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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시간도 부족한데 디피에 글을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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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2-15 04:34:15

오랜 동안 눈팅만 하다가 요즘처럼 자주 글을 쓴 적은 없습니다.

우선 아무 글이나 하나 써야 하루를 시작할 동력을 얻게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지금 다른 것을 먼저 하려다 주저 앉아서 스스로에게 되묻는 내용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같이 읽고 공감할 만한 내용이기를 바라지만 어디까지나 부족한 제 생각을 정리해 쓰고 있으니 그 점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1. 눈팅을 하는 것은 수동적인 참여입니다.

프차 기준, 마음 가는 대로 골라 읽는 재미도 있지만 항상 행운 같이 멋진 글, 감동 사연, 예술 같은 사진을 내게 가져다 주진 못합니다. (취미별 게시판에서 조차도 소란스런 일이 있기도 하죠) 때론 안구를 찌르고 영혼이 훼손돼는 글을 접해 감정이 격하게 동요되는 소모감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그것도 말초를 만족시키는 맛을 찾는 습관 때문에 스스로 겪게 되는 부작용이라라고 생각합니다. 소오강호에서 좌냉선이 절세신공을 얻기 위해 무엇을 잃었는 지 아시죠?


2. 댓글 참여도 같은 경로를 겪게 됩니다.

선플만 달아야지 같은 건 지키기 쉽지 않은 스스로에 대한 약속입니다. 1과 같은 경로로 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감동을 표현하거나 연민어린 댓글을 달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흥분과 분노에 찬 댓글을 달고 말게 됩니다. 

 

3. 디피 시스템이나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답이 있습니다.

게시판은 동네 담벼락의 온라인 판입니다. 

'XX는 얼레꼴레' 써있는 담벼락 요즈음에도 볼 수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지우거나 '낙서금지'를 써놓아도 뾰족한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표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지 않는 한(게시판 폐쇄) 언제라도 씌어지고 그래서 불쾌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거름을 잔뜩 뿌려놓은 화초밭을 디피라 한다면 X을 밟지 않고 화초 사이를 거닐고 싶으면 잘 피해야 할 것입니다.

 

4. 익명은 양날이 있는 칼 같지만 필수적인 기능입니다.

차단도 글가리기도 안하고 익명 글도 가리지 않고 보는 요즘 느끼는 것은 익명의 폐해 보다는 익명이기에 진솔한 글을 더 많이 봤습니다. (익명 글의 문장스타일이나 포스팅 시간대를 봐서 이게 누구의 글이겠구나 하는 짐작도 할 수 있습니다^^) 불쾌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글 제목은 처음부터 읽지않으려고 노력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5. 글을 쓰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에 보다 다가가는 길이고 자신의 글과 맞닿고 싶어하는 상대와 만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표현할 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 지에 신경 쓰고 글을 올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내 자신을 스스로가 더 잘 알게 해주는 하나의 도구라는 생각은 요즘에야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글에 댓글로 감응하는 상대의 글을 머리와 가슴으로  대하는 것이 게시판의 진정한 즐거움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6. 익명 댓글은 원하지 않는 손님입니다. 익명으로 할 말이 있으면 익명 글을 쓰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아직까지 익명 글을 써본 적도 써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제 경우, 항상 제 글 자체가 부끄러운데 뭣하러 너무 부끄러워 정체를 감추고 싶은 글까지 쓰고 싶겠습니까? 제 글은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바라는 마음에  익명댓글 배제를 선택해서 쓰고 있습니다. 익명을 빌리는 글은 댓글에서 사실 무의미한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같은 주제로 익명 글을 쓸 수 있으니 소란의 빌미를 주는 익명 댓글 자체 의미가 없습니다. 운영자님 마음대로니 그냥 적응하면 됩니다.

 

디피를 통해 소개받은 솔라리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초반이지만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읽다가 조중걸님 책(비트겐슈타인 해제본)을 교차로 읽고 같은 이야기를 철학책과 문학(그것도 SF에서)에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생각의 심연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갔습니다. 

