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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역사] 19세기 메이지 일본 지도부의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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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4 12:17:46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은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유럽각국을 시찰하였습니다. 본래 사절단의 목적은 일본과 서구열강의 불평등조약 개정이었지만, 당사자 본인들도 조약개정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대신 서구열강의 실체를 직접 눈으로 보고 또 무엇을 배워야할지 판단하기 위해 여행에 떠났습니다. 부의 실세 최고지도부가 단체로 2년 가까이 나라를 비우는 일은 세계사적으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인데, 이들의 규모와 일정을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규모: 사절단 46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으로 총 107명

  대사급: 이와쿠라 도모미 (당시 정부 수반)

  장관급: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방문국가: 미국(8개월), 영국(4개월), 프랑스(2개월),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3주), 러시아(2주),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12개국 방문. 아라비아해,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거쳐 귀국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에 대한 기록도 남김)

  소요경비: 약 50만 달러, 현재 환율로 약 100억엔 (당시 국가 예산의 1%) 

  사절단 평균 나이 32세, 최연로 이와쿠라 도모미가 47세, 최연소는 18세


이를 통해 볼 수 있는 건 당시 정부 실세들이 대부분 젊은 층이었고, 이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명목상 최고수반이었던 이와쿠라 도모미는 40대 후반이었으나 실제 국정을 좌지우하던 이들은 대부분 30대 중후반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중국이나 조선의 실권자들에 비하면 굉장히 젊은 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젊음 특유의 에너지 때문인지 아주 정열적이었습니다. 


한편 사절단에는 정부관료와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유학생들도 동행했는데, 이들은 사절단의 귀국 이후에도 계속 현지에 체류하여 학업을 계속하였습니다. 


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에 유학을 시켰고, 이들 중 일부는 프랑스의 민권사상에 감화되어 추후 일본의 민권운동을 주도하기도 했고 (대표적인 인물이 나카에 초민입니다. 그는 장자크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일본에 소개하고 자유민권운동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 또 일부는 군사교관이 되었으며 또 다른 일부 하버드 대학 등 미국의 유수 대학을 졸업하여 일본에서 의사, 물리학자 또는 법률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쿠라 사절단 귀국 후 쿠메 쿠니타케라는 서기관은 오늘날 단행본으로는 총 5권, 당시 책으로는 100편에 달하는 보고서 겸 시찰일기를 남겼고, 일반 대중에 공개했습니다. 이것이 미구회람실기라 불리는 책이고, 여행지마다 해당 국가의 역사와 지리, 풍속과 강점 등을 소개하였으며 해당 국가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와 인상적이었던 점들을 서술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국회의원 외유성 해외시찰과 비교하면, 여전히 배울점이 많은 부분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해마다 각종 명목으로 의원외교 한답시고 해외 여기저기 가는데, 보도자료용 1~2페이지 보고서 말고 반드시 상세한 보고서를 남겨 국회 홈페이지에 올렸으면 좋겠네요. 


그것이 어렵다면 해외에 주재한 우리나라 외교관들이 해당 국가에 대한 에피소드 등을 블로그 형식으로 남기는 활동, 또는 특정 국가에 체재하고 있는 우리 언론사 특파원들이 본인들이 업으로 하는 단문 기사 말고, 특집 기획으로 해당 국가의 제반 동향 관련, 본인들이 관찰한 것에 대한 에세이를 최소 1주 단위로 정기적으로 올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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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Updated at 2020-07-04 12:41:40

벌써 임란 이후 17세기쯤 조선통신사가 재개됐을 때 일본에 이미 수십만 단위의 상업교역 도시가

성장하고 서로 총칼 맞대고 싸웠던 조선 유성룡의 징비록 등이 널리 출판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들의 야욕을 너무나 잘 아는 입장에서 이런 급격한 변화를 재빨리 캐치하고 

조선의 지도층에서도 함께 대비했어야 하는데 또다시 침략의 빌미를 준 건 너무나 아쉽습니다 

Updated at 2020-07-04 12:49:05

우리나라 의원님들은 해외시찰 가서
골프 & 관광, 먹방 & 놀방 위주고
보고서는 보좌진, 여행사가 써준다죠.
21대 국회는 제발 그러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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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4 12:53:21

그 당시 평균수명을 생각했을때 30대가 젊은건가요? 관료 나이에 대한 통계가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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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7-04 14:40:41 (220.*.*.130)

메이지유신이면 1868년.

