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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2019년 노벨 문학상 - 피터 한트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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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16 20:24:18

편집에 문제가 있어서 수정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작년도 노벨 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 논란으로 수상자가 없었죠.

그래서 이번에 두명의 수상자를 뽑았는데, 한사람은 2018년 수상자고, 다른 한사람은 2019년 수상자입니다. 좀 묘하네요.

 

2019년 노벨 문학상은, “언어적 창의력으로 인간의 주변성(periphery)과 특수성(specialty)을 탐구한 영향력 있는 작품”들을 보여준 피터 한트케에게 수여되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 영화를 좋아하시는 DP인들은 특히 - 피터 한트케를 아시거나 최소한 이름은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에 대해서 문외한이 저도 이 이름은 들어 봤으니까요. 문학상은 과학상과 달리, 노벨상 홈페이지에도 그의 ‘업적’을 설명하는 글은 따로 없고, 대신 수상자 약력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차피 제맘대로 하는 리뷰이므로, 아마츄어리즘을 마음껏 발휘하여 자유롭게 적겠습니다. 개봉 박두!


제가 처음 피터 한트케의 작품을 접한 것은, 대학때 본 연극 ‘관객모독’을 통해서였습니다. 연극 포스터에 ‘침을 뱉지는 않겠다!’라는 캐치프레이즈와 고함을 지르는 듯한 배우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는데, 나중에 누가 말하길, ‘침을 뱉지는 않고 분무기로 뿌린다’고 해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연극을 보신 분들은 아실 거에요. 이 연극은 대사가 무의미합니다. 뭘 하려는건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남성 3명과 여성 1명 (제가 본 연극 구성은 이랬습니다.)으로 이루어진 배우들은, 연극 내내 무의미한 것 같은 대사를 계속 읊조립니다. 연기도 하긴 합니다만 그 연기가 대사와 전혀 매칭이 되지 않습니다. 연극의 한 장면을 - 오래 전이지만 - 생각나는 데로 설명하면,

한 사람이 뱀장수의 목소리로, 마치 뱀을 파는 듯한 연기를 합니다. 분명히 목소리와 액션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로는 계속 엉뚱한 대사를 합니다. 그 대사는, 잘 기억은 안나는데, 아마 이런 비슷한 대사였나 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상황을 연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보고 여러분~ 은자신~ 을 인식할~ 수없을! 것입니다...   “

 

갑자기 멜로도 나옵니다.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는데, 대사는 위와 비슷합니다.  한 문장을 한 사람이 다 마치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남: “여러분은 “

녀: “당황할 필요가 “

남: “없습니다?“

녀: “여러분은 의미가 !”

남: “ 없습니다 …”

 

대강 이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소품도 없고, 의상도 평상복입니다. 그냥 목소리 톤과 연기만 있습니다.

이번에 글 쓰면서 인터넷에서 대본 일부를 찾아보니, 배우들에게 기본적인 설정 리스트를 제공해 주고,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 대사가 정해져 있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 오리지널의 설정리스트는 당시의 독일 문화권에 어울리는 거였을 것이므로, 한국에서 공연할 때는 한국적 설정을 새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뱀장수라든지, 제사지내는 장면이라든지, 등등...

연극이 끝나갈 때쯤, 배우들은 미리 관객들에게 경고 비슷한 걸 날립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객석의 누군가를 가리키며 ‘너!’라고 갑자기 도발을 겁니다. 그 다음부터 - 그 사람한테는 아니고 불특정 다수의 관객들에게 - 욕을 하기 시작합니다. 나중엔 그야말로 쌍욕을 날립니다.