 

기저가 없으면 옆 사람을 보고 판단한다(조중걸님 설명)는 부분이 마치 주관 없이 디피를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관이나 쌓인 지식이나 예술적 소양을 뜻하는 주관이 아닙니다. 디피라는 공간을 내게 주어진(내가 할애한) 시간 동안 어떻게 사용하고 상대와는 어떻게 만날 것이며 그것들이 내 실생활과는 어떤 영향을 주고받게 할 것인가? 라는 되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솔라리스에서 고대 희랍철학의 문제를 되살렸다는 작가의 지문부터 "옳거니" 소리를 내면서 파고들게 되더군요. 아마도 솔라리스 작가 또한 비트겐슈타인적 상념을 책에 투사한 것 같습니다.(그가 비님을 알았거나 읽지 못했거나 상관없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비님 스타일의 생각을 하며 삽니다! 제 생각)

 

조중걸님의 책은 같은 부분을 여러번 읽기도 하고 아무 데나 펴서 읽기도 하는 데도 생각의 타래를 풀어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비님은 명제들을 원자적 수준으로 기저까지 분해해서 써놨고 조중걸님은 옆사람을 보듯 읽고 있는 독자에게 기저부터 찬찬히 설명해 줍니다. 어려운 책인 줄 알았더니 어려운 책입니다. 하지만 읽다 보면 이거 내 생각이잖아! 하는 부분에서 스스로가 어려운 생각(=생각을 어렵게 하는)을 하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조중걸님은 훌륭한 옆사람입니다.

 

솔라리스는 소설입니다. 끊어서 읽거나 멈췄다가 읽을 수 없는 진도가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는 책이기에 읽기만 해도 생각하게 만든 작가의 생각강제장치입니다. 좋은 책입니다.

 

이 정도 쓰니 오늘 하루의 동력이 생긴 것 같습니다. 부족하니까 글을 쓰는 것입니다.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님의 서명
인생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하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써야 하고, 고통 받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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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
2020-12-18 03:27:33

잘려고 마무리 하다가 이 글을 봅니다.

글이 이쁘네요~~ 홧팅 ~~!!!!^^

WR
1
2020-12-18 03:28:30

화이팅! 전기상회 상호일줄이야 몰랐던 동방전기님! 

1
2020-12-18 03:30:46

제가 좀 많이 즉흥적입니다. ㅎㅎㅎㅎ^^

WR
2020-12-18 03:33:26

이건 줄은 모를거야 디피니까. 이런 생각하시면서 선택하셨죠? 동방불패 시리즈 전반부를 좋아하시나보다(소오강호, 동방불패 1부) 했어요. 제가 그렇거든요.

2
Updated at 2020-12-18 03:39:23

솔직히 얘기하면 당시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아이돌 그룹에 대한 무시와 제 스스로의 음악적 지식과 경험을 과신하면서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러다 버스타고 지나가는데 동방전기라는 전파사가 똭 ~~~!!!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ㅎㅎㅎㅎ 돗자리 까세욧 !!!!!

그리고 전 동방불패를 피카디리 개봉관에서 8번을 봐서 동방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친근감도 있었거든요. ㅎㅎㅎ 

 

여튼 bts 만세....

2020-12-18 03:34:52

저는 동방불패와 연관있는 줄 알았는데.ㅎㅎ

Updated at 2020-12-18 03:31:53

역시 단번에 간파하셨군요. 상자속의 딱정벌레나, 솔라리스와 인간의 소통이나. 

WR
2020-12-18 03:29:59

쩌르르~. rockid님은 과외선생님 같습니다, 다만 숙제의 부담이 없어 너무 좋습니다.(이것도 극복해야 할 프로세스가 있더군요^^)

Updated at 2020-12-18 03:35:18

예의상 추어주시는 말씀인줄은 알지만 그럼 말씀은 저도 부담입니다.^^;;

택배가 밀리는 관계로 아직 영문판 책이 도착하지 않아서 참 궁금합니다. 국역본 2종을 읽었었는데 약간씩 번역이 달랐거든요. 영역본도 원어는 아니지만 국내 번역자 둘이 전부 영역본을 저본으로 번역한 것같으니 궁금하더랍니다.  

WR
2
Updated at 2020-12-18 03:47:20

초반 Solaricists챕터에 나오는 Oceanic Yogi, Oceanic Idiot를 어떻게 번역했을지 궁금합니다. 뉘앙스가 영어 문장에서는 분명한데. Electrical Brain(전기(자)두뇌)에서 빵 터졌어요. PC가 있기 전 80년대 이전 만화에는 전자두뇌가 정말 많이 나왔었거든요. ㅎㅎ 컴퓨터는 너무 부피가 크던 시대였으니 그게 쬐끄만 휴대폰으로 들어갈 줄은 제아무리 머리 좋은 작가라도 상상 못했겠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은 정말 혀를 내두를 만합니다. 먼저 직관적인 사고의 대단함도 글을 통해 느껴지고요.

