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치] 국민은 장면으로 기억한다
2010년 11월 오세훈 시장이 g20 손님맞이 한다고 강남에서 신연희와 함께 청소하는 모습입니다.
원래 이것말고 마치 만화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청소하는 장면이 있는데 구글에서 찾으려니 못찾겠네요.
사실 별 대단한 장면 아니죠. 정치인들이 의례 하는 퍼포먼스입니다.
하지만 제겐 오세훈 하면 유독 이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분명 그에게는 무상급식 반대 투표를 선언하며 무릎꿇는 그 유명한 장면(그의 정치생명을 끝장낸)이 있는데 말이죠.
그건 아마 당시 정치적 맥락과 g20 에 대한 국민의 시니컬한 감정에 둔감했던 그의 본질을 드러낸 순간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당시 대중들의 심리와 굉장히 괴리된 퍼포먼스였죠.
그는 몇달전 겨우 2만 몇천표 차이로 한명숙을 간신히 이겼어요. 나꼼수는 이명박을 조롱하며 서서히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물론 대선에서 생각지 못한 비극이 벌어졌지만요) 시의회는 온통 민주당 판이었지요. 그 와중에 중앙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이 퍼포먼스는 곧 그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에(이전까지 저는 그가 합리적 보수의 얼굴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대한 치명적인 오판 같이 보였던 게 당시 제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뒤 대중들의 기대에서 벗어나 스스로 막다른 코너로 몰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그가 임기동안 나쁘지 않은 시정을 보였음에도 그의 운명이 딱 거기까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대중들은 참 오묘한 존재지요.
아둔하고 순진하며 겁이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냉철하고 영악하며 용감하기도 하죠.
그래서 정치인은 지금 대중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 필수입니다. 그것은 마치 흐르는 강물 같아서 눈에는 보이지만 손에 잡히지 않고 말없이 흐르지만 무엇으로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치인은 그 흐름에 겸손하면서 어디로 흐를지 항상 조심하고 말 하나 행동 하나 깊이 생각하고 드러내야 하지요.
조국 청문회에서 박지원이 표창장 문자를 보는 장면입니다.
조국 전쟁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중 하나죠. 그가 대선때 아침마다 트위터로 문재인을 그렇게 괴롭혔음에도 이 장면 하나로 민주당 지지자들이 그를 왜 증오할 수는 없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동시에 그가 어떻게 지금까지 그 긴 시간을 살아남았는지도 보여주죠.
그렇죠.
대중은 정치인을 동영상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기억해요.
가장 결정적인 사진.
많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단 한장의 사진.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그에게 관심없던 국민중 누군가가 그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정치인들이 다 그런 장면을 갖고 있죠.
그 한 장면은 그를 대중정치인으로 떠올릴 수도 있고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안철수가 엠비아바타라는 말을 입에서 꺼내는 순간,
반기문이 퇴주잔을 마시는 순간,
유승민이 문재인의 끝까지 들어보라는 말에 움찔해 하는 그 순간...
그 한순간이 그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딱 그에 맞는 역할을 한정하고 말아버립니다.
이 순간 만큼은 진실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울 수 없는 이미지만 남죠.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민주당 정치인에 대해서 다들 뇌리에 각인된 장면들이 있습니다.
문재인에게는 노무현 장례식장에서 이명박에게 인사하는 장면이 있고
김대중에게는 군사법정에서 헌병들 틈에서 사형언도를 받던 장면이 있고
노무현에게는 삼당통합을 선언하는 김영삼을 향해 당원투표 하라고 외치던 장면이 있죠.
이해찬에게는 광주항쟁 청문회에서 공수부대의 진압봉을 들어보이던 장면이 있고
정동영에게는 열우당의 총선결과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던 장면이 있고(그는 이 장면을 어머니 정동영입니다 그 플랜카드로 날려버립니다)
박주민에게는 세월호 진상 조사 시위에서 전경 방패 앞에서 땅바닥에 주저 앉아 졸던 장면...
모두 한때 국민들의 마음속에, 또는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결정적으로 각인시킨 장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두가 연출된 게 아니라는 것이죠. 역사의 맥락 속에서 인상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낸 장면들입니다.
