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VER HEALTH CHECK: OK
1
프라임차한잔
ID/PW 찾기 회원가입

[차한잔]  [역사]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6
  1707
2020-01-18 15:20:03

19세기 조선에서 이른바 개화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은 박규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박지원의 후손이었고, 제네럴 셔먼호 사건 당시 평양의 책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가장 깨어있는 사람 중 한명이었는데, 실제 그의 글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그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인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근대한국 국제정치관 자료집이라는 책에서 그의 편지가 소개되어 있어 이를 한 번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

박규수가 온경에게 보낸 서한 (예의지방이라는 말에 대한 생각) 

공친왕이 화륜선의 제조를 감독하기 위해 천진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는데, 저 오랑캐가 다녀온 날짜가 천진을 왕래하는 시간과 꼭 일치한다. 그렇다면 북경에까지 가지 않고 바로 공친왕에게 요구를 했다가 거절당한 것이다.고 하니 그 말이 혹 그럴 법하다. 이른바 예의지방이 먼 데서 온 오랑캐에게 모욕을 당함이 끝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무슨 일인가

걸핏하면 예의지방이라고 하는데, 나는 본래 이 말을 고루하게 여긴다. 천하만고에 어찌 나라가 되어서 예의가 없는 것이 있겠는가? 이는 중국인이 오랑캐 가운데서도 이러한 나라가 있음을 가상하게 여겨서 예의지방이라고 부른데 불과하다. 이는 본래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말이니 천하에 스스로 뽀내기엔 부족한 것이다. 조금 지위와 문벌이 있는 자가 매번 양반, 양반을 거론한다면 이는 가장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말이자 가장 무식한 말이 된다. 지금 매번 예의지방을 자칭하는 것은 예의가 어떤 물건과 일인지 알지 못하는 말이다. 

일본서계 관련 박규수가 대원군에게 보내는 답사

(우리가 일본의 서계를 받지 않은 이유) 

첫째. 예로부터 서계가 왕래할 때는 피차가 격식을 신중히 준수해서 격식에 어긋남이 있거든 비록 한글자 한 획이라도 반드시 따져서 받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이 더욱 까다롭게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그렇게 해서 서로 양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 황실을 쓸 때는 한 글자 높여 적고 칙이나 경사 등과 같은 말을 쓴 것입니다. 
셋째. 황실은 한글자 높여 쓰면서도 귀국은 한글자 낮춰서 쓴 것입니다. 
넷째 우리나라가 제조해서 보낸 도서로 인압하지 않고 갑자기 저들이 만든 인신을 찍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받아야 하는 이유) 

저들이 황실, 황상을 쓸 떄는 과연 한 글자를 높여 썼으며 일본국, 조선국, 본방, 귀국, 조정, 칙, 경사, 예지 등의 글자를 쓸 때는 모두 똑같이 행을 맞추어 높여 적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오직 황실과 황상에 대해서만 한 글자를 높여 쓴 예를 보건대, 만약 우리나라의 지존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면 반드시 황과 똑같이 높였을 것입니다. 단지 아직 언급이 없었들 따름입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저들이 반드시 저들의 皇자보다 낮추어 쓸 것이라고 미리 예측한다면, 이는 바로 형체가 없는 일로써 스스로 모멸을 취하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이렇게 할 것이 있겠습니까?

 서계에서 직함을 덧붙여 쓴 것은 저들이 스스로 제 나라의 정령이 일신되었음을 자랑하고 저들 군주의 우상을 입은 것일 뿐이니 그 이른바 벼슬길에 나아간다는 것이 우리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서계가 이전의 격식과 다르다고 해서 꾸짖고 접수하지 않는다면, 역관의 견해에 있어서는 괴이할 것이 없겠으나, 어찌 반드시 조정에서까지도 달갑지 않게 여기며 이를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의 웃음거리로 부치면 될 것입니다. 

