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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박완서, Flannery O'Con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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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1-09 02:32:01

지난 주에 웹툰 감상을 하는 아침 5분을 이야기했었습니다. 잠에서 덜 깨어 눈을 비비면 시신경이 잡아내는 해상도가 480i에서 4K로 이동하고 정보를 전달받은 뇌 조차도 방금 채널이 바뀌는 바람에 놓친 꿈의 어렴풋한 줄거리를 폰에 보이는 웹툰 장면을 보면서 더듬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하루는 무협 폭력물 속에서 대충  누군가의 팔 다리를 아작내거나 '로어 올림푸스' 속 페르세포네의 발그레한 볼따구니를 보면서 일어나게 됩니다.

 

잠자리에 들 때는 누워서 한 손으로 볼 수 있는 킨들 페이퍼화이트를 봅니다. 한글책을 잔뜩 넣어뒀습니다. 박완서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시작했다가 놓을 수 없게 돼버렸습니다. 박완서님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는 국딩의 눈에 만만하게 비치는 제목 때문에 국민학교 6학년 때(79년도쯤?)  읽었었죠. 꼴찌가 받는 갈채가 궁금하기도 했었고요. 어린이, 청소년기에 대중소설, 문학작품 가리지 않고 읽어댔었습니다. '그 많던 싱아~'는 지금 처음 읽습니다. 코웃음치며 90년대 초반 당시 인기를 무시하고 읽지 않았었습니다. 너무 일찍 이광수 등으로 시작해 어둠의 자식들, 인간시장 등까지 마구잡이로 읽다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한국 소설에 대한 폄하의 시각을 갖게 되었었죠. 이를테면 강석경의 '숲속의 방'에서 '광장'을 찾으려 애쓰기도 하는 등 80, 90년대를 지나며 그 시대 현실과 문학적 성찰의 궤가 갈라져 점점 동떨어지는 느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것도 다 지나보니 생각이 정리된 것이지 당시는 단순하게 끌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년전 문학계의 미투가 결론이 났는지 모르겠으나 제게는 축구협회에 대한 실망과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합니다. 

 

30년이 지나 초로에 들어 노모를 모시는 입장에서 보는 박완서님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엄마의 말뚝1,2,3'은 가슴에 와 닿는 책입니다. 이 세 소설만 읽어도 박완서님의 자서전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많은 장편들도 그의 삶 자체를 우리가 따라가 볼 수 있는 박완서님 인생의 스냅샷들이란 느낌입니다. 박완서님께는 외람되지만 마치 잘 씌여진 프차 정성글 같은 친근감이 그의 글에 들어있습니다.

 

박완서님의 책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는 기억의 동질성 때문이 아닙니다. 외국 생활을 10년 이상 하다 보니 구사하는 언어 중추가 잡종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소리내는 한국어는 빨라지고 발음은 굴러가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버릇 또한 단어 구사의 애매함이 자주 불거져서 할 수 없이 영어단어를 음차해서 쓰는 보그체가 되기 일쑤입니다. 그런 '스타일'이 돼버렸습니다. 프차에 글을 쓰면서 글버릇을 좋게 가지다가도 마음이 앞서는 날은 에라 모르겠다하고 영어단어를 섞어쓰게 되더군요. 박완서님의 영어의 흔적이 없는 글을 보니 어떤 해방감 비슷한 느낌이 왔습니다. 불편한 점은 내용의 시대적 배경 때문에 할 수 없이 등장하는 일본의 흔적을 읽어야 하는 것이지만 영어에 쩌들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끼며 편안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들수 있으니 역사 속 일본어의 흔적 정도는 감수할 만 합니다. 아마도 소설 전집을 마치고도 목마름이 남으면 박완서님의 수필집도 읽을 것 같습니다.

