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커피] 무산소 프로세싱 원두 감상, 그리고 취향의 변화
추석에 요즘 인기를 많이 얻고 있다는 카페 블랜딩 원두 두 종을 선물받았습니다. 카페를 창업한 바리스타가 해외 수상경력, 특히 에스프레소 부분 수상경력이 많아 눈길이 갔습니다.
둘 다 맛에 특색이 있고 수준급이라 감탄하고 원두 구성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둘다 평소 마시는대로 진한 에스프레소 룽고로 한 잔 씩 마셔봤습니다.
견과류 맛과 바디감을 강조한 buttery은 의외로 적절한 산미도 곁들여져서 벨런스가 매우 우수하게 느껴졌는데, 블랜딩 비율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기본적으로 콜롬비아 소농장의 여러가지 스페셜티 원두가 60%이 넘고 베이스를 지탱하는 인도 kappi royale 원두가 1/4정도, 그리고 산뜻한 첫 맛과 약간의 과일향과 신미를 위해 에디오피아 G1등급을 예가체프 코케 원두 13% 섞었더군요. 납득이 가고 영리한 블랜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정도면 저로서는 기억에 남을만한 수준급 맛이었는데 가격을 확인해보니 보통 동네 커피점에서 파는 원두가격보다 저렴했습니다.
두 번째로 마셔본 winy라는이름이 붙은 원두는 포장 개봉부터 약간의 충격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말 그대로 포도의 달콤한 향이 강하게 올라오는데, 원두에다 진짜 와인을 분사했나 싶을 정도로 강하고 매혹적인 향이었습니다. 커피에서 이런 향이 나기도 하는군요. 이 원두에 같이 온 명함 크기 설명에는 특이하게 원두의 원산지나 품종 설명이 없고 무산소 프로세싱 30%, 내추럴 프로세싱 70%이라고만 적혀있습니다. (나중에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결과 위의 원두와 대동소이한 원두들이 섞여있었습니다. 단 원산지(농장)는 서로 다르고 인도산 원두 대신 코스타리카 원두가 섞여있었고요. 모두 매우 좋은 등급의 원두를 쓰는 것 같았습니다. )무산소프로세싱이 뭔지 찾아보니 발효과정에서 산소를 차단하기 위해 이산화탄소를 주입하는 공법이라고 하더군요.
마셔보고 나니 입안에 꽃향기가 확 퍼지는, 전형적인 고급원두의 맛과 향이면서 그 강도가 여태껏 맛봤던 어떤 원두보다도 강렬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무산소 프로세싱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원두 가격이 생각보다 많이 쌌다는 것입니다. 저희 동네에도 꽤 괜찮고 입소문을 탄 커피전문점들이 둘 있습니다. 둘 다 독립 로스터리를 갖추고 공부 많이 하신 사장님들이 하는 곳이죠.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엄선된 스페셜티와 블랜딩 종류를 파는데 두 곳 다 1온스(226g)에 15000원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선물받은 원두들은 각각 12000, 16000 정도로 기존의 카페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저렴했습니다. 심지어 입지도 훨씬 비싼 곳의 커피였는데도요. 저라면 이정도의 맛 차이에 2~30%정도의 가격을 더 지불할 용의가 있는 맛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잠간 생각해보니 어렴풋한 그림이 그려지더랍니다.
1. 아직도 커피 트렌드는 맹렬하게 변하는 중이다.
위에서 말한 두 곳 외에도 꽤 맛있다고 인정받는 카페가 몇 군데 있는데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늦게 창업한 곳일 수록 미묘하게 맛이 더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다들 처음부터 실력도 있고 그래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곳들이다보니 자신이 발견했던 최초의 성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트렌드는 변하고 새로운 가게들은 창업당시의 트렌드를 적극 반영하고 지켜가니 새롭게 뜨는 커피점일수록 더 나은 맛을 보여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 전 ,5년 전과 비교해볼 때, 확실히 5년 전 구할 수 있는 커피는 10년 전 구할 수 있는 커피보다 맛있었고, 지금 구하는 커피들은 5년전 구할 수 있는 커피보다 맛있습니다. 그런데 가격은 그대로거나 더 낮아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에스프레소 머신의 기술발달도 여전히 눈에 띄는 차이를 만들어내며 발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저가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도 10년 전의 중가 에스프레소 머신보다 낫다고 하더군요.
2. 로스팅 가격이 싸졌다.
