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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추가) 박완서님 소설 '그 많던~'과 '그 산이~'를 맨 나중에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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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1-09 02:35:41

박완서님 소설을 읽게 된 계기는 유시민의 알릴레오북스 때문입니다. 침묵의 봄 편을 보고 레이첼 카슨의 책을 집어들었고 한 동안 알릴레오북스를 멀리(?)했었습니다. 몇 달이 훌쩍 지나가 꽤 많은 회차가 쌓였고 뜻밖에 박완서님의 엄마의 말뚝이 리스트에 들어있었습니다. 

 

저 방송을 보기 전에 책을 먼저 보면 감상이 한층 흥미롭겠다 싶었습니다. 얼른 가지고 있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부터 시작해서 '그 산은 정말 거기 있었을까'까지 단숨에 읽어버렸고 '엄마의 말뚝'을 폈다가 '나목'을 반 쯤 읽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알릴레오북스의 엄마의 말뚝 편을 시청했습니다.

 

'나목'과 ' 엄마의 말뚝'은 경험과 허구를 섞은 소설입니다. '그 많던~'(말뚝 1)과 '그 산은~'(말뚝2에 해당)은 실명과 사실에 기반한 소설 형식을 차용한 회상록과 자서전의 중간 쯤인 작품입니다.

 

작품 연보를 보니 엄마의 말뚝 연작을 먼저 집필했고 나중에 '그 많던'과 '그 산은'이 나왔습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엄마의 연대기 같은 소설을 썼고 그 소설과 공유하는 스스로의 체험담을 실명 소설로 다시 써 낸 것입니다.

 

위에 제가 엄마의 말뚝을 '폈다가'라고 썼습니다. 앞에 다큐 같은 작품을 먼저 읽고 엄마의 말뚝 첫 페이지를 펼치니 아는 내용에 반갑기도 하고 소설적 문체가 어색하기도 한 야릇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알릴레오북스를 보려면 이 책을 읽어야하는데 하면서도 앞의 두 권을 읽고 반복의 피로감이 있다면 좀 쉬어가야겠구나 하고 '나목'으로 바꿔들었습니다.

 

'나목'은 박완서님의 데뷰작이면서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삼았기에 박수근 화백의 시점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박완서를 보기 위해 박완서를 통해 쉬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죠.

 

나목은 소설 설정을 위해 주인공들의 이름을 모두 가명으로 바꾼 박완서 시점의 소설이었습니다. 그것도 익숙했던 회상체가 아니라 현재 시점의 소녀와 처녀의 중간 쯤인 화자가 박수근을 관찰하는 시점으로 나옵니다. 여전히 피로하더군요.

 

여기서 피로라 함은 상대적인 감정입니다. 그 만큼 '그 많던'과 ' 그 산이'의 영향이 심각한 탓입니다. 엄마의 말뚝, 나목, 알릴레오북스 1회를 통해 느낀 피로함은 '사실에 대한 의식'입니다. 박완서님이 겪은 그대로 일제와 동란을 거친 성장기를 체험한 듯하고 그 박완서가 빙의된 상태로 엄마의 말뚝과 나목은 허구로 느끼는 갈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입니다. 다만 박완서님의 작품을 두루 읽고 싶다면 ' 그 많던'과 '그 산이'를 가장 나중에 읽으시기 바랍니다. 박완서를 읽는다면 필독입니다만 선독하신다면 같은 서사로 픽션이 논픽션을 이길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알릴레오북스를 보면서 40대에 등단한 박완서님의 필력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에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박완서님 본인이 밝히기를 많이 쓰기도 중요하지만 좋은 책을 많이 읽은 게 많이 도움됐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읽고 추정하기에는 박완서님의 소설가적 재능은 어머니에게 물려받고 어머니로 말미암아 훈련됐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삯바느질 하면서 졸음을 물리치고자 어린 박완서에게 삼국지, 수호지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 줄거리에 탐닉했다는 내용이 '그 많던'에 있었습니다. 또한 두 권의 책 전편에 걸쳐 마치 엄마와 사상 투쟁을 하듯 어린 박완서와 청소년 박완서와 처녀 박완서의 성장사 내내 어머니의 생각에 대한 짐작과 분석과 평가가 서술됩니다. 단순치 않은 어머니와 복잡한 심사의 딸이 격동기를 거치며 작가 박완서를 빚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완서님의 작품들은 사적인 체험담을 다양한 작품으로 생산해냈는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작가의 기억에 대한 천착과 인식의 변천이 경험을 다시 반추해서 새로이 변주한 작품을 내게 하는 모티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해방 전과 한국전 직후까지를 엄마의 말뚝을 통해 역사의 거대담론에 휘말린 소시민의 풍상을 짚어낸 알릴레오북스는 바로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를 통해 그 다음 세대 역사 이야기를 마련했더군요. 유시민님의 깨시민을 위한 역사인식근육 단련운동이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는구나~~ 합니다^^.

님의 서명
인생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하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써야 하고, 고통 받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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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1-02-18 02:05:02

그 많던 싱아는~을 다 읽고 거의 밤을 지새며 멍하니 누워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어떤 다큐나 영상보다도 전쟁에 대한 공포감과 무력감이 생생하게 실감되더군요 그렇게까지 몰입해서 본 책은 정말 몇권 안되는것 같습니다

WR
2021-02-18 02:12:11

비슷한 상황을 다른 이름과 약간씩 바꾼 설정이 나오는 작가의 다른 소설 읽는데 방해가 되더군요. 