2
Updated at 2020-12-18 03:59:59

당연히 Electronic인줄 알았더니, 아직 진공관의 시대에 머물러 있었군요.ㅋㅋ 맞아요. 인공두뇌학이 아니고 전자두뇌학이었죠. 관련 과학자들에 대한 묘사는 지금의 인공지능 연구자들만큼 대단하게 묘사합니다. 그래도 다른 소설들에서는 물질의 상 구조를 이용해 정보를 저장하는 등의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하고요.. 커즈와일이 말했듯이, 컴퓨터의 발전은 다른 기술적진보와 비교해서 믿기 힘든 기술적 진보였으니까요. 

 

한국에 SF를 정착시키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평론가겸 번역가 김상훈의 번역에서는 각각, 현자의 바다, 자폐증적 바다로 번역했습니다.  저는 적절하게 느껴지네요.

WR
1
Updated at 2020-12-18 06:02:26

영문 표현 보다는 기저^^를 드러내는 번역이 되지는 못했군요. 바다가 주격이니까요. 영문은 바다 자체가 형용사가 되었고. 어차피 폴리쉬도 알파벳 계열이니 영어번역은 수평적 번역이었겠지만 이런 부분이 동서양 번역의 맛이 대양을 건너가면서 서로 느낌이 변질되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병희님이 희랍어 직역을 시도한 것이나 독일 철학 전공자들이 원어로 공부하는 이유가 본의를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이겠습니다. 댓글 다실 것 같아 기다렸다가 쓰고 갑니다. 제가 질문하고는 아차 했어요.^^ 늘 감사합니다.

1
2020-12-18 04:05:24

저도 그래서 차라리 각주를 달지언정 직역을 선호합니다. 마더 퍼커를 지애미가 아니고 빌어먹을 놈으로 번역하는 건 맥락의 일부분을 삭제하는 것 같아요.ㅎㅎ

WR
1
Updated at 2020-12-18 06:03:13

번역 대상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번역하는 것인데 문화적 마더 퍼커의 위치를 이해함(또는 독자의 알 기회)을 저해하고 갑자기 한복을 입히는 번역(빌어먹을 놈)이죠, 나쁜 번역의 좋은 예 잘 드셨어요. ㅎㅎ

WR
1
2020-12-18 04:35:58

제가 언급을 빼먹었는데 저도 현자의 바다, 자폐증적 바다 이상의 번역을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언어적 한계, 언어에 종속된 사고의 한계, 동서양의 차이라고 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WR
1
2020-12-18 07:29:42

읽다가 다시 마주 치네요. electronic brain이 사용됐어요. 제가 스테이션 묘사 중 거듭 나오는 electric을 읽으며 추억의 전자두뇌 떠올려서 생각이 엉켰네요. (메타 데이터의 나쁜 예)

4
Updated at 2020-12-18 04:53:22

제가 살면서 깨달은 것 저만의 개똥철학은 사람이든 무엇이든 너무 가까이 세밀히 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보면 여유가 있고 전체 그림이 보여 좋은데, 좋다고 해서 너무 가까이서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전체 그림이 안보이고 그림 속에 들어앉아 내가 그림의 어디에 서있는지 알지도 못하거니와 피로가 빨리 옵니다.

WR
2020-12-18 04:37:11

생각하시는 것에 번호를 붙여 기록하시면 개똥을 벗어난 철학의 일가를 이루시는 겁니다. ^^ 훌륭한 말씀입니다.

2020-12-18 11:04:07

멋진 말씀이십니다. 처음 루브르에서 꿈에 그리던 작품들을 실제로 접했을 때, 그전까지 화집에서 보았던 '지식'들이 다 헛것이었다는 걸 지각, 그리고 감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았을 때, 그저 아름답기만 했던 것이 붓의 결을 따라가 보면 그것의 실체와 의미를 만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것의 실체가 결국 내가 그려나가는 그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 그림 속에 들어앉게 된다면 내가 그림의 어디에 서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피로가 몰려오겠죠. 자기의 인생이란 그림도 붓의 결을 따라가면서 실체와 의미를 찾겠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본다면 여유가 생길 듯 합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게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일테니까요^^   

1
2020-12-18 05:36:32

저도 나름 아침형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를 참 일찍 시작하시네요. 

