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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역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치사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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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2 12:45:53
로마 가톨릭 교회 (Ecclesia Catholica Romana) 



세계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조직입니다. 수많은 왕국들이 흥하고 망했지만, 수많은 공화국들도 흥하고 망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계속 생존했습니다. 교회는 로마제국 멸망을 버텼고, 종교전쟁의 시대도 버텼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 때도 살아남았고 1차 및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로마교회는 정말 "서바이버(Survivor)"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많은 풍파에도 불구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으니 말이죠. 

1. 로마의 중심성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주지하디시피 예수의 첫번째 제자 사도 베드로(Petrus), 그리고 새로 개종한 바오로(Paulus)가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순교하면서 탄생했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안티오키아 또는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세계제국 로마의 수도에서 이들이 순교한 것은 아주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교리를 제국의 심장에서 동포 유대인을 상대로만 설파한 것이 아니고, 로마의 시민들을 상대로 포교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심장으로, 로마인뿐만 아니라 이집트, 유대, 갈리아, 아나톨리아, 그리스, 심지어 게르마니아의 사람들이 뒤섞여지내던 오늘날의 뉴욕이었습니다.  이들을 따르던 이들은 이들의 순교에도 불구 로마를 떠나지 않고, 제국의 도시에 은밀히 계속 활동하면서 세를 넓혀나갔습니다. 당시 교황이나 주교와 같은 직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평신도들의 수평적 모임에 가까웠지만, 로마에 거주하는 기독교들은 리더를 계속 선출하여 베드로의 자리를 잇고자 했습니다. 

서기 4세기에 이르면 기독교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노예나 여성만이 믿는 소수자의 종교가 아닌, 도시의 중산층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지던 혁명이었습니다. 로마는 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한 제국이었는데, 기독교 또한 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한 종교였습니다. 후일 미신을 믿는 이교도를 Paganus(영어로 Pagan)라고 불렀는데, 이는 촌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는 다시 말해 농촌은 아직 기독교 개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당시 세계인구의 절대다수는 도시가 아닌 농촌에 거주했지만, 정치권력은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기독교는 숫자에 비해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죠. 그런 배경 하에서 내전을 종식시키고 제국을 다시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그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아예 제국의 국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가톨릭(Catholicos)이라는 단어가 제국의 법령에 들어간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고, 가톨릭이란 [보편적(Universal)]이라는 뜻입니다. 제국의 신민은 이제 모두 Catholicos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국의 내분은 끊이지 않았고, 게르만족의 침입 등 혼란은 지속되어 결국 로마제국은 껍대기만 남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로마는 더 이상 수도로 기능하지 못했고, 사실상의 행정권력은 서로마에서는 라벤나, 동로마에서는 콘스탄티노플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로마에서 황제의 권력을 대신한 것이 로마의 대주교, 즉 교황이었습니다. 레오 교황은 훈족 아틸라의 침입에 맞서 로마시민을 대표하여 협상을 통해 도시를 지켰고 이는 교황이 본격적인 정치적 플레이어로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로마를 기독교세계의 중심지로 각인시킨 점입니다.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황제가 있는 콘스탄티노플이 제2의 대주교좌가 되었지만, 로마는 황제가 거주하는 것과 무관하게 여전히 제1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대주교좌의 권위는 황제의 유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권위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게 이유였습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건국한 것처럼, 베드로와 바오로는 제2의 건국자가 된 것입니다. 

2. 로마교회의 팽창 

제국의 멸망 후 로마교회가 수세적 입장에서 본격적인 해외팽창을 시작한 것은 서기 6세기 그레고리오 교황의 시대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전통적 귀족 출신으로, 학식이 높았고 또 권위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로마시를 대표하는 사절로 황제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수년간 거주한 바 있던 엘리트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교황이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어느날 그는 거리에서 어린이 앵글로색슨 노예를 보고 이들이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앵를로색슨(Angli)라고 하자, 그레고리오 교황은 앵글로인(Angli)이 아니라 천사(Angeli)라고 하면서 최초의 대규모 포교활동을 기획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는 저 멀리 떨어진 브리타니아의 앵글로색슨에 대한 적극적 포교활동을 시작했고, 나름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로마가 중심이 되어 머나먼 지역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하게 된 최초의 사례가 되어, 이는 후일 포교활동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레고리오가 대교황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런 적극적 포교의 선구자가 된 것도 있지만, 한편 그가 아주 뛰어난 행정가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로마주교좌의 행정조직을 재편하고, 법령을 반포하여 교회법을 통일하고 기준을 마련했으며 한편으로는 미사의 전례도 스탠다드화시키면서 어떤 찬송가를, 어떻게 불러야할지도 정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부르는 중세 기독교 성가가 바로 그의 치세 때 확립된 것입니다. 