욕이 한참 진행되다가 분무기로 물을 뿌리기 시작하고, 막판에는 세수대야로 물을 한바가지 객석에 뿌립니다. 그리고 무슨 종이테이프 같은 걸 객석에 던지면서 배우들과 연결, 일종의 공감대를 상징하는 듯한 액션을 하는데, 이런 마무리가 원래 희곡에 있었을지, 한국판으로 넘어오면서 다소 변형된 설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희곡은 피터 한트케의 두번째 작품으로, 그가 24살이던 1966년에 발표한 것입니다. 첫번째 작품인 소설 ‘말벌들’과 마찬가지로 평론가들의 평은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의외로 프랑크프루트 공연에서 관객들 반응이 폭발적이었고, 곧 유명 작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앙팡 테리블’로서 기존 유명작가들을 거침없이 비난하면서 주목을 끌던 그는 이 연극으로 아방가르드의 무서운 신예작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 연극에서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전 그가 이 연극에서 ‘연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관객에게 보통의 연극무대에서 기대하는 스토리텔링에 적응하지 말고, 각각을 분리해 보라고 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의도한 대사는 사실 끊임없이 배우들의 입을 통해 말해지고 있지만, 그것은 배우들의 행동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심지어 배우들이 거꾸로 관객들을 평가하고, 서슴없이 욕을 하고, 물세례를 퍼붓습니다. 형식의 한계를 넘어보려고 한것 같고, 이야기수단으로서의 연극이 아니라, 그냥 이 무대 자체에 집중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대학때,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볼 생각을 친구랑 했던 적이 있어요. 저도 프로그램을 못하지는 않지만(^^;) 그 친구는 굉장히 잘했고, 둘다 울티마 같은 롤플레잉 게임도 좋아했죠. 그런데 게임에 뭔가 충격을 주고싶은 거에요.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에게 어떤 신선한 경험을 줄 것인가… 주로 스토리 내에서 멋지고 감동적인 장면(예를 들면 왕겜의 호도르 같은 캐릭터가 싸움은 잘 못해도 위기에서 자기희생적인 행동으로 주인공을 구한다든지)을 제안했던 그와 전~혀 다른 제안을 제가 한적이 있는데, 게임의 전개에 따라 실제로 게임이 종료되면서 컴퓨터의 파일 몇개를 삭제하는…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제안을 한 적이 있어요. 그당시 어린 마음에는, 게임은 그냥 무슨 짓을 해도 게임 안에서일 뿐이라는게 굉장히 큰 한계처럼 보였고, 어떤 식으로든 게임 바깥의 실제 세상에서의 상실감으로 연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거죠. 그 친구는 내 생각을 - 다행히도 - 전혀 이해 못했는데, 만약 의기투합 했다면, 최초로 유저의 파일들을 공격하는 바이러스형 롤플레잉 게임으로 이름을 날릴뻔 했습니다. ^^

이 이야기를 왜 했냐면, 에… 제가 느꼈던 스토리텔링 수단으로서의 컴퓨터게임의 한계와 그걸 극복하고 싶다는 제 생각이, 피터한트케가 느꼈던 연극이라는 형식에 대한 생각과 뭔가 일맥상통하지 않았었을까… 뭐 이런… 뻘소리였습니다.


그는 영화대본도 많이 썼고, 자신이 직접 감독한 영화도 있습니다. 아마 그가 참여한 작품 중 DP에 가장 잘 알려져 있을 영화는.....


“베를린 천사의 시” 입니다.


뜻밖이죠? ‘관객모독’과 ‘베를린 천사의 시’는 시간적으로 20여년 떨어져 있다는 걸 감안해도, 뭔가 같은 맥락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헐리우드판 리메이크(니콜라스 케이지와 맥 라이언이 나오는…)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피터 한트케가 의도한 바 중 (극히) 일부분만을 영화에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보다 한트케스러웠던 작품으로는, 아마 영화를 전공한 분들이나 특별히 아트필름을 찾는 분들이 아니면 들어볼 일이 없을 영화, “페널티킥을 맞이하는 골키퍼의 불안”이 있습니다. 그의 단편소설을 각색했죠.

1972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아 그 전에, 두 영화의 공통점을 아시겠나요? 작가 말고요.

네, 두 영화 다 감독이 '빔 벤더스'라는 분입니다. 둘이 공동작업을 꽤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페널티’...”도 '관객모독' 수준의 파격은 아니지만, 주인공의 스토리릍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불안 자체’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관객모독'과 일맥상통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젊은 시절이라서 그런걸까 싶어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비하면....