글이 읽기에 편안하고 좋습니다. 

잘 쓰시네요. 부럽습니다. ^^

WR
2
Updated at 2020-12-18 05:43:22

미국 오전이 한국 깊은 밤에서 꼭두 새벽이라서 많은 분들이 읽을 첫 새벽 글이라는 생각하면 삿된 글을 쓰면 안되겠다는 압박도 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1
2020-12-18 05:45:26

아~ 미국! 그랬군요. ^^

좋은 하루 보내세요

WR
2020-12-18 05:49:05
2
2020-12-18 05:44:57

그랬군요 님의 글을 계속 보고 싶어서 늘 조금씩 부족하셨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져봅니다.

 

WR
2020-12-18 05:50:30

많이 부족해서 많이 창피해질 예정입니다. ㅎㅎ 많은 글을 쓰신 분들이라면 다 느끼셨을 '그것'을 이제 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1
2020-12-18 06:57:13

그랬군요님의 글을 읽으며 같은 분노를 느껴보기도 했고 적극 공감을 하기도하는 1인입니다 이번글도 읽으면서 잠시 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네요 추천드립니다

WR
2020-12-18 06:58:54

주관을 마주보면 서로의 객관이 되니 큰 의지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1
2020-12-18 07:00:10

많은부분에 공감이 가네요. 저도 아침 일찍 그랬군요님의 글을 읽으며 금요일의 동력에 시동을 켭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WR
2020-12-18 07:01:55

오빠 달렸~~! 좀 있으면 주말입니다. 힘찬 하루! 기원합니다.

1
2020-12-18 08:15:55

WR
2020-12-18 10:14:40

짤을 모으지 않았으니 달아보지도 못했어요. 계획된 정성과 배려의 결정체 '짤' 댓글을 받다니 영광입니다.

"이런거 좋아"!합니다. 감사합니다. 

2
2020-12-18 08:18:24

닉에서 느껴지는 포스가 글에서 묻어납니다.
출퇴근길 소소한 행복이되어 주는 차한잔 이래서 좋아합니다.

WR
2020-12-18 10:16:31

출근길에 동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닉이 디비디900님에게는 "그랬군요"

2
2020-12-18 09:03:25

글을 잘 쓰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글은 정말 확 와닿습니다^^. 

하루의 소소한 행복을 시작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WR
Updated at 2020-12-18 10:30:55

봉준호가 이야기했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을 인용했었죠.

제가 그결 디피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라고 잘못 인용했던 기억(아니면 지금 착각했는지도)이 있어요. 디피에서 보편적인 생각과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썼으니 훅 들어오듯 닿았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여담으로 제가 위에 저지른 오류 때문에 확인 차 검색했다가

http://m.blog.yes24.com/bohemian75/post/8544080 여기까지 갔더랬어요.

폴 오스터의 뉴욕삼부작은 관광지에서 바가지를 감수하고 사두었는데 아직 안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내면보고서'라는 책은 스스로를 2인칭으로 썼다네요. 급 호기심이 당깁니다.

한강의 '소년의 온다'도 2인칭의 독특한 서술로 독자가 직접 체험/목격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었어요.

아, 지금 폴 오스터의 '내면보고서'를 발견한 것이 한강 소설가의 내면을 들여다 본듯한 쾌감을 야기했다면 저 변탠가요? ㅎㅎ

1
2020-12-18 10:00:10

그랬군요.