 

주로 붙잡는 것은 킨들 오아시스입니다. 침대에 누워 오아시스를 들고 보다가 자꾸 얼굴로 떨어뜨리게 되어 오아시스에는 영어책만 넣어놓고 앉아서만 보기로 했습니다. 최근에 게시판에서 소개받은 앤드류 포터의 단편집 중 맨 첫 소설 ' The Hole'을 읽었습니다. 너무 잘 써서 욕이 나왔다는 회원분의 소감을 먼저 들었기에 호감도 있었고 내용도 좋았습니다. 이의를 제기하자면 잘 빠진 '상품' 같았습니다. 반짝반짝 광을 내어 흠 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제가 흠을 잡는다면 단 한 가지, 영어 문장 '투'입니다. 작가들마다 문장의 스타일이 있는데 데뷰작인 만큼 세련됐지만 작가 자신만의 모습은 아직 미숙한  아직 제대로 뜨지 않은 막걸리 맛 같습니다. 표지에 있는 작가의 이름을 잊으면 작품으로부터 유추하려는 작가의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기분입니다. 레이몬드 카버의 문장보다는 덜 단순하지만, 내용의 흐름을 보면 레이몬드 카버가 씬 하나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한데 비해 앤드류 포터는 영화감독의 입장에서 편집 작업할 필요 없이 잘 손질한 여러 씬을 나열했습니다. 비디오 세대에게 더욱 친숙한 글 쓰기라고 하겠습니다. 나머지 마저 읽고 나면 재미여부와 상관없이 이 작가의 문장 '투'에 대해서 곱씹어 볼 것입니다. 

 

번역판 앤드류 포터의 단편집 표지에는 '플래너리 오코너상 수상' 배지가 붙어 있습니다. 좋은 한국 작품들이 누구나 아는 '이상'문학상을 받듯이 누군가의 이름으로 상이 있다면 일단 그 이름 주인공의 작품을 먼저 봐야겠죠. 마침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이 도서관에 신청한 지 거의 6개월이 넘어서야 차례가 왔습니다. Goodreads 사이트의 평도 너무 좋고 한국에는 2015년경 번역판에 대한 많은 분들의 호평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있더군요. 한국 번역판을 읽어도 좋을 오코너의 작품 리뷰에 지금 쓰게 될 저와 같은 감상을 느낀 분이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소개할 영어 원문이나 번역문이나 내용은 같지만 너무도 익숙한 묘사이기에 많은 분들이 그냥 지나쳤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에  첫 번째 수록 작품인 'The Geranium'을 읽다가 마주친 이 한 문단 때문에 앤드류 포터까지 끌어들여 말을 꺼냈습니다. 1946년에 출판된 이 단편에서 오코너는 뉴욕의 지하철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2021년 지금 읽어도 현대적인 묘사입니다. 현대의 우리가 읽기에는 너무도 평범한 우리들의 매일매일  '경험'과  일치하는 문구이기에 지금까지 지하철이 등장하는 많은 글들에 비슷하게 묘사되었고 읽었을 법합니다. 하지만 이 문장은 1946년 미국에서 씌여진 오코너의 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상'의 문학을 걸고 상을 주듯 '플래너리 오코너' 이름으로 상을 줄 만 합니다.

 

그들은 "지하철"을 탔다- 땅 아래에 있는 커다란 동굴 같은 철길이다. 끓어넘치듯 기차에서 나온 사람들이 거리로 향한 계단을 올라갔다. 거리에서 구르듯 내려온 사람들은 기차에 올라탔다.- 흑인, 백인, 황인종이 수프 속의 야채처럼 골고루 섞여 있었다. 모두가 들끓는 듯 했다. 터널에서 기차가 플랫폼 끝까지 밀려 들어오더니 갑자기 멈췄다. 사람들은 마주 오는 사람들을 밀어내듯 밖으로 뚫고 나왔고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기차는 다시 홱 가버렸다. 