그는 이외에도 ‘왼손잡이 여인’으로 78년 칸느에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고, 92년에는 ‘The absence’라는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릅니다. 둘다 감독으로서입니다. 빔 벤더스와는 아직 둘다 20대였던 72년의 ‘패널티…’를 시작으로, 75년 ‘wrong move’, 87년 ‘베를린 천사의 시’, 그리고 최근인 2016년 ‘아랑훼즈의 아름다운 나날들’의 각본에 참여합니다. 'wrong move'는 빔 벤더스의 로드무비 3부작 중 두번째 작품인데, 사실 3부작의 첫번째인 ‘도시의 앨리스’도 피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short letter, long farewell)’에 기반을 둔 작품입니다. 위키에는 빔벤더스의 역작(!), ‘이세상 끝까지’에도 참여했다고 나오는데 그건 사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음악이 참 좋았는데…(summer kisses winter tears~~) ‘왼손잡이 여인’도 피터 한트케가 감독,각본을 했지만 제작은 빔 벤더스가 했습니다. 보진 못했지만 영화가이드의 평에 의하면 차암 지루한 영화라고…. 이 글을 쓰면서 기회가 되면 ‘아랑훼즈…’는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알려질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오스트리아의 ‘앙팡 테리블’, 무서운 신예 전위주의작가였다고 합니다. 그가 관객모독이나 페널티...에서 하고 싶었던 것은, 위에서 적은 것처럼 기존 형식의 한계를 넘어선 직접적인 의사소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관객모독에서는  ‘연극이란, 무대에서 대사와 소품과 연기로 전달되는 네러티브가 본질이 아니다… 무대와 무대 앞 공간에서 벌어지는 그 자체…’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저 나름대로의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페널티…’에서는 위에도 적었지만 현대인의 불안함을 스토리에 녹여내는 방식이 아닌,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베를린 천사의 시’는 무엇인가?

그의 중후반기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게 별로 없지만, “추운 겨울에 가슴 한켠이 따듯해져 오는 몽롱함을 느낄 수 있는” 이 영화는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뭔가 이야기하실 거리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 영화 전반에 걸쳐 독백처럼 전해지는 피터 한트케의 시 ‘유년기의 노래’는 영화의 상황과 어우러져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줍니다. 저라면 이 영화의 제목을 ‘천사의 손길’이라고 짓고 싶네요.. touched by an angel… (스포일러가 될지 모르나, 영화에 두종류의 touch가 등장하죠…)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그는 초창기에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벤츠 E 클래스 패키지 이름이 아니에요… ^^) 작품들이 특징이었으나, 중후반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작품들을 한 것 같습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혹시나 아직 이 영화를 못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꼭 보시라고 강추하겠습니다. 취향을 탈 수는 있으나… 아뭏든 따듯한 영화입니다. 참고로, 원제는 'Der Himmel über Berlin(베를린 위의 하늘(천국))'인데 영어 제목은 'wings of desire(욕망의 날개)'라는 군요. 한국제목은 일본제목을 따온거라던데 영어제목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와 관련된 한가지 논란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태생이지만 어머니는 슬로베니아계였고 생물학적 아버지는 독일인 나치 군인이었습니다. 1942년에 태어났으니 그당시 오스트리아 상황으로 볼때 유부남 군인과 소수민족 출신의 점령국 여인과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또다른  나치군인이었던 부르노 한트케와 결혼해서 아들에게 한트케라는 이름을 주게 되죠. 그들은 1948년까지 베를린에서 살다가 어머니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고, 그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에 빠져 폭력적이 됩니다. 피터 한트케는 여기서 기숙학교를 시작으로 65년 그라츠 대학 법학과를 그만둘 때까지, 학업을 이어갑니다.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그의 첫번째 소설 ‘말벌들(Die Homissen)’의 출판이 결정되어서 라고 하네요. 본인은 진작에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고등학교때 선생님이 ‘괴테도 법대 출신이다’라고 설득해서 법대를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가던 1971년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는 1년 후 자전적 중편소설, ‘소망없는 불행(영어로는 A sorrow beyond dreams)’을 통해 그의 어머니에 대해 ‘매우 담담한 문체로’ 이야기합니다. (주말에 서점가서 한권 사볼까 합니다. 어쩌면 이를 계기로, 아방가르드했던 그의 작품세계가,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탐구로 방향이 조금 바뀌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가 가진 이러한 배경이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몰라도 그는 1996년에, 세르비아 역시 유고내전의 희생양이라는 취지의 여행기 ‘도나우,사바,모라바, 그리고 드리나강으로의 겨울여행과 세르비아의 정의’를 발표해 구설수에 오르는데, 특히 작품에서 유고내전을 왜곡보도한다고 서방언론을 비난했다고 합니다. 이후 2000년대 중반에는 유고내전의 전범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된 밀로세비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가죠? 혹시 그가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 아시는 분 있으시면 공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밀로세비치의 장례식에 짧은 헌사도 남겼다고 하네요. 이런 이유로 그가 2014년 입셍 상을 수상하자 심사위원 일부는 사퇴하기도 했는데요, 위키에 따르면, 노르웨이 언론에서의 한트케에 대한 평가는 ‘전범들과 결탁한 파시스트’라 합니다. 흐음…


