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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단상] 왜 갑신정변은 실패할수밖에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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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0-21 13:07:20

갑신정변은 구한말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최초의 '혁명적 사변'이였습니다.

부유층 자제들이 숭고한 사명감으로 일으킨 야심찬 계획이었으나 3일천하로 막을 내렸죠. 

이들은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왜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했을까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비교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번. 군사력의 차이

갑신정변: 두 자리 수도 안 되는 인원으로 거사를 도모 

메이지 유신최소 7000 명 이상의 동원 가능한 병력과 후장식 라이플을 비롯한 최신식 무기 

(후장식 라이플 -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승리의 비결은 후장식 라이플에 있다죠) 그리고 자금으로 무장한 삿쵸 동맹

 

2번. 명분의 차이

갑신정변: 근대화를 이룩하겠다며 왕을 납치하고 무력으로 위협함. 대의를 위한 명분으로는 조금 약함 

메이지 유신: 존왕양이, 외세를 막아야 하는 정이대장군의 역할을 수행지 못하는 막부를 멸하고 

정권을 만세일계 천황에게 반환해야 한다는 여론(적어도 무사계급 + 유학자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

 

3번. 대외정세의 차이

갑신정변: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 착각.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혁명을 위해 피를 흘릴 의사가 없었던 반면,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음 

메이지 유신: 막부 최대 후원자 프랑스는 막부를 지키기 위해 영국과 전쟁을 할 의사가 없었고, 

영국 또한 자금과 무기지원 이상으로 일본 국내정세에 개입할 의사가 없었음.  

  

4번. 대외인식의 차이

갑신정변: 그나마 대외정세에 정통했고 나름대로의 개혁책을 고민했던 세력, 즉 박규수 학파 등은 단 한번도 주류가 되지 못했음. 아편전쟁의 충격으로 중국에서는 서양국가들의 지리, 역사, 문화, 물리, 화학, 병기 등을 총망라한 100권짜리 도서 <해국도지>가 발간되었는데 이를 입수했던 박규수와 그의 제자들(김옥균, 박영효, 유대치 등)은 한 번도 정권의 주류가 되지 못했고, 주류 정치인들은 해국도지를 읽어보지도 못했음

메이지 유신: <해국도지>가 일본의 인사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거대. 막부 뿐만 아니라 난학자, 유학자, 그리고 각 번들도 자체적으로 해국도지를 입수하고 일본어로 번역하고 2판, 3판까지 인쇄함. 안 그래도 난학자들은 자체적으로 서양문명을 '번역'했었는데 당대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 <대청제국>의 지성의 총집체 <해국도지>는 일본의 학자들에게 아주 신선한 충격을 주었음. 

  

참 아쉽고 동시에 재미있는 게 <해국도지>는 근대 동아시아 문명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도서 중에 하나인데, 왜 이것이 일본에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청나라나 조선에는 그 영향이 미미했을까..라는 것입니다. 아편전쟁의 충격을 몸소 체험한 것은 중국이었고, 그 중국은 <해국도지>라는 어마어마한 백과사전을 몇년만에 만들어버리는 기염을 토해냅니다. 그런데 해국도지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조선이나 청나라에서 주류가 되거나 실권을 차지하지 못했고, 일본에서는 후일 유신지사들은 물론 일본에서는 막부 측 인사들도 해국도지에 정통했다는 것입니다.

 

조선 입장에서도 아쉽지만 이 책을 직접 집필한 중국 입장에서는 더더욱 아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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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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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1 13:13:09

복잡해보이지만, 단순화시켜보면...

일본이 배후조종 해놓고, 일 터지자 발뺌한거죠. 

주역들이 착각을 한것이라기 보다는, 일본이 배신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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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0-21 13:19:54

저도 이쪽으로 봅니다.

 

일본은 조선을 근대화시킬려는 목적이 아니라,

조선을 잡아먹기 위해 망가트릴 목적으로 내란을 후원한 거였고,

 

거기에 낚인 조선의 젊은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거죠.

2019-10-21 13:57:32

다른사람들은 그렇다해보 김옥균 이후 행보를 보면 배신당했단 자각이 있었는지는 의심이들더군요.