(구글 번역 신뢰도 20% 이하입니다. 특히 전치사에 의한 문장묘사가 아예 번역이 반대로 되는군요. 문장 일부를 송두리째 빼먹기도 하네요. 제가 좀 많이 고쳐야 했고 canal은 현대에 맞게 플랫폼으로 바꿨습니다)

 

They went in a "subway" - a railroad underneath the ground like a big cave. People boild out of trains and up steps and over into the streets. They rolled off the street and down steps and into trains - black and white and yellow all mixed up like vegetables in soup. Everything was boiling. The trains swished in from tunnels, up canals, and all of a sudden stopped. The people coming out pushed through the people coming in and a noise rang and the train swooped off again.

 

 

 

 


 

 

 

 

님의 서명
인생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하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써야 하고, 고통 받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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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1-02-02 09:16:28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근데 문장중에 킨들 페이퍼화이트에 한글책 넣었다는 대목이 있는데

저도 킨들화이트페이트 직구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책만 보는게 답답한데 한글책 어떻게 넣어 보나요

제가 가진책들 다 스캔해서 한글pdf로 만든게 백권 정도 있는데 이것 킨들에 넣고 싶습니다.

WR
Updated at 2021-02-02 09:42:16

https://m.clien.net/service/board/lecture/14454201?combine=true&q=Calibre&p=1&sort=recency&boardCd=&isBoard=false
이외에도 클리앙에 있는 킨들강좌 훌륭하니 둘러보세요.
영한사전, 옥편, 한글폰트 등을 넣을 수 있습니다.

"Amazon Kindle 에 영한사전 추가 방법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aga111&logNo=221478102397&proxyReferer=http:%2F%2Fwww.google.com%2F

"킨들 페이퍼화이트 한글글꼴설정 및 영한사전 설정법 및 pdf파일 보기 원본과 크롭본 비교사진" https://m.blog.daum.net/sman76/15711525

2021-02-02 09:36:22

감사합니다.^^

1
2021-02-02 09:53:23

 저도 님의 경우와 비슷한 이유로 한국소설을 읽지 않았는데, 얼마전에 '그 많던 싱아'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독후감 비슷하게 남긴 적이 있는데 그 중 일부를 옮겨봅니다^^;;

 

 

 그래도 대한민국이 가난을 벗어나던 즈음에 태어나서 성장한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시절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루아침에 평범했던 사람들이 좌익이 되었다가 다시 우익이 되고, 어제까지 서로 손주새끼 오줌 똥을 받았던 이웃들을 고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니 말이지요. 어쩌면 선생님께는 지금의 작태가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 시절을 살아보지 못한 세대들이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단죄하는 것이 말이지요. 일제부역자였다고 손가락질하고 친일파라고 욕하고, 또는 용공분자였다고 침을 뱉고 빨갱이 집안이라고 여전히 연좌제를 가져다 대는 것, 한 시대를 올바르게 산다는 것을 두고 어쩌면 그렇게 명석할 수 있을까요.

 

...............

 

선생님의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창씨개명을 하고 싶었지만 부득이하게 못했던 것뿐이고, 서울과 시골 사이에서 이중생활을 하셨던 선생님과 어머니는 미천한 서울에서의 지위를 감춰야만 했으며, 이상을 꿈꾸던 선생님의 오빠는 현실 앞에서 비굴해졌다고 선생님은 기억했지요. 선생님께서는 쉽게 써보자는 배짱이라고, 순전히 기억에만 의존해서 쓴 글이라고 하셨지만, 소설의 형식을 벗고 오롯이 선생님의 가족사와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의 용기로 인해 선생님은 위안이 필요할 정도로 지쳤을지라도 우리 독자들은 드디어 가장 인간적인 그 시대의 증언을 들을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어 버렸을까요, 유일하게 정신적인 높이를 가지고 있던 선생님의 오빠는 왜 변해버린 걸까요. 선생님은 이렇게 덤덤한 어조로 글을 마쳤습니다, 새날이 밝고 동네를 내려다보는데 거대한 공허를 보았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전 선생님이 쓰신 이 문장에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을 느꼈고,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내게 되었다고 말이지요. 문득 언젠가 선생님께서 어느 잡지사와 했던 인터뷰에서 읽었던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기자는 선생님께 칠십 대의 시간이 마음에 드는지를 물었고,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죠. 뜻하지 않은 나이라고요, 예정에 없었던 것이라고요. 어쩌면 예정에 없는 시간을 사는 게 바로 삶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전 이제야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WR
1
Updated at 2021-02-02 10:59:26

