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시간도 부족한데 디피에 글을 쓰는 이유
오랜 동안 눈팅만 하다가 요즘처럼 자주 글을 쓴 적은 없습니다.
우선 아무 글이나 하나 써야 하루를 시작할 동력을 얻게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지금 다른 것을 먼저 하려다 주저 앉아서 스스로에게 되묻는 내용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같이 읽고 공감할 만한 내용이기를 바라지만 어디까지나 부족한 제 생각을 정리해 쓰고 있으니 그 점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1. 눈팅을 하는 것은 수동적인 참여입니다.
프차 기준, 마음 가는 대로 골라 읽는 재미도 있지만 항상 행운 같이 멋진 글, 감동 사연, 예술 같은 사진을 내게 가져다 주진 못합니다. (취미별 게시판에서 조차도 소란스런 일이 있기도 하죠) 때론 안구를 찌르고 영혼이 훼손돼는 글을 접해 감정이 격하게 동요되는 소모감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그것도 말초를 만족시키는 맛을 찾는 습관 때문에 스스로 겪게 되는 부작용이라라고 생각합니다. 소오강호에서 좌냉선이 절세신공을 얻기 위해 무엇을 잃었는 지 아시죠?
2. 댓글 참여도 같은 경로를 겪게 됩니다.
선플만 달아야지 같은 건 지키기 쉽지 않은 스스로에 대한 약속입니다. 1과 같은 경로로 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감동을 표현하거나 연민어린 댓글을 달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흥분과 분노에 찬 댓글을 달고 말게 됩니다.
3. 디피 시스템이나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답이 있습니다.
게시판은 동네 담벼락의 온라인 판입니다.
'XX는 얼레꼴레' 써있는 담벼락 요즈음에도 볼 수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지우거나 '낙서금지'를 써놓아도 뾰족한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표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지 않는 한(게시판 폐쇄) 언제라도 씌어지고 그래서 불쾌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거름을 잔뜩 뿌려놓은 화초밭을 디피라 한다면 X을 밟지 않고 화초 사이를 거닐고 싶으면 잘 피해야 할 것입니다.
4. 익명은 양날이 있는 칼 같지만 필수적인 기능입니다.
차단도 글가리기도 안하고 익명 글도 가리지 않고 보는 요즘 느끼는 것은 익명의 폐해 보다는 익명이기에 진솔한 글을 더 많이 봤습니다. (익명 글의 문장스타일이나 포스팅 시간대를 봐서 이게 누구의 글이겠구나 하는 짐작도 할 수 있습니다^^) 불쾌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글 제목은 처음부터 읽지않으려고 노력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5. 글을 쓰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에 보다 다가가는 길이고 자신의 글과 맞닿고 싶어하는 상대와 만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표현할 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 지에 신경 쓰고 글을 올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내 자신을 스스로가 더 잘 알게 해주는 하나의 도구라는 생각은 요즘에야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글에 댓글로 감응하는 상대의 글을 머리와 가슴으로 대하는 것이 게시판의 진정한 즐거움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6. 익명 댓글은 원하지 않는 손님입니다. 익명으로 할 말이 있으면 익명 글을 쓰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아직까지 익명 글을 써본 적도 써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제 경우, 항상 제 글 자체가 부끄러운데 뭣하러 너무 부끄러워 정체를 감추고 싶은 글까지 쓰고 싶겠습니까? 제 글은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바라는 마음에 익명댓글 배제를 선택해서 쓰고 있습니다. 익명을 빌리는 글은 댓글에서 사실 무의미한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같은 주제로 익명 글을 쓸 수 있으니 소란의 빌미를 주는 익명 댓글 자체 의미가 없습니다. 운영자님 마음대로니 그냥 적응하면 됩니다.
디피를 통해 소개받은 솔라리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초반이지만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읽다가 조중걸님 책(비트겐슈타인 해제본)을 교차로 읽고 같은 이야기를 철학책과 문학(그것도 SF에서)에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생각의 심연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갔습니다.
기저가 없으면 옆 사람을 보고 판단한다(조중걸님 설명)는 부분이 마치 주관 없이 디피를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관이나 쌓인 지식이나 예술적 소양을 뜻하는 주관이 아닙니다. 디피라는 공간을 내게 주어진(내가 할애한) 시간 동안 어떻게 사용하고 상대와는 어떻게 만날 것이며 그것들이 내 실생활과는 어떤 영향을 주고받게 할 것인가? 라는 되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솔라리스에서 고대 희랍철학의 문제를 되살렸다는 작가의 지문부터 "옳거니" 소리를 내면서 파고들게 되더군요. 아마도 솔라리스 작가 또한 비트겐슈타인적 상념을 책에 투사한 것 같습니다.(그가 비님을 알았거나 읽지 못했거나 상관없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비님 스타일의 생각을 하며 삽니다! 제 생각)
조중걸님의 책은 같은 부분을 여러번 읽기도 하고 아무 데나 펴서 읽기도 하는 데도 생각의 타래를 풀어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비님은 명제들을 원자적 수준으로 기저까지 분해해서 써놨고 조중걸님은 옆사람을 보듯 읽고 있는 독자에게 기저부터 찬찬히 설명해 줍니다. 어려운 책인 줄 알았더니 어려운 책입니다. 하지만 읽다 보면 이거 내 생각이잖아! 하는 부분에서 스스로가 어려운 생각(=생각을 어렵게 하는)을 하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조중걸님은 훌륭한 옆사람입니다.
솔라리스는 소설입니다. 끊어서 읽거나 멈췄다가 읽을 수 없는 진도가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는 책이기에 읽기만 해도 생각하게 만든 작가의 생각강제장치입니다. 좋은 책입니다.
이 정도 쓰니 오늘 하루의 동력이 생긴 것 같습니다. 부족하니까 글을 쓰는 것입니다.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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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려고 마무리 하다가 이 글을 봅니다.
글이 이쁘네요~~ 홧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