 저들이 천황을 칭한 것이 수천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라 안에서 스스로 칭하는 것이자 스스로 높이는 것이니 타국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당나라 고정의 전성시대에 일본이 장안에 왔는데 그 글에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내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당나라 조정의 군신들이 일찍이 거절하고 접수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며 단지 연회를 베풀고 의복을 하사하여 좋게 돌려보냈을 뿐입니다. 자고로 멀리서 온 자들을 대하는 방법이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니 지금 어찌 저들과 더불어 칭호를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일후에 과연 오만한 말이 있으면 그때 가서 거절하고 책망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보낸 도서로 찍지 않고 저들이 새로 만든 인장으로 압인한 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도서가 본래 연문이자 가소로운 일이었습니다. 이 도서를 보내면 저들이 우리를 신하로 섬기는 것이 되며, 우리나라에서 봉건해준 모양이 되겠습니까? 

(중략)

하물며 저들이 서양과 한편이라는 것을 분명히 들어서 알고 있는데도 어찌하며 다시 화호를 잃어 적국을 하나를 더한단 말입니까? 

김윤식이 박규수를 회고하는 글

당시 한번은 선생을 모시고 있었는데 선생께서 큰 탄식을 하시며 말씀하셨다
“돌아보건대 지금 우내의 정세가 날마다 변해서 동서의 여러 강국들이 병치한 것이 옛날 춘추열국 시대와 같으니, 장차 회맹과 정벌이 어지럽게 일어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지만 동양의 중추에 처해서 마치 정나라가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있는 것과 같으니 내치와 외교에서 기의를 잃지 않는다면 그래도 스스로 보전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지하고 약한 나라가 먼저 망함은 하늘의 도이니 다시 누구를 탓하겠는가? 내 듣자하니 미국은 지구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가장 공평하다고 일컬어지며 분쟁을 잘 해결한다고 한다. 또 부가 육주에서 가장 으뜸이라서 영토를 넓히려는 욕심이 없으니 저들이 비록 말이 없더라도 사전에 교분을 맺고 맹약을 체결해야 요행이 고립되는 근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밀쳐서 물리치고 말았으니 어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겠는가?”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위 말하는 보수파가 정말 세상물정을 모르고 세상과 담을 쌓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래는 1879년 영의정 이유원이 중국의 리훙장에게 보낸 편지인데, 그가 제기하는 물음들은 충분히 합리적인 것이었고, 또 중요한 것들이었습니다. 보수파도 덴마크 벨기에 터키 등의 나라를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을 따라하기 조선의 여건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

이유원이 리훙장에게 보낸 편지 (1879)

옛날에 국가의 계책을 세우는 자가 말하길 “먼 국가와 교제하고, 가까운 국가는 공격한다”고 하고 또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공격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적으로써 적을 제압하는 술책입니다. 그러나 지금 국면은 완전히 다릅니다. 비록 무력이 강해서 자력할 수 있는 나라라고 해도 아침엔 폐백으로 교제하고 저녁엔 전쟁해서 두 가지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면 그것을 하는 와중에 피혜해져서 내가 먼저 패하고 말 뿐이니 어찌 우리와 같이 문약한 나라가 옛날의 경우를 본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불가능한 것이지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신황은 백초를 맛볼 때 독을 만나면 죽고, 죽었다가도 다시 일어났지만 신황이 아닌 자가 이를 본받는다면 한 번 독을 만난 다음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자가 드물 것입니다. 지금 적을 제압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해도 내가 먼저 적의 공격을 당할 것이며, 독을 공격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해도 내가 먼저 중독될 것입니다. 한번 독에 중독된 다음엔 다시 일어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느 겨를에 적을 제압할 수 있겠습니까?