제가 어떤 사람의 글은 모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문장이 아닌 그 너머의 시선 때문에 하게 된 것은 조지오웰, 르 귄, 박완서입니다. 동 시대를 꿰뚫는 굳건한 통찰력에 대한 믿음 같은 게 느껴지는데 반해 박경리는 말년의 에세이 보고 그게...

별개로 문장은 김현, 황현산입니다.

감상 댓글에 동화됐습니다. 감사합니다.

Updated at 2021-02-02 12:19:04

'박완서가 박수근을 만나다'처럼 역사에 있어서도 늘 명제는 반복되는 듯 합니다, 다만 박완서나 박수근을 취한 배나 그랬군요가 대신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겠죠^^ 개인적으로는 해방정국에서 좌, 우익의 대립이 지금도 한반도에서는 반복되는 것도 같습니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겠죠. 님께서 쓰신 독서기들은 잘 읽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모르는 작품이 많아서..^^;; 친절한 댓글에 감사드리며 늘 정정진하시길 바랍니다! 

WR
1
2021-02-03 06:59:34

로마어를 바탕으로 한 여러 갈래의 언어가 유럽에 퍼져 있던 시절 우리가 사투리를 어렴풋이 때려맞춰 이해하는 정도로 의사소통이 되었더군요. 그런 연유로 유럽의 수개 언어를 아우르는 사람이 생기는 게 가능한 것이라 짐작합니다. 글이나 말에도 각기 쌓인 생각의 갈래가 다를텐데다 사람마다 표현의 도구를 다루는 방법 또한 달라서 이해 또는 감응의 정도가 천차만별인 것을 느낍니다. 주제가 무엇이든 존재감의 표현이 아닌 공감을 위한 댓글임을 알기에 님의 댓글 기다려집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2021-02-03 11:34:41

문득 떠오른 책의 구절이 있어서 옮겨봅니다^^ 감사드리며,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각종 화두/공안에 대해서 고인들의 대답을 대신해서 대답해 보기도 하고 다르게 대답하기도 하면서, 그것을 참선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참나의 체험을 자신만의 언어와 몸짓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옛사람들의 말에 얽매이지 말고 묵은 언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와 미래를 초월하여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움직이는 참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야만 참된 수행자라 할 것이다.

 

윤홍식의 <선문답에서 배우는 禪의 지혜> 에서

 

 

WR
1
2021-02-03 12:32:00

지금 읽고 있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대개의 가르침하고 통하네요.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이 특정 종교를 설파하지 않는 점도 있으면서도 그로 인해 20세기 말엽 이후 불교의 정수가 서양 여타의 정신세계에 스며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3
2021-02-02 11:12:24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소설가로서 박완서의 문학적 힘은 아주머니들이 수다르루떠는 것 같은 수더분한 문체와 이 뒤에 숨겨진 저열한 속물근성을 날카롭게 드러내는(본인도 물론) 차가운 시선입니다.

사실 그의 소설에 처음 꽂히게 된 건 엄마의 말뚝 때문이지요.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비극적인(?) 사연도 물론이지만 언제까지나 그곳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를 다시 돌아보고 가늠하게 만들고야 마는 그 말뚝 같은 가난이 제 가슴을 후려쳤기 때문이지요.

