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축구) 추모/ 마라도나, 신의 품 안에 든 신의 손
가슴 깊이 추모의 뜻을 품고 작성한 포스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의 흑역사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뜬, 제 유년시절의 영웅을 향한 리스펙을 표하기 위함입니다.
#0. 생전 디에고 마라도나 본인이 뽑은, 자신의 커리어 사상 최고의 골. 프로에 처음 입성했을 때의 팀인 아르헨티노스 주니오르에서 뛸 당시, 국제 친선경기 중 나온 득점 장면입니다. 화질은 최악입니다만, 디에고 특유의 리듬감과 파워를 느끼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마라도나의 10대 시절로 추정됩니다.
#1-1. 1982년 갈티에리 군부가 내정과 관련한 자신들의 치부를 덮기 위해 일으킨, 결과적으로 조국 아르헨티나에 패전의 쓴맛을 선사하고 스스로도 실각이란 자충수가 된 포클랜드 전쟁.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당한 패배는 군부가 어떤 저의로 전쟁을 일으켰든 말든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겐 씻기 힘든 상처가 됐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잉글랜드 대 아르헨티나의 대진이 완성됩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최전성기를 맞이한 디에고 마라도나가 일기당천으로 잉글랜드를 박살냅니다.
신의 손과
세기의 골로 말이죠. 이와 관련한 의미는 이미 너무도 많은 분들이 알고 있고 가늠할 수 있기에 패스.
월드컵 역사상 단일대회에서 가장 많은 파울을 당한 선수는 86 월드컵에서의 디에고 마라도나입니다. 그런데 2위와 3위가?
1. 7경기 53개 마라도나 (86 멕시코 월드컵)
2. 7경기 50개 마라도나 (90 이탈리아 월드컵)
3. 5경기 36개 마라도나 (82 스페인 월드컵)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신 팩트 하나. 월드컵 우승팀이 해당 대회 베스트 11중 두 명 이상을 배출하지 못한 경우가 단 한 번 있으니, 바로 1986 아르헨티나입니다. 아시다시피 우승팀과 준우승팀, 넓게는 4강팀까지의 멤버들이 앞선 명단의 대부분을 채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86 멕시코 월드컵의 우승국 아르헨티나에서 대회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단 한 명뿐, 그의 이름은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1-1 번외편. 단, 1970 멕시코 월드컵 이전까지는 결승까지 총 6경기를 치렀기 때문에 파울 당한 횟수 관련 해당 카테고리에 이름을 올린 선수를 찾기란 하늘에서 별따기입니다. 또 하나 염두에 둘 점은 66 잉글랜드 월드컵까지는 옐로우 카드 자체가 없었고, A란 선수가 상대 수비수의 하드 파울로 인해 부상을 입었다고 한들 교체 제도까지 없던 시절이란 것입니다. 옐로우/레드 카드+선수 교체 제도가 정립된 70년 월드컵 이후와 달리, 상대팀의 에이스를 상대로 속된 말로 그라운드에 아예 못 들어오게끔 초장에 담가버리는 장면이 잦게 연출된 이유입니다. 쉽게 말해 ‘상대 슈퍼에이스에게 부상을 입히고 얻는 이익>하드 파울을 범한 내가 퇴장을 당해 우리 팀이 당하게 될 불이익’의 공식이 있었단 말씀. 그 대표적 희생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축구황제 펠레입니다. 최전성기를 달리던 구간에서 열린 62 칠레 월드컵과 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상대의 연이은 하드파울로 조별 예선 부상 아웃을 당해버렸으니 말이죠. 이런 시스템에서 ‘어느 선수가 파울을 당한 숫자=해당 팀에서 그 선수의 지배력과 상대팀에게 미치는 위압감’ 따위의 결과를 유추하는 일은 큰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66 잉글랜드 월드컵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 브라질 v 포르투갈전. 펠레는 예선 첫 경기에서 불가리아를 상대로 득점포를 올리지만, 상대 수비진의 하드 파울과 심판진의 거친 태클 허용(지금도 ‘주최국 잉글랜드가 펠레가 이끄는 제국 브라질을 대회 초반에 탈락시키기 위해 브라질을 상대로 어떤 거친 반칙이 나와도 심판진이 제재를 하지 않게끔 그 분위기를 조성했다’란 의혹을 사고 있다)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두 번째 경기인 헝가리전에서 황제는 출전하지 못했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브라질은 1:3 대패를 당하고 말았죠.
