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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뭔가 이상하고 묘했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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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9-29 01:11:29

제가 대학에 처음 들어가고, 고등학생의 까까머리, 그리고 비쩍 마른 몸을 가졌던 그때.

주변 사람들이 제게 김경민을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네. 지금은 기억에서 잊혀진,  호기심천국, 라인업, 매맞는 남편이었던 개그맨 김경민이요.

 

 

안녕하시렵니까? 하던 이상한 복장의 이상한 사람.

당시에 너무 기분이 나빴는데... 뭐 닮았다는데 어쩌겠어요.

막 싫은티를 내면 사람들은 "그럼 성형수술 한 김경민이라고 해줄께" 그랬어요.

지금은 좀 변한건지 그런 얘기가 없습니다만.

아무튼 이 정보를 밑밥에 깔고.

 

대학 초년생때 아는 지인의 영화 촬영을 도운적이 있습니다.

독립영화일텐데 정확히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겠고, 완성본을 보지도 못했었어요.

어쨌든 촬영의 마지막날이었던가요.

막 촬영장에서 기웃대고 있는데, 감독을 하는 그 지인이 제게 급하게 그러는거에요.

시나리오가 바뀌어서 지금 한 장면이 추가되었다. 

'막 이사한 느낌의 원룸, 침대에 누으면 창문으로 네온싸인이 보이는 곳' 섭외가 필요하다는겁니다.

본인들은 촬영을 하고 있을테니, 두시간 뒤 정도에 촬영을 할수 있도록 장소 섭외좀 해달라.

하더라고요.

 

그 주변이 경희대였나, 외대였나....

급박한 상황이라니까, 전 뭣도 모르고 무작정 거리로 나와 일단 주변 부동산들을 다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도 촉박하고, 제작비도 넉넉치 않아 충분한 사례도 되지 않는데, 그런 안성맞춤의 원룸을 바로 섭외하는게 쉬울리 없잖아요?

몇군데에서 퇴짜를 먹고, 서성이다 역전 주변의 되게 작은 부동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즘 부동산들은 '공인중계사무소'라고 해서, 나름의 그 분위기라는게 있잖아요.

그런데 거기는 들어가자마자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뭔가 시간이 멈춰있는 곳 같달까요? 오래된 나무로 된 책장들과 책상, 오래된 소파...

공간 자체가 뿌연 먼지로 뒤덮힌듯한 착시가 드는 곳.

'부동산'보다는 70-80년 "복덕방"이라는 이름이 어울릴만한 그런곳이었죠.

 

집을 구하러 다니며 부동산들을 방문했지만 그런 느낌의 그런 박제된 공간같은 곳은 처음이라

뭔가 느낌이 묘하더라고요. 여기도 혹시 영화촬영장소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것 같아요.

그리고 그 장소에 너무나 어울리는, 

풍채가 있고 나이가 지긋하신, 그리고 딱봐도 말수가 적어 보이는 할아버지, 뿔테안경을 쓴 할아버지가 오래된 사장님 의자에 앉아있었어요. 몸이 좀 육중하셔서 그 커다란 의자에 거의 누워있듯 앉아계셨던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묘했던건.

그 곳 벽에 어울리지 않게 다닥다닥 붙어있던 사진들!

남자의 어린시절 사진, 그리고 이상한 복장을 한 사진들, TV에 나왔던 사진, 기사의 스크랩 들...

연예인 김경민의 사진들이더라고요.

하나하나 나무액자에 정성쏟아 걸어둔 느낌이 물씬들었죠.

순간 아, 이분이 김경민의 아버지시구나.하는 추론이 가능하더라고요.

이게 나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뭔지 모를 뭉클함도 들었습니다. 당시 김경민이 방송에서 좀 망한 연예인으로 놀림받던 시기였거든요. 아버지에게는 이렇게 소중한 자식이구나.그런게 느껴지더라고요. 막 진짜 내 아버지 같고...

 

20살 초반의 어리석은 저는, 경황도 없이, 예의도 없이 다짜고짜 '영화를 촬영하는데 이런이런 공간이 필요하다. 혹시 주변으로 이 정도 가격에 오늘 몇시간만 빌릴수 있는 곳을 알아봐줄수 없느냐'라고 쏟아냈던것 같아요.

그 할아버지, 그러니까 김경민의 아버지가 저를 한참이나 쳐다보시더라고요. 아무말씀도 없으셨어요. 

그냥 쳐다만 보고 계셨어요.

'혹시 저 분도 내가 본인 아들과 닮았다고 생각하는걸까?' 생각하긴 했는데, 그 무뚝뚝하고 굳은 표정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아무말도 없이 갑자기 그 분이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말투도 조금 어눌하고 느리시더라고요.

두서군데 전화를 돌리시면서 잘 알아들을수 없는 몇 마디를 나누시더니 , 부동산 뒤로 50미터 정도 가면 원룸건물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보라고 하더군요. 말해두었다고요.

