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단상] 왜 갑신정변은 실패할수밖에 없었나?
갑신정변은 구한말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최초의 '혁명적 사변'이였습니다.
부유층 자제들이 숭고한 사명감으로 일으킨 야심찬 계획이었으나 3일천하로 막을 내렸죠.
이들은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왜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했을까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비교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번. 군사력의 차이
갑신정변: 두 자리 수도 안 되는 인원으로 거사를 도모
메이지 유신: 최소 7000 명 이상의 동원 가능한 병력과 후장식 라이플을 비롯한 최신식 무기
(후장식 라이플 -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승리의 비결은 후장식 라이플에 있다죠) 그리고 자금으로 무장한 삿쵸 동맹
2번. 명분의 차이
갑신정변: 근대화를 이룩하겠다며 왕을 납치하고 무력으로 위협함. 대의를 위한 명분으로는 조금 약함
메이지 유신: 존왕양이, 외세를 막아야 하는 정이대장군의 역할을 수행지 못하는 막부를 멸하고
정권을 만세일계 천황에게 반환해야 한다는 여론(적어도 무사계급 + 유학자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
3번. 대외정세의 차이
갑신정변: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 착각.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혁명을 위해 피를 흘릴 의사가 없었던 반면,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음
메이지 유신: 막부 최대 후원자 프랑스는 막부를 지키기 위해 영국과 전쟁을 할 의사가 없었고,
영국 또한 자금과 무기지원 이상으로 일본 국내정세에 개입할 의사가 없었음.
4번. 대외인식의 차이
갑신정변: 그나마 대외정세에 정통했고 나름대로의 개혁책을 고민했던 세력, 즉 박규수 학파 등은 단 한번도 주류가 되지 못했음. 아편전쟁의 충격으로 중국에서는 서양국가들의 지리, 역사, 문화, 물리, 화학, 병기 등을 총망라한 100권짜리 도서 <해국도지>가 발간되었는데 이를 입수했던 박규수와 그의 제자들(김옥균, 박영효, 유대치 등)은 한 번도 정권의 주류가 되지 못했고, 주류 정치인들은 해국도지를 읽어보지도 못했음
메이지 유신: <해국도지>가 일본의 인사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거대. 막부 뿐만 아니라 난학자, 유학자, 그리고 각 번들도 자체적으로 해국도지를 입수하고 일본어로 번역하고 2판, 3판까지 인쇄함. 안 그래도 난학자들은 자체적으로 서양문명을 '번역'했었는데 당대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 <대청제국>의 지성의 총집체 <해국도지>는 일본의 학자들에게 아주 신선한 충격을 주었음.
참 아쉽고 동시에 재미있는 게 <해국도지>는 근대 동아시아 문명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도서 중에 하나인데, 왜 이것이 일본에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청나라나 조선에는 그 영향이 미미했을까..라는 것입니다. 아편전쟁의 충격을 몸소 체험한 것은 중국이었고, 그 중국은 <해국도지>라는 어마어마한 백과사전을 몇년만에 만들어버리는 기염을 토해냅니다. 그런데 해국도지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조선이나 청나라에서 주류가 되거나 실권을 차지하지 못했고, 일본에서는 후일 유신지사들은 물론 일본에서는 막부 측 인사들도 해국도지에 정통했다는 것입니다.
조선 입장에서도 아쉽지만 이 책을 직접 집필한 중국 입장에서는 더더욱 아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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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해보이지만, 단순화시켜보면...
일본이 배후조종 해놓고, 일 터지자 발뺌한거죠.
주역들이 착각을 한것이라기 보다는, 일본이 배신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