4년 전 62 칠레 월드컵에선 황제의 부재 속에 역사상 최고의 드리블러로 평가(덧붙여 메시와 호날두가 등장하기 전까지 축구사 최고의 윙포워드로 평가를 받음)를 받는 가린샤가 맹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의 가린샤는 30대 초중반의 노장이었고, 무엇보다 무절제한 사생활로 인해 몸 관리에 완전히 실패한 상태였습니다. 4년 전과는 달리, 작은 새로부터 대활약을 기대하기 힘들었단 소리입니다. 1승 1패 백척간두에 선 제국 입장에서 C조의 막강한 도전자 포르투갈과의 일전을 앞두었으니 펠레에게 SOS를 친 건 당연지사.
참고로 포르투갈의 중심은 에우제비우와 그가 이끄는 벤피카의 멤버들이었고, 다시 에우제비우의 벤피카는 60년대 초반 오늘날의 챔피언스리그인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한 강호였습니다. 당시 남미 클럽 경쟁의 최종 우승자와 유럽 클럽 경쟁의 최종 우승자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결전을 벌이는 인터컨티넨탈컵(후 도요타컵. 1960-2004년 존속)이 있었는데, 62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에우제비우의 벤피카는 남미의 챔피언이자 펠레가 이끄는 산토스와 맞붙게 됩니다. 홈 앤드 어웨이 경기에서 펠레는 유럽의 챔피언을 말 그대로 난도질합니다.
특히 리스본에서 벌어진 어웨이 경기에서 산토스는 벤피카에 5:2 대승을 거두게 되는데, 이 경기에서 펠레는 해트트릭에 1어시스트를 곁들여버리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포르투갈은 펠레를 막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황제를 그라운드 밖으로 몰아내라’란 지령이 떨어진 이유입니다.
펠레는 전반 9분 수비수 비첸테의 하드파울을 시작으로
전반 29분 주앙 모라이스의 오른쪽 무릎을 노린 태클 2연타를 맞고 오른쪽 무릎에 심각한 부상을 입습니다. 7분 후 오른쪽 무릎에 붕대를 감은 채 절뚝이며 그라운드로 들어섭니다만, 왼쪽 다리로만 경기를 펼쳐야만 했던 펠레는 더 이상 축구 황제가 아녔습니다.
이 경기의 다른 이름은 ‘The hunt of Pele’입니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에 1:3 패배를 당했고, 최종 1승 2패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든 채 예선탈락의 수모를 겪었습니다. 62 월드컵에 이어 66 월드컵에서도 상대의 하드 파울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FIFA측에 열이 받을 대로 받은 펠레는 ‘다시는 월드컵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고, 이는 옐로우 카드와 선수 교체 제도의 도입을 촉진했습니다. 그 결과물은 디에고 마라도나와 리오넬 메시와 같은 후대 슈퍼스타들을 보호해주는 보호망이 됐고 말이죠.
훗날 펠레는 최전성기를 달리던 자신을 향한 월드컵 잔혹사와, 그 상징적 경기인 포르투갈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정말 거칠게 다뤄졌습니다. 특히 주앙 모라이스는 그 어떤 자비심도 없이 거칠게 절 차고 또 넘어뜨리더군요. 연속으로 행해진 그 잔혹한 파울로 인해 결국 전 경기에서 축출되고 말았습니다.”
#1-2. 디에고 마라도나의 커리어를 훑다보면 그에게도 극복해야할 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축구 제국 브라질.
마라도나가 최전성기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지쿠의 브라질이 그 벽이었습니다. 79 코파 아메리카를 거쳐 월드컵(82월드컵)에서까지, 그러니까 두 차례 메이저 대회에서 카나리아군단은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만나 모두 승리를 거뒀습니다. 화끈하고 아름다운 공격축구와 환상의 사중주로 대표되는 지쿠의 브라질에 대해선 몇 차례 언급을 한 적이 있으니 넘어갑니다.
