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VER HEALTH CHECK: OK
1
못웃기면맞는다
ID/PW 찾기 회원가입

[시사정치]  백선엽은 공을 너어무 과하게 따진 케이스겠죠.

 
26
  1373
Updated at 2020-07-12 12:06:39

 

 

(1) 백선엽이 없었으면 6.25의 전황이 어찌될지 알 수 없었다. (X)

 

- 전황만 따져보자면 전시 초기 말그대로 분쇄 되어 사라진 국군을 새로 만들어 낸 김홍일이 저 항목에 들어가야 겠죠;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1096

 

...(선략)...


15세에 만주 봉천(奉天)에서 중국소학교를 마치고 귀국하여, 18세에 정주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황해도 신천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재직 중 오산동문회가 항일단체로 몰려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 곳에서 구국일보사(救國日報社) 사장인 중국인 황개민(黃介民)의 도움으로 1920년구이저우[貴州]의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하자마자 바로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무관학교의 생도대장·교관·중대장·대대장, 1921년 독립군의용군단 대장, 1923년조선의용군 부사령관 등을 거치면서 일본군 소탕전에 적지않은 공적을 올렸다. 그러나 헤이허사변(黑河事變)으로 독립군이 참변을 겪은 데 큰 충격을 받고, 1926년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하여 장개석(蔣介石)의 북벌에 직접 나선 적도 있으며, 1945년 5월 중국군 중장으로 승진될 때까지 근 20여년 간 항일전투는 물론 한국의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적극 지원하였다.

 

국민혁명군에 복무하는 동안 총사령부 병기감, 통계과장, 우쑹요새(吳淞要塞)의 사령부 참모장, 상해병공창 군기처 주임, 육해공군 총사령부 군기처장 등 중국군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장교로 있으면서, 김구(金九)의 뜻에 따라 한인애국단의 거사에 비밀작전 참모격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송식표(宋式驫)와 함께1932년 이봉창(李奉昌)의 1ㆍ8일왕저격 및 윤봉길(尹奉吉)의 4ㆍ29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하였다. 이봉창의 거사가 일왕 히로히토(裕仁)를 죽이지는 못하였지만, 윤봉길의 대의거는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를 비롯한 10여 명의 일본 요인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게 하였다.


1948년 육군 준장으로 임명되어, 그해 12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직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한강선에서 밀려오는 적을 1주일간 방어한 뒤, 육군 제1군단장으로 평택지구에서 포항탈환작전에 이르기까지 전공을 세우고, 육군종합학교 총장으로 군간부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1951년 10월 예편된 뒤 주중 대사가 되었고, 타이페이 외교사절단장으로 활약하다가 10년 만에 귀국하여 1961년5·16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고문과 군정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1965년 한일협정을 적극 반대, 박정희(朴正熙)와 결별하고, 1967년 정계에 투신하여 제7대 국회의원이 된 뒤, 1970년신민당 전당대회의장을 거쳐, 1971년유진산(柳珍山)이 한때 물러난 뒤에 당수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 해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고, 당내로는 김대중(金大中)과 제휴하여 1971년신민당 당수가 되었으나, 당내 양파가 각각 전당대회를 열어 1당 2당수의 내분을 겪은 뒤, 1972년 9월 당수직을 사임하였다. 박정희의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만년에는 광복회 회장을 맡았다. 1980년에 82세로 사망하였다. 

 

...(후략)...

 

- 심지어 생애도 깔거리가 없습니다. 한반도 근현대사 통틀어 정말 몇 안 되는 희귀한 케이스라 할 수 있겠네요. 광복 - 전쟁영웅 - 반독재 테크트리 탄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보통 장준하 처럼 반독재 테크 타다 암살 당하거나 김구나 여운형처럼 좌우 백색테러 난장판에서 암살당하기 딱 좋은데 그와중에 본인 소신대로 다 살다 갔습니다 완전 존재 자체가 사기에요;

 

 

 

 

 

(2) 백선엽의 과만 봐서는 안 된다 (X)

 

- 정확히는 너어어어무우우우 공만 다뤘던 측면이 크죠. 대충 공에 대해 95번 이야기 할 때 과는 한 다섯번 이야기 한 정도라 보면 됩니다. 그나마 본인 소신대로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던 임종국 같은 사람들 덕분에 최근 십여년간 과를 언급이라도 했지 예전에는 말도 못 꺼냈습니다.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21691063&sca=&sfl=wr_name%2C0&stx=%EC%9C%BC%EC%95%99%EC%A5%AC%EA%B8%88&sop=and&scrap_mode=

 

- 거기다 웃긴게 이 양반 공을 본인 이너서클 이용해서 셀프로 퍼뜨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3) 현충원에 묻히지 않는다면 그의 공을 치하할 수 없다 (X)

 

- 현재까지 상황만 놓고 보면 백선엽이 현충원이 아니라 가족장으로 가족들과 묻힌다 하더라도 그의 공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6.25 전쟁 당시 조국수호의 한 축을 맡았다는 사실은 이미 (본인이 열심히 퍼뜨린 덕분에)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이를 치하하는 기념비나 기념관은 충분히 있습니다. 

