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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치]  [정의연 이슈]고노담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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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5-19 11:32:31

- 아마 심미자 할머니 관련해서 글이 올라올 거 같은데, 아닌게 아니라

[기사]정대협 비판해 뺐나…심미자 할머니, 위안부 기념물에 이름이 없다
https://www.google.com/amp/s/m.mt.co.kr/renew/view_amp.html%3fno=2020051907393276280

이런 기사들이 단독 딱지 붙어서 마구 복붙되고 있는 상태거든요.
(물론 대한민국 언론계에서 "단독"이란 단어는 그냥 '내가 먼저 어그로 끌었뜸 ㅋ'과 같은 뜻이라 무시 하셔도 됩니다;)





- 자, 그러면 심미자 할머니가 당시 어떠한 주장을 했는지, 이를 다른 쪽에서는 어떻게 해석 했는디 미디어워치(변TM 실소유한 그 언론사 맞습니다)의 2016년도 기사를 통해 유추 해 봅시다.

[기고]정대협 민족권력을 비판한 역작, ‘제국의 위안부’
http://mediawatch.kr/mobile/article.html?no=250558

...(선략)...

앞에서 언급한 심미자 할머니는 유언장에서 정대협을 격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그녀는 일본 정부가 인정한 유일한 일본군 위안부였고 1992년에 결성된 무궁화자매회라는 이름의 일본군 위안부 단체의 회장이었다. 그런데 이후 자신들의 단체를 '북한공작원 정대협이 발길로 차 쫓아' 냈다고 말한다. 그는 정대협이 위안부를 해외에서 '수입'해서 수요시위에 동원해 '앵벌이' 시킨다면서 2004년에는 '정대협 나눔의 집 모금행위 및 시위 동원 금지 가처분 신청'가지 했다. 그리고 정대협이 자신들을 이용해 출세했으며 정대협 출신 국회의원이 하지도 않은 위안부 관련 활동을 했다는 '거짓 의정보고'를 했다고 주장한다. 

...(중략)...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이제까지 지원단체(정대협)과 그들과 함께하는 위안부를 이긴 이는 없다. 위안부를 '공창'이라 말했다는 식의 곡해가 원인이 되어 정대협의 비난을 받았던 한 교수는 결국 나눔의 집에 가서 사죄했고, 위안부 사진집을 만들려 했다고 비난받은 여배우도 역시 나눔의 집에 가서 필름을 불태우고 무릎꿇고 사죄했다. 그렇게 '정대협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이들은 단순히 비판받는 정도를 넘어 위안부와 지원단체(정대협)'가 대표하는 '민족에 대한 사죄'를 해야 할 만큼 정대협은 어느새 '민족'을 대표하고 있었고, 그 힘은 절대적이었다.

...(후략)...

- 좀 당황스럽긴 한데 이쪽 방향에 계신분들은 정대협이 엄청나게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심미자 할머니 본인도 이 권력에 자신이 당했다고 생각하는 걸로 보입니다.

- 적어도 2020년 현재 기준으로 정의연이 탈탈 털리는 걸 보면 그런 권력은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 아, 그리고 위 기고문에서 '무궁화 자매회'란 단체가 등장하는데 이건 실제로 있었던게 맞습니다. 아래에 보시다시피 1992년 기사가 남아있거든요(1992년이면 해당 사안이 막 수면위로 드러나던 시기라 보심 됩니다).

[기사]정신대 할머니 20명 한자리 모여
https://www.google.com/amp/s/m.yna.co.kr/amp/view/AKR19920504003200004

...(선략)...

국내에 생존해있는 정신대피해자 20명은 2일 서울용산구한남동 감리교회 여선교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무궁화자매회'를 구성,앞으로 2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만나 치욕과 저주로 얼룩진 과거때문에 심한 수치심과 소외감에 시달려야 했던 서로의 처지를 위로해 나가기로 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공동대표 李效再 전이화여대교수등 3명)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그동안 신고된 정신대할머니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마련한 1박2일간의 경노잔치행사도중 한 할머니의 제의로 즉석에서 모임을 결성한 이들은 회원들 대부분이 연고도 없는 처지임을 감안,회원이 사망할 경우에는 함께 모여 장례를 치러주기로 했다.

...(후략)...

- 물론 미디어 워치 주장과 달리 초기 모임 형성시에 심미자 할머니가 회장이거나, 심미자 할머니를 필두로 모인 단체는 아닌 걸로 보이네요.





- 오히려 심미자 할머니와 궤를 같이하는 단체는 그 이후 만들어진 '무궁화 할머니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블로그]<무궁화 할머니회>를 아십니까?

https://mvkceo.blogspot.com/2016/01/blog-post_39.html?m=1

...(선략)...

1990년 대 이후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불거지고 한일간 외교 쟁점이 되자, 1992년 당시 일본 미야자와 총리는 진상 규명을 약속했고, 이에 따라 1993년 고노 관방장관의 담화가 있었다.

이를 일명 고노 담화라고 하는데, 조선인 위안부 모집, 강제적인 연행, 이송 등에 일본 제국 육군의 개입이 있었으며, 본인의 의사와 반하여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이들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1995년 일명 아시아 국민기금이라는 일본 재단법인이 발족되었다.

이 기금은 일본 정부가 출연한 의료, 복지 사업 (약 5억엔 상당), 모금을 통해 조성한 보상금 (일명 속죄금) 약 6억엔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기금을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된 285명에게 일인당 2백만엔 씩 지불하였다.

이 기금은 일본 정부의 예산에서 집행된 것이 아니라, 일본 국민과 기업을 통해 모금한 것인데, 일본 정부의 원칙 즉, 태평양 전쟁 당시 지급되지 않은 군인들의 급여, 퇴직금,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보상 등을 지급하지 아니한다는 원칙에 따라 정부 예산이 아닌 기금으로 조성해 지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이 보상금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정대협은 이 보상금 수령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 대신 범국민 모금 운동을 통해 생계비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들이 반대한 이유는 일본 정부의 배상이 아닌 위로금 형태의 보상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정부는 7명의 위안부 피해자에게 의료비를 포함해 일인당 500만엔을 전달했다.

이후 이를 전달받은 7명을 주축한 33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만든 단체가 무궁화 할머니회이다.

이들은 정대협과 깊은 갈등을 빚었다.

...(후략)...











[정리]

(1)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정의연 관련 이슈는 갑자기 발생한게 아니라, 적어도 1990년도에 있었던 고노 담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유서 깊은(?)이야기다.

(2) 당시 고노담화로 도출 된 사과문과 보상금에 대해 정의연과 일부 할머니들간에 꽤 큰 잡음이 있었고 이로 인해 갈라서게 되었다.

(3) 결과적으로 고노담화 이후 이 담화를 뒤집으려는 시도가 일본내에서 꽤 자주 있었기에(야스쿠니 신사 참배 떠올리시면 쉬울듯)정의연이 주장이 맞는게 되었다.

(4) 반대로 그 당시 보상금을 받은 할머니들은 정의연에게 공격을 당할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왜냐면 고노담화 하나만 놓고 보면 나름 그럴싸했기 때문에(다만 그 이후 일본 정부의 행보를 보면...).





[결론]
역시 이 사안은 제3자 입장에서 누구편도 안 드는게 답이네요;;;




님의 서명
끄앙숨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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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020-05-19 11:57:14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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