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치] 감당못할 집을 강요하는 사회
안녕하세요? 문자마약상입니다.
건강하시죠?
어제 잠을 조금 밖에 안자서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막상 잠이 안오네요.
내일 쉬는 날이라 아마 설레여서 그런가 봅니다.
이런 때에는 글쓰는 게 최고죠.
부동산 이야기가 핫하네요. 그런 쪽에는 원래 관심이 없지만 그럼에도 민주정부의 성공에 현존하는 가장 큰 위협이 그것이기에, 그 이전에 한국사회가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느냐 과거의 저주에 갇혀 주저앉느냐를 결정할 사안이 바로 그것이기에 그에 관해 요즘 생각한 것을 글로 남길까 합니다.
제가 사는 월세의 집주인은 집을 몇백채나 갖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노인분인데 구두 밑창이 닳을 정도로 검소하신 분이죠. 집이 이 동네가 아닌데도 제 방에 뭐가 필요할 경우 직접 걸어서 오십니다. 센서등 하나도 어디 시키는 데 없이 직접 달아요.
오랜 세입자 생활로 느끼지만 정말 임대사업하는 분이구나 싶은 분입니다.
어디선가 듣기로 고생도 많이 하시고 사기도 크게 당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평생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도 신변잡기에 능해서 이래저래 대학생때부터 돈을 좀 벌었습니다. 신학대학을 다니면서도 학원에서 강의하고 과외하고 전도사하고 책도 내고 그렇게 등록금도 제가 벌고 최소한 가난한 신학생 생활 이런 건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십몇년전부터 학원강사로 나서면서는 큰돈도 벌어봤구 이래저래 인생의 부침은 있었지만 돈이 필요하다 싶으면 어떻게든 잘 벌어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저축이나 재테크 이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집값? 집사는데 그 돈 쓰느니 차라리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자는 주의로 평생 살았습니다. 국민연금 잘 넣고 60되기 전에 싸고 깨끗한 오피스텔 조그만 거 하나 사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삽니다. 저한테는 그게 어울리는 삶이에요.
집주인과 저는 분명 다른 사람이죠. 그분은 그런 삶을 감당할 수 있기에 그런 삶을 살고 또 저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글을 쓰는 삶을 감당할 수 있기에 이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모두 생긴 게 다른 것처럼 성격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사는 삶의 양태도 다릅니다. 당연히 집주인과 제가 사는 집이 다르듯 다들 사는 집도 다릅니다.
그런데 세상은 오직 아파트만이 제대로 된 집이라고 말합니다.
아파트에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결혼을 두번 했지요.
첫사람과 결혼할 때 그래도 번듯한 집하나는 있어야 된다는 말때문에 90% 대출끼고 투룸짜리 조그만 빌라 하나 샀어요. 항상 월세방만 전전하던 제게 그 집은 궁궐처럼 아름다운 저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 표정은 어두웠어요. 그리고 얼마뒤 집들이때 몰려왔던 처가댁 사람들도 똑같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역시 빌라는 살 데가 못 돼.
신혼부부의 힘겨운 출발에 대한 동정을 빙자해서 자신이 공인받은 중산층, 바로 아파트인임을 세상물정 모르는 제게 과시하고 있었지요. 그래봐야 서울가려면 한시간은 차로 이동해야 되는 곳에 낡은 방세개짜리 오래된 아파트예요. 당시 제게 그들의 아파트는 전혀 부러워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제 생각이겠죠. 저는 7년동안 거의 남편대접, 사위대접 못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답답하던 삶에 대운이 터졌습니다.
학원강사로 단 1년만에 붕 떠버렸죠. 전 변했고 그 동안 남편대접 사위대접 못받은 설움을 한방에 해치우고자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그 사람은 7년만에 능력자가 된 저를 놓아주지 않았고 저는 그 집을 그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그 사람을 가정법원으로 나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대출이 꽤 남아있었음에도 7년 동안 그 집 가격이 꽤 올랐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능력자가 된 저는 얼마뒤 새로운 여자와 재혼했습니다.
그러면서 입주한 집은 으리으리한 주상복합 아파트였습니다. 월세였지요.
그래도 단 시간에 꽤 많은 보증금을 모았고 결혼할 때 온갖 고급 가구들을 갖춰놓고 집들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하던 날. 앞집 아줌마가 달려와서 우리보고 얼마에 샀냐고 물었습니다.
이웃간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집안까지 들어와서 묻는 그 아줌마에게 저는 순진하게 월세라고 대답했죠. 그러자 아아, 그래요? 하면서 안색이 돌변하는 아줌마. 이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인사한번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능력자의 삶도 끝나는 날이 왔죠.
