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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일본군이 4년 동안 휴전할 수밖에 없었던 2차 진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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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7-26 21:04:29


정유재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진주성을 공격했던 일본군.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이 들어갔지만, 곽재우와 권율 장군은 수성에 반대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6천 VS 10만
8일간의 대전투. 덜 알려진 황진 장군을 돌아 봅니다.

https://youtu.be/_dp3gRLA5Zw


님의 서명
십리 호수에 서리는 하늘을 덮고
푸른 귀밑 머리에는 젊은 날의 근심이 어리네
외로운 달은 서로를 지키기를 원하니
원앙은 부러우나 신선은 부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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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1-07-26 21:04:26

1차 진주성 전투에게 패했던게 쟤들한테는 그렇게 쇼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진주성 만큼은 그냥 못넘어간다고 발악 했던거고 정말 처절하게 싸웠지만 결국은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죠

WR
2021-07-26 21:09:27

졌지만 일본군의 피해가 너무 커서 더 싸울 엄두를 못 냈다니, 진주성 전투를 생각해 봅니다.

5
Updated at 2021-07-26 22:06:11

1차 진주성이 얼마나 악몽이었는지 풍신수길이 '목쿠소' 목 베어오라고 길길이 날뛰어서 벌어진게 2차 진주성 전투지요. 1차 전투는 몰라도 2차 전투는 전략적인 의미가 없는 보복전이었지요. '목쿳소'란  '목사'라는 직함의 일본식 발음인데 진주목사 김시민의 이름을 몰라서 '목쿠소'라고 일본에 전해졌지요... 얼마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으면 이후 도쿠카와 막부 시대에도 우는 아이 겁주는 용도로 '자꾸 울면 목쿠소가 잡아간다' 라는 말을 사용했다죠. 물론 그 '목쿠소'는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일본군 및 풍신수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죠.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에게는 '충무공'이 최고의 악몽이었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목쿠소'의 인지도가 충무공을 능가했다 합니다. 수전은 몰라도 육전에서 자기들이 명군도 아닌 조선군에게 그것도 소수의 조선군에게 질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진주성에서의 패배가 엄청난 충격과 공포였나 봅니다.

2021-07-26 21:52:38

이순신에게 패하는거야 작은전투부터 큰 전투까지 연전연패를 했으니 이미 저사람은 절대 못이겨 라는 인식이 뇌리에 박힌 반면 1차 진주성 전투와 김시민의 존재는 완전히 예상 밖, 쟤들 입장에서 보면 그냥 길가다 삥뜯는 기분으로 패고 지나갈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개박살이 나버렸으니 엄청난 쇼크였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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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7-26 22:25:55

그런데 김시민 목사도 시호가 이순신 장군과 같은 ‘충무’ 입니다. 두분 다 충무공.. 묘지와 사당이 괴산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Updated at 2021-07-27 01:13:41

1차 진주성 전투의 전략적 의미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을 정도로 어마어마 했거든요... 그때 진주성이 뚫렸으면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거나 최악의 경우 육지의 근거지를 잃고 보급에 큰 애로사항을 겪었을 겁니다.

2021-07-26 21:21:33

논개가 기생이냐 아니냐는 계속 논쟁이 되는 주제인가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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