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테크] 헐..퇴계이황도 위선자였나요?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조선 사대부들은 이재(利財)를 쌓는 것을 죄악시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구분에서도 상인을 가장 아래에 놓았던 이유입니다. 부를 쌓고 이재를 중요시하면 인간의 본성을 잃고 도리를 어지럽힌다며 상공업의 발달을 억눌렀습니다.
이황도 『성학십도』를 통해 세속의 이익에 대해 경계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부동심(不動心)에 이르러야 부귀(富貴)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여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세워진다." ----중략---
이황이 남긴 땅은 약 36만 3542평 정도 입니다.이황은 대략 250~300명 안팎의 노비를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생계 걱정 없이 학문에만 전념했던 지방 지주들의 재산이 평균 전답 300~500두락, 노비 100여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답 3000두락에 노비 250여명 가까이 거느린 이황은 꽤 잘 사는 축에 속했던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황은 재산 증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각종 서찰을 보면 그가 재산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노비 규모를 늘리는 데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노비는 토지보다 더 가치 있는 재산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죠. 개간을 통해 전답으로 바꿀 수 있는 황무지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비를 많이 갖고 있다면 토지는 늘리기가 수월했던 거죠.
이황이 아들에게 남긴 서찰을 보면 그가 자신의 노비들을 양인(良人)과 결혼시키려고 무척 애썼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범금(范金)과 범운(范雲) 등을 불러다가 믿을만한 양인 중에 부모가 있어 생업을 의탁할 수 있는 자를 골라 시집을 보내고, 죽동에 와서 살게 한다면 더욱 좋겠다.“ (『도산전서(陶山全書)』 中)
이황이 노비들을 양인(百姓)들과 적극적으로 맺어주려고 했던 까닭은 당시 노비와 양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천즉천’(一賤卽賤〮부모 중 한 명만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라고 합니다. 노비끼리 결혼시키는 것보다 이처럼 양천교혼(良賤交婚)을 시키면 노비를 손쉽게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은 노비들이 양인과 결혼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이황은 노비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구입하기도 했는데, 간혹 강제력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연동(連同)에게 절대 방매(放賣)하지 말라고 지시해 놓았으니 너도 이에 따라 가르쳐주는 것이 좋겠다. 부득이 방매한다면 내년에 가서 네가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그렇게 할 만한 형편이 아니니 어쩌겠느냐.”
연동은 이황이 소유한 영천 토지에 거주하던 노비였는데 이황은 그가 토지를 팔려고 하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은 다음 꼭 팔아야 한다면 이황 집안에게 팔도록 강권했던 것이죠.
또한 이들은 재산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많은 애를 썼습니다. 비슷한 수준의 가문끼리 혼인 관계를 맺은 것도 부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컸습니다. 이황만 하더라도 2차례 결혼 과정에서 전처와 후처가 처가에서 가져온 영천(382두락), 풍산(148두락), 의령(687.5두락)의 토지 덕분에 가산을 크게 늘릴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첨언하면 이황은 생전에 자신이 늘 넉넉치 않다고 여겼으며, 가뭄이나 흉년이 들 때면 경제적 곤궁함을 토로한 적도 많았습니다. 중상층 이상의 재산을 소유했던 그의 이런 '결핍' 의식은 재산 증식의 당위성과 원동력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https://mnews.joins.com/article/22973353#home
다른 커뮤니티에서 어떤 유저가 노비장사하던 위선자라고 욕하길래 진짜인가해서 검색해보니 사실이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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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려서 세종한테 죽을 때 까지 일하지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