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치] 비겁해도 버틸 거다
1. 생일 다음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느 dp회원분에게 카카오톡으로 꽤 큰 선물을 받았다. 쪽지로 보내주신 상담글에 부족하나마 열심히 답을 드렸더니 놀랍게도 스벅 상품권 두장을 보내주셨다. 금액도 적지 않았다. 놀라서 더 좋은 글로 보답하겠다고 감사인사를 드리고 곧바로 스벅으로 달려갔다.
2. 스벅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행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비어있었다. 테이블 맞은 편에 지우개먼지가 가득 얹혀 있었다. 아마 점심에 누군가 아이를 데려왔었나 보다. 노트북을 펴면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가방을 열려는 찰나 전화가 왔다. 학부모 전화였다. 며칠 전 중간고사와 관련해서 불안과 걱정이 교차하시는 듯 했다. 아이는 실력이 나아졌으나 어머님은 조금 더 원하셨다. 설명이 필요했고 열심히 상담했다. 전화하는 내내 맞은 편 지우개먼지가 눈에 걸렸다. 여기 스벅은 이런 적이 없었다.
4. 혼잡한 지금 누군가 앉고 싶어도 못앉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내가 그랬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때 급한 움직임으로 직원이 내가 앉은 테이블 주변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맞은 편을 그냥 지나며 저 옆자리를 치웠다. 어머니와의 통화는 말한마디도 조심해야 한다. 난 여직원을 향해 손짓했다.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내 앞 자리를 가리켰다. 그녀는 내 앞자리를 두세번 휙휙 행주로 문지르더니 내팽개치듯 카운터로 돌아갔다. 여전히 지우개 먼지는 남아 있었다. 카운터의 그녀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그제야 난 아뿔싸 싶었다. 그럼에도 학부모의 걱정은 끊길 줄 모른다.
5. 통화는 그 뒤로도 한참 후에나 끝났다. 난 얼른 카운터로 달려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까 죄송했어요. 제가 급한 통화중이어서 저도 모르게..."
그녀는 마스크 위로 벌레보듯 차가운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저한테 그러시는 건 괜찮은데 다른 파트너에겐 그러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난 부끄러웠고 스벅에서 오늘 받은 상품권으로 뭔가 평소 못먹던 것을 먹어보겠다는 원래의 생각을 포기한 채 쫓겨나듯 매장을 뛰어나왔다. 난 그녀를 꽤 오래전부터 좋아했었다. 그리고 그날 자정 시장의 시신이 발견된다.
6. 완벽주의. 그 어떤 흠도 잡히지 않고 세상을 통제하고 싶은 결벽증.
사업에 망하고 애엄마가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났을 때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거의 하루에 한 번씩 전화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질문을 했다.
너, 이상한 생각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예전에 세상은 내 뜻대로 돌아갔다. 노력하면 최고가 되었고 갖고 싶으면 원하는 것을 가졌고 성공을 했고 예쁜 여자를 만났고 무엇이든 가능할 것처럼 돈을 벌었다. 모든 게 다 내 뜻대로 될 것같은 시절, 난 무엇하나라도 내 생각대로 안되면 견딜 수 없었다. 내 생각대로 안되는 것은 나에 대한 도전이었고 여기서 지면 다음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난 초조하고 더 불안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가슴앓이를 호흡처럼 달고 다녔다. 죽고 싶다는 말이 버릇이었고 자살 충동이 식욕처럼 정기적으로 솟구쳤다.
7. 세상은 내뜻대로 안된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 긍정과 부정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한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면 한 사건에 대한 변수는 무한을 헤아린다. 그 안에서 내가 원하는 걸 얻을 확률은 애초부터 제로에 수렴했었다. 난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걸 내 능력, 특히 완벽주의와 그에 합당한 노력 덕택이라고 착각했다. 망하고 그 뒤 몇년을 뭔가 자신있게 시작하다가 좌절하고 깨지고 쫓겨나면서 서서히 깨달았다. 그러는 동안 난 많이 변했다. 최소한 겉으로나마 그랬고 난 그걸 성장이라고 여겼다. 그것마저도 착각이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8. 마흔 여덟.
스벅 한 구석에 앉아 카운터의 그 사람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성추행에 비견될 무례일 수 있으나 주관적으로는 망상을 얹은 소망일 수도 있다. 열심히 글을 쓸 거야. 베스트 1위에 오르고 매출이 터지면, 그래서 다시 성공하면 어찌어찌 기회가 다시 올지도 몰라. 그래, 마지막 사랑... 그것은 그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상관이 없다. 다시 일어서고 다시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있다는 그 망상이 분명 지금 글쓰기의 원동력일 수 있다. 그래, 누군가 댓글로 물었지. 나의 글쓰는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그것은 점점 희박해져가는 마지막 사랑의 가능성, 그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 그 안에 벌레보듯 내리까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치는 순간, 이 나이, 이 처지의 남자란 게 객관적으로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래, 모두 망상이었어.