 

무슨 영화 촬영인데,라고 물을법하기도, 중계를 해준 일에 대해서 생색이라도 내실법한데..

아니면 아들과 닮았다는 얘기로(전 동의하지 않지만) 말문이라도 뗄 법 한데, 

정말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그렇게 가만히 쳐다보시다가, 전화 해주시고, 그렇게 장소를 찾아주셨어요.

가봤더니 섭외도 어렵지 않았고, 공간도 감독이 요청했던 그 분위기와 얼추 비슷한 곳이더라고요.

 

나름 급박하고, 해결이 안되면 골치아파질 일이었는데, 그 분 덕에 그렇게 쉽게 일이 풀렸습니다.

이상한 경험이었어요.

오래되고 먼지 가득한 복덕방, 그리고 그 안에 가득차있는 기괴한 복장의 김경민 사진들...

(김경민 닮았다는 얘기에 노이로제에 걸려있던 전, 누가 날 놀리나? 몰래카메라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한참 쳐다보던 그 아버지의 눈빛.

 

지금은 사라졌겠지요? 그 곳?

가끔씩 묘한 경험이라는 생각에 떠오르곤 합니다.  

 


 

님의 서명
얼지마.죽지마.부활할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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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1-09-29 01:07:50

자... 이제 본인 사진을 올려주세요.
DP 분들이 매의 눈으로 검증해주실 겁니다.

WR
2021-09-29 01:08:45
아냐야냐 김경민 아냐 ㅜㅜ
2021-09-29 01:13:04

묘한 경험이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ㅎ
근데, 진짜 김경민 아버지였을까요?
정황상 빼박이긴 하지만 너무 궁금

WR
2021-09-29 01:14:18

아버지가 아니고서야 김경민의 사진을 그렇게 어울리지 않게 부동산에 벽면 가득 걸어두시지 않으실것 같아서...설마 김경민 찐팬이었을까요?

2021-09-29 01:18:34

나가시면서 한번 슬쩍 물어보시지ㅠ_ㅠ
"예. 제가 애비입니다" 한마디만 들어도 시원하잖아요

WR
2021-09-29 01:35:05
2021-09-29 03:04:49

 간절히 원하면 하늘이 돕는다는게 사실이군요 

WR
2021-09-29 21:07:23

거기서 아버지를 상봉할줄이야!

5
2021-09-29 05:36:32

 '안녕하시렵니까'는 신동엽 아닌가요?

WR
2021-09-29 21:07:54

아 그런가요?

김경민도 그러지 않았어요? 저도 정확히 기억이...

2021-09-29 23:27:07

https://namu.wiki/w/%EA%B9%80%EA%B2%BD%EB%AF%BC(%EA%B0%9C%EA%B7%B8%EB%A7%A8)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귀염둥이 김경민이에요~"

4
2021-09-29 07:20:04

단편소설 읽은 느낌이네요. 재밋는 글 감사합니다.

WR
2021-09-29 21:08:32

감사합니다.

닮은 사람으로 오해해서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영화들은 많았던것 같은데..

2021-09-29 23:24:06

저도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소설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2021-09-29 07:23:52

글 작성자 님 평소 드레스코드 궁금합니다

WR
2021-09-29 21:09:02

전 엄청 수수한걸 좋아합니다 ㅋㅋ

김경민 너무 시러 정말 하나도 맞는게 없어

1
2021-09-29 09:11:31

김경민 나무위키 보니 '동대문구 휘경동 살던 시절' 이라는 말이 나오네요...

그 분 아버님이 맞을수도...

WR
2021-09-29 21:09:25

맞을것 같아요. 

그냥 그 부동산 공간이 김경민의 사랑으로 가득했어요.

2021-09-29 09:23:03

저도 고등학교 때 학교 행사같은 거 찍는 전속 사진사님이 김경식씨 아버지였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자꾸 누구 아냐로 말 붙이시고 아들 홍보하시던 기억 떠오릅니다. 

WR
2021-09-29 21:10:29

역시 맞나봅니다.

제가 뵈었을때는 말수도 없고, 원래 그러신 분처럼 보였는데, 원래는 그렇게 다니시면서 호객도 하시고 그러신분이셨군요.

아들을 정말 사랑하시는 분 같아요. 

2021-09-29 09:31:41

편의점 이전에 연쇄점 이라고 있었죠. 구멍가게 같은.

WR
2021-09-29 21:12:16

그런 느낌이었어요. 뭔가 시대가 한세대 이전의 느낌의..

2021-09-29 09:39:33

연예인 아들을 둬서 이런 촬영에 대한 이해가 좀 있으셨던듯

WR
2021-09-29 21:13:00

그럴것 같아요.

그리고 아들과 아들의 일에 대한 사랑도 지극하신것 같고..

2021-09-29 11:56:04

단편영화 한편 찍을 만한 스토리 인거 같습니다

WR
2021-09-29 21:14:06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어요. 마치 그 공간이 내방 인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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