Updated at 2019-10-21 13:20:21

게다가 박규수 쪽 애들은 조선-대한제국 정치를 쥐고 있던 민비 일파한테도 밀려서 만년 쩌리 신세를 면하지 못 했습죠.

덕분에 한반도 근대화는 저 멀리로 떠나 버리고 민비 쪽 일파는 민비가 죽고도 여기저기 들러붙다 결국 일본한테 찰싹 붙어서 개꿀 빨게 되어부리며 배드 엔딩이 뙇!

2019-10-21 13:20:15

박규수가 중심언저리만 갔어도 역사가 바뀌었을 겁니다

Updated at 2019-10-21 13:31:25

아마 그렇게 됐음 왕당파/개화파 둘로 갈려서 진짜배기 내전을 했을지도...

2019-10-21 13:45:26

전 약간 구도를 다르게 보는데요, 효명세자와 헌종이 박규수를 원했거든요. 안동 김가네 몰아내려고.

그러니 그가 중심 언저리에 갔음 왕당복권파 VS 수구파와의 전쟁이 댔을 가능성이...

2019-10-21 13:56:00

이야...그러고 보니 그게 훨씬 더 그럴싸한 전개긴 하네요.

문제는 저렇게 붙어도 수구파 애들이 이길 거 같다는게 ㄷㄷㄷㄷㄷㄷ...왕 갈아치우고 아무 열강에 굽신 거리며 지들이 독재할 거 같아요

2019-10-21 13:57:36

뭐 왕비부터 대비는 물론 밑의 사관까지 죄다 안동김씨인데요 뭘. 아마 독살해놓고 사초 폐기를 해버렸을겁니다. 그리고 철종 2호를 찾겠죠. 

2
2019-10-21 13:22:18
명분도, 수단도, 그리고 인원수도 적절하지 못했죠.
급하게 먹으면 체합니다.
1
2019-10-21 13:22:23

이것에 대해서 왕도의 개라는 만화가 생각나네요.

 

WR
1
2019-10-21 13:22:58

왕도의 개는 정말 대단한 명작이죠. 

20
2019-10-21 13:24:37

저는 기본적으로 조선과 일본은 근대화의 저력 자체가 달랐다고 생각됩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조선은 하멜을 얻고도 그로부터 제대로 된 지식을 얻지도 못했다고 했는데, 조선은 중국과 너무 가까이 있었지요. 단적으로 말해서 경상도 관찰사가 외국인이 자유로이 무역을 할 수 있는 항구를 부산진에 설치했다고 생각해보죠. 당연히 중앙 정부에서는 경상도 관찰사가 역모를 꾀한다고 몰아붙이기 딱 좋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죠. 조선은 중국 입장에서는 사대를 통해 중국의 질서 체제에 잡혀 있는 곳입니다. 조선이 중국을 거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외국과 무역을 한다? 그건 중국과 전쟁선포에 다름 없는 짓이지요.

 

반면에 일본의 경우 중국의 문화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위치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찍부터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상인들과 접촉하여 전국시대에는 사카이를, 에도 막부 시대에는 나가사키를 개항시켜서 일찍부터 서양 문물을 직접 받아들일 수 있었지요. 즉 일본은 페리 제독에 의해서 개항을 하기 전부터 이미 서양 문명에 대해서 그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화에 물든 중국이나, 사대에 물들어 소중화를 주장하던 조선과는 달랐죠. 

 

그나마 벨테브레가 조선에 귀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명-청 교체기였고, 일본이 기독교 탄압을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미 청나라가 중국의 질서를 잡은 효종때에 하멜이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죠. 

 

그런 간극이 계속 벌어져 오다가 결국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었는데, 그나마 이게 명분이 섰던 것이 일본의 덴노는 애초에 왕권이 유명무실 했었지요. 왕권을 막부로부터 접수해서 다시 왕에게 돌려준다는데 그만한 명분이 어디있겠습니까. 반면에 갑신정변은 왕이 가지고 있던 절대왕권의 일부를 신하와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죠. 그건 말 그대로 역모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4
Updated at 2019-10-21 14:00:31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보니 또 모든 것을 일본의 음모로 보는 댓글이 있는데 이렇게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고 앞으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은 일본의 (가끔 미국의) 음모라 그러는거 참 언제까지 그럴지...

