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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치]  [역사] 레바논은 왜 프랑스의 신탁통치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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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8-08 20:44:22
최근 베이루트에서 거대한 폭발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140명 이상 희생되었으며 5천명 이상 부상당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30만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사 발생 후 이틀만에 프랑스 대통령이 참사 현장을 방문하였고 이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레바논의 그 어느 정치인도 참사현장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프랑스 대통령이 먼저 이곳을 방문한 것입니다. 현지 주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였고, 심지어 부패한 자기나라 정권을 전복시켜달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또 레바논 인터넷 청원사이트에서는 무려 5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10년간 프랑스의 신탁통치를 원한다고 서명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는 굉장히 기묘한 상황입니다. 어떻게 다른 나라에 주권을 위임하기를 원하는 것인가, 또는 어떻게 과거 식민지 모국이었던 나라에 대해 다시 돌아와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왜 프랑스 대통령은 그 어느 나라보다 먼저 레바논에 직접 가서 그곳 주민들과 만난 것인가?

물론 프랑스는 과거 레바논을 통치한 적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제국을 분할하면서 국제연맹의 신탁통치 형식으로 레바논을 1920년부터 1944년까지 약 24년 간 통치한 것이죠. 프랑스의 국민영웅 샤를드골도 젊었을 적 이곳에서 2년간 복무한 적이 있습니다. 1944년 프랑스가 레바논에 주권을 되돌려주었으나, 그 조건으로 프랑스가 주도한 헌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요지는 대통령은 기독교가 되어야 하고, 총리는 순니 무슬림 그리고 하원의장은 시아 무슬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레바논에 존재하던 3대 종파의 균형을 위해 프랑스가 조정한 안이었습니다. 식민지라고 하면 일제강점기를 연상하는 한국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레바논은 독립 후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레바논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에도 무려 22만명에 달하는 레바논인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프랑스에서도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며 사회의 중산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레바논과 프랑스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었더군요. 

과거에는 레바논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레바논이라 불리게 되는 지역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정복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이곳은 오스만 제국 점령 하에 있던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종파가 서로 이웃하며 지냈습니다. 순니파, 시아파, 드루즈교도, 그리고 상당수의 기독교(정교회+마론파). 그 중 마론파 기독교는 레반트 지역의 토착 기독교이면서도 그리스정교회와는 달리 로마교황의 우위권을 인정하던 기독교도였습니다. 

그리고 1639년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는 레바논 지역의 마론파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처하였으며, 그들이 프랑스에 유학하거나 다른 활동을 해도 좋다고 선언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스만 제국의 주권침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당시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은 오래전부터 동맹관계에 있던 나라였습니다. 오히려 오스만제국은 자국내 가톨릭 기독교에 대한 관할권을 프랑스 국왕에게 위임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프랑스는 공사를 파견하여 이곳에 상주하게 되었습니다.  

마론파 기독교도들은 유럽과 중동을 잇는 특수한 지위 때문인지 상업에도 두각을 나타내었고, 사회의 중간계급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베이루트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급기야 베이루트 인구의 절반은 기독교도였습니다.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인구분포가 교묘한 세력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인지, 양 종파는 큰 문제 없이 비교적 원활하게 공존했습니다. 아울러 중동에서 으뜸가는 상업도시 중 하나로 발전하여 1827년에 이르면 베이루트에 상주하던 프랑스 공사가 "이곳은 상인들의 공화국이며 그들만의 법과 힘을 자랑한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베이루트가 본격적으로 중동의 파리라 불리게 될 대도시로 발전한 것은 1831년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가 모국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일으키면서 레바논-시리아 지역은 이집트군 수중에 떨어졌고, 거침없는 근대화를 추진했던 그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 마흐무드 나미 베이를 현지 총독으로 임명하여 이곳을 다스렸습니다. 마흐무드는 도시를 현대적으로 재건하였고 상업을 장려하였습니다. 그 결과 베이루트에 본거지를 둔 회사가 점점 증가하였고, 무역액도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1836년에 이르면 프랑스 외에 도 러시아와 미국 그리고 오스트리아도 공사관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는 그만큼 이 도시가 번성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한편 베이루트를 통치하던 것은 드루즈라고 알려진 일종의 무슬림 분파였는데 (참고로 무슬림교도는 이들을 무슬림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이곳의 통치를 위임받은 봉건영주집단이었습니다. 이들 또한 상업에 특출난 능력을 발휘한 자들로, 1839년에는 영국과 접촉하여 영국의 통치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도의 파르시(페르시아) 상인들이 영국통치로 번영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새로 이곳을 통치하게 된 이집트인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마론파 기독교를 이용하여 드루즈인들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1839년 드루즈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집트 총독은 마론파 기독교도를 기용하요 이를 진압했습니다. 수백년간 이어지던 공존이 완전히 깨지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 드루즈인, 마론파 기독교도, 시아파 무슬림을 대표한다고 자처한 지도자들은 공동명의로 오스만 제국 술탄에게 서신을 발송, 이집트 총독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영국과 오스트리아 등의 도움을 받아 레바논을 탈환하였고, 종파간 갈등은 당분간 해소되었습니다. 