플래너리 오코너는 일전에 읽었더랬습니다.
그녀의 최고 걸작아라고 평가를 받는 단편집을 번역한 물건이지요.
도시의 뜨내기들의 밑바닥 삶과 그들에게서조차 드러나는 섬뜩한 인종차별의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한 작품들이 두고두고 인상에 남습니다.
그래서 전자책이 참 고맙습니다.
https://ridibooks.com/books/593000456

한국과 달리 단편이 일종의 펄프픽션 취급을 받는 미국에서 단편집으로 이런 평가를 받아낼 작가는 앞으로도 그녀가 유일할 것 같습니다.

WR
1
2021-02-02 11:30:47

사실 박완서님과 어머니의 이야기 정도는 한국 현대사를 거친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들려줬던 집안의 과거사 이야기도 못지 않는 내력이 많이 있었습니다.

박완서님의 경우 여성임에도 시대상황에 앞서서 깜냥이 되게끔 교육받았고 겪었고 기억하고 써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며 비극적 가족력과 경제상황에 내몰린 것까지 합쳐서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까지 작가가 될 수 밖에 없어보였는데 그 와중에 꼿꼿한 비판의식을 말년까지 놓지 않았다는 점에 고개 숙이게 합니다. 여생 좀 편히 살게 호텔방 내놓으라던 사람도 있을 만큼 가치가 혼탁해진 현대에 말입니다.

2021-02-02 12:41:22

유튜브로 크라임씬3 모음편을 보면서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는데.. 저도 책을 좀 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WR
2021-02-03 07:01:12

눈 많이 왔나요? 동부에 정말 많이 왔던데 조심하세요. 여긴 시애틀에요. 비만 줄창 옵니다.

2021-02-03 07:04:48

저는 어바인 삽니다. 고도가 높은 근처 산에는 눈이 많이 왔는데, 올 해는 만져보지도 못하고 봄이 오게 생겼네요. ^^

WR
2021-02-03 07:17:25

동부 지인의 SNS 사진 보니 정말 많이 왔어요. 윈터스톰이 어바인 비껴갔군요. 다행입니다.

3
Updated at 2021-02-02 17:32:42

전 일본 소설들을 읽으면서 한국문학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ㅋㅋ 무라카미 류나 하루키, 츠지 히토나리 등등의 소설들에 열광했는데 점점 읽어나가다 보니 부박함의 한계를 많이 느꼈죠. 비로소 한국 문학의 장점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박상륭, 황석영, 김승옥, 이청준, 정찬, 하일지, 정영문에게 진 빚들은 끝까지 기억할 거에요.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이 제게 큰 울림을 주었던 것은 작가의 운명에 대한 탐구, 혹은 천착이 소설 전편에 걸쳐서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운명과 인생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였습니다. 그 통일성과 다양성의 절묘한 조화가 잘 짜여진 전시회를 보는 느낌이더군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소설들은 역시 잘 짜여진 야구의 타순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편의 리드 오프가 짧고 강렬하게 이 소설 집의 주제를 제시한 후, 강한 2번 타자와 클린 업 트리오가 나오죠. 다만 정말로 야구의 타순과 비슷하게 후반의 타자들은 좀 약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박완서의 소설들은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그 나이에 좋아할만한 스타일리쉬 한 문장이나 자의식 가득한 주제들이 아니었음에도 깥까지 읽게만드는 힘이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작가들로는 저는 최윤이나 윤영수를 더 좋아했지만요. 

 

 

플레너리 오코너에 대한 소개 감사합니다. 이것도 곧 읽어봐야겠네요.