3. 동로마에 의한 로마의 종속시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이탈리아 탈환 이래 로마교황은 사실 동로마에 종속된 상태였습니다. 비록 그레고리오 교황처럼 걸출한 인물이 나오기도 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동로마의 승인이 있어야 교황좌에 오를 수 있었고, 황제와 대립할 경우 교황 자리는 보전하기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동로마의 경우 황제가 교리에도 간섭하는 경우가 있어, 로마교황이 이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해당 교황은 가차없이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마르틴 1세의 경우 제국군에 의해 압송되어 저 멀리 크림반도의 케르손 유폐된 적도 있을 정도였죠. 그 결과 서기 678년부터 752년까지 13명의 교황 중 오직 2명만 로마 출신이었고 그 외에는 그리스어가 모국어였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로마 황제의 후원을 받아 로마교황이 될 수 있었고, 그리스 본토나 시리아 또는 시칠리아 출신이었습니다. 

동로마 황제가 사실상 교황을 좌지우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는 여전히 로마였습니다. 로마의 상징성은 황제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능가하는 것으로, 황제가 제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로마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교황이 저 멀리 떨어진 황제에 의해 탄압받는 상황을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심지어 동로마 황제는 로마제국의 보호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로마시의 시민들에게 도움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랍인들의 약탈을 막지도 못했고, 롬바르드인들의 진격을 멈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교리상으로도 성상파괴주의를 채택해 로마인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습니다.  

4. 동로마로부터 독립, 프랑크인들과의 동맹(혹은 종속)

그런 상황에서 로마인들은 새로운 동맹국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바로 프랑크 왕국입니다. 프랑크왕국은 서기 5세기 클로비스 1세 당시 자발적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최초의 게르만 왕국이었습니다.  이는 로마교황 입장에서는 기적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는 후일 프랑크왕국과 프랑크족을 [교회의 맏딸, La fille ainee de l'eglise]라고 추겨세웁니다. 아무튼 751년 프랑크왕국과 로마교황 사이에 일종의 동맹이 성사되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본래 메로빙거 왕조가 건국하고 통치하던 나라였으나, 이미 백여년 이상 실권은 재상이 차지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재상은 피핀이라 불린 인물인데 바로 그가 그 유명한 샤를마뉴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사실상 실권을 차지한 인물이었으나, 왕위를 찬탈할 명분이 부족하여 그 권위를 외부에서 빌려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절을 보내 당시 로마교황 자카리아의 자문을 구하게 되는데, 자카리아 교황은 "왕 노릇을 못하는 허수아비 왕보다 실권을 행사하는 자가 왕이 되는 게 옳다"고 말했습니다. 

자카리아 교황은 그리스인으로 동로마로부터 책봉(?) 받은 마지막 교황인데, 그는 본인이 그리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황좌가 동로마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롬바르드인들이 무섭게 이탈리아 중부로 진격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동로마가 어떤 지원도 해주지 못하는 상황을 감안, 새로운 동맹을 시급히 찾아야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피핀의 왕위찬탈을 묵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자키리아 교황은 로마 시내에서 노예거래를 금지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로마에서 무슬림 상인들에게 노예를 판매하려고 하자 자카리아 교황은 대금을 본인이 지불하고 노예를 모두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내에서 그러한 거래를 금지했습니다. 

뒤이어 교황이 된 스테파노 2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본인이 직접 파리에 올라가 피핀과 만나고 그를 왕위등극을 공식적으로 축복했습니다. 교황에 의한 왕위책봉(?)은 샤를마뉴의 대관식 이전 이미 피핀시대에 일종의 선례가 생긴 샘입니다. 그리고 피핀은 스테파노 2세의 바람대로 롬바르드인들을 무찌르고 정복한 영토의 일부를 교황에게 기증했습니다. 이것이 [피핀의 기증]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인데, [교황령 국가]가 탄생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황은 이제 로마시의 주교, 그리고 로마시민의 대표가 아니라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군주가 된 것입니다. 