9. 몇년 전 영등포 교보문고에서 난 저자 사인회를 하는 시장을 멀리서나마 본 적이 있었다.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그를 애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모자를 눌러쓴 채 얼굴조차 알아볼 여지 없이 혼자 좁은 골목을 지나는 모습이었다. 그 전날 전 비서라는 사람은 그를 성추행으로 고소했다. 그의 평생에 걸친 정치적 투쟁과 시민운동을 향한 헌신을 기억하는 내게 그의 마지막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급작스럽고 허망했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그의 죽음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다. 하지만 그게 하루 아침에 다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안다. 언제나 그랬듯 그의 마지막에 관한 진실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드러나거나 그 마저도 안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죽음은 그의 삶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볼 때 그의 죽음은 분명 사회가치적인 면에서 안타깝고 슬픈 일임에 분명하다.
10. 모든 생명은 정말 동일한 것일까?
그렇다면 모든 죽음이 다 안타깝고 괴로워야 할 것이다.
박시장 바로 직전 평생을 어그로만 끌던 bj가 자살했다. 박시작이 죽은 바로 다음날에는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사람이 죽었다. bj는 그의 어그로 행적을 빌미로 그를 지속적으로 협박하고 괴롭혔던 다른 bj때문에 죽는다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친일파는 살았을 때 스스로 주장했듯이 현충원에 묻히게 생겼다.
11. 대단한 삶에 대해 회의가 든다.
사회를 발전하기 위해 아무리 헌신해도 사회는 매정하게 그의 목숨을 앗아간다.
대단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을까?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에서 세상의 모든 생명은 정의든 악의든 어쨌든 간에 사회 발전에 일조를 한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생명 그자체를 어떻게 존중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발전도를 평가한다. 2011년 노르웨이에서 정치캠프에 참석한 청소년들을 포함해 77명을 죽이고 319명에게 상해를 입혔던 아네르스에게 내린 판결은 징역 21년이었다. 그 마저도 범인은 인권침해라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나라는 90년대 마지막 시행 이래로 20년넘게 사형을 실제 시행하지 않는다. 실제적 사형 폐지국가이면서 동시에 국민 여론때문에 사형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못한다.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우리 가운데 지하수처럼 흐른다.
12. 세상에서 가장 악한 범죄는 무엇인가?
가정파괴범일 것이다. 아마 모든 범죄가 궁극적으로 가정을 파괴하기 때문에 사회는 범죄를 규제하고 형벌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광의적 의미에서 나는 사회적으로 사형당했어야 했다. 가정을 지키지 못했고 딸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겼다. 내 죄는 사업실패이고 능력부족이며 인격결함일 것이다. 사건이 폭력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법적인 절차에 따라 건전하고 우아하게 전개된 덕택에 신원조회서에 붉은 줄만 안그어졌을 뿐, 난 사회적으로 가정 파괴범이고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을 수 있다. 그것도 전과가 2범이다. 즉 나 한 사람때문에 남의 집 귀한 딸 두 명이 신세를 망쳤다.
13. 나눔과나눔. 무연고자 장례봉사 시민단체.
매주, 아니 거의 매일 이곳 봉사자들은 벽제 승화원에서 가족도 없이 세상에서 죽었다는 말도 못하고 죽은 이들을 위한 장례를 치룬다. 몇년 전 처음 그 단체에 갔을 때는 일주일에 두세번 있던 장례가 지금은 거의 매일 그것도 합동 장례로 치룬다. 거의 50대 언저리 남자들이다. 한 때 가정을 이뤘고 꿈과 열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사업이 망했고 그 뒤로 반등의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가정에게서 버림받은 뒤 술로 연명하다 고시원에서 길에서 폐가에서 여관에서 주변의 신고로 시신이 되어 발견된다.
그들 중 대부분은 아직 가족이 있었다. 하지만 500만원의 시신 인도비용이 없어서, 또는 아까워서 시신 인도를 거부하는 경우가 대다수. 그렇게 쓸쓸히 연기로 사라지고 플라스틱 유골함에 담겨 임시 납골당에 놓인다. 보존기한은 10년인가 그랬다. 그 사이 가족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이유다. 하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그냥 있을 거라고 이 사회는 믿고 싶은 것이다.
14. 아빠를 부탁해.
유튜브에 얼마전부터 그 프로그램의 클립이 올라왔다. 화려한 집에서 공주처럼 행복하게 크는 딸, 그동안 바빠서 딸에게 신경써주지 못했던 연예인 아빠들이 방송을 빙자해 딸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친구들에게 아버지를 보여주는 딸의 표정엔 자부심이 가득하다.
매트리스 위를 뒹굴며 유튜브로 성공한 연예인과 그들의 예쁜 딸들을 보면서 남의 성을 가진 나의 딸이 그래도 한 10년후 저렇게 예쁘게 커서 다시 재기한 나와 저러고 돌아다니면 좋겠다는, 감정이입이라는 미명으로 그런 말도 안되는 망상을 하며 곁가지로 생각은 가지를 뻗는다.
