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치] 논객 시대의 종말
* 딱히 시사정치적인 글이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 몰라 일단 시사 카테고리로 글 작성합니다.
진중권씨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얻게 된 게 제 기억으로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책을 통해서였는데요. 당시 독일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을 연구하고 왔다고 소개된 적도 있고, 그가 이 책에서 펼친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수구 언론에 대한 비판은 나름대로 참신했습니다. 사실 그리 학술적인 글이라 할 수는 없고, 악플 댓거리 수준의 조롱에 가까운 글이었는데 당시엔 그런 조롱이 엄숙한 책의 형태로 활자화되는 경우는 없었으니, 선구적이랄 수도 있고 어쨌든 신선한 스타일이었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이 책은 그가 창시한 논평의 명암을 이미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어를 폭력적 수단으로 삼을 때, 그 폭력이 얼마나 통제불가능하게 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그 뒤에, 다시 한 번 대중의 주목을 받은 것은 <디 워> 사태였죠. 제가 당시에 놀랐던 것은, 진중권씨의 이야기는 너무나 초보적인 수준의 이야기에 불과한데 이것으로 영화평론가 대접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 뒤 그가 정치 평론을 하고 문화 비평을 하고 미학 강의를 할 때에도, 저는 한 번도 그가 깊이 있는 수준의 무언가, 눈에 띄는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준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미학 강의와 저술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소개하면서도 그의 정치 평론은 지극히 근대적이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상식 수준의 논평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미학분야의 재치 있는 소개자였고, 아무런 전문성 없이 지극히 상식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필부였습니다. 그런 그의 발언들이 끊임없이 기사화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정도의 상식도 기사거리가 되는 우리 사회의 지적 가난함만을 새삼 깨달을 뿐이었죠.
아마도, 그러한 시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진중권씨와 같이 상식적인, 최소한도의 합리성을 갖춘 이야기가 필요하고 유의미했던 그런 시대. 80년대 이전까지가 지식인의 시대였다면,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논객의 시대가 아니었을까요. 지식인이 모든 분야의 지식을 섭렵하고 고도의 도덕성을 겸비한 채 사회를 굽어보며 사회에게 나아가야 할 가르침을 주는 선도자적인 존재였다면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 그러한 지식인의 존재는 사라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를 지식의 전문화, 파편화에 따라 그러한 그람시적인 유기적, 총체적 지식인이 불가능해졌다고 진단했습니다. 지식인이 열어놓은 사회 비판의 공론장에 들어선 것은 논객입니다. 이들은 일단 재기넘치는 언어적 재능과 문화적 소양을 통해 대중들의 기호에 맞는 담론들을 생산해는, 대중 친화적인 존재였고, 그러면서도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현재를 일깨워주는 지식인의 역할 또한 일정 부분 담당했었지요. 어떤 사회적 문제, 논쟁이 생기면 논객들이 등장해 이러쿵 저러쿵 논평하며 그 사건들의 의미와 위치를 지정해주었습니다. 알기 쉽게 말이죠. 2010년대 무렵에는 일군의 청년 논객들이 등장했습니다. 아마도 인터넷 매체의 등장이 이러한 논객의 존재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고(1세대 논객이라 할 진중권씨부터가 그러하죠) 이는 좀 더 면밀하고 깊은 탐구의 주제일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실 이 논객의 존재와 역사라기보다는, 그 종말에 대해서입니다. 길게 쓸 생각이 아니었는데, 이미 길어졌군요. 많이 잊혀졌지만, 올 3월,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던 무렵 진중권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마스크 착용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내용의 글을 올립니다. WHO는 물론이고 유럽, 미국 어느 곳에서도 마스크 착용을 권장하지 않고 마스크 착용이 위생안전에 소홀하게 만들어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이지요. 그 스스로는 아무런 과학적 지식도 근거도 없는 진중권씨의 근거는 WHO의 권위와 미국, 유럽의 권위였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진중권씨의 말에 따라, 그리고 이를 받아쓰기한 언론들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마스크 무용론이 힘을 얻었다면, 어찌 되었을지요.
