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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다단계 살짝 경험한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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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9-30 17:29:27

대학 1학년 때인 1985년 어느 날, 친구들과 논현동 어딘가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봉투를 하나 줍니다.
"이거 한번 들어 보세요. 하루 두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한달에 200만원 벌 수 있어요!"
35년 전이니 200만원이면 월급쟁이들 월급의 6~7배는 되는 돈이었습니다.
어리버리한 저희들에게는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액수였죠.
어디냐고 물어보니 바로 옆이랍니다.

따라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있고 앞에서는 무슨 "성공 사례" 같은 걸 발표하는 상황이더군요.
앞에서 발표하는 사람들은 "이대리점님", "김대리점님" 이런 식으로 호명되고 그러면 앞으로 나가 자기들의 성공담을 얘기해 주는 겁니다.

회사 이름이 너무 거창해서 지금까지도 기억합니다.
"아메리칸 뷰티 소사이어티".
지갑, 벨트 등의 악세사리 세트, 보온 밥통, 전기담요 등을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판매하는 듯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 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가격이었죠.

그런데 좀 서서 보고 있자니 특이한 점 하나가 눈에 띕니다.
그 "김대리점", "이대리점", "박대리점"들이 얘기할 때마다 얼굴 표정들이 너무 똑같은 겁니다.
마치 스텝포드 와이프에 나오는 그 마을 부인들처럼 활짝 웃지만 뭔가 부자연스럽고 인공적이라는 느낌?
단 한명의 예외없이 모두들 무시무시할 정도로 똑같은 그 '성공한 사람들의 미소'에 싸~~한 위화감이 느껴지더군요.

결국 친구들에게 귓속말로 나가자 하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빡세게 강요하고 못나가게 하고 그런 건 없었던지라 별 일 없이 거기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느낀 그 이상한 느낌을 친구들도 다 느꼈더군요.
그런데 그때는 "다단계", "피라미드", "네트워크 마케팅" 같은 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저희는 그게 그런 거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경험하고 얼마 뒤, 뉴스에 다단계 업체들에 대해서 나오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그 이름 거창한 회사가 다단계 조직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완전 초기라 거기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었던 거겠죠.

그 이후에도 여기저기서 다단계 애들을 볼 수 있었는데, 항상 눈에 딱 띄는 특징들이 있죠.
일단 밝은 녹색, 와인색, 겨자색 등 평소 보기 힘든 색깔의 양복을 입고 손에 항상 다이어리 같은 걸 들고 다니면서 공중전화 박스 근처의 가게 주변에 몰려 다닙니다.(핸드폰이 별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수시로 전화박스에서 전화를 거는데 주로 학교 동창, 군대 친구들 이런 사람들에게 걸어서 만나자 합니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면 뻗대고 있던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한그릇 씩 때리죠.
그 말단의 애들은 어찌 보면 참 불쌍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몇년 뒤, 대학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가장 나이 많은 형이 "얘들아, 니들 혹시 XX이 소식 아니?"하고 묻습니다.
그 XX라는 사람은 저희 동기이지만 스스로 자기는 58년 개띠라고 하면서 최고참 행세를 하던 사람인데, 알고보니 63년인가 64년 생이어서 실제 59년, 58년생 형들을 나중에 어이없게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자기 말로는 벌교 출신에 유도 4단, 당구는 700 치고 늘 술에 쩔어서 다녔는데, 학교는 졸업도 안하고 7년 넘게 다니고 있었고 수업 시간에는 강의실에 들어와서 뒤쪽 바닥에 아예 누워 코골며 자는 게 일이었습니다.
외모가 워낙 험상궂고 얼굴, 팔 같은데 칼자국이 많아 교수들도 그 사람 잘 때느 봉변 당할까봐 깨우지도 않았죠.
하여간 다들 잘 어울려 놀긴 하면서도 속마음으로는 피하고 싶어했던 인물이었는데, 그의 얘기를 꺼낸 형님의 이어지는 말이 "XX이 요즘 피라미드 한단다. 연락 오면 조심들 해라" 하는 겁니다.
그때 다들 반응이 "그 인간 그럴 줄 알았다, 그 인간답다"였습니다.
그만큼 다단계는 인생의 막장들이 몰리는 곳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님의 서명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서명 안만들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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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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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30 17:40:34

저희 친척중 한분이 저거에 뻐져서,,,,80년대 당시 미제 진공청소기를 팔아서...어머니가 어쩔수 없이 하나 사줬는데....당시 가격으로 천만원 조금 안됐던걸로. ㄷㄷㄷ

-뭐 호텔에서 사용하는듯한 무지 시끄럽고 둥근통같은건데....

당시 그거 한대면 자가용 한대 값이엿다는....ㄷㄷㄷ 결국 너무 시끄러워 몇번 못쓰고 창고에 쳐박혀있다가 십년도 넘어서 버린걸로 기억하네요.

 
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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