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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미나리 - 자연선택과 순응 (스포일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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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9-21 22:52:41

(스포일러 주의) 

 

 어제 추석 특집 영화로 '미나리'를 봤습니다. 잔잔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네러티브에 오랫만에 영화 다운 영화를 봤다는 느낌입니다. 적잖은 여운이 아직까지 있습니다. 

 

1. 뭐랄까, '상영 이후의 영화는 감독의 것이 아닌 관객의 것'이라는 클리셰가 무색해질 정도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매우 치밀하게 짜여진 "작품"이었습니다. 관객의 오픈된 해석이 어려운 단단한 영화임에 틀림없습니다. 모든 대사와 장면에 버릴 것이 없으며, 또한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옷장을 보여주는 장면들, 기상예보를 보여주는 장면들 등, 사소하게 보여지는 장면들 모두 의미가 있고 복선 마냥 모두 연결됩니다. 마지막 장면이 이를 극적으로 대변합니다. 그렇게나 우습게 봤던 수맥 전문가(?)를 부인과 함께 진지하게 바라보며, 제이콥이 수맥이 발견된 장소를 표시하고자 마지 못해 벽돌을 올려 놓는 장면. 그리고, 아들인 데이빗과 함께 장모님이 미나리를 심었던 개울가로 가는 장면. 

 

 2. '미나리'는 제이콥에 대한 영화입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제이콥의 '순응"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제이콥이 아버지 또는 남편이라는 것은 1980년 대 상황을 빗대고자 설정한 셋팅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제이콥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성년기를 대부분 시작합니다. State 정부의 수도를 사용하지 않고 혼자서 물을 찾고자 우물을 직접 파는 장면. Pseudo-science로 수맥을 찾는 방법을 일거에 무시하는 장면. 폴의 우스꽝스러운 기도나 엑소시즘을 미친 행동으로 치부하는 장면.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으로 흘러가며, 제이콥은 어느새 교회를 다니고, 수맥을 찾는 방법으로 이제 물을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very last scene에서 제이콥은 장모님이 미나리를 심은 그 개울가에 처음으로 갑니다. 그리고 '미나리'를 아들과 함께 땁니다. 

 

3. 할머니(윤여정 분)가 손자인 데이빗에게 전해준 "숨겨져 있는 것이 더 무섭다"는 말, 영화가 웅변하는 주제, 그 자체입니다. 자신만을 믿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제이콥은 "무서워 해야 할 숨겨져 있는 것"도 있다는 것을 일련의 사건으로 "깨우치게 됩니다" - 거칠게 말하면, 자연선택에 살아남고자 자기도 모르게 순응하는 것이죠. 본인이 개척한 우물에서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는 순간, 최초 납품 계약한 한인가게에서 납품 취소가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순간, 그리고, 다음 주에 장모의 실수로 수확된 모든 채소가 불타버리는 순간. 그 일련의 사건으로 겪으며 제이콥은 교회를 다시 다니고, 수맥을 찾는 방법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미나리'를 아들과 함께 땁니다. 

 

4. 제이콥 가족은 모든 것이 명확하게 흘러갈 수 있는 캘리포니아를 떠나 아칸소주로 온 순간, 보다 철저한 비주류가 됩니다. 비주류는 달리 말하자면, 돌연변이이겠죠. 그 생뚱맞은 아칸소주에서 한국 채소를 한국 방식을 제배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그 순간은 자연선택에서 멀어지며 도태될 수 있는 "실패한 돌연변이"의 순간, 그 직전입니다. 하지만, "무서워 해야 할 숨겨져 있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는 폴 그리고 장모님의 개입으로 제이콥은 실패하지 않고자 조금씩 환경에 순응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늦은 밤에 State 정부의 수도관을 밸브를 제이콥이 여는 장면, 순응의 시작입니다. 

 

5. 우리네 인생도 비슷합니다. 내 자신이 내 인생을 개척할 수 있으며 또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어느새 기대와 달려 펼쳐지는 사소한 사건을 겪으며, 조그마한 징크스가 인생의 굴곡을 바꿀 수 있다는 사소한 두려움에 하루 하루를 사로잡힙니다. 떨어지는 자신감에 점을 보기도 하고 토정비결을 알아보기고 하고, 기복적인 자세로 종교에 빠지기도 하죠. 더 나아가, 내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목숨 같이 가지고 있던 원칙을 헌신짝마냥 버리기도 하죠. 우리 모두 자연선택에서 도태되지 않고자, "숨겨져 있는 것"까지 통제하고자 발버둥치는 이 모습들, 개인차가 있겠지만, 그렇게 생경한 것으로 아닐 것입니다. 

 

6. 제이콥은 장모님이 심었던 미나리가 어느새 군집을 이루고 잘 자라고 있는 개울가로 옵니다. '미나리'. 비주류의 이민사회를 겪으며 정체성을 잃지 않고 home country에서 가져온 '미나리' 마냥 군집을 이루며 자리잡은 1980년 대 미국의 한국인 이민세대를 보여주는 비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해석해보자면,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을 살며 통제를 꿈꾸면서도 그 인생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조언이기도 할 것입니다. 패배론적인 조언이 아닌, 인생 그 그대로의 조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할머니 (윤여정 분)의 미나리에 대한 설명처럼요: "미나리가 얼마나 좋은 건데. 잡초처럼 아무데서나 막 자라니까, 누구든지 다 뽑아 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뽑아 벅고, 건강해질 수 있어. 김치에도 넣고, 찌개에도 넣고, 국에도 넣고, 아플 땐 약도 되고. 미나리는 원더풀, 원더풀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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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1-09-21 20:25:43

너무 재미가 없어서 실망했다는 분들도 계시던데... 사실 이런 영화는 오락적인 기대를 하고 보는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대차이도 있는 것 같은데... 7-80년대 이민이나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신 분들과 90년대 이후 외국 생활을 경험하신 분들이 느끼는 감성에도 그 차이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WR
2021-09-21 21:18:39

예, 맞습니다. 다양한 감상이 나올 수 있는 영화인데, 당시 유사한 경험이 있는 경우에는 제 해석이 유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2021-09-21 21:57:49

재미가 오락적인 재미를 말하는 게 아니죠.

어느 누가 이런 영화에 그런 재미를 기대하나요?

1
2021-09-21 21:10:19

우리나라 문화가 아닌 미국 이민자문화, 미국 감성을 건들인 영화라고 생각해요.

WR
2021-09-21 21:19:12

예, 그렇죠. 원천적으로 미국 영화인 점도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2021-09-21 21:3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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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
2021-09-21 22:40:05

아, 어떤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ㅠ.ㅠ 그 만큼 할머니에 대한 감정이입이 남다른 네러티브라 생각됩니다.

2
Updated at 2021-09-21 22:38:18

좋은 영화 감상평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치밀한 구성, 소품, 대사, 연기 하나하나를 연결시켜 복선으로 보시면 봉 감독과 견줄만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인 이민자들이 영화 장면 장면마다 " 맞아 나도 그랬어, 아니면 내 주변사람이 그랬지 " 하는 공감대를 표현했구요.

WR
2021-09-21 22:43:03

좋은 말씀 감사 드립니다. 정말, 봉 감독 님 영화의 짜임새가 느껴졌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마지막으로 갈 수록 어떤 퍼즐의 그림이 그려질지, 긴장(?)도 느껴졌고요. 저에게는 오랜만의 좋은 영화였습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느껴지는 이물감 (사회적인 의미에 대한 부담)과 달리, 제이콥, 할머니에 대한 감정이입으로 뭔가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봄날 같은 영화이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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