것)했다. 세상 모두가 자신의 아이돌이자 친구의 배신에 피눈물을 흘리던(찰나의 순간 스스로 눈 부위를 찢었다) 헐크 호건의 승리를 바랐다.
3년 간 챔피언 벨트를 착용하고 있는 헐크 호건 대 15년 간 무패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대전, 이는 8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알리 대 조 프레이저 경기와도 같았다. 레슬매니아 III 일자가 다가오면서 그 열기는 끝을 모르고 불타올랐다.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등 수술을 받았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는 상태였다. 프로레슬링 업계 전설의 아나운서로 남아있는 ‘민’ 진 오클런드의 말이다. “전 저 둘이 쇼를 완성시킬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한편 그는 호건이 자신이 링 위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알기를 원하지 않더군요.” 빈스 맥마흔은 기억한다. “호건은 경기의 결과를 알지 못해 긴장했죠. ‘앙드레가 저를 링 위에서 완전히 때려눕히진 않을까요?’ 전 그에게 답해줬어요.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잘 얘기할 테니까.’” 그의 걱정과 근심, 그도 그럴 것이 앙드레가 꽤나 짓궂은 행동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호건이 들을 수밖에 없게끔 “난 내가 원하는 걸 할 거란 말이지!”라 외치기도 했다. 시합 전날 빈스 맥마흔과 헐크 호건은 구체적 합이 담긴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빈스가 앙드레 더 자이언트에게 그 시나리오를 전달했다.
시합 당일까지도 헐크 호건은 경기의 결과를 자신하지 못했다.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미묘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고, 실제 빈스 맥마흔까지도 그 결과에 대해 반신반의했다고 할 정도였다. 막상 경기는 시나리오대로 풀렸다. 다만 저 거인은 허리의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링 위를 제대로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한 자리에 서서 최대한 많은 합을 보여주려 했던 건 그래서다. 빈스 맥마흔과 헐크가 작성했던 시나리오는 끝을 향해 달려갔다. 앙드레의 베어 허그로부터 기절했던 호건이 헐크로 변한 순간, 그 뒤의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헐크 호건은 똑똑히 기억한다.
앙드레가 외쳤다. “슬램!”
링에 등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앙드레가 다시 외쳤다. “레그 드랍!”
헐크 호건은 앙드레가 다시 일어날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합이 종료됐습니다.” 초로의 슈퍼스타의 눈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레슬매니아 III 이후,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급격한 하락세를 그린다. 그는 악역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팬들은 호건과의 앙숙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앙드레가 악역으로 남길 바랐다. 거인은 팬들의 응원을 바랐지만, 돌아오는 건 야유밖에 없단 사실에 신경질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프로레슬러로서 활동반경이 급격히 좁아진 것도 문제였다. 그는 제대로 걷질 못했다. 한 쪽 로프를 잡고 있는 빈도가 늘었다. 주변 사람들은 무대 뒤에서 그의 얼굴이 늘 일그러져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보스, 괜찮아요?”란 얘기 외엔. 그렇게 프로레슬러로서의 커리어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링 위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고 특별한 존재로 남기 위해 커리어와 생명을 맞바꿨던 앙드레 더 자이언트, 이런 그에게 앞선 상황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선수가 아닌 초대 손님으로서 링을 바라봐야만 하는 심정이 어땠을까?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사람들이 자신을 두 번 쳐다보지 않아 좋다던 노스캐롤라이나의 인적 드문 집으로 향했다. 아픈 몸을 보여주기보단 사라지는 걸 택한 것이다. 몸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목발을 짚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WWF 무대를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 영원히 여기 링 위에 있을 것입니다.”
분명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선대 회장 시절 WWF의 1차 전성기를 이끌었다. WWF가 전국적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밑거름 역할 또한 멋지게 해냈다. 그런 자신에게 계약 연장을 해주지 않은 빈스 맥마흔에게 섭섭함을 느끼며, 90년대 초 일본으로 향한다. 의료팀이 말한 데드라인, 마흔이 넘은 시점이었다. WWF 말년 시절, 이미 레슬매니아 III 이전부터, 앙드레의 키는 연이은 허리 수술로 인해 210cm 수준으로 최고점에서 약 15cm가량이나 줄어든 상태였다. 다시 말해 80년대 후반 우리나라 꼬맹이들이 AFKN을 통해 목격한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그 거인이 아니었단 말씀. 키를 제외한 모든 기관은 계속 비대화가 됐는데, 심장만은 그대로였다. 앙드레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굼떴고, 안색 역시 매우 좋지 않았다.
빈스 맥마흔이 이 거인과의 계약에서 손을 뗀 이유다. 빈스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했다. “그는 아마도 나를 원망했겠죠. 하지만 전 이 업계를, 단체를 이끌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공연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앙드레와 더는 계약을 맺을 수 없었어요. 경기 전체의 템포가 그 한 명으로 인해 느려질 수밖에 없고, 관중들과 시청자들의 흥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고. 헐크 호건을 위시한 새로운 세대가 선수단의 보스 앙드레 더 자이언트 없이 WWF를 이끌게 됐고, 그의 부재중에도 전대미문의 거대한 성공을 이끌어냈습니다.”
1993년 1월,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거의 걸을 수 없는 상태였다. 프랑스에 있는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가족은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무르고 있던 앙드레에게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라 연락을 했다. 그는 고향을 향했고, 며칠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그 며칠 뒤, 파리의 한 호텔에서 잠을 자던 거인은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46세였다.
생전 앙드레 더 자이언트가 말했다. “글쎄요. 전 당장 죽을 수도 내일 죽을 수도 있어요. 그 시점을 알 수가 없네요. 계획이란 걸 만들 수 없는 이유죠. 그저 순간을 헤쳐 나가는 수밖에요.” “전 제가 반드시 챔피언이 돼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거인으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앙드레 더 자이언트로요.” “제가 세상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쇼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 보다 많은 분들이 제 모습을, 그러니까 거인의 존재를 목격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저 모두에게 ‘안녕하세요?’란 인사를 건네고 싶습니다.”
언론인 테리 토드의 말처럼 그는 평생 과장된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다. 별다른 복장도 필요없었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특별한, 신화 속 거인을 닮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앙드레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수술을 받을 수 없던 이유 아닐까. 설사 생명을 포기한다고 해도 신화 속 인물로 남고 싶었던 게 아닐까.
덕분에 그렇게 됐고 말이다.
앙드레 루시모프는 27년의 활동 기간 동안 6개 대륙을 누비며 5,000회 이상의 공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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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적 오락실에서 자주 하곤 했던 "wwf super stars" 시절이 떠올라 살짝 코끝이 찡해옵니다.
너무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