얼마전만 해도 로스팅은 일종의 비법이고, 생두와 원두의 가격의 격차가 컸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변한 것 같습니다. 커피업계에 몸담았던 지인이 말하기를 이제는 각 원두별로 최적의 로스팅 포인트가 널리 알려졌고, 로스터리의 실력이 상향평준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소비자들이 생두의 품질에 대해서도 지식이 늘어서 생두 가격이 예전만큼 싸지 않다고 합니다. 대신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원두의 가격은 고정되거나 다소 싸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3. 국내 커피업의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저는 한 7~8년 만해도 일본 커피에 대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스페셜티 드립을 일본 특유의 다도와 결합한 일본의 커피 문화는 맛과 향, 그리고 커피를 즐기는 분위기까지 한국의 커피문화와 엄청난 격차가 있는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도 물론 어느정도 격차는 있습니다. 일례로 비슷한 등급의 원두 가격은 우리나라가 미국과 일본보다 거의 배 이상 비쌉니다. 그 이유는 보통 우리나라의 스페셜티 생두 수입이 소비량이 많은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생두 대량구입이 현실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일본 업체들이 먼저 대량구매를 하면 거기서 조금 때어오는 형식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양적인 풍부함이 뒷받침된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이 가미된 커피문화가 아무래도 한국보다 유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한국도 웬만큼 이름이 난 커피점들은 놀라운 맛과 향의 커피를 보여주는 곳들이 늘었습니다. 아마도 카페들이 많이 늘었고, 업주님들의 생존경쟁과 노력이 엄청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가계를 운영하면서 기술 개발가지 하는것은 정말 만만한 일이 아니죠. 특히 잘되는 가게들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일들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대충 이 정도가 과거보다 훨씬 맛있는 커피를 과거와 거의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싼 가격에 맛볼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제가 요 몇 년 들어 변한 커피 취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전세계적인 커피 트렌드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커피의 세계에 발을 딛은 것은 전광수 커피를 통해서였습니다. 아마 20년도 더 된 이야기 같은데, 그 이전에 마셨던 커피라봐야 스타벅스나 할리스 같은 국내외 프렌차이즈 들이었고, 그나마도 커피 자체를 그다지 즐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로 커피 전문점에서 스페셜티 드립 커피를 처음 먹어봤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제가 그때 선택했던 원두는 케냐 AA였습니다. 물론 에스프레소 기계가 비싸긴 하지만 역시 제대로 커피의 특징을 즐기면서 마시는 것은 스페셜티 드립커피구나 하는 것을 처음 각인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이는 최근 한 몇년 전까지도 깨지지 않는 고정관념이었습니다. 보통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로 나오는 블랜딩 커피는 그 카페의 실력을 가늠할만한 가성비 좋은 가장 싼 메뉴라는 인식이 강했고, 실제로 가격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명한 커피점에 가면 무조건 그 가게에서 가장 유명한 스페셜티 원두 드립 메뉴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릅니다. 아직도 공급이 달리는 귀한 스페셜티들은 블렌딩 원두에 비해 가격이 훨씬 비싸지만 대중화된 준수한 원두들은 스페셜티 원두가 블렌딩과 가격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싼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블렌딩 원두에 사용되는 생두의 질과, 블렌딩 실력이 올라긴 덕분이겠죠. 그리고 에스프레소머신의 성능도 비약적으로 상향평준화된 것 같습니다. 요즘은 작은 커피점에서도 싸면 몇 백에서 수 천만원 하는 머신을 발견하는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에스프레소용 블렌딩 원두와 머신의 발달로, 저는 이제 오히려 드립보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해 마시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는 집에서 커피를 마실 때도 마찬가지인데, 예전에는 비싼 원두는 무조건 프렌치 프레스나 드립으로, 싼 원두는 아메리카노로 뽑아마셨습니다.
그러나 질좋은 블렌딩 원두로 마시는 에스프레소는 커피를 마시는 방식에서 완벽하게 저의 기호에 부합합니다. 일단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짧아서 가장 맛있는 온도에서 집중력있게 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 드립이나 아메리카노는 마시다 보면 어느새 식어서 마지막 한 모금은 그냥 입에 털어넣는 수준이거든요. 예전에는 카페에서 큰 용량의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이야기를 하거나 책을 보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습니다. 아마 앞으로는 더욱 그런 식으로 커피를 마실 일이 드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취향의 변화로 커피를 마시는 양이 줄었습니다. 예전에 저에게 커피란 카페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운동이든, 일이든, 독서든, 대화든, 하기 전에 집중력과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것. 그래서 '맛없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은 느꼈고, 때문에 인스턴트 동결건조 커피를 마시면서도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카페인도 물론 중요하지만, 커피 자체의 맛을 느끼는 것에서 즐거움이 늘었습니다. 예전에는 하루 평균 투 샷을 세 번 정도 마셨는데, 요즘에는 진한 에스프레소 원 샷에 룽고로 좀 길게 뽑아먹습니다. 하루에 1~3전 정도 마시니 거의2/1~1/6 수준으로 원두 소비량이 줄었습니다.(평균적으로 1/3정도로 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하루하루 소소한 즐거움입니다. 소비량이 줄으니 고급원두를 구입해서 마시게 되었습니다. 맨날 spa 브랜드만 입다가, 이제는 좀 오래 입을 수 있는 메스티지 브랜드 옷을 입고 만족감이 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여기까지 요즘 제 커피생활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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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배우고 갑니다.
커피에 대한 이야기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