WR
1
2021-02-03 07:20:41

방금 Coyotes를 읽었습니다. 아 깔 말이 많은데 이게 제게로 부메랑으로 돌아오더군요. ㅎㅎ  rockid님 글을 좋아하는 제가 (만일 '깐다면') 싫어하는 앤드류 포터의 글을 좋아하는 rockid님이 이해하는 그랬군요라는 메비우스의 띠가 떠올랐어요. 제가 포터를 깔 수록 자승자박입니다. 제가 포터 보다 훌륭해지기 전에는 절대 그럼 안됩니다. ㅠㅠ

 

한편 coyotes는 영어문장임에도 같이 읽고 있는 '그 많던 싱아~'와 똑같은 내러티브로 음성지원하듯 이해됐습니다. 가끔씩 문장에 두른 실버라이닝은 박완서님이 압도적으로 많았고요. 포터의 실버라이닝스런 문장은 함축된 의미의 발산이 아닌 겹쳐진 수사 형용사로 웰메이드 단문으로 끝나더군요. 이를테면 아버지의 확인되지 않은 잠재된 재능에 대한 문장 같은 류가 문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티를 보이지만 세계와 인간에 대한 관조 그리고 소설 구조를 다루는 다이내믹은 빠져있어서 뭔가를 기대하며 읽어나갔지만 그게 다더군요. 아 쓰다보니 결국 깠네요^^ (뉴요커 잡지 같은 데에 훌륭한 글들이 많이 올라오지만 저는 이런 류의 글들을 Netflix의 이름만 4K atmos 작품들하고 같이 분류합니다)

 

참고로 일전에 이야기했던 레이몬드 카버는 문장을 답답할 정도로 드라이하게 쓰는 반면 단어적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 여백과 여운이 많이 남도록 단편을 썼습니다. 다 읽고도 이 장면에 내가 놓친 게 혹시 있나 하고 책을 두리번거리게 합니다.  포터나 카버나 모두 영화감독들 한테는 환영받을 만한 이야기꾼들이라는 점이 공통점으로 보입니다. 

 

 

Updated at 2021-02-04 01: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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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
Updated at 2021-02-04 08:36:12

매번 댓글을 쓰고나면 후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댓글이란 상대방의 글을 읽고 말 그대로 대꾸를 해야 하는데 저는 댓구를 하지 않았나, 아니 실상 대부분의 제 댓글이 대꾸가 아닌 댓구를 하고있다고 고백하는 바입니다. 대꾸를 하면 상대방의 말을 동어반복이 아니면서 변주하는 것이고 댓구를 하면 주제를 넘나드는 다른 것을 도입하는 것이지요. 자칫하면 말돌리기로 이어질 수도 있고 무지에 대한 회피성 글로 보이기 싶상입니다만 저의 후회는 대부분이 혹여 상대방이 마음쓰지 않을까에 대한 마음쓰임입니다.

 

또 하나는 내 모습이 초라해지는, 과장되는 것도 없으면서 말 실수 없이 오롯이 내 뜻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랬군요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닌 정도여야 합니다. 상대방을 바라봄 또한 그러해야 주고받음의 왜곡이 없고 감정 상할 일도 없어 즐거운 대화의 장이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난 대화들에서 이야기했듯이 저는 한국 문학에서 시선을 뗀지 꽤 오래됐습니다. 증명된 작품(최명희, 김주영, 황석영, 박경리 등의 대하소설들, 김승옥 등 레전드격 작품들)이 아닌 세기말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문학계의 진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예외로 미약한 관심의 조각에 들었던 것이 황현산님과 신형철, 그리고 최근에 읽은 신용목 시인 정도입니다.

 

여기 도서관에도 한국책이 꽤 있어서 코로나 시대 전에 몇몇 요즘 유명한 작가들(이름은 거론 않겠습니다) 책을 읽었다가 실망한 점도 있습니다. 유시민 역사의 역사책과 도시기행도 실망 좀 했습니다만 장르가 다르니 실망의 장르 또한 다릅니다.