한나라? 새누리? 자한당? 미통당? 어쨌든 그쪽 인사들에게도 이런 장면들이 있습니다.
슬픈 것은 평범한 시민 입장에서 무엇하나 좋게 기억되는 게 없다는 거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죠.
박근혜는 잔뜩 부은 얼굴로 구명조끼 운운하던 그 순간이 그녀의 운명을 결정했겠지만 저에게는 이 장면이 더 결정적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공주로 규정한 순간입니다. 이때 이미 선진적인 민주 공화정을 향해 가던 이 나라에 그녀가 얼마나 안어울리는지, 그래서 그녀의 끝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해진 건지 모릅니다.
이명박은... 글쎄요, 저는 그에 대해서 그저 혀를 삐죽 내미는 그 모습 밖에 기억이 안나네요.
홍준표는 뒷짐지고 보좌관에게 자신의 장화를 벗기게 하는 장면이
김무성은 그 유명한 노룩패스(이건 사진이 아닌 짤방으로 기억되는 흔치않은 경우)
김성태는 국회계단에서 아구창 날라가는 것(이것도 짤방이...)
권성동은 강유미에게 장미꽃을 받으며 몇명 꽂아넣었냐고 질문 받을 때 그 똥씹은 표정
심재철은 국회에서 누드사진
원유철은 총선결과 발표 순간 그 눈물...
그런 면에서 선출직으로서 가장 치명적인 장면을 만든 이는 바로 김태흠이죠.
이 한장으로 그는 선출직으로서 절대 지금 위치 이상은 못올라갑니다. 그의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말이죠.
지금 코로나 사태는 어쨌거나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자신을 국민들에게 영웅이 되느냐 역적이 되느냐를 각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것입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그 사실을 잘 알죠. 그들은 동물적 감각으로 자신을 어떻게 어필할까 고민합니다. 덕택에 국민들은 평소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정치인들을 자신들의 뇌 속에 뚜렷이 각인시키죠.
이런 측면에서 민주당 정치인들 중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장면은 이재명의 이 사진입니다.
그의 과거에 대한 논란은 일단 차치하고 선출직 정치인으로서 그가 이 상황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과천 신천지 쳐들어가는 장면은 따로 있죠. 이 사진은 신천지 봉쇄 발표와 함께 나온 사진입니다. 그럼에도 국민은 마치 신천지를 쳐들어가는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죠. 개인적으로 이재명에게는 촛불집회 연설순간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재명 말고도 집회 금지를 명령하는 박원순의 사진도 있고 브리핑하는 김경수 지사의 사진도 있죠. 다들 동물적 감각으로 이 상황을 활용합니다. 국민들은 그 저의가 무엇이든 일단 다급한 지금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면 성원하고 좋게 봅니다.
황교안 당도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총선을 2달도 안남겨 놓은 지금 그들도 열심히 뜁니다.
그 결과가 이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문대통령에게 편지를 건네는 대구 남구청장. 그 편지의 내용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차마 여기 밝히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질본이 찾아낸 확진자보다 더 많은 확진자를 찾아냈다고 말하는 대구 시장. 그는 지금 자신이 왜 욕먹는지 모르는 것 같아 보입니다.
여자 화장실을 방역하는 황교안. 그의 참모진 수준과 황교안 당의 대국민 홍보창구가 어떤 상태인지알 수 있게 해주죠. 이 사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았어야 했습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정치인들의 퍼포먼스는 퍼포먼스이자 메시지이고 자신의 역량에 대한 어필이죠. 동시에 자신 한 사람 뿐 아니라 자신을 보좌하는 보좌진과 참모진의 수준이 어떻고 그들을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어떻게 이끄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전체적인 풍경을 통해서 정치인은 자신이 국민들을 어떤 식으로 이끌게 될지, 그 수준과 범위, 방식을 암시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때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연출도 합니다. 하지만 국민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보고 바라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악한 국민들은 자신들이 속을까봐 의심하고 진실을 파악하겠다고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죠.
그걸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ps.
'과거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라는 문장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지사에 대해 민감해 하시는 분들이 있네요. 이 글의 주제는 이재명의 잘하고 못하고가 아닙니다. 정치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포착하느냐와 그것이 국민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대한 다양한 예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가 피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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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DP에서 명문이 쏟아지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