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치] 유서와 기자회견
오늘 기자 회견 보니 전비서를 대리하는 여성의 전화측은 박원순의 유죄를 확신하는 것 같더군요. 그것도 애매모호한 경우가 아니라 위계에 의한 성폭력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무려 4년간 위계에 의한 성추행이 있었고, 텔레그램 대화록, 박시장이 보냈다는 사진들. 음담패설에 가까운 메시지들.. 이런 증거들이 있다고 하니 내주에 그 증거를 다 공개하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판단해 볼 수 있겠지요.
전 솔직히 박시장이 아니라 다른 정치인들이었다면 이런 의문이 안들었을 거 같애요. 근데도 꾸역꾸역 떨칠 수 없는 생각이 뭐냐면...
아까 낮에 어떤 분 댓글에서도 본 것이지만 만약 이 말이 다 사실이라면... 박시장은 빼도 박지 못하는 싸이코 패스나 다름이 없어요. 우조교 사건 변호를 통해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법 용어에 도입시킨 것이 박원순이라고 하죠.. 여성인권 향상에 누구보다도 관심을 가져서 그 이후에도 꾸준히 자신의 관심을 여성 친화적인 정책(지하철 임산부 전용석, 젠더 자문역 신설 등등..)으로 실현 시켜나갔죠. 평생을 통해 자신이 내건 사회적 가치이자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간 명예의 영역이 젠더평등인데.. 무엇보다도... 권력이나 위계에 의한 성폭력의 의미와 파장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바로 스스로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짓을 한다?
박원순이 정말 겉과 속이 다른 싸이코패스라면 그럴 수 있다고도 봐요. 그런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버리는 싸이코패스를... 상상할 수 있으세요? 싸이코패스의 본질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스스럼 없이 자기 쾌락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음> 일진대, 박원순의 행위는 이 본질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거죠. 박원순이 정말 싸이코패스였다면 자신의 행위가 들통이 났을 때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놓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변명하고 회피하고 알리바이를 찾으려는 모습을 보였을 겁니다.
요컨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기자회견의 <성폭력의 가해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바로 박.원.순.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택한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방식 때문에, 기자회견에도 불구하고 박원순의 실제의 행위 동기가 해명이 되지 않고 남아 있는 거죠. 즉 정말 그랬다면 서슬퍼런 미투 운동이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던 바로 그 때, 왜 본인의 커리어에 그렇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그런 바보같은 행동을 태연히 저질렀고, 그 이후에 일이 불거졌을 때 왜 그런 충격적인 자살을 선택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겨진다는 것..
전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유서의 의미로 돌아가서, 왜 박사장이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유서의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나마 행간을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공개된 유서 내용을 접하고 언뜻 이해가 안되었던 건, - 아마 많은 분들이 그러셨을 거라고 봅니다만- 전 비서에 대한 유감이나 사죄는 일언 반구도 없고, 오히려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는 거예요. 오늘 기자회견에서도 여성의 전화 측에서 그 부분을 유감이라고 지적했습니다만, 저도 이게 매우 의아했어요.
간단히 기억을 되돌려 보면 안희정 미투 사건이 터졌을 때 안희정은 곧바로 자신의 페북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상대방에게 사과를 구하는 글을 올렸지요. (물론 이것이 안희정 건이 전형적인 미투에 속한다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현상이라고 보는데, 최근에 터진 오거돈 건도 그렇고, 적어도 최근 문제가 된 이 두 정치인은 자신의 잘못을 재빨리 시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거든요. 결은 전혀 다르지만 지평을 확대해 보면 노회찬 의원 유서나 노무현 대통령 유서에도 그렇고, 보통은 그들의 극단적 행위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거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 그 반대로 - 즉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 사용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박시장의 경우는 정반대로, 겉보기로만 보면 자신의 저열한 동기를 감추는 행동이자 자신이 죽음 안에 자신의 잘못을 억지로 묻고 가려는 행위로 보이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무책임하다고 분노하는 것이 이 지점이죠)
그런데 저는 암만 봐도 박시장의 이런 선택을 저쪽 진영의 가장 저열한 본능을 가진 정치인들이나 할법한 동기로 이해하려는 것이 과연 맞는 건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박시장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3~4년전 창출했던 상황이 오늘 기자회견에서 여성의 전화측이 설명한 바 그대로 였다면, 유서 안에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한다는 메시지를 남겼을 것 같거든요.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있을 수도 모르는 대중들의 원망을 잠재우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고쳐잡고, 자신이 평생토록 세우고자 했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지 않는 길이니까요. (그리고 이건 어찌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택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
박원순 시장도 결심 이전에 분명 숙고를 했을 겁니다. 이 자살의 의미와, 이 자살이 가져올 후폭풍과 결과들을요.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순간적인 욕정에 이끌린 것은 과거의 일이지만,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고 그 길로 나아긴 것은 순전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선택이죠. 가장 드라마틱하고 숭고한 방식으로 사과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여기서부터는 저의 소설이고 뇌피셜이니.. 그것을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즉 제가 인간 박원순의 극단적 선택을 이해할 수 있는.. 저에게는 현재까지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거지요.