 

실망의 연유는 이전 댓글에 제가 '문학계'로 지칭해서 말했든 개개인이 아닌 한국문학의 전체적인 흐름, 그러니까 어떤 작품이 좋게 평가받고 팔리고 상을 받고 하는 것들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감에 미충족되는 부분 때문입니다. 이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풍조에 반해 수년 간의 수련을 통해 작품을 내놓는 분야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치부한다 해도 작가 스스로의 내,외를 똑같은 시선으로 비판하고 쥐어짜낸 작품을 찾기 힘들고 잘 팔릴만한 플롯만 추구하는 영화의 프리프로세스 공장 같은 문학계의 흐름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 편협한 의식의 흐름을 말씀드렸는데 이 기나긴 사설은 님이 말씀하신 여러 작가분들의 책을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작가 이름조차도 금시초문인 제 무지의 소치라는 고백입니다.

 

무진기행이나 토지, 혼불을 집적거리며 집었다 놨다하는 앞서 거론한 제 기대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행태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바뀌었습니다. 작가의 부친의 책은 한권도 읽지 않은 저로서는 그의 영애가 저리도 장성해서 가슴 절절이 시공을 초월한 공감을 글로 써냈다는 부분이 책이라는 물리적 매체를 넘어서는 감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제 '싱아'를 마치고 '그 산은~'으로 이어 읽고 있습니다. 소설도 자서전도 아닌 '실록'을 읽는 심정으로 읽고 있습니다. 사관의 추상같은 잣대로 어미를 비판하고 다시 그런 자신을 돌아보는 작가의 글씀씀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속마음과 다를 바 없지만 문학작품이라기엔 좀 투박한 문장에 깃든 엄정함에 역사현장의 목격담을 듣듯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 두 소설이 '초고'라 하면 더 다듬어 나온 것이 '엄마의 말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포터의 Coyotes 제목이 복수이기에 데이빗과 엄마를 두고 어디까지 편입을 시킬지 고민했었습니다. 아빠와 데이빗에 엄마까지도 주인공이 기다리고 (코요테처럼) 주변을 어슬렁거리게 만든 범주에 포함시킨다 해도 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볼드체로 표시한 부분이 아래 링크의 리뷰에 있는 소설 인용부분입니다. 작가가 이 부분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의도, 수준, 소설의 형식에 대한 의지 등 독자로 하여금 잠시 읽던 것을 멈추고 여러가지를 한 번에 유추하게 하는 인터미션을 갖게 만들더군요.(동시에 '싱아'랑 비슷하네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결말에 이르는 소설의 변주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궁금해지지 않게 되는 즉, 초반에 김이 빠져버리더군요. 이 단편의 힘은 유려한 문장, 보편적 미국의 가정현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동심의 회고, 코요테를 버무린 주인공 감정의 억제 및 투영인데 이런 구성을 설계한 세심한 정성이 갸륵해 보이지 저를 미지의 숲으로 이끄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별 5개를 주는 지점에서 저는 갸웃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In “Coyotes,” for example, Porter writes of a father—“a failed documentary filmmaker”—whose “small amount of talent … served as a source of frustration for him, a constant reminder of some vague, unrealized potential.” When we witness this character chase an unattainable dream—at the expense of a loving and supporting wife and son—we ache for what might have been, but also recognize those times that we, ourselves, have forsaken the stable relationships in our lives to chase fantasies. (Kim의 리뷰 중)

 

출처:  https://www.goodreads.com/book/show/3304674-the-theory-of-light-and-matter?ac=1&from_search=true&qid=n5plvwdhgV&rank=2

 

이 리뷰는 작품에 별점 5개를 줬고요. 비슷하게 

대부분의 여성 독자들은 장편까지 이어서 읽더군요. 

위 링크 내 s.penkevich의 별점 한 개 짜리 리뷰는 일독할만 합니다.(대충요약 번역 이해하세요^^) 

 

This collection is disappointing at best. Porter draws you in with beautiful, bittersweet language but when you reach the core you realize there is nothing else to be had; basically there is no tootsie roll center to this tootsie pop. He tries his best to depress the reader into thinking he is a master of literature, selling you tears and heartache in faltering attempt to unlock the human spirit.