다음의 벽은 장차 94 월드컵 챔피언이 될 브라질 핵심 멤버들의 심장이 펄펄 끓던 시점입니다. 사실 86월드컵 이후 지쿠가 소크라치스와 함께 브라질 대표팀을 떠난 뒤에도, 그러니까 프라임 타임의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도 브라질만 만나면 번번이 패배의 잔(무승부나 패배)을 들이켰습니다. 87 코파 아메리카에서의 실패 이후, 마라도나는 캄페오나토 수다메리카노 코파 아메리카를 들기 위해 89 대회에도 참가하기로 결정합니다. 호마리우-베베투 환상의 콤비가 세상에 위용을 떨치기 시작한 시점이며, 훗날 캡틴 둥가란 칭호로 더 유명하게 될 둥가가 중원을 호령하던 때입니다. 최후방엔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평가를 받는 타파렐이 버티고 있었고 말이죠. 이 대회에서도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을 만나 0:2 완패를 당합니다.
하지만 이토록 지긋지긋하던 제국 브라질과의 악연을 디에고 마라도나는 결국 극복해냅니다. 그것도 가장 거대한 스포츠 이벤트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말이죠. 90 이탈리아 월드컵 16강 브라질과의 대전. 이 대회에서 마라도나는 상대방의 반칙을 이끌어내기 위해 가벼운 접촉에도 맥없이 쓰러졌습니다. 전 세계 언론에서 그를 향해 ‘다리 벌린 창녀’란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예선 첫 경기이자 월드컵 개막전인 카메룬과의 경기에서 팀의 충격적 패배를 막지 못한 마라도나에게 ‘86월드컵에서와 달라도 너무 다른데?’란 의혹이 많이 나온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국내 축구팬들 중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의 상태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분들이 많아 잠시 말씀을 드리자면, 마라도나가 코카인 복용 의혹을 사고 있었던 건 참입니다. 동시에 나폴리 구단주의 비호 아래 경기력 향상 약물 의혹을 사고 있던 것도 참이고요. 다만 이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89/90시즌 마라도나는 세리에를 지배했고, 슈퍼팀 AC밀란을 넘어 나폴리를 우승시킨(이에 대해 아리고 사키 감독이 통탄을 한 바가 있다. 슈퍼팀을 이끌고서도 마라도나에게 1등 자리를 빼앗겼다고.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치욕적이며 슬픈 일이었다고) 일등공신이었단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90 이탈리아 월드컵 기간이면 마라도나의 최전성기 구간에 들어간단 얘기. 문제는 그가 대회를 앞두고 부상을 입었고, 완치가 되기도 전에 월드컵을 치러야만 했단 사실인데, 대회기간 내내 마라도나의 경기력이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라 하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시점이었습니다. 디에고 마라도나를 향한 의혹과 비난, 그리고 비아냥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던 그 때였단 말이죠. 마라도나가 자신의 신성을 보여주는데 필요로 한 시간은 단 3초. 16강전 전후반 내내 아르헨티나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때,
‧ 브라질의 파상공세를 막아낸 GK 고이코체아의 손은 신성으로 가득했다.
‧ 골대를 때리든지 고이코체아를 뚫지 못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꼭 하던 당시 브라질 공격진이었건만, ‘특유의 오만함과 게으름으로 인해 선수단 분위기를 망친다’란 이유로 호마리우를 벤치에 묵힌 라자로니 감독의 선택은 멍청했다. 호마리우는 일반적인 선수가 아니고, 희소하지만 그래도 찾아볼 수 있는 당대 엘리트 레벨 선수도 아닌, 대놓고 천재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오만한 크루이프조차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호마리우를 지도하다 결국 인정하지 않았던가. “쟨 놔둬. 밤새 클럽에서 놀다가 와도 해트트릭을 기록하잖아?” 그러니까 라자로니가 천재에게 자신들을 맞출 생각이 아닌, 천재를 자신들에게 맞출 생각을 했단 것인데, 지금까지도 ‘만일 호마리우가 경기를 뛰었다면, 과연 브라질이 그 수많았던 찬스 중에 단 한 골도 넣지 못했을까?’란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 만일 욱일승천하던 기세의 베베토가 경기를 뛸 수 있었다면 호마리우 없이도 최전방의 카레카와 좋은 호흡을 보여줄 수 있었겠고, 그렇게 됐다면 공격진의 생각보다 빈약했던 결정력 문제가 많이 해소됐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월드컵 개막 직전 트레이닝 캠프에서 훈련을 하다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막강한 위용을 뽐낸 94 미국 월드컵 우승팀 멤버들 중 그 핵심자원들이 네 살이나 더 젊은 시절이었건만, 감독의 보수적 접근법으로 인해 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도전기는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 찰나를 통해 이탈리아와 함께 우승후보 1순위였던 브라질을 침몰시킵니다. 남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앙숙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관계를 염두에 둘 때, 아르헨티나인들에게 디에고 마라도나가 어떠한 모습으로 보였을지 잠시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가 조국에서 절대적 영웅이 된 이유입니다.