이러한 사례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올해 초 JTBC에서 있었던 신년 토론회에서 "제가 아니까요"라고 말하던 진중권씨의 모습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경악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더 인상적이었던 모습은, 똑같이 독일 유학한 유시민씨를 상대하면서 법무부가 독일어로 뭔지 아느냐 영어로 뭔지 아느냐라고 하던 모습입니다. 최근에도 누군가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법무부가 영어로 minister of justice라는 게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정의'라는 말이 들어간다는 게 무슨 새삼스러운 이야기일까요. 이걸 굳이 법무부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게 법무부를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알아야 할 수 있는 말일까요? 외국 법무부의 구체적인 행정 사례나 사건들도 아니고 그런 단순한 외국어 표현을 거들먹거리는 태도에서 저는 유아적인 의식만을 엿보게 됩니다. 진중권씨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저런 외국어 낱말들 몇 개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싶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언론의 미래를 논하는 토론 자리에서 돈 얘기로부터 시작하며 부들부들 떨던 진중권씨의 모습(실제로 흥분해서 떨던데, 손석희가 물어보자 조금 춥다고 하더군요)은 저에게는 현재 논객의 존재를 상징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논객의 존재는 진중권씨를 비롯한 특정 개인들의 개별적 존재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들 알고 있듯이, 논객들은 그들의 말을 기사화해주는 언론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논객들은 개인 SNS 공간에 거친 언사들, 즉흥적인 생각들, 짧은 촌평들을 매일같이 써제끼고 언론들은 이를 다시 받아쓰면서 장사를 해먹습니다. 아무런 전문성이 없으면서 사회의 거의 모든 사안들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의견들을 내놓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진중권씨 같은 이들은 단지 개인적인 온라인 공간에 자기 생각을 늘어놓는 자유를 누렸을 뿐입니다. 언론은 단지 진중권씨 같은 이른바 "인플루언서"(논객이 인플루언서로 불리는 이 현상, 단지 표현의 변화만이 아니라 영어 낱말을 음차한 것부터, 아무런 구체적인 규정 없이 단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라는 의미만을 가진 이 낱말 자체에 이르는 모든 것이 분석해야 할 대상이 될 것입니다)의 말을 옮겼을 뿐입니다. 기사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직접인용과 간접인용 속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기자는 남의 말을 따왔을 뿐이고, 원래의 발언자는 그 지면에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지만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말들이 이렇게 생산됩니다. 극우 보수 언론들의 말을 정확히 그대로 되돌려주면서, 말로 폭력을 행사하며 등장했던 진중권씨는 이제 SNS봇과 구분되지 않는, 주체 없는 말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논객'을 대신해서 등장한 이 새로운 존재, SNS와 언론의 이 체계, 모두 인터넷 온라인이라는 경계없고 한계없는 공간에 의해 창출된 이 인플루언서 시스템을 이제 고민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최근 진중권씨의 언행들을 보면 그에게는 자신의 발언들이 어떤 정치적 효과를 낳고 어떻게 이용될지에 대한 성찰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80년대 독재 권력과 싸우듯이 부패를 이야기하고 공정과 정의를 외치는 그의 언행들은 21세기 정치 지형이 적과 아군의 단순 대립으로 환원될 수 없는 훨씬 복잡한 형세를 이루고 있으며, 그 자신이 외부의 논평자가 아니라 내부의 참여자라는 점을 모르고 있는 듯 보입니다. 아마도, 모두가 얼마간은 부패해 있고 부정의할 것입니다. 더 이상 단순한 선과 정의는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 더 없는 아이러니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미학을 소개한 이가 그러한 근대적 선과 정의를 확고하게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그의 말들은 이 비일관성 위에서 어떤 정박지도 근거지도 없이 질주합니다. 3월,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마스크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던 말처럼 질주하고, 또 사라집니다. 그 뒤에 남는 것은 돈과 소모된 감정의 찌꺼기입니다. 21세기 우리 사회의 한 모습이 이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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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우선 추천 했고요...
후반부 결론 부분은 제 생각은 약간 다릅니다.
- 진중권은 자신이 써 갈긴 글들이 어떻게 언론들에 의해 재생산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에서 동시에 고정컬럼을 연재하는 불가능한 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제도권 언론에서 인용된다는 것은 일종의 밥벌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의 글이 보수-진조 양쪽 매체에서 인용된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하면 더 인용되는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쓰는 글들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x이지만 그는 고심해서 쓴 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글을 자극적이 될 겁니다. 그래야 자신이 생존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 뽕 맛을 본 것과 유사합니다.... 그가 아직 유튜브로 건너가지 않는 것은 최후의 자존심인데 이 또한 기존 언론에서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어 생계 그리고 관심을 위해서 넘어갈 것이라 저는 추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