WR
Updated at 2020-12-18 10:31:52

디비디900님의 말씀에 의하면 (제 닉네임이)음성지원이나 문자부호 추가에 따라 두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댓글을 다신 겁니다. 제게 음성지원으로 동감하는 어조로 들립니다^^

2020-12-18 11:19:38

 서울에는 간밤에 눈이 내렸습니다. 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문장에서 기형도 시인의 시작메모 중 긴 문장들이 떠올라서 옮겨봅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 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울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 1988.11. 시작메모 기형도

 

밤눈은 밤에 내린 눈이기도 하겠지만 먹는 밤의 눈이기도 하겠죠^^ 쓰셔야 하는 시절이 있다면 쓰지 않아서 좋을 시절도 곧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읽어야 하는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읽지 않아서 좋을 시절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제 경우에는 살아내기 위해서 취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저 살아지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시절도 체(體)험(ex-periment, ex-perience, ex-pect)하게 되네요^^ 우연히 알게 되어 가입한 디피인데 님과 같이 늘 정진하시는 좋은 분들과 인연이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남은 오늘 하루도 좋은 시간으로 채우시면 좋겠습니다^^  

WR
1
2020-12-18 12:03:15

일전에도 기형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지요. 치열한 삶의 궤적을 감히 상상이야 해보랴마는 그래도 그의 시를 읽어나간 끝에 그의 외로운 죽음 전후의 시들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시를 많이 읽지는 않지만 김수영 시 전집을 읽으면서 연도별 역사를 되짚으며 그의 시를 읽었었습니다. 시인이 역사에 맞서야 하는 삶은 피곤하고 고달프겠지만 타고 나기를 그런 걸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무당이 신내림 받을 숙명이라면 그래야 하겠지요. 바꿀 수 있는 운명이면 바뀌는 것이고 순응하면 그 또한 변變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깊은 통찰이 담긴 글, 속내를 보인 듯 부끄럽지만 그런 것 또한 감수할 때에서야 이런 만남 가능해진다는 것도 이제야 알아 갑니다. 감사합니다.

1
Updated at 2020-12-18 14:25:33

기형도 시인의 학교선배(?)인 윤동주 시인의 아이코닉한 '서시' 1연의 지도리는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나한테 주어진 길'이라는 참구해야 할 새로운 공안이 내던져집니다(pro-blema). 영화 매트릭스가 이 공안을 풀기 위해 도전합니다. 네오는 이 공안으로 심란(心亂)합니다. 오라클의 신탁으로는 네오가 그(the one)가 아니며 모피어스와 네오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네오 자신이 신탁을 듣게 되면서 새로운 지도리가 생겨납니다. 네오가 생각하기에 그가 죽지 않은 것은 우발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어야했던 운명이니까요. 그럼 오라클의 신탁은 틀렸던 걸까요, 아니면 오라클은 일부러 네오에게 틀린 예언을 했던 걸까요. 하지만 오라클이 아는 미래가 바뀌지 않으려면 오라클은 초월자로서 그 세계 밖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라클조차도 인과 연의 사슬에 얽히면서 계속 새로운 지도리를 만들어낼테니까요. 시간은 선재(a priori)하는 게 아니라 생(生)겨나는 것이라서요. 아직 공안을 제대로 참구하지 못한 네오는 이해(理解)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때 네오의 구루인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장자로 등을 한대 쳐줬으면 더 좋았을텐데요^^) "그게 바로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야". 곧 잠드실 시간이겠네요, 님이 나비의 꿈을 꾸시는 것인지, 나비가 님의 꿈을 꾸는 것인지,, 꿈 속에서도 좋은 만남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1
2020-12-18 11:28:31

부끄러워서 익명글을 쓰는 것도 있겠지만

글 속에서 나타 날 수 있는 자신이나 주변인의 신변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

일수도 있고 글쓴이의 고착 된 이미지로 인해 글의 진의가 왜곡될수 있다는 

우려(글쓴이의 판단이겠지만) 때문에도 익명으로 쓸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때문에 익명으로 썼다는 것만 가지고 비난하는 행태는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WR
1
2020-12-18 11:56:06

맞습니다, 맞고 말고요. 단지 선의의 익명 글은 모두 그런 연유를 이해하고 선플이 앞다튀 달립니다. 

익명인 것만 제외하고 닉을 전제한 글보다 더 진솔한 글이 될 이유가 익명인 이유와 일맥상통하니까요.

읽는 사람들은 마치 익명이 아닌 듯 대하게 됩니다. 어차피 우리가 둘러쓰고 있는 닉네임도 익명 다음에 붙어있는 숫자처럼 서로를 구분하기 위한 익명의 다른 모습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 누가 선의의 익명 글을 성토한 적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익명글에 대한 가혹한 비난만이 눈에 띄는 것입니다. 피하는 것도 스스로의 몫이지만 비난 받을 글을 쓰지 않는 것도 회원된 도리이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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