#1-2 번외편. 브라질이 16강전에서 탈락한 이후, 대회가 진행될수록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평가받게 된 팀은 서독이 아닌, 홈팀 이탈리아였습니다. 4강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가 이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마라도나는 이탈리아를 맞이해 이 대회에서의 자신의 최고의 경기력을 선사했습니다. ‘개막전, 카메룬을 상대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는 걸 구해내지 못함->16강전, 세계 최강 브라질을 무너뜨린 그 3초->8강전, 승부차기를 실축하는 등 최악의 부진한 모습
->4강전, 5경기 무실점 경기를 이어가고 있던 이탈리아의 가공할 수비진을 계속해서 타격, 결국 이탈리아를 잡아내는 선봉장이자 1등 공신이 됨.’ 부상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희대의 천재가 4년 전에 비해 더 약해진 전력의 팀을 이끌고, 4년 전 당시 토너먼트(86년 월드컵에서의 빅2는 브라질과 프랑스였다. 마라도나가 7경기를 치르는 동안 만난 강호는 서독과 잉글랜드였다)에서 만났던 상대보다 더 강한 상대(90년 월드컵에서의 빅2는 브라질과 이탈리아였다. 마라도나는 결승전에서 서독을 만나기 전까지 토너먼트에서 이들을 모두 상대해야만 했다)를 맞이해 보여준 기록지입니다.
참고로 당시 이탈리아의 수비진은 축구 역대상 최강의 수비 라인업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3-5-2와 4-4-2를 자유롭게 오가며 초기 컴펙트 사커의 특징(흔히들 오해하는 게 있다. ‘요즘 축구의 전선 간 너비가 가장 좁다’고, 그러니까 ‘시간이 갈수록 전선의 폭이 더 좁아지고 있으니 어느 한 특정 선수를 통한 공간 창출은 더 어려워진다’란 믿음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90년대 초반의 전선 간 너비가 축구 역사상 가장 좁았다. 특정 선수를 통한 공간 창출이 더 어려워지고 있는 건 참이지만)을 가미한 카테나치오의 가공할 위력을 대회 기간 내내 선보였습니다. 4-4-2를 기준으로 그 면면을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를 꼽을 때 열 손가락 안팎에서 거론이 되는 젱가.
‧ 뒤에도 잠시 등장하겠지만, 인테르 밀란의 심장이자 영원한 캡틴이며 축구 역사상 최고의 풀백/센터백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베르고미.
‧ 이탈리아의 위대한 수비 역사가 만들어낸, 말디니와 함께 가장 완벽하고도 위대한 창조물인 바레시.
‧ 당대 최고의 센터백 중 한 명(판 바스턴은 ‘자신을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바로 페리를 꼽는다)이자 베르고미 그리고 브레메와 함께 인테르 밀란의 철벽 수비진을 구축했던 리카르도 페리.
‧ 마지막으로 자타공인 역대 최고의 좌측 풀백이자 센터백으로서도 역대급 선수인, 이탈리아의 위대한 수비 역사가 만들어낸, 바레시와 함께 가장 완벽하고도 위대한 창조물인 말디니.