베이루트가 안정을 되찾자,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대거 유입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회, 카푸친회, 예수회 등. 많은 가톨릭 선교사들이 레바논을 찾았고, 이들은 과거 미국인 선교사들이 구한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설립했듯이 이들 또한 베이루트에 학교와 병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물론 프랑스어를 가르쳤습니다. 가톨릭과 우호적 관계에 있던 마론파 기독교는 이에 고무되어 사회에서 점점 더 적극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지원 아래 기고만장해졌습니다. 또한 1860년, 경기침체에 따라 마론파 기독교 농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자, 이들에 대한 반감을 품던 기존의 기득권자 드루즈인, 그리고 무슬림들은 분노에 휩싸여 결국 마론파 기독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15,000의 기독교도가 학살당했고, 200여개의 마을이 불탔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10만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학살의 배경에는 무슬림인들의 강한 반감이 있었습니다. 1821년 그리스의 독립 이래, 오스만 제국은 정책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고, 지방에서는 유럽인들과의 무역으로 점점 부유해진 기독교도들을 질투하였고 시기하였습니다레바논 최초의 무역상사, 인쇄소, 출판사 등 대부분 기독교도가 설립하여 사회에서 특출나게 부유한 계층으로 자리잡자, 이들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지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도에 대한 학살소식은 곧 유럽에도 전해졌고, 결국 프랑스와 영국은 함대를 파견하여 베이루트를 봉쇄하였고 특히 프랑스의 경우 육군 7,000명을 파병하여 기독교도를 보호했습니다. 이에 레바논은 프랑스군의 감독 아래 안정을 되찾았지만 종파간의 갈등은 전혀 해소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도들은 프랑스에게 군대를 계속 주둔시켜달라고 요청했고, 무슬림인들은 당장 철수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와중 오스만제국 술탄의 대리인으로 온 푸아드 파샤는 학살 가담자들의 처벌을 약속했습니다. 사실상 새로운 레바논 총독으로 부임한 것과 다름없었지만, 그는 유럽열강들과 협상하여 레바논 지역에 일종의 국제적 보장을 받는 특수통치구역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훗날 레바논이라고 불리게되는 국가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은 1861년부터 1915년까지 이 지역의 총독으로 계속 기독교도(가톨릭)를 기용했습니다. 

안정을 되찾은 레바논, 특히 베이루트는 기독교가 인구의 55~66%를 차지하는 도시로 발전했고 생활양식의 많은 부분이 유럽의 그것과 유사했습니다. 유럽식 학교와 정원, 나름 근대적인 시설이 구비된 도시였고,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번창했습니다. 그 결과 오스만제국은 베이루트를 술탄 직할 도시로 승격하였고, 베이루트 산하 트리폴리 등 여러 도시를 두게 하여 레바논 국토의 원형을 만들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은 베이루트를 특별취급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제국의 근대국가 프로젝트는 기독교도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대국가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을 만들어야 하며 국민은 같은 문화와 종교를 공유하는 집단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스만제국이 이슬람을 국교로 삼는 이상 기독교도들은 계속 탄압의 대상이 될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오스만 제국의 숙적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아르메니아인은 적국과 내통할 수 있다는 혐의로 특히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레바논의 기독교도들도 국제적 보장에 의해 안정을 찾았다고는 하나, 계속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애증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나름 안전을 보장해주던 오스만제국마저 제1차세계대전의 패전 후 멸망해버렸습니다. 

이에 레바논의 기독교도 대표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프랑스 측에 서한을 발송하여 대(大)레바논 국가의 독립과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 요청을 근거로 레바논에 대한 식탁통치(사실상의 식민지)를 시행했습니다. 단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새로 생긴 행정구역은 비기독교도 무슬림을 대거 포함시켜 오히려 마론파 기독교도의 세력이 위축되는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 대레바논을 구상했던 마론파 기독교의 판단착오였습니다. 그는 1915년의 대기아(the great famine)의 기억이 뚜렷하여 농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커다란 행정구역을 요청했는데, 그 결과 한개 민족으로 구성된 현대적 국민국가(nation-state)를 건설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무슬림이 다수였던 시리아와의 통합을 원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불씨로 남게 되었습니다. 

1944년, 결국 여러 우여곡절 끝에 레바논이라는 나라가 독립하게 되었으나, 이 국가의 안정은 거의 전적으로 프랑스에 의존하는 것이었고 새로 만든 헌법조차 프랑스의 지도 아래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결국 종파간 갈등은 법률로 간단히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1975년 내전이 발발하였고 이는 199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망명을 떠났으며 오늘날 레바논의 인구가 680만명인데, 해외에 분포한 레바논인은 1500 만명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중 대다수가 기독교입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60년대부터 레반논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레바논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만, 결국 계속 어쩔 수 없이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고 합니다. 레바논 내전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개입하여 평화유지군을 설치하고, UN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등 노력했으나 이러한 활동 등은 프랑스 자국 내에서 대단히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0년 레바논 내전이 끝나고 프랑스군이 레바논군 육성을 도왔는데, 성과는 미미했고 오히려 레바논이 헤즈볼라 등에 의해 잠식당하는 등의 사태가 초래되었고, 레바논은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의 각축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2017년 레바논 총리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해 납치/감금되는 상황이 발생, 프랑스 대통령의 개입으로 간신히 풀려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위를 살펴보니, 레바논 사람들이 프랑스의 신탁통치를 통한 안정을 바라는 게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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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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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8 21:08:20

https://youtu.be/_knLrtsiS1Q

이번 폭발사고 이전에 코로나 바이러스 등의 이유로 이미 심각한 단계였고, 종파별로 권력을 나누게 한 게 정치가 부패한 큰 원인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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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8-09 15:03:09

문제는 마크롱 이 자식이 대외 정책에 있어 정체가 불분명한 풋내기 우파인데다 지나치게 빨리 베이루트에 나타났다는 거죠. 보는 사람 긴장시켰지만 사실은 그냥 날라리였던 사르코지와 달리 얘는 잘못하면 사고칠 수도 있는 애 입니다.

그런 그렇고 그 동네 애들마다 베이루트 정말 좋다고 한 번 오라고 난리였는데 ㅠㅠ

2020-08-09 00:29:38

아주 깊고도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8-10 02:09:33

좋은 글 잘봤습니다.
덕분에 많은걸 배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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