그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과거 유고연방 국가들 - 코소보,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크로아티아 - 이 유쾌할리 없습니다. 아마 취소하라고 지금도 목소리를 내고 있을것 같습니다. PEN America라는 미국 자유언론단체도 ‘깊은 실망감’을 표했다고 하고요. 

지금도 한트케는 세르비아 한림원 소속이면서 세르비아 정교회 일원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말에 유고국적을 취득했었다는데, 이로 인해 그의 오스트리아 국적이 취소가 되는지 - 2019년 10월 현재 - 확인중이라 합니다. 오스트리아는 원칙적으로는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가 봅니다.


어쩌면 노벨상은 수상자의 정치적 입장과는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보르헤스 같은 작가가 노벨상을 받지 못했던 이유가, 그가 남미 우익정권(피노체트!)을 지지했기 때문이라는 게 거의 정설인 걸 생각하면, 뭔가 일관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좌익 독재자들을 지지한 작가들에 노벨상위원회가 상대적으로 관대한 것 같긴 합니다. 스탈린을 지지한 사르트르나 네루다, 혹은 카스트로를 지지한 마르케즈 같은 수상자들이 있죠. 하지만 밀로세비치는 공산주의자라기 보다 잔혹한 인종청소를 주도한 과격 민족주의자 아닙니까…)


요약하면, 2019년 노벨 문학상은, 초기에는 ‘관객모독’을 통해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중반기에는 ‘베를린 천사의 시’와 같은 인간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가진 작품들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후반기에는 밀로세비치를 지지하여 많은 논란에 휩싸였던 오스트리아의 작가 피터 한트케에게 돌아갔습니다.


<추가:191116 20:19>

    어제 글에 적었던 바, 서점에 와서 '소망없는 불행'을 다 읽었네요. 70여페이지 되는 중/단편입니다.

    읽으면서, 한트케를 연극이나 영화가 아닌 글로 만난게 이것이 처음이라는 걸 꺠달았습니다.

    참... 좋네요. 읽고 났더니 위의 글 중 일부를 수정하고 싶어집니다만... 그냥 둘까 합니다.

    뭐랄까... 그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거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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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what we Bokononists whisper whenever we think of how complicated and unpredictable the machinery of life really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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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9-11-15 23:30:12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매우 흥미롭군요.

WR
2019-11-15 23:43:02

감사합니다. ^^

인종적으로도 세르비아계도 아니고 슬로베니아계인데...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밀로셰비치의 불우한 가정사가 뭔가 공감을 불러일으킨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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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15 23:50:44

헌데 웃긴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도 제2차 세계대전과 구 유고슬라비아 전쟁때

자국내에서 살던 세르비아인 사람들 엄청나게 대량학살하여 죽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 두 나라가 부코바르 학살과 스레브레니차 학살 같은 유고 전쟁 시기

세르비아군과 민병대가 저지른 학살을 문제 삼아서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반대하면

세르비아도 이에 뒤질세라 보스니아,크로아티아 니그들도 우리나라 사람들 많이 죽였잖아라며 

강경하게 맞받아 칠 정도.

WR
2019-11-16 07:04:31

발칸반도가 달리 화약고가 아니었겠죠. 이제 다 각각의 국가가 되었으니 좀 나을까요..

3
2019-11-16 00:04:28

- 이름만 알고 있는 피터 한트케군요. 

'관객모독'과 '베를린 천사의 시' 역시 존재만 알고 있는 상태. 

한데 쓰신 글로만 보기엔 글빨이 좀 받는 또라이 정도로 보이네요. --;

- 보르헤스는 처음 접하면 와 이런 참신한 아이디어들과 감각이라니 하고 놀라지만 보다보면 차츰 열정이 식는게 느껴지던 작가였네요. 