저는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고 얼마 못가 이래저래 인간사에 치이면서 망했습니다.
망하는 과정의 끝은 두번째 이혼이었고 그 사람에게 이미 예전부터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이혼 후 처음 딸아이를 면회가던 날 딸에게서 처음 들었습니다.
이혼 1년 뒤 애엄마는 재혼을 했고 신도시의 아파트 전세로 갔다가 얼마전 새로운 신도시의 아파트를 사서 입주했다고 들었습니다.
언젠가 딸아이를 만났을 때 새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언뜻 들었어요.
매일 회사일 때문에 술먹고 밤 늦게 들어와서 얼굴보기 힘들다는 말,
그리고 주말에는 쇼핑몰에서 하루종일 쇼핑만 한다는 말...
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그게 그 사람이 갖고 싶었던 궁극적인 가정일까 그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저는 두번째 이혼 후 죽다 살아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제가 저에게 맞지 않는 삶, 저도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억지로 살았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저의 삶이 그 모양이었을 겁니다.
저는 어머니의 꿈을 제 꿈으로 알고 목회자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난에 대한 악몽을 이기지 못해 돈을 좋아했고 하루종일 맞벌이를 하신 엄마의 사랑을 못받아서 여자에 집착했고 청소년기 수십번도 더 이사한 집안 사정때문에 친구같은 것의 허무함을 일찍 깨닫고 인간관계에 별 애착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글을 썼고 새로 간 학교와 교회에 빨리 적응하려고 말빨이 늘었죠.
그러니까 저는 그런 삶을 살아왔고 그런 저에 대해서 깨달은 뒤 제가 왜 두번이나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왜 아파트와 같은 장기 투자에 관심이 없고 돈은 잘버나 모으는 것은 싫어하는지 이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된 후 앞으로도 제게는 결혼이나 가정, 그리고 아파트 같은 것은 없을 거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저 하루 열심히 일한 뒤 마음편히 쉴 수 있는 공간, 인터넷 잘 되고 깨끗한 작은 공간. 딱 그정도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공간이니까요.
월세든 자가든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돈이 있으면 사고 없으면 빌리는 거죠, 뭐.
물론 저같은 삶은 흔치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모두 똑같은 삶을 살지는 않겠죠. 둘러보면 다들 저 못지 않게 다양한 성격, 다양한 삶, 다양한 가치관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삶에 맞추는 게 집이지 집에 맞추는 게 사람의 삶은 아니지요.
하지만 우리 사회는 너무 아파트가 주거환경의 절대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주거수단이 더이상 아닙니다. 재산이며 주식이며 코인이고 다단계의 다른 이름입니다. 더 나아가 계급이며 인종이고 고등동물과 하등동물, 다세포와 단세포 생물을 가르는 기준까지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 어디든 똑같은 형태로 치솟은 아파트의 모습은 곧 한국 사회의 욕망이 얼마나 획일화, 수직화 되어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40대 후반에 아파트도 없고 가족도 없는 남자를 사회에선 무엇으로 볼까요?
여러분 보시기에 저는 어떤 사람인가요?
자기 기만에 빠진 현실을 망각한 삶의 실패자인가요?
늦게나마 진정한 행복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인가요?
사실 이런 질문은 아무 의미 없지요.
저의 삶, 저의 행복은 제가 정의하면 그만이고 저는 지금 저의 인간됨에서 최선의 행복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남이 제게 실패한 삶이라건 성공한 삶이라건 그건 저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제게 중요한 건 오늘 쓸 글, 오늘 가르칠 학생들, 오늘 맛있게 먹을 식사, 오늘 스벅에서 마실 커피 한 잔, 오늘도 행복했다고 읊조리며 누울 작은 잠자리 딱 거기까지입니다.
다시 태어난 뒤부터 수업을 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마음이 아픕니다.
생긴 것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듯이 그들의 앞으로의 삶, 행복의 형태는 모두 다를 겁니다.
그런데 저는 아이들에게 성적만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단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본 베이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분명 틀린 말일 겁니다.
앞으로 사회는 더욱 다양해 질 것이고 인공지능과 로봇이 노동을 대체하게될,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미래 사회에 현재 직업환경에만 초점을 맞춘 교육, 학습은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국수영탐이 아니라 더욱 창의적이고 직관적인 능력의 개발입니다.