#2-0. 영어로 된 칼럼인데, 꽤나 문학적인 뉘앙스로 쓰인 칼럼입니다. 내용이 상당히 좋습니다. 읽어보실 분은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https://thesefootballtimes.co/2019/08/15/the-cecline-of-napoli-post-maradona-from-paradiso-to-inferno/
#2-1. 10년도 더 전에 올린 포스팅입니다. 나폴리에서 마라도나가 살아있는 수호신이 된 이유입니다. 지금 와서 보니 본래 작성했던 내용 중 여러 부분이 사라진 것도 같네요. 오래 지난 글이라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14760325&sca=%EC%B0%A8%ED%95%9C%EC%9E%94&sfl=wr_name%2C1&stx=axl18&sop=and&spt=-462542&page=4&scrap_mode=
#2-2. 최전성기를 달리던 나폴리 시절의 마라도나, 그의 당대 라이벌로 거론되는 인물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세리아에선 판 바스턴과 굴리트. 클럽에 국가대표까지 합친 영역으로 넘어가면 마라도나 본인도 인정한 인물이 한 명 나오는데, 바로 마테우스.
하지만 전 결코 앞선 이들을 마라도나의 라이벌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사실 이름이 언급된 본인들도 손사래를 칠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거두절미하고 그 이유와 관련해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1990년대까지의 축구계는 21세기의 것과 꽤나 상이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21세기 들어 레알이나 바르샤, 맨시티 등 압도적인 자금력을 과시하는 몇몇 슈퍼 클럽들이 전 세계 유소년부터 성인 선수들까지 각 포지션의 A+~S급 선수들을 독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들은 속된 말로 지들끼리 돌아가며 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사실 그렇기 때문에 전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나 리그 우승의 가치를 이전보다 더 낮게 평가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만, 뭐 아직까지는 제 개인적 생각일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너도 나도 우승할 수 있던 그 이전 시대, 분데스리가를 넘어 슬슬 최고의 리그로 발돋움하던 80년대 중반 세리에에서 일대 사건이 벌어집니다. AC 밀란의 구단주로 등극한 베를루스코니가 헬리콥터를 타고 산시로에 입성하는 장면을 연출한 후 전(錢)의 전쟁을 벌인 것이죠. 80년대 후반 AC밀란 스쿼드를 보면 베스트 일레븐 중 7명이 이탈리아 선수이고, 그 7명 전원이 각각 80년대 중반-90년대 초반 길게는 00년대 초반까지 아주리 군단의 주전으로 뛰어봤습니다. 다시 그 중 세 선수가 90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의 주전이었는데, 그중 두 명은 축구사 역대 수비수를 꼽을 때 카이저 베켄바우어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바레시와 말디니이고, 다른 한 명은 축구를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도나도니입니다. AC밀란엔 이외에도 코스타쿠르타(94 미국 월드컵과 98 프랑스 월드컵 주전)와 안첼로티 등 이탈리아산 레전드들이 즐비했습니다.
베를루스코니는 마라도나의 나폴리를 비롯한 다른 경쟁자들의 추격을 완전히 따돌리기 위해 네덜란드 3인방까지 영입합니다. 바레시나 말디니와 마찬가지로 축구사 올타임 레전드를 100명 뽑을 때 무조건 그 이름을 올리는 판 바스턴-굴리트-레이카르트 오렌지 삼총사(유로 88 우승의 주역들)를 말이죠. 생각해보시길. 축구사 100년 올타임 100인에 이름을 올리는 5명의 선수가 한 팀에 있다고 말입니다. 더 웃긴 건 그렇다고 다른 선수들의 수준이 결코 떨어지지 않았단 사실입니다. 여기에다 감독은 압박 축구-컴펙트 사커 혁명의 창조자인 위대한 아리고 사키.
AC 밀란이란 희대의 슈퍼팀이 등장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지역 라이벌 인테르 밀란도 전의 전쟁에 기꺼이 동참합니다.
그들의 선택은 훗날 90 이탈리아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에 이름을 올린 서독의 게르만 3총사, 클린스만-마테우스-브레메. 최전방-허리-수비라인에 A+~S급 선수들을 수급하면서 인테르의 전력도 수직상승을 하게 됩니다. 약관의 나이로 82년 월드컵에 출전해 주전 센터백으로 맹활약, 월드컵까지 거머쥐었던, 오직 인테르 밀란에서만 약 20여 년의 세월을 보낸 인테르의 영원한 주장이자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명수비수 중 한 명 베르고미가 클럽 커리어에 있어서도 비로소 단맛을 본 시점이기도 합니다.