서양의 공법이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의 국가를 빼앗거나 멸망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도 터키에서 군대를 철수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무고한데 혹 타국에 의해 병탄당하는 독을 당하게 된다면 그때도 여러 나라들이 함께 이를 막아주겠습니까? 이것이 유독 확실치 않아 회의하면서 해소되지 않는 부분입니다일본이 류큐 왕을 폐하고 그 강토를 병탄한 것은 바로 걸송의 행실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유럽의 열강들은 제나라 환공이 군대를 일으켜서 형을 옮기고 위를 봉해 준 일처럼 하거나, 혹은 의리로써 일본인을 깨우쳐서 그들로 하여금 정나라 장공이 다시 허나라 군주를 세웠던 것처럼 하게 했어야 하는데, 귀를 기울여도 그러한 말을 들을 수 없음은 어째서입니까?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른 터키를 구원할 때는 공법에 의지할 수 있지만, 이미 멸망한 류큐를 부흥시키는 데는 공법이 시행되기 어려워서입니까? 아니면 일본인들이 사납고 약아서 각국을 경시해서 제멋대로 사리를 취하더라도 공법이 시행될 수 없기 때문입니까? 벨기에와 덴마크는 약소국으로서 대국 사이에 끼어 있음에도 강약상유에 의지하지만, 류쿠 왕은 수백 년의 오래된 나라인데도 상유하지 못한 것은 고립된 처지에 놓여 각국과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공법이 미처 시행될 수 없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우리나라는 기구하게 땅 끝자락에 위치해 있습니다. 터키, 류큐, 벨기에, 덴마크 등의 나라와 비교해보면 더욱 빈검하고 가난할 뿐만 아니라 서양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도달할 수 없으니 병사를 일으켜서 균형을 이루거나 옥백으로 주선하는 것도 스스로 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인은 통상에 익숙하고 제조에 뛰어나서 부강지술을 모두 깨우쳤는데도 오히려 그 창고가 비고 국채가 누적되는 탄식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렇다면 설령 우리나라가 계획을 바꾸어서 항구와 시장을 넓게 설치하고, 마침내 먼지역과 교통하여 그 교묘함을 모두 배우더라도, 반드시 띠풀로 자를 깔고 바구니를 만들어 손님을 맞이하여 응수하는 사이에 바로 곡식자루가 비게 될 것이니, 어찌 국고를 고갈하고 국채를 누적해서 일본의 전철을 밟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나라의 물산이 멸렬하고 화물이 조악함은 사방에서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각국이 멀리서 와서 교역한다면, 마치 아주 작은 고을의 시장이 천금의 상인을 수용하기 어려운 것과 같을 것이니 또한 주객에게 모두 이득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스스로 일으키기 어려움이 실제로 이와 같습니다. 앉은뱅이 주제에 먼 길을 가려고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방구석을 앉아서 지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

이유원의 고민에 대해서는 여러분께서는 뭐라 답할 수 있을까요? 
3
Comments
2
2020-01-18 16:44:49

거꾸로 본문을 쓰신 회원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조선 조정 실권과는 천리밖 멀리 떨어져 있는 선각자들이 택할 선택지... 과연 존재자체가 있었을까요??

 

조선은 조정의 막강한 실권을 가진 사람들은 정권 유지에 정신이 없었죠... 대격변기가 오고 있음에도 언발에 오줌누기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특히 국왕 고종은.....

그렇다보니 대책이 나올리가 만무하죠..

 

근대 개화기 시대 조선과 일본을 갈라놓은 결정적 차이가 바로 그점이었습니다...

개화기때 조선에 들어온 일본제국주의자도 그 점을 못봤을 리가 없었습니다..

2
2020-01-18 17:09:08

일본이나 청이 서양과 교류를 시작한 시점을 생각하면, 근대에 조선이 개항하냐 마냐는 아무의미없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배 떠나간지 너무 오래되어서요.

3
2020-01-18 17:11:58

내부 사정(세도 정치 겨우 정리한게 1864년이었죠, 가라앉은 왕실 권위 올리는게 더 시급했으니)에다가 외부 사정(양요로 두번이나 당했으니)까지 겹친데다 시간 자체가 모자랐습니다.

미래를 아예 내다보는 사람이 정권을 잡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글쓰기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