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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책)메흐메드 알리 - 이집트 근대화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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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21 11:46:40

칼레드 파흐미, '메흐메드 알리' -일조각-

메흐메드 알리 (또는 무함마드 알리. 1805~1848년 재위)는 중동근대사를 다루는 책에는 꼭 나오는 인물입니다. 중동사 연구자들이 이슬람이 근대화에 대해 저항했다 또는 이슬람이 근대까지 정체된 사회였다는 편견을 깨는데에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됩니다. (다른 하나는 오스만 제국의 셀림3세부터 이어지는 19세기 개혁)

'이집트에서는 반란에 성공한 무함마드 알리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으며 이에따른 결과로 나타난 새로운 질서가 향후 100년에 걸쳐 국가를 근대화시키는데 기본적인 틀이 되었다. 이런 한 개혁은 무함마드 알리가 울라마와 전통적인 군부 세력인 맘루크를 제거하고 그들의 속박에 놓여있던 인적, 물적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무함마드 알리의 명성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차츰 이름뿐이던 오스만 제국의 대군주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 캠브리지 이슬람사 -

'이집트 개혁에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와은 달리 국가가 경제를 장악하는데 비중을 두었다. 무함마드 알리는 관개시설을 개선하고 목화생산을 장려하고 국영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군수품 생산공장에 투자했다. 광범위한 경제개혁조치를 통해 새로운 지주계급과 관료계급이 탄생했으면, 19세기 말에는 그 자손들이 공무원, 법률가, 언론가, 정치가 등의 사회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 이슬람의 세계사 2 -



메흐메드 알리는 수니파 쿠르드인을 선조로 둔 그리스 출신이었습니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이 그의 인생을 바꿉니다. 당시 오스만제국은 프랑스를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모집하는데 지방간부였던 매형이 나두면 골치아플것 같은 처남을 이집트로 보내버립니다. 막상 이집트에 도착했는데 프랑스는 영국의 개입에 의해 물러나고 오스만이 보낸 총독은 토착세력인 맘루크 지도자들에 의해 이름뿐이었고 실질적인 지배자들인 맘루크 지도자들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파견군의 총사령관이 살해되고 메흐메드는 같이 간 알바니아 병사들에 의해 (또는 이용하여) 세력을 구축하면서 이집트의 주요 정치세력인 총독과 맘루크를 차차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한편에서는 울라마(종교학자), 상공인, 농민으로부터 지지를 얻는 조치들을 취합니다.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었던, 심지어 아랍어도 몰랐던 그리스출신의 이방인이 오스만 제국의 가장 큰 부를 가지고 있었던 이집트를 지배합니다. 물론 지배하기 전이나 후나 모두 적대적인 경쟁자들에게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지배층이나 대다수가 농민인 이집트인, 무함마드 알리가 넓힌 영토 예컨대 시리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기도 합니다.
* 참고로 오스만제국은 보통 18세기부터 약해지기 시작하고 이를 틈타 토착세력인 맘루크들은 반독립적이 됩니다.

메흐메드는 결국 이전에는 오스만에서 파견이었던 총독자리의 세습을 인정받습니다. 한때는 오스만 제국의 심장부까지 쳐들어가고 시리아, 메카, 크레타까지 점령하지만 유럽 열강의 간섭과 침략을 두려워하여 이집트에서의 안정적인 권력독점(총독 세습)으로 타협합니다.
그런 성공의 배경으로 메흐메드의 개혁을 꼽습니다.(심지어 메흐메드에게 연패한 오스만제국의 탄지마트 개혁이 서구보다는 메흐메드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메흐메드는 경제개혁(무역 독점)과 농민에게 불리한 세금 제도 개편, 군대 개혁(서양군대 모방), 서구의 면직업 공장 도입, 교육개혁(초등학교부터 중등교육기관까지 신설), 의료 개혁(병원 건설), 인구조사 등을 실시합니다. 이것이 위의 책에서 언급되는 (근대화라고 언급되는) 메흐메드의 업적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개혁의 이면을 보여줍니다. 경제개혁과 과도한 세금은 이집트 농민들에게 싸게사서 대외적으로 비싸게 파는 메흐메드 가문과 지배엘리트만을 위한 것이었고 세금 개선도 그 이전 맘루크 지배때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들고일어선 농민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하는것은 반복된 후속조치였습니다. 군대개혁도 상비군을 농민에게서 징집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평생복무해야 해서 농사를 지어야하는 농민에게는 큰 손실이었습니다. 농민들은 손가락을 부러뜨리기부터 마을에서 도망까지 저항합니다, 농민에게 가장 큰 저항을 받은 정책이었다고 합니다. (반대하면 역시 가혹한 탄압) 면직업 활황때문에 도입된 공장도 가혹한 노동조건이서 노동자들은 거의 노예수준이었고발생한 이익도 메흐메드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교육도 초중등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학문보다는 당장 지배에 용이한 인력을 양성하려는 목적이어서 중등생이 초등학교보다 많은 인력수급의 불균형이 있었고 학교에 입학하면 기숙사에 들어감으로써 가족과의 절연을 해야했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이 소극적이었다고 합니다.(만약 학교에서 학생이 도망가면 심지어 부모를 죽임) 체계적인 인구조사나 토지조사도 이집트인들을 군대에 징집하기 위해서거나 수탈하기 위한 목적이었답니다.
유일하게 이집트인들이 저항이 적은 것은 의료개혁이었다고 합니다. 근대적인 예방접종이나 검역체계를 도입했는데 이것도 군대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긴 한데 이집트인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저자는 기존의 메흐메드 알리 평가에 덧씨워진 이집트 (또는 이슬람)근대화의 선구자(기초자)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기존에도 가혹한 탄압과 학살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과가 있었는데 공으로 알려진 업적마저도 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메흐메드 알리와 그 일족 및 소수의 지배층을 이익을 위해 한 개혁인 것입니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國務를 '家門'으로 알았던 겁니다.

* 이전에 있던 책 게시판이 없어져서 여기에 올립니다. 별도 게시판이 있으면 옮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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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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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1 12:51:14

얼마전 이집트를 패키지로 다녀왔는데 조상 잘 둔 후손...딱 그정도였습니다. 기본적인 사회시스템이 전혀 정비가 안되있는데다 치안도 좋지않아 자유여행은 절대 추천못하겠더군요.

WR
2020-01-21 13:32:33

저도 언젠가 이집트를 가보고 싶어서 알아보고 있기는 한데 자유 여행으로 쉽지는 않겠더라구요. 그렇다고 패키지로 가기엔 너무 짧은것 같고.
아무튼 이미 다녀 오셨다니 주럽습니다. 피라미드 실물로 꼭 봐야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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