 

최인훈의 광장은 소설이지만 반복된 인민군의 서울 점령과 피난 딜레마에 대한 고민과 상황은 날 것 그대로이고 당시 잔류한 서울 시민들의 고초를 같이 겪는 느낌이 들 정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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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8 08:56:07

'그 많던 싱아'의 (추가)를 쓰셨군요^^ 우연히 박수근 화백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제대로? 본 적이 있는데, 그제서야 왜 박화백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지 알겠더라고요! 저도 '그 많던 싱아'로 예전에 썼던 독후감?의 일부를 (추가)로 덧붙여 봅니다.^^;;

 

  선생님께서는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으로 첫 작품, 나목을 쓰셨지요, 기억이란 평생 묻어둬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생님께서는 처음으로 박수근 화백을 통해 용기를 내셨던 것 같습니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하나 둘씩 선생님의 기억은 글이 되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이 작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어버렸을까를 통해 그동안의 소설적인 윤색을 다 걷어내고 오롯이 선생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그런 용기는 연이어 가장 가까운 분들이 돌아가셨던 일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선생님께서 다시 마주해야 했던 공허를 이 작품을 통해 몰아내셨던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산문집에서 읽었던 글귀가 마치 선생님이 제 귀에 대고 조곤조곤 말씀해주시는 것처럼 들려옵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들 역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아름답고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지요. 선생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지금 계신 곳에서는 늘 평온하기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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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2-18 09:36:37

일생을 작가로 끝까지 작가로 남았다는 의미가 굉장히 크게 다가옵니다. 나목부터 순서대로 읽는다면 선생의 정신적 여행을 추적할 수 있겠죠. 끝까지 원고를 다듬다가 돌아가셨다니 온전히 작가의 삶이었지요.

알릴레오북스 엄마의 말뚝 편에서 유시민 작가가 나이 듦은 스스로를 구성하는 기억 능력의 점진적 소실 때문에 자신이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데서 많이 공감했습니다. 그럼에도 박완서님은 현역 작가인 채로 생을 마감하셨으니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어머니와의 인터뷰 에피소드도 참 재밌더라구요. 어머니가 작가님 책을 읽지 않았으면 해서 항상 뒤집어 꽂아두었다는... 냉정히 써내려간 글을 엄마가 읽고 맘상할까 걱정하셨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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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8 10:13:33

제가 알릴레오북스를 본 적이 없어서 유시민 작가가 어떤 맥락에서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나'를 구성하는 것 중에 '기억'이 있겠지만, 사실 그 '기억'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착각인지, 혹은 환상인지는 알 수 없고, 또 알 필요도 없겠죠. 소견으로는 기억 능력의 소실을 그리 아쉬워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은 각자 나름의 '인생 소설'을 쓰는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지난 시간에 계속 머무르면서 '나'란 허상을 계속 붙잡게 되기 때문에 파르마콘은 아닐까도 싶습니다^^ 불가(Buddism)적인 사고로는 '자신이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을 환영하겠죠. 하지만 '자신이고', '자신이 아니고'란 분별조차 뛰어넘어야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닐까도 싶고요, 물론 '깨달음'이라는 개념조차 '형상'에 불과하기도 할테고요^^;; 

 

제 기억에 하루키의 아내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만, '자기'를 쓰는 소설가와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늘 불안할 수 밖에 없겠죠;; 처음 사소설을 썼던 하루키는 어느 시점부터 완전히 환상문학으로 돌아선 듯 한데, 혹시 사소설의 한계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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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8 10:43:00

유시민의 말뜻은 노화로 인한 기억 능력 감퇴로 주변 관계에 대응하는 자신이 현재 마음처럼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낀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유시민이 나중의 자신을 용납 못한다는...덕분에 좋은 말씀 얻어들었네요^^

 

(유시민 작가가) 기억의 총합이 인격체란 말을 하던데 언뜻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하고 같습니다만 그런 뜻으로 한 것은 아니고요. 크리슈나무르티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고 했고 미래 또한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취한배님 말씀 대로 깨달음이라 일컫는 순간 깨달음도 아니라고도 했고요. 

 

하루키도 사소설로 시작했군요. 박완서님을 읽으면서 작가가 자신의 글을 얼마나 치열하게 파고 들었는지 상상이 안갑니다. 문학도 예술의 한 형태고 사소설은 과거와 주변의 관계에 서 자유롭지 않은데 사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것 모두(예술, 과거에 집착) 장려하지 않았거든요. 인간의 삶, 작가의 삶, 구도의 삶 모두가 다르겠지만 하나 밖에 없는 생에 무엇인가에 한가지에 매진했다는 것 자체가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021-02-18 10:56:24

친절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전에 이렇게 말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건방지게 말이죠!^^;; "예술가가 될 것인가, 해탈을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좋은 저녁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2021-02-18 09:26:30

박완서 선생님 글들은 정말 좋아요 재미도 있구요 커다란 흐름을 가진 큰 소설도 있지만 작은 이야기들도 재미있어요 전 소품들도 많이 좋아합니다

WR
2021-02-18 09:45:10

구글 이북에서 3권씩 묶어팔기 신공에 걸려 9권이나 샀지 말예요. 당분간 원 없이 읽을 예정입니다.

2021-02-18 10:13:26

 저도 <나목>을 박완서 작가님 책 중에 맨 처음 보았는데, 폭격에 의해 오빠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나갈 때의 그 공포가 주인공의 뇌리에 박혀 트라우마를 만든 것을 보고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WR
2021-02-18 10:45:07

지금 나목을 반 정도 봤는데 퇴근하며 집에 돌아가면 먼발치서 보이는 무너진 사랑채가 자꾸 나오는데 그게 그거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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