아름답고 달콤쌉싸름한 문장을 그리는 포터의 작품에 실상 별 것 없었다. 특별한 반전도 재미도 없다. 독자에게 감성을 팔아 우울하게 만드는데 그의 문학적 재능을 경주했다

(중략)

 Despite it's success, I feel this book falls far short of the name Flannery O'Connor, who is attached to it's award, giving the impression that it must have been an off year for short fiction. If you want a read with admittedly beautiful words (hence, along with the surreal story Coyotes, why it is really a 2.5/5 although I really wanted to award only 2) that will make you sob and lament over lost love and dead childhood friends, then this may be a ripe choice for you. However, Porter's words are emotionally effective yet empty and lacking of any true "matter" and you would do well to look elsewhere for a short story collection that will really capture your heart and mind.

문장 좋고 감성 쩐다 하지만 뭔가 부족함이 많다. 

 

너무 길어졌네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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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2-03 0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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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2-03 12:01:58

님의 댓글에서 김승옥의 이름을 발견하니 무척 반갑습니다^^ 소싯적에 짐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거기서 국문과를 다니며 소설가를 꿈꾸던 녀석이 만났습니다. 함께 술을 참 많이 마셨는데 아무리 물어도 이 친구는 문학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죠;; 어느날 그 친구가 던져줬던 책이 김승옥 단편 전집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명연습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상한(?) 비유이겠지만 생명연습을 반복해 읽다보니 마치 교향곡 같더군요^^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가 연상된다고나 할까요?^^;; 여전히 그 책을 가지고 있는데 방치(?)한지가 꽤 되었습니다. 20대에 이런 작품들을 쓰다니 거의 미쳤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질투가 나서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대작들도 존경합니다만, 단편이야말로 '천재(말 그대로 하늘이 준 재능이겠죠?)'가 '일정 시기'에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이상의 오감도와 날개처럼 말이죠. 그 뒤로 그 친구가 던져준 소설이 다자이 오사무의 역행이었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편지를 보내서 '내가 왜 아쿠타카와상 차석이란 말이냐?'라고 따졌던 작품으로 기억납니다만.. 전에 미시마 유키오를 좋게 평가하지 않으셨던 것이 기억나네요, 아마 다자이 오사무도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죠?^^ 님께서 쓰시는 글들도 늘 관심가지고 읽어보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모르는 분야들이 많아서..^^;;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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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2-04 04:19:59

생명연습, 정말 흥미롭죠. 김승옥의 잘 다듬어진 단편들하고도 또 다르고, 60년대식 같은 비슷한 길이의 중편과도 다르죠. 다른 김승옥의 단편들이 잘 다듬어진 소품들 같다면 복잡한 텍스쳐를 보여주는 생명연습이 교향곡 같다는 말씀이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미시마 유키오를 싫어하는 것이 꼭 그의 작품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은 실소가 나오도록 유치한 것도 있고, 깊은 울림을 주는 좋은 작품들도 있죠. 제가 일관되게 싫어하는 것은 미시마의 너무도 유치한 현실에서의 행보였습니다. 그런 어릿광대에게 한 수 접어주면서 끌려다닌 당시 일본 지성계와 언론계도 그렇고요.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일본의 사소설들이 미묘하게 제 컴플렉스를 건드리는 지점들이 있어서좀 진절머리가 납니다. 그래서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사회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2021-02-04 09:21:26

류미리가 '자살'이라는 에세이집(?)에서 미시마 유키오는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자살했고,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을 너무 혐오해서 자살했다고 썼던 것이 떠오릅니다. 편하게 말해서 둘은 정반대의 성향이었지만, 결국 동전의 앞뒷면처럼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양면적인 모습을 대변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양명학과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을 관련지어서 보기도 하더군요. 소설이란 게 '소설 쓰네'처럼 자기의 이야기로 시작되겠지만 일본의 사소설들은 마치 작금의 유튜버들같죠, 소설을 쓰기 위해 사건을 만들어내고 경험하고 찾아다녀야 하는 작가들! 친절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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