당시의 프랑스라면 영국과 투톱으로 식민지 확대 경쟁에 열을 올릴 시기인데 프랑스의 민권사상에 감화되어 추후 일본의 민권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요? 민권 사상은 이중성이 요체인가보네요. 자국민과 타국 식민지인들의 철저한 분리. 식민지 사람들은 아예 사람 취급을 안했으니 이중성이라고 볼 순 없는건가?

그리고 그래서 그 잘난 프랑스에 영향을 받은 쪽바리들이 조선 침탈과 식민지 철권 통치를 자행했던 것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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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7-04 14:30:50

하지만 서구열강으로부터 식민지를 개척이 주는 이익 또한 보게 됩니다. 이게 일본에서 발전해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최악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구요.
글의 취지는 알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 예시로 말씀하신 이와쿠라 사절단이 선생님께서 주장하시는 바에 적절한 예시인지는 의문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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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7-04 14:44:17

일본의 정치인들도 외유로 세금낭비합니다. 일본은 뭔가 선진국스럽고, 우리만 후져서 외유다니면서 세금 낭비하는 것 같지만... 배울 영역이 아닙니다. 

https://www.nikkan-gendai.com/articles/view/news/187400

 

일본의 격동기때와 우리의 격동기는 같은 시기가 아닙니다. 동시대를 놓고 "그들은 선진국인데 우리는 후졌다"라고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때 세계에 관심을 두었지만, 그 직후에 세계를 잡아먹을려는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과 여러 나라를 괴롭혔습니다. 우리는 그 시기에 만주로, 중국으로, 러시아로 다니면서 그런 야욕에 맞서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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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4 16:02:50

 이와쿠라 사절단의 역사적 의의는 바로 일본이 나아갈 길은 제국주의 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그걸 쏙 빼놓고 민권사상에 감화되었다느니 의사 물리학자가 되었다느니 하는것만 말하는건 본말전도죠

2020-07-04 23:58:38

당시 이와쿠라 사절단이 롤모델로 삼은 국가가 독일이었는데 3주밖에 머물지 않았군요

2020-07-06 10:30:01

미국은 커서 오래 걸린건지 저도 국가별 체류일수를 어떻게 결정했나 하는 의문이 본문을 보고 따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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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6 10:43:51

이와쿠라 사절단이 태평양 건너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다음 수도인 워싱턴 D.C까지 가는데 한 달 넘게 걸렸겠죠.

 

미국 방문은 일본 입장에서는 불평등 조약의 개정이 주 목적이었는데 미국측이 천왕의 전권 위임장을 요구해서 오쿠보 도시미치가 그거 받으러 다시 일본에 돌아갔다가와서 사절단의 체류 기간이 길어진 것로 알고 있습니다. 

 

 

Updated at 2020-07-05 18:35:01

이와쿠라사절단등은 당시 조선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19c말~20c전반기에 이르는 일본제국을 아시아에서 압도적 최강자의 지위로 끌어올리게 되는데, 정말 일본의 근세사는 알면 알수록 부럽더군요.
일본에서 상당히 엘리트교육을 받은 일본인들과 근세사 얘기를 해보면 의외로 상당히 무지하더라구요. 근세사를 학교에서 별로 안 가르치는듯요.
한국인 입장에서는 정말 부러운 근세사인데 정작 현대 일본인들은 크게 관심을 안 가지는 현실이 아이러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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