박시장의 유서에는 피해 호소인에 관한 보이지 않는 원망이 느껴집니다. 말을... 원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적절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네요.. 너무 강한 단어 같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했다고 한 대책 회의에서 배신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는 것을 어떤 댓글에서 보았는데... (그런 기사가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더군요) 오늘 이렇게 당했다고 여성의 전화측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을 봐도 그렇고.. (셀카 같이 찍자고 하는 거나, 멍든 무릎이 안쓰럽다고 호 불어주겠다고 한거나..)
박시장은 실제로 그 비서에게 호감 이상의 깊은 감정을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요? 집무실 야전 침대에서 살다시피하는 전형적인 워커 홀릭이었다고 하던데.. 고단하고 피곤한 일상에 비서가 차한잔 갖다 주면서 따뜻한 말한마디 해주면... 편안함을 느끼지 않을 남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항상 옆에서 수행하면서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비서라는 존재는.. 경우에 따라서는 유달리 사람에 대한 정이 많았던 그에게는 가족만큼 가깝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물론 상하의 직무관계로 만난 사이고 그런 감정을 품어선 안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박시장이었겠지만, 결국 가랑비에 옷젖듯이, 천천히 그 비서에게 정을 품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여기서 비극의 씨앗이 잉태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상대방은 직무상 상관으로만 대할 뿐이었는데, 그리고 비서로서 필요한 일을 했을 뿐인데, 본인이 만든 감정의 환타지에 자연스럽게 갇히게 되는 상황이 와버린 거죠. 그런 상황에서 아마도 박시장은 그 비서와 자신이 연애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연애를 하는 사이에 자신의 속옷 차림 사진이나 약간의 외설적인 내용이 있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죠)
이 모든 것은 텔레그램에서 둘 사이에 오고간 대화가 복원된다면 어느 정도 추론해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만, 그런 상황이 올지 안올지는 현재로선 누구도 모르는 거죠. (공개된다면 박시장 일방의 메시지가 아니라 쌍방의 대화 내용이 모두 온전히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이야기를 비서분 입장에서 풀어보면, 처음엔 엄청난 업무량과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시장님이 안쓰럽기도 하고 자신의 일이 그것이기도 해서 적극적으로 받아주었겠지만, 어느새 시장님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것이고, 또 이것을 적절하게 표출할 수 있는 소통의 방법을 못찾고 있다가, 직장 상사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렇게 커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비서분에게 조심스럽지만 궁금한 사항은, 비서분이 박시장에게 완곡하게 나마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분명히 표현한 적이 있는가 하는거예요. 박시장의 삶의 이력상 이런 식으로나마 표현을 하게 되면 자신이 중대한 오해와 함께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고 하는 것을 재빨리 간파했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저는 바로 이 지점이 앞으로 제 입장의 한계를 규정지을 것 같아요. 저는 이 사건이 궁극적으로 남녀의 의사소통 방식이 서로 미숙한데서 오는 중대한 오해에서 발생한 비극이라고 보는데, 분명히 입장 표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시장이 계속 그랬던 것이라면, 그것은 빼도 박지 못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박시장 잘못인 것이지요. 근데 전개된 상황이 그게 아니었다면...(물론 상황 인식 자체가 양 당사자들이 판이하게 다를 수 있어요.. 전 앞으로 이렇게 사태가 전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만) 박시장 관점에서는 강한 배신감과 허탈감, 회한... 무엇보다도 심대한 자기환멸을 느꼈을 것이고.. 반대로 가족에게는 한없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인거지요.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죽은 자가 남긴 메시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여러 상념이 들어서 몇자 적어 봤습니다. 박시장이 어떤 한도 품지 않고 영면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전 비서분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보냅니다. 미투 운동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녀가 서로 한을 품지 않고 바로바로 허심탄회하게 소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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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인간 박원순의 극단적 선택을 이해할 수 있는.. 저에게는 현재까지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거지요."
성 인지 감수성 어쩌고 하는 주장들에 대해서, "아니 그건 상식선에서 풀어나가면 되는 얘기지" 하고 생각했던 제 자신을 반성합니다. 박원순의 자살을 정말로, 정파적인 호불호와 관계 없이 이런 방식으로 밖에 이해를 못하시겠다면, 선생님의 성 인지 감수성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이 선을 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번 사태에서 극도의 2차 가해들을 목격하면서, 그 생각이 많이 바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