이윽고 프랑크 왕국과의 결속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낸 사건은 레오3세와 샤를마뉴의 동맹이었습니다. 레오3세는 본래 로마의 귀족들로부터 버림받아 도피신세였으나 샤를마뉴의 지지를 얻어 로마에 화려하게 귀환, 자신의 권력을 관철시켰습니다. 그리고 고마움의 표시로 샤를마뉴에게 [로마황제]라는 칭호를 수여하면서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그에게 왕관을 씌웁니다. 이는 동로마의 종주권을 완전히 부정하는 행위였고, 한편 교황이 황제를 책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물론 실제 권력은 샤를마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로마교황은 동로마에 종속되어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카롤링거 제국에 종속된 것었지만. 게다가 레오3세는 로마시민들이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뉴 덕분에 자리를 보전했으니 샤를마뉴에 대해 더욱 저자세일 수밖에 없었죠. 

5. 로마교황의 독립...그러나 암흑기의 시작 

그러나 로마교황으로서는 운이 좋게도 샤를마뉴의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샤를마뉴 사후 제국은 약체화되었고, 곧 3등분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카롤링거 제국이 오랜 시간 단일한 세력을 유지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면, 로마교황은 동로마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황제에 종속된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카롤링거 가문의 자멸로 인해 로마 교황의 독립성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샤를마뉴는 아마 로마교황을 자신의 신하로 생각했겠지만,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은 서로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오히려 로마교황의 인정을 갈구했고, 이는 교황에게 전례없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명백한 적이 사라진 로마 교황좌는 끊임없는 사투와 음모가 도사리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종교적 지도자를 나타내는 자리가 아니라, 로마 귀족들이 서로 쟁취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자리였습니다. 초기 교회의 교황은 평신도 간의 투표 또는 지명으로 선출되거나 나중에는 황제의 책봉으로 선출되었지만, 독립한 교황의 자리는 힘으로 쟁취해서 얻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에 유력 가문들이 교황이 되면, 자신의 아들이나 친인척을 계속 교황으로 만들려고 했고, 자리를 사실상 세습적 직위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테오필락투스 가문의 전횡입니다. 투스쿨룸의 백작으로 시작한 이 가문은 Gloriosissimus Dux(영광스러운 공작), Consul(집정관), Senator(원로원의원), Magister Militum(군사령관) 등의 관직을 독차지하면서 로마를 사실상 지배하는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교황을 만들고 폐위하는 등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가문입니다. 르네상스 교황의 타락을 지적할 때 방탕과 난교 그리고 온갖 종류의 부정부패 등을 지적하는 데, 이 모든 것이 이미 이 당시 나타난 것들입니다. 이에 교회사에서도 이 시기를 Saeclum Obscurum, 즉 암흑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편 여자가 권력을 휘두른 것으로도 유명한데, 테오필락투스 가문 출신의 마로치아가 교황 세르기오 3세의 애첩이 되어, 그의 사후에도 다양한 애인들을 통해 권력을 휘둘렀고 심지어 자신의 눈 밖에 난 교황을 암살하기도 했습니다. 

테오필락투스를 위시한 귀족가문들의 전횡이 극심했던 결과 로마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졌고, 그 결과 수차례의 개혁운동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집행하려고 했던 인물이 후일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해지게 될 그레고리오 7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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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 계속~~~ 조만간 시간 될 때 계속 연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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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7-22 13:06:28

동로마가 서유럽 문화를 잘 지켜주긴 했습니다. 카톨릭도 포함해서. 서고트의 테오도리크가 아리우스 파였기에 그의 왕조가 지속되었다면 교황도 흐지부지되었을지도 있었겠지만 유스티니아누스의 터무니없는 계획을 벨리사리우스 옹이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끝나버렸죠.

근데 서유럽이 나중에 힘이 세진 다음에 통수를 때려버린건 다른 얘기입니다.

2020-07-22 13:08:03

너무 정리가 잘되어있네요. 

최근에 개인적으로 십자군원정 관련 배경 정리하는 중이었는데... 이 글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2부 어여 올려주세요 ^^ 감사합니다.

2020-07-22 13:16:39

가톨릭 교회 정치사인데 교황과 유럽의 왕가 이야기만 있네요. 예수시대-사도시대-속사도시대-교부시대-동서교회의 갈등-교회분리 등 기독교 내의 역사와 유럽의 정치사를 같이 엮어서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20-07-22 13:38:56

흥미진진합니다. 2부 기대됩니다.

2020-07-22 14:26:06

두근두근합니다
다음편도 기대할께요 감사합니다

2020-07-22 19:25:37

늘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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