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침 일찍 선생님께서 눈을 감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선생은 눈을 감으신 것이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며 우리 집 마루 천장에 이렇게 새겼다. 선생은 마침내 다시 차름했구나라고. 그러니까 그것이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다.
우리 꼬맹이들에겐 한참 달리기 겨루기가 번져갔다.
어떤 애는 발목에 돌멩이를 매달고 또 어떤 애는 가슴에 깻잎을 가시로 찔러 달고 그리고 나는 핫바지 바짓가랑이를 움켜쥐고, 범이 나온다는 멍우리고개를 넘다가 하나씩 둘씩 쓰러져갔다. 다리가 아파서? 아니다. 배가 고파서. 이때다. 초등학교 4학년쯤 되는 애가 울부짖었다. 손기정은 찬물만 한바가지 마시고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넘었다고. 이에 눈이 휘둥그레진 꼬마들이 이를 악물고 그 가파른 멍우리고개를 넘게 해주던 아, 손기정.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갑자기 생긴 38선은 세계 그 어떤 산보다도 높아 넘을 수가 없다는 말이 돌자 담임선생님의 말씀이었다. 그렇지가 않다고. 우리 모두가 손기정이가 되면 손쉽게 넘을 수가 있는 모래성이라고 해 애들한테 손뼉까지 받았었는데 그 일로 하여 어디론가 끌려간 그 선생님이 영 돌아오시지 않자 원망스럽기도 하던 아, 손기정.
하지만 6·25 때 있었던 일이다.
빨갱이를 가르던 어느 헌병이 물었다.
“네가 틀림없이 손기정이 손씨라 말이지?” “네.” “또 네 고향도 저 북쪽 손기정이네 고향이고?” “네.” “그렇다면 진작 그렇게 말을 해야지. 나가라고 해.” 빨갱이로 몰렸던 사람을 살려내던 아, 손기정.
그는 어떤 분일까. 그는 비록 사상가는 아니지만 근대 200년 이래 그 어떤 분보다도 가난이라는 거추장(장애)을 극복하게 한 힘의 상징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된다.
누구나 가난을 마주하게 되면 한켠으로는 좌절, 또 한켠으로는 저만 그 고비를 넘고자 하는 이기주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고빗길과는 달리 가난을 의지로 넘게 하는 것이 사회정신이고 보면 손기정은 바로 그 사회정신을 일깨운 점에서 근대 100년사에 가장 드높은 사회사상가였다고 믿고 싶다.
두 번째로는 손기정 선생이야말로 역사를 꿰뚫는 굽이침이라고 말하고 싶다.
8·15해방 직후다. 38선을 무너뜨릴 힘으로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혁명가·애국자들은 그리도 많았다. 하지만 그 민족혼의 한가운데를 굽이치는 무지렁이들의 피눈물을 끄집어내지는 못 했었다. 그런데 한 이름 없는 초등학교 선생만이 말했던 것이다. 우리 모두 손기정이가 되자. 그리하면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 38선은 그냥 무너진다고 했던 것이니, 손기정 선생은 누구일까. 한낱 달리기선수였을까. 아니다. 역사의 굽이침,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빨갱이로 몰려 죽게 되었던 사람이 손기정의 손씨성이라고 해서 살아난 것은 무엇일까. 한낱 웃지 못할 사태였을까. 손기정 선생이야말로 우리 겨레의 아픔을 몽땅 쓸어앉는 품새,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그렇다. 우리 모두 한 사상가가 되기에 앞서, 아니 권력의 화신이 되기에 앞서 우리 모두 손기정 선생한테 배우자 그런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선생은 이제 다시 달리기를 차름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된다. 아, 손기정 선생이시여.
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