- 그나저나 아직껏 밀란 쿤데라도 수상자 목록에 올리지 못한 노벨문학상 따위...

WR
2019-11-16 07:29:08

피터 하트케를 제가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합니다만, 결코 '글빨이 좀 받는 또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누군지 까먹었는데 이미 몇년전에도 어느 수상자가 '왜 피터 한트케가 아니고 내가 수상자냐'라고 이야기했었다 할 정도.    다만... 밀로세비치...

 

보르헤스가 노벨상을 받지 못하면 '노벨상의 수치'라고 했었다죠.

말씀하신 밀란 쿤데라 는 아직 살아 있으니 가능성이 ^^

문학의 특징이겠지만 노벨 문학상은 항상 논란이 있는 것 같아요.

1회 (1901년) 수상자부터 논란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가 받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에밀졸라, 마크 트웨인 등의 작가들도 받지 못했는데, 초기에는 북유럽 작가 편중 현상이 특히 심했던 것 같아요. 아마 심사위원들이, 제대로 외국 작품들을 평가할 수 없었던 시대였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그러면 또 헨릭 입센은 왜 수상자에서 제외되었는가... 이상하죠...)

 

딴 사람 다 제껴두고라도, '제임스 조이스'가 받지 못한 건 정말 아쉽습니다..

조금만 더 오래 살았었으면 분명히 받았을 텐데...

2019-11-16 12:19:40

결국 심사를 누가 하느냐, 시상을 통해 어떻게 상의 가치를 높여 가느냐의 문제이긴 하죠. 

 

어쨋건 공들인 정성글 잘 봤습니다. 

1
2019-11-16 09:23:12

역시 정성글엔 추천이죠.

 

중간에 읽다가 포기하고 만,

박상륭 작가의 죽음의 한 연구 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한 100페이지 까지의

길고 장황한, 내 호흡에 맞추려면 이 정도 레벨쯤일 거야라는

작가의 도발같은 느낌도 받습니다.

그 이후부터 에코의 팬이 되었어요.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도

읽기만 해도 쏟아지는 잠(?) 때문에

반 권밖에 진도가 안나가고요.

 

이제는 노안도 와서, 참. 어쩔...

 

탁월한 박식함에

X랄을 탁 치고

감복합니다. ㅋ 

WR
1
2019-11-16 10:33:15

감사합니다.

예전엔 꽤 읽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저도 책읽는게... 특히나 소설은 손이 잘 안가요. 영상문화의 폐혜인것 같기도 하고..

에코... 사람들이 다들 대단하다고 하는데, 정작 저는 읽는게 힘들어서.. ㅋㅋ

내가 책읽는게 되게 훈련이 안되어 있는가보다... 했었어요.

(그런데 유발 하라리 같은 책은 술술 읽히는데, 그 책을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고요.. 다양한가 봅니다.)

장미의 이름도 숀코네리와 크리스챤 슬레이터가 대신 읽어 주고 ^^ 

 

2019-11-16 14:08:59

대부분의 문학작품 영상화가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장미의 이름은 영화와 소설이 상당히 다른 편이에요.

사실 스토리의 뼈대는 간략한데 핵심은 중세시대 갑갑하고 불합리한 시대상과 교회 권력/정치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네요. 자기가 만든 언어를 꾸미기 위해 판타지 소설들을 쓴 톨킨처럼 에코는 자신의 고전/중세 지식들을 알리고 싶어 미스테리 소설들을 쓴 듯 하달까.

영화는 영화 나름의 풍취를 잘 살린 편이지만 확실히 소설과는 느낌이 달라요.

에코나 쿤데라 같은 소설들은 영상화하기 힘든 소설 특유의 장점을 잘 활용한 소설들로 보여요.

스토리의 뼈대보다 뼈대를 덮는 각종 부수물들에 더 초점이 맞춰진달까.

WR
2019-11-16 14:37:39

그렇군요.
에코를 한번 재도전해 봐야겠네요.
예전에 수필은 한권 읽었더랬죠.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감사합니다.

2019-11-16 15:13:24

개인적으론 에코 소설 중 '푸코의 진자'가 제일 맘에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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