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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차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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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잘못된 정보의 인도여행 이야기를 삭제하고 고쳐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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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9-21 14:00:07

 지난 주에 잠깐 인도여행에 관한 글을 올렸습니다.

코로나로 몸과 마음이 지친 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싶었습니다만

인도여행에서 현지인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잘못된 정보가 많았습니다.

이 곳 디피의 회원님 한분이 그 글을 읽으시고 참고하라면 추천해주신 이옥순 교수가 쓴 <무굴황제>라는 책을 읽으면서

부족한 공부를 너무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세 번의 인도여행을 다니면서 나름 안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 글을 읽으신 분들께 먼저 깊은 사과를 드립니다.

해서 부끄럽지만 <무굴제국>을 읽고 틀렸던 저의 정보를 수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도가 영국놈들에 의해 강제로 점거되기 전까지 무굴제국이 존재했습니다.

무굴제국이란 명칭은 정식 나라 명칭이 아니고 황제가 속했던 부족의 이름이었습니다.

이슬람(수니파)을 믿는 무굴은 야만인과 동일시 된 몽골족을 일컫는 페르시아 말로 실제로 무굴황제들은 이 말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무굴제국은 1대부터 6대까지가 최전성기였습니다. 6대 이후로 영국에 의해 강제로 점령될 때까지 무굴을 19대까지 이어졌지만 6대 이후로는 그야말로 무능한 황제와 부정부패한 간신모리배로 인해 나라는 그야말로 쑥대밭이었습니다.

무굴제국이 인도를 장악하기 전부터 이미 이슬람 왕국은 여러 곳에 존재했습니다.

무굴제국의 문을 연 바부르는 그 중의 한 곳인 델리 로디 왕조를 무너뜨리고 델리에 입성했지만 그는 아그라(타지마할)이 있는 곳에 수도를 정했습니다.

워낙 오랜동안 낭인으로 떠돌았던 바부르는 마약과 술에 쩔어 살았던 이유는 자신의 고향인 카불(아프카니스탄)을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혹독한 더위와 먼지를 그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2대 황제 후마윤은 지극히 햄릿적인 인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동생들로 인한 반란과 지난 정권에 충성했던 장군인 세르 샤의 반란으로 인해 델리를 잃고 아버지처럼 낭인이 되어 15년간 망명길에 올랐다가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다시 제국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르 샤가 만든 도서관의 이층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다가 넘어져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은 아크바르 황제에 의해 위대한 제국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아크바르 황제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고향을 그리워했던 것과는 달리 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인도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해서 그는 힌두교를 배척하지 않았고 포용했고 힌두교 왕국인 라지푸트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관용의 정치를 베풀게 됩니다.

인도 역사상 "위대한" 이란 수식어가 붙는 왕이 두 명 있는데 고대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인도를 통일한 후 불교를 인도의 종교로 정하고 인도 전역에 부처의 유적지를 찾아 보존한)과 바로 아크바르 황제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피난길에 태어나 글을 배우지 못한 문맹이었습니다.

위대함이란 결코 단순한 글의 읽고 쓰기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술과 마약에 쩔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장남인 살림(자한기르 황제)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주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했고 결국 몇 번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위대한 황제는 매번 아들을 용서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러 하나 뿐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네 번째 황제가 된 자한기르는 아버지가 이룬 태평성대를 이어받아 제국의 영토를 더 넓혀 나갔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처럼 맏아들 쿠슈라우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자신을 총애했고 자신이 진정 할아버지의 승계자임을 내세우며 집권 5개월 만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첫 번째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감옥에 갇힌 아들은 또 다시 아버지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고 이 또한 발각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자한기르는 용서를 했지만 아들의 눈을 철사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자신의 눈을 철사로 찌르는 동안 쿠슈라우는 단 한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아들은 목숨은 건졌지만 비참한 운명을 맞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또 한번 운명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자한기르는 왕권의 대부분을 아내인 누르자한에게 맡겼고 대를 이어 권력을 차지하고 싶었던 그녀는 장님이 된 쿠슈라우에게 자신의 말을 들으면 차기 황제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을 단번에 거절합니다. 누르자한이 전 남편과 사이에 나은 딸, 라들리 공주와 결혼하라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쿠슈라우는 이미 결혼한 아내가 있었고 이슬람법에는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지만 지금껏 자신을 위해 헌신한 조강지처, 즉 눈까지 먼 자신의 곁을 지킨 아내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찾아와 울며 자신을 버리고 다시 결혼하라고 매달렸지만 그는 단호하게 안된다고 말하고 운명의 시간을 잡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막내 동생 쿠람에 의해 살해됩니다.

누르자한 왕비와 왕권경쟁을 벌이던 쿠람은 결국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을 제압한 자한기르는 손자들을 볼모로 잡으면서 아들을 용서했습니다. 

정쟁은 더럽고 욕망은 잔인한 것임을 자한기르는 아마 자신을 빼닮은 아들들에게서 알았을 겁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쿠람은 아그라의 타지마할로 유명한 샤쟈 한 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하나 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들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글을 썼습니다.

