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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차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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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역사] 청일전쟁의 진짜 승자는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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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13 20:57:12


영국제국의 역사라는 일본책을 읽고 있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청일전쟁에 대한 배상금으로 일본이 중국한테 막대한 금액을 요구했는데, 중국은 그 배상금 준비를 위해 영국은행 HSBC을 통해 차관을 받았더군요.

영국은 담보로 광산이권, 철도이권, 관세수입 등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철도부설권을 얻는 회사는 자딘 매디슨이었고요. 참고로 자딘 매디슨은 일본막부말기(1865~70)메이지 유신 세력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했던 회사입니다 (토마스 글로버가 거기 직원)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다시 잉글랜드 은행에 예금....

이건 뭐

영국은 앉아서 돈놀이 했네요....

일본은 왜 배상금을 영국은행에 예탁했는지 궁금하네요

다른 한편 19세기 영국금융제국의 아시아 진출 과정과 수단 등도 이해해야 19세기 동아시아 근대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다음에 이 부분 관련 좀 더 읽고 정리되면 보다 장문의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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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11-13 19:15:13

이렇게 200여년간 쌓아놨던 부가 2차세계대전 때 미국으로 다 넘어가게 되는 ... 아이러니죠

2019-11-13 19:37:51

러일 전쟁때는 돈 없어서 난리였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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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3 20:35:42

그때 세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은행이 HSBC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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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3 21:48:48

아마도 군함, 전함 구매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영국 은행에 예금 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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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4 01:29:06

일본이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받은 금액은...

일본화폐 3억 6천만엔, 중국화폐로 2억3천만냥, 영국화폐로 3,800만 파운드입니다.

 

당시 일본은 중국, 조선과 함께 1,000년 가까이 은본위체제였습니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이후

일본경제가 발달하면서 당시 유럽의 선진국들의 금융체제로 진입하기 위해 금본위체제로의

변환이 필요했지요. 1871년 금본위제도를 도입하지만 보유한 금이 부족해서 은을 병행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일본은 복본위체제였습니다. 금본위제도로 가야한다는 금융계의 요구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관료들은 기존의 체제를 바꿀 필요가 없다며 반대했구요. 금본위제도 도입 20여년이 지난 후인 1893년

다시 한번 금본위제 도입을 논의했는데, 정부가 구성한 ‘화폐제도조사회’ 에서 은본위 7명, 금본위 6명,

복본위제도 2명으로 의견이 팽팽히 나뉘었습니다. 

 

그러던 중 청일전쟁의 배상금으로 막대한 금액 (일본정부 예산의 4.5년치) 을 수령하면서 결단을 내려서

금본위제도로 전격 결정합니다. 이는 곧 당시 세계 통화중 가장 영향력있던 기축통화에 해당하는 영국

파운드화 경제권으로의 진입을 뜻하지요. 때문에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배상금을 영국 파운드화로 받습니다.

(청나라가 HSBC에서 돈을 빌리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 물론 그 금액은 이후 일본의 군비확장 자금으로

거의 다 쓰이게 되지만, 일본은 전쟁배상금을 영국은행 (이때의 영국은행은 HSBC가 아니라 흔히 영란은행

이라고 하는 영국의 중앙은행 Bank of England )에 예치하고, 서방금융체제로 진입하는 것이지요.

 

영국은행에 돈을 예치하고 금본위제도에 편입된 일본은 이후 HSBC 등의 협조로 런던금융시장에서 공채를

발행하고 국채도 발행해서 이후 막대한 러일전쟁 전비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지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재정지출의 정반가량을 군비확충에 올인합니다. 러일전쟁이 시작되고서는 재정의 80%가 전비에 쓰였구요.

이때 일본이 런던 금융시장에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때 보증을 서준 게 영국은행입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이후 영국과 일본은 1901년 영일동맹까지 체결하고 일본은 영국의 보증아래

신나게 국채를 발행합니다. 러일전쟁 이전에 발행한 것 외에 전쟁중에 4회, 전쟁이 끝난 후에 2회에 걸쳐

총 1억 3,000만 파운드 규모의 국채를 발행합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청일전쟁과 달리 배상금은 한푼도

받지 못하지만, (만주와 조선에서의 우월적 권리나 사할린 할양등은 차치하고) 런던금융시장을 통해서

국제금융계에 화려한 데뷔를 한거지요. (러시아는 노불동맹을 맺고 파리에서 국채를 발행해서 전비를 마련)

 

물론 런던시장에서 발행된 막대한 국채를 매입해줘가면서 일본을 지원하고 러시아를 견제한 영국이지만,

영국도 일본의 승리를 확신하지는 못했는지, 국채매입에 미국을 끌어들입니다. 일종의 리스크 분산이지요.

이때 미국쪽에서 일본에 500만 파운에 달하는 돈을 댄 자본이 유태계 제이콥 쉬프의 돈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감에 돈을 댔다고 하더라는....돈버는 데는 천부적인 그들이라...

영국쪽 자본에도 그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돈 등 유태계 자본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러일전쟁 종결후 일본을 방문한 쉬프는 극진한 대우를 받고 일왕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받습니다.

 

이렇게 영국의 도움 아래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정부예산의 7배가 넘는 막대한 전비를 해외국채로

발행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으로 전쟁배상금을 하나도 받지 못하자 경제가 휘청하지요.

그래서 1905년 상속세를 신설하고 이후 소득세 인상, 영업세와 주세, 설탕소비세, 간장세, 등록세,

각종 거래세, 수렵면허세, 광업세, 인지세 등도 이 시기에 신설되거나 인상됩니다. 담배와 소금의 전매도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2019-11-14 09:49:11

 80년대 일본인 저자의 유태인 음모론 서적이 상당히 범람했었는데 이런저런 인연때문인가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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