덧붙여 디에고 마라도나가 세리에에 입성했을 80년대 초중반 당시 리그 최강의 팀이자 유럽 최강의 클럽이었던 트라파토니의, 아니 플라티니의 유벤투스 라인업을 보시길 바랍니다. 마라도나가 이탈리아에 입성하기 직전 유벤투스에서 은퇴를 한 디노 조프나 팀을 떠난 젠틸레까지를 머릿속에 그려보면, 82 스페인 월드컵 우승팀 이탈리아의 베스트 일레븐 중 6명의 선수가 유벤투스에서 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유벤투스는 선수단의 노쇠화와 부상 등으로 인해 전력이 약화가 됐고, 86/87시즌을 끝으로 플라티니의 10번을 물려받게 될 로베르토 바조가 팀에 합류하는 90/91시즌 전까지 리그 우승 경쟁이나 국제 클럽 경쟁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지만 말입니다.
광적인 마라도나교 신도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폴리가 어디 강등권 약팀의 전력은 아닙니다. 마라도나를 제외하고 선수 명단을 보자면 당시 세리에에서 잘하면 중상위권, 못해도 중위권 정도를 차지할 수준은 되니까요. 다만 선수단의 질/두터움/자금의 정도 그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마라도나의 나폴리가 앞서 언급한 슈퍼팀들을 당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임무였음에 변함이 없습니다. 특히나 단기간에 결판을 볼 수 있는 토너먼트가 아닌, 장기 레이스인 시즌에서라면 말이죠. 나폴리의 면면을 볼 때 살바토레 바그니(86 월드컵), 페르난도 데 나폴리(90 월드컵) 정도를 제외하면, 꾸준히 아주리 군단의 부름을 받고 월드컵 무대에서 주전으로 뛰며 이탈리아를 대표했던 선수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 나폴리에선 레전드이지만, 국대 관련해서는 비운의 사나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 치로 페라라의 존재(20대 시절엔 이탈리아 수비진의 말도 안 되는 질적/양적 우수성으로 인해 아웃, 30대에 접어들자 확고한 주전 자리를 예약했지만 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 낙마)를 잊어선 안 되겠지만 말이죠. 한편 브루노 지오다노를 두고 카레카-마라도나와 함께 삼각편대를 형성했다고 하는데(MA-GI-CA라인), 굳이 말하자면 마라도나가 있어서 86년 월드컵 우승을 거둘 수 있었던 아르헨티나, 이를 통해 그 선수들의 이름값까지도 덩달아 높아질 수 있었음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폴리가 강등권 약팀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 전력을 앞서 언급한 AC 밀란, 인테르 밀란, 유벤투스의 경쟁력과 비교한다면 안 된단 것. 그런데 마라도나는 나폴리를 이끌고 스쿠데토를 들어올렸단 말씀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 번을, 동기간 UEFA컵 우승까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이제 나폴리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3대 보물이 된 이유를, 마라도나가 죽자 나폴리에선 왜 일제히 휴교령을 내렸는지, 마치 디에고의 조국 아르헨티나인 마냥 지역 전체가 국장을 치르는 분위기가 됐는가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 신의 품 안에 든 신의 손
‧ 디에고 마라도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뛸 당시 명과 암을 선사했다. 이와는 별개로 스페인 사람들은 그의 등번호 10번을 가리키며, 단순한 숫자 10이 아닌, 그 숫자가 뜻하는 롤과 관련한 동음이의어를 통해 디에고를 두고 ‘신’이라 칭송했더랬다.
펠레가 축구의 신의 앞모습이라면, 마라도나는 그 신의 뒷모습일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다 간 영웅이자 반영웅이며, 데미갓이자 혹자들에겐 신이었던 디에고 알만도 마라도나.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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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알만도 마라도나를 추모하기 위해 하나가 된 세상의 모습 중 몇 장면만
‧ CNN 기준, 축구가 아직까지는 학원 스포츠와 여자 스포츠 범주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미국에서 하루 종일 마라도나 사망 소식을 전했다.
‧ 일본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애도를 표했다.
‧ 인도에서는 마라도나의 동상 앞에서 힌두교인들이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끝없이 이어졌다.
‧ 세계 최강 럭비팀 뉴질랜드의 올 블랙스가 디에고 마라도나를 추모하는 하카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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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가 경막하형종을 앓았다고 하네요
http://www.polinews.co.kr/mobile/article.html?no=479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