5
2019-10-21 14:01:01

전 그래서 갑신정변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왕을 죽여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서 왜 왕을 죽였느냐 할때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절대로 절대왕정을 포기할 리가 없었고, 왕이 살아 있는 이상 절대로 시민들은 권력을 쥘 수 없었기 때문이죠. 왕이 시민들에 의해 죽음으로서, 왕은 국가의 살아있는 실체가 아닌, 왕 역시 죽을 수 있는 하나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선언입니다. 

 

갑신정변 역시 매한가지죠. 결국 왕을 죽여야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을 죽이기에는 그들은 스스로 아직 근대인이, 시민이 아니었지요. 결국 봉건군주 밑의 신하에 불과했을 뿐이고, 중종 아래의 조광조가 그러했듯이 왕이 설정한 경계 안에서의 개혁은 그 경계를 넘는 순간 역모에 불과할 뿐입니다. 

1
2019-10-21 14:11:33

사실 맞는 말씀입니다. 고종이 스스로 입헌군주제라고 결심하지 않는 한... 그런데 그럴 리가 없었죠. 그런데 왕을 죽였으면... 나름 너무 급격하게 사건이 흘러가서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당시 조선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결국 당시 조선 사회가 근대화를 받아들일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정설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3
2019-10-21 13:31:22

그들이 믿었던 것은 고종과 일본인데, 고종은 왕권강화는 커녕 오히려 약화되는 걸 알고 등을 돌렸고, 일본은 충분한 힘이 없었고 또한 기회주의자였지요. 이런 허약한 지원책에 의존한 거사였기에 3일 밖에 지탱할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8
2019-10-21 13:31:46

메이지 유신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웅번들과 막부간의 내전(무진전쟁)의 결과이고

 

갑신정변은 쿠데타...로 치기에도 스케일이 안습이라 비교불가라 봅니다.

2019-10-21 13:40:38

간단하게 우리편이 너무 적었어요.

1
2019-10-21 13:42:12

후장식 라이플이라니... 뭔가 고통스러울 것 같은 이름의 무기군요

2
2019-10-21 13:47:55

별다른건 아니고, 총의 뒷부분을 통해서 화약을 장전할 수 있는 라이플이라는 뜻입니다. 

 

이전의 구식 라이플은 총의 앞부분 총구를 통해서 화약과 총알을 집어넣었죠. 그런 식이니 총을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화약을 총 깊이 집어넣기 위해 꽃을대가 필요했고 그만큼 총을 쏘고 재장전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죠. 

2
2019-10-21 13:53:15

넵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그냥 드립친건데 너무 친절하셔서 몸둘 바를 ㅎㅎ 감사합니다

2019-10-21 14:21:44

근데 프사의 그 게임 이름이 뭔가요? 어릴 때 겟 셋 레디! 하면서 시작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름을 몰라서 롬도 못찾아봤어요 참 재미나게 했는데...

1
2019-10-21 14:28:01

원작은 일본게임인데 우리 나라에는 이 이름으로 들어왔을 겁니다. 

2019-10-21 14:28:52

와우 감사합니다 찾으러 갑니다

1
2019-10-21 13:51:30

아 ㅋㅋㅋ 저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군요... 

1
2019-10-21 13:54:48

이러니 시나몬롤님에게 반해버리잖아요

2
2019-10-21 13:59:59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1
2019-10-21 14:03:08

철회합니다

1
2019-10-21 14:06:46
2019-10-21 14:07:36

 말씀하신대로 메이지유신과 달리 갑신정변은 성공하기 위한 사상적,제도적,물적 기반이 거의 없었죠..실패가 예정된 개혁이었지만..저 개인적으로는 그 방향성 자체는 틀린 게 아니어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돌이켜보면 구한말 역사는 많이 아쉽습니다..구한말이 뒤틀리는 바람에 2019년 현재에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외세한테 휘둘리는 구조이니까요..우리나라는 언제쯤 이런 역사를 멈출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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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0-21 14:13:17

임금을 위협한 것은 순(順)한 것이 아니고 역(逆)한 것이니 실패하는 첫째 이유이다.

외세를 믿고 의지하였으니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 실패하는 둘째 이유이다.