샤자한은 세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한명은 힌두교, 한 명은 기독교, 한명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내 중에 스무살에 결혼을 한  뭄타즈 마할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녀는 14번째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17년 동안 여덟명의 아들과 여섯명의 딸을 샤자한에게 남겼습니다.

그녀의 유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고 또 샤자한이 재혼하지 말라는 유언이었습니다.

"선택받은 자의 거처"라는 뜻의 타지마할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무덤 때문에 십만명의 장인의 손목을 잘랐다는 야사가 전해진 것 같습니다. 이는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 아닌 듯 합니다. 

그리고 샤자한 역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들의 반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14명의 아이들 중에 살아남은 아이들은 일곱이었고 왕자 네 명과 공주 세 명이었습니다.

황제는 장남과 장녀를 사랑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막내 아들인 아우랑제브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왕위를 찬탈했고 아버지를 타지마할이 내려다 보이는 아그라 성탑에 가두고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맏아들 다라 시코의 머리를 잘라 부수어 선물로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에 보낸 선물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어져 보내졌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준비한 이는 다름 아닌 차녀인 로샤나라의 계획이었습니다.

아우랑제브는 권력에 눈이 멀어 이미 인간의 존엄을 상실한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독실한 무슬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씻으려는 듯이 종교에 몰두했고 그럴 수록 그는 오히려 근본주의로 변해갔습니다. 

결국 그는 검소한 황제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당시 무굴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나라였으나 그는 황제의 사치와 향락을 즐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이전 세대가 한결같이 지켜 온 종교적 관용을 무시했고 정복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치세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냈고 그 전장에 델리의 50만 백성 중에  20만명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아그라 석굴과 아잔타 석굴이 있는 아우랑가바드에 있는 또 다른 타지마할은 그가 그토록 점령하고자 했던 데칸고원에 자리잡은 도시로 그의 어머니 (뮤타즈 마할)를 위해서 세운 무덤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를 위해 세운 무덤입니다.

그 타지마할은 생긴 모습은 비슷하나 이미 기울어 가고 있던 제국의 모습처럼 대리석이 아닌 석회암으로 지어졌고 찾는 이도 별로 없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우랑제브 역시 전장에서 후퇴하면서 죽음을 맞아 아우랑가바드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그의 무덤은 너무 초라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관광객들조차 찾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긴 글이 되어버린 것 이해를 구합니다.

제가 잘못 쓴 글의 내용은

샤자한이 타지마할 때문에 장인의 손목을 잘랐다는 말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인도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우랑제브는 뮤타즈 마할이 낳은 네 번째 아들로 자신의 아내를 위해 아우랑가바드에 자신의 어머니의 무덤과 비슷한 타지마할을 지었습니다.

<무굴황제>는 제국의 번성과 멸망이 어떻게 왜  이루어졌는지를 재미있게 잘 풀어쓰고 있습니다.

단숨에 읽으면서 이옥순 교수의 다른 책들을 주문했습니다.

디피를 통해서 제가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깨우치게 되어 너무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님의 서명
철학자는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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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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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1 13:05:29

읽으면서도 왠지 그럴 것 같습니다 인도사람들인들 자신들의 역사를 빠짐없이 다 알고 있을까요? ㅎ 그 부분 빼고서도 유익한 내용들이 많아 즐겁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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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1 13:56:15

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숨쉬는 것 빼고는 다 거짓말이다.라고 하더군요.

전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지금도 믿지 않습니다만 역사적 사실은 늘 자세히 검증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2020-09-21 13:15:56

 어떤 건축물을 짓고 건축가들의 손을 잘랐다는 식의 이야기는 러시아의 이반대제의 경우에도 비슷한 야사가 있었던 것 같아요(바실리성당인가를 만든 건축가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는 야사). 이런 건축물에는 그런 야사들이 뒤따르는게 운명인가봐요. 

WR
2020-09-21 13:58:55

아마 그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그런 야사를 지어내는 것 같습니다. 인도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의 이야기는 사실 권력투쟁인데 아우랑가바드 사람들은 오히려 아우랑제브를 측은하게 여기는 것 같더군요.

제 짧은 영어도 아마 한 몫을 했겠지만 그들은 아우랑가바드의 타지마할을 진짜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더군요.

전 아그라의 타지마할은 손목 이야기를 듣고 처음부터 가지 않으려고 했고 세 번의 인도여행에서 늘 빠졌던 곳입니다.

이렇듯 잘못된 정보는 무서운 것이지요

1
2020-09-21 13:26:55

무굴제국 인터넷서점에서 찾아보니
무굴황제 군요.

저두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WR
2020-09-21 14:01:27

아 그렇군요. 무굴황제가 맞습니다. 

또 실수를 하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
2020-09-21 14:28:00

와 근데 참 대단한 콩가루 집안이네요.

WR
2020-09-21 15:44:58

네 읽어보시면 더 대단합니다. 

3
2020-09-21 16:09:34

글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넌지시 책을 권해주는 회원님.
그걸 또 찾아 읽고 잘못된 부분을 새로 고쳐 써주시는 회원님.
디피의 가치와 존엄은 이렇게 유지되어 온 거겠죠?

WR
2020-09-21 16:27:30

네 디피의 또 하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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