저런 집, 저런 가정까지 끌고 온 저 남자들은 정말 위대해.
얼마나 열정적이고 완벽하며 철두철미했을까.
무엇보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수컷과의 전쟁을 치뤘을까.
그들 중 한명이 죽었다. 그의 말과 문자가 문제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 자리는 자신의 크고 아름다운 주상복합 아파트 지하 주차장 한 구석이었다. 어떻게 살든 중간에 포기한 남자들의 마지막 자리는 너무 초라하다. 이쯤 되면 남자로서 잘 산다는 것과 못 산다는 게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15. 강용석.
평생 박시장을 증오한 남자. 세상 사람의 반 이상이 그의 추락을 환호하고 그의 죽음을 고대한다. 그럼에도 그는 실실 웃으면서 살아남는다. 그는 자신이 바라보는 당에서 버림받았다. 그는 자신이 환영받던 방송에서도 버림받았다. 심지어 포승줄에도 묶여봤다. 하버드까지 나왔다는 사람이 극우 노인들의 방송 코인만 바라보며 산다.
그럼에도 살아남는다. 자식들이 그를 부끄러워하길 대중들은 바라지만 난 모르겠다. 가정의 어디 한자리에 질기게 버티고 앉아 있는 것으로도 어떤 면에서 난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의 사악하고 독한 언행도 그의 삶의 궤적을 돌아봤을 때 어느 정도 납득이 되면서 난 왜 저렇게 단단하게 못살까 스스로 자책도 해본다.
그런 면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리고 결국은 의미있는 한자리를 차지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김민석도 대단하다. 안희정도 정봉주도 그냥 오래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그러다 뭔가 좋은 소식으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난 아낌없이 그들을 칭찬할 것이다.
16. 점점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해지지 않는다.
그냥 살아남았느냐, 그래서 제명까지 버텼느냐가 중요해진다. 백선엽도 백살까지 살았다.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이명박 누구하나 부끄럽다고 먼저 죽지 않았다. 죽은 뒤 무덤에 침뱉는게 사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그때 죽지 않은 나를 칭찬하고 싶다. 사회에서 잠재적 성범죄자로 보든 광의적 가정 파괴범으로 보든, 아내에게 버림받든, 장차 자라날 딸이 내 피를 부정하든 점점 상관이 없다. 내 소설이 성공하는 것도 내게 마지막 사랑이 남아 있든 없든 다 중요하지 않다. 그냥 숨쉬는 것 만으로도 이 사회에 작용이든 반작용이든 뭔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럼 됐다. 그러니까 끝까지 살아남으련다. 아무리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좌절당하고 폄하당해도 내 뇌속에서 내 마음대로 망상을 하고 내 마음대로 세상을 사는 이유를 만들고 내 마음대로 행복의 여부를 정하며 그렇게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 돈도 열심히 벌고 노후자금도 마련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위한 글도 쓰고 세상 앞으로 어떻게 될지 느낌 오는대로 글도 쓰고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소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글, 비난이나 악플 같은 거 철저히 무시하고 차단하고 삭제하면서, 반일과 상관없이 야동도 열심히 보고(포르노를 금지하는 한국책임이다) 오마이걸, 여자친구, 드림캐처 열심히 응원하고 얼굴 드러낼 일 절대 하지 않고 그렇게 이 사회 한 구석에서 오래오래 열심히 살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나이들어 주책이란 말 쿨하게 씹을 거다.
17. 그 스벅. 그 자리에 다시 앉는다.
오늘 그 여자는 출근하지 않았나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그냥 이자리에서 버티는 것이다. 다른 스벅으로 가면 그건 이 스벅에서 내가 죽은 것과 같다. 난 그렇게 못죽겠다. 소설이 완성될때까지 내 숨이 끊길 때까지 그녀가 벌레보듯 쳐다보든 어쩌면 내게 자신이 무언가 말했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할 가능성이 거의 100%일 테지만 어쨌든 난 이자리를 지키련다.
내게도 다 사정이 있었고 사연이 있었다.
그것을 이해해 주든 무시하든 상관없다.
난 내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
그 뒤로도 며칠 째 그녀의 말과 나의 생각지 못한 실수에 자책하며 스트레스받았다.
그럼 됐다. 죄가를 치뤘다. 난 정당하다.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가 피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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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사람 생명이 참 하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별일로 사람목숨이 파리목숨이던 옛날옛적에도
충성을 맹세하는 최고의 표시는 목숨이었는데요
요즘은 목숨을 내놔도 그게 다냐? 이런 반응이네요
뻔뻔한 사람들은 악착같이 살고 일말이라도 죄책감이란걸 느끼는 사람은 빨리죽고
산업재해속에서도 어찌나 열심히 일하던 착한이들만 먼저 골라서 가는지요
이렇게 계속 가다보면 점점 더 뻔뻔한 성격만 적자생존하고
저 자신도 더 뻔뻔해질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못버틸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