인심이 불복하여 변이 안에서부터 일어날 것이니 실패할 셋째 이유이다.

적은 수로 큰 수를 대적할 수 없는 것이나 숫자가 적은 일본군이 어찌 많은 청군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실패할 넷째 이유이다.

설사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순조롭게 그 뜻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미 여러 민씨와 임금께서 친애하는 신하들을 죽였으니 이는 왕과 왕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임금과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서 그 자리와 세력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실패할 다섯째 이유이다.

여섯째, 두서너 사람이 위로는 임금의 사랑을 잃고 아래로 민심을 잃고 있으며 곁에는 청국인이 있고, 안으로 임금과 부모의 미움을 받고, 밖으로 붕당의 도움이 없으니 어찌 그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짐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일이 반드시 실패할 터인데 도리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리석고 한스럽다.
- 윤치호 일기(1884. 12.)

윤치호 부친 윤웅렬이 정변 전에 예측한 것이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때도 무리한 행보라고 생각했었나봐요.

5
2019-10-21 14:40:03

그냥 젊은 청년들의 치기였다고 봅니다. 거기에 일반 백성들은 등따숩고 배부른 명문가 자제들의 일탈이라고 생각하기도하고 당장 자기들 삶에 딱히 영향을 주는 것도 없으니 호응도 안 해줘서 그들의 사상이나 개혁이 일반 백성들하고는 철저히 유리된데다가 뜬금 일본같은 외세가 도와준다고 하면 의심을 해봐야 하는데 그걸 또 철석같이 믿어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시네마토그라프 님 말씀이 가장 와닿습니다. 조선 비하가 아니라 지리적 위치나 당시 상황을 고려해봤을때 조선과 일본은 출발점이 애석하게도 달랐다고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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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0-21 15:20:28

저는 그래도 그걸 젊은 청년들의 치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 그건 젊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애국심과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봅니다.

그들은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수신사 등을 통해 일본의 부국강병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의 야욕이 머잖아 조선에 올 것을 알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당연히 부국강병을 위한 방법을 모색해보았을테고, 그러한 개화의 움직임이 외척인 민비 일파와 맞부딛쳐서 좌초될 위기에 놓였을 때 그들 입장에서는 외척을 제거하면서 정권을 잡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 즉 역모의 유혹에 넘어갔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일종의 잘못된 사명감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걸 알기에는 그들은 너무 젊었을지도 모르죠. 그들은 왕으로 대변되는 권력만을 바라보았고, 아래에 있는 백성들을 시민으로 키우는걸 등한시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근대인이 아닌, 근대를 바라본 봉건인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나중에 갑신정변으로 죽을 뻔 했던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와서 독립협회를 만들고 만민공동체를 구성하면서 제일 중시했던 것은 바로 시민을 형성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조선은 돌이킬수 없는 망국의 세월 속으로 빠져든 뒤였죠.  

2019-10-21 15:44:11

일본은 1700년대에 이미 네델란드에서 들어온 해부학교과서 일본어판이 나오고, 무려 1796년에 표제어 6만단어의 네델란드어 - 일본어 사전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서구적 개념의 단어가 탄생) 

그만큼 서구적 사상에 익숙한 개혁파가 지식인 계층에 넓고 두텁게 존재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나마 한줌 밖에 안되는 개혁파 지식인들이 갑신정변으로 뿌리채 뽑혀 나가버립니다. ㅠㅠ

2019-10-21 15:54:37

토막파와 막부파 간의 내전인 메이지 유신과 한줌도 안되는 개혁적 정치인의 쿠데타시도는 차이가 크죠. 

메이지 유신조차도 토막파가 무진전쟁에서 패했다면 실패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토막파의 주력인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수백년의 세월 동안 많은 자본과 인력을 축적해 둬서,

자체적인 세력이 상당한 번들이었죠. 

 

쥐뿔도 없는 갑신 정변 주도 세력과는 정말 엄청난 차이죠. 

 

2019-10-21 16:29:52

애초에 지방자치체제였던 일본의 막부 체제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였던 조선과는 길이 다를 수 밖에 없었지요. 그걸 같은 것으로 봤던 것이 개화파의 큰 패착 중의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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