 

- 여기에 현충원까지 묻히기에는 백선엽 본인이 셀프로 증언한 것을 포함한 과의 전적들이 원채 화려한지라 쬐금 형평성에 어긋나는게 아닌가 싶네요. 

 

- 이종찬 장군 같은 진짜 참군인이라면 또 모를까 백선엽은 흐음...

 

http://www.ynamnews.co.kr/news/13058#0DG0

 

...(선략)...

 

6.25 전쟁 중에 이종찬 장군은, 제3보병사단장을 역임하여 영천 사수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또한 38선을 최초로 돌파하기도 했다.(국군의 날 기원) 이때 그는 최대한 전쟁에서도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그의 직속 상관이었던 김백일 군단장이 영덕군을 공격하고 있던 그의 부대가 읍내 시가지에 틀어박힌 북한군의 저항에 의해 고전하고 있자 '읍내에 직접 포격도 하고, 불도 지르고 해서 빨리 진입하라'고 명령했을 때 '그런 마적단 토벌 방식을 같은 동포가 사는 곳에 어떻게 쓸 수 있느냐'고 항명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후략)...

 

- 같은 일본 제국군 출신도 클라스가 있지 이종찬 장군이 김백일 백선엽과 같은 카테고리에 엮이는 것도 썩 유쾌하진 않네요.

 

 

 

- 물론 이종찬 장군도 거기 묻히기에는 가족력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데 백선엽을 거기다? 

 

 

- 제 결론은 삼진 에바로 기각입니다.

 

 

 

 

 

 

 

 

 

 

 

 

 

님의 서명
끄앙숨즴 ㅠㅠ
7
Comments
8
2020-07-12 12:19:46

재산은 어떻게 축적했을지...
증여세도 피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WR
1
2020-07-12 12:33:06

군사독재 치하에서 영웅화 사업(?)의 수혜자라서 재산 불리는 거야 일도 아녔졍;

9
2020-07-12 12:23:02

백선엽이를 현충원에 묻으려는 애들은 저 인간이 부일매국노들의 죄를 덮을수 있는 일종의 정체성 아니 핑계꺼리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WR
2020-07-12 12:34:37

백선엽이 6.26때 아무것도 안 했다는게 아니라 공과 과를 저울질 했을때 현충원은 좀 에바고 6.25 전과는 굳이 현충원 안 가도 충분히 치하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죠.

2020-07-12 12:38:46

말도 좀알고 해야

7
2020-07-12 12:40:17

 군 원로들이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명예원수 추대를 좌절시켰다

 https://news.v.daum.net/v/20170205153130061

 

 “백선엽 자신은 (명예원수 추대) 당시 김태영 국방장관에게 보낸 공문에서 

”본인은 간도 특설대에 근무한 사실은 있으나 독립군 토벌작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며 

“그러나 그의 주장은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비추어 볼 때 명백한 허위임이 밝혀졌다”

 

 “당시 이희원 청와대 안보특보실에 창군원로들을 비롯한 군 원로들이 수십통의 자필 편지를 보내와 백선엽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했다”며 “일부 창군 원로의 편지에는 ‘비열했던 백장군의 과거까지 까겠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들어 있어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됐다”고 밝혔다. 일부 한국전 참전 군 원로들은 “백선엽 장군 혼자 싸운 게 아니라 전부 도와서 싸웠다”며 “혼자만 원수 자격이 있느냐”고 반발했다.

 

https://news.v.daum.net/v/20200709095506265 

6·25 개전 초기 국군이 무너져 내렸다. 개성의 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전날 서울 육군회관 파티에 외출 나갔다가 6·25가 터진 그날 오전까지 부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단장이 없는 동안 닥친 전쟁에서 1사단은 속수무책 후퇴했다. 임진강 남쪽의 일부 병사들이 고향 집으로 달아나버릴 정도로 부대는 엉망진창이 됐다. 

  

2013년도에도 예비역영관장교연합회를 통해 백선엽 장군을 '명예원수'!라는 주장이 나왔는데

뉴데일리 외에는 취재하는 언론이 거의 없없다

 

 

백선엽이 없었으면, 북한화되었을꺼라는 주장들을 하던데

백선엽이 또있었으면 우리는 지금 일본어 쓰고 있겠네요. 

7
2020-07-12 12:43:33

우리나라 박정희 없었으면 전부 공산화 됐고 빈국으로 북한보다 못 산다
우리나라 이승만 없었으면 전부 공산화 됐다
우리나라 백선엽 없었으면 전부 공산화 됐다

태극기 부대들이 틈만 나면 짖는 소리인데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네요

 
글쓰기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