제대로 된 미래라면 그곳에서 인서울 졸업장은 지금 그들의 젊음을 갈아넣어서 얻어야 할 만큼 가치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좋은 성적을 내지 않으면 앞으로 행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저의 말은 맞는 말일 가능성 역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한국 사회는 서울에 살아야만이 사람다운 삶이라고 말하고 아파트에 살아야만이 제대로 사는 거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대기업에 취직해야만이 예쁜 여자를 만날 수 있거나 얼굴이 예뻐야만이 대기업 남편을 만날 수 있고 그래야만이 부모님 아파트 담보대출과 남편의 직장 대출로 신혼아파트를 구할 수 있고 그게 제대로된 결혼의 시작이라는 주장을 정당화시킵니다.
이렇게 수십년째 이어오고 있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패턴, 그러니까 저와 같은 이상한 사람의 신기한 삶 같은 것은 받아주지 않는 철저하고 냉정한 아파트 파시즘의 한국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지금 학생들이 좁은 학원책상에 갇혀서 수학하나 더 풀고 영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게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각자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게 됩니다. 이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요?
역사의 진보는 비효율의 수정을 통해 이뤄집니다.
아파트와 사교육의 비효율은 자동주행과 카쉐어로 나가는 자동차 산업의 미래처럼 수정되는 게 바른 방향일 것입니다. 미래는 탈가족화, 1인가족, 온라인 네트워크 시대이고 주거환경과 교육환경도 당연히 그에 맞춰 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의 처지에 맞는 다양한 주거환경, 교육환경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과연 그렇게 될까요?
코로나 사태속에서 학교가 거의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시험을 보고 그 와중에도 잘하는 애들, 못하는 애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나옵니다. 즉 학교의 가치가 코로나 사태 속에서 탁아적 기능 이상으로 크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의외로 소중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학교나 교회가 없어질까요?
없어진다면 그것은 역사의 진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중세시대나 산업혁명시대의 잔재를 넘어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거니까요.
하지만 나아가지 못하거나 그 속도가 더디다면 그건 학교로 먹고 사는 사람들, 교회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저항 때문일 것입니다.
아파트와 사교육의 미래는 어떨까요?
자동차가 자동주행, 공유로 가듯 아파트 역시 소유나 투자가 아니라 이용대상으로 바뀌는 게 역사의 이치입니다. 사교육은 교육의 다변화와 공공성, 그리고 온라인화의 물결 속에서 사라지는 게 맞습니다. 그럼에도 아파트로 먹고 사는 사람들, 사교육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저항-공포심, 박탈감, 우월의식을 유발하는 행태가 만연하다면 아파트나 사교육은 사라지지 않고 번성할 것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10년후, 20, 30년후에도 우리 자식들이 아파트에 목매고 자식 학원비 만드느라 허리가 휘고 그 자식들이 대기업, 아니면 공무원 밖에는 꿈이 없는 세상을요. 그러니까 인공지능과 나노기술, 로봇사회, 소유가 공유로 대체되는 미래사회에서 이런 구시대의 잔재에 목을 메는 한국사회를요.
8대2의 원칙이 있습니다.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 공부가 그들의 재능인 아이들은 20%도 안되요.
이 나라에서 서울에 사는 사람 역시 20%도 안되고 인서울 대학도 20%가 안됩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말고도 수많은 특성화고들이 있고 대학 말고도 수많은 전문대가 있고 대졸사원말고도 수많은 고졸 사원들이 있습니다.
독일3사 프리미엄 세단 말고 수많은 차들이 있고 샤넬, 루이비통 말고도 수많은 가방, 옷, 신발이 있고 대기업과 공무원 말고도 수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서울 말고 지방도 있고 아파트 말고 빌라, 다세대, 단독, 오피스텔 다양한 주거환경이 있습니다. 밤마다 LED조명이 번쩍이는 아파트의 세련미 만큼이나 구불구불 집사이로 난 골목길 한 구석 이름없는 슈퍼의 백열등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소중한 풍경입니다.
그 80%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이 나라는 아파트의 저주, 인서울의 저주, 입시학원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100명의 행복은 100가지 모양일 것입니다.
100명의 얼굴, 100명의 인생이 다르듯, 그들에게 맞는 집 역시 100가지 그 이상일 것입니다.
아파트 대출금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요?
당신은 재테크에 천부적인 성향을 갖고 태어난 게 맞는지요?
정말 아파트 대출 이자와 자녀의 사교육비, 중형세단 할부금, 연금보험과 생명보험, 세금, 그리고 아내와 가족의 품위유지비, 더 나아가 안정된 노후자금 준비까지, 그 엄청난 경제력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요.
그것이 정말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오히려 아파트에 대한 집착이 당신의 행복을 가로막고 당신에게 가장 알맞은 삶을 방해하며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삷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가 피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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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