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류근. 지리산에서 길을 잃고 적선자를 만났을 때
좀전에 제가 지리산 신선 적선자 이야기를 했더니 막 애인이 안 믿는 거였습니다. 아이고, 지리산 적선자를 안 믿다니요. 제가 대딩 댕기다 말고 더 이상 시도 안 되고 영어도 안 되고 독일어도 안 되고 그래서 지리산 갔었잖어요. 그때 제가 하도 외로워서 세석산장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이고,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는지 저는 이태리 로마에서도 잃지 않던 길을 다 잃고 지리산에서 호올로 길을 잃고요, 호올로 백일홍 나무 아래 그윽히 누워서 아아, 내게 당도할 죽음을 기다리면서 숨을 천천히 쉬고 있었어요. 그랬더니,
어떤 하얗고 파란 할아버지께서 별안간 날아오시더니,
분명히 날아오셨습니다. 얘야, 니는 많이 곤란해 보이는구나.
곤란해 보인다고요? 저는 그 죽음 직전의 괴로움에도 그 노인의 말씀이 참 좋았습니다. 제가, 곤란해 보이나요?
제가 아주 뭐 자빠져서 숨을 천천히 쉬고 있자 그 노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응, 니는 아주 곤란해 보이는구나. 그리고는 제 손을 천천히 잡으셨습니다. 이상하게도 다 죽어가던 제가, 벌떡 몸이 세워지는 것이었어요. 니는 아주 곤란하니까 이 할아버지가 옛날 얘기를 들려줄게.
나는 하필 1825년도에 태어났단다. 그때 진달래가 참 좋았다. 사람들도 참 좋았다. 다들 나라가 바뀔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나쁘게 바뀌었다. 나쁘게 바뀌는 걸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구나. 니는 참 곤란하게 생겨서 이제 그 인생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고는 제 이마를 서른 번쯤 쓰다듬으셨습니다. 할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땀에 젖은 대딩이 물어보자 참 물끄러미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적선자라고 부르지.
저는 혼자서 막 생각했습니다. 1825년도에 태어났으면 지금 도대체 몇살이신 건가요. 그런데 또 그 노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니는, 참 곤란하게 생겼구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류근 시인이 소싯적에 지리산에서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나 봅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을 적선자 즉 착한 일을 한 사람이라 하나 봅니다.
푸른 귀밑 머리에는 젊은 날의 근심이 어리네
외로운 달은 서로를 지키기를 원하니
원앙은 부러우나 신선은 부럽지 않네
글쓰기 |
오래전에 지리산에서 길을 잃었었습니다.
화엄사 지나 노고단 오르는 길이었던가
무슨 생각인지 골몰하다가 문득 여기가 어디인가 어디로 가야하나
적선자 도인은 아니고
땅 속에 조금 드러난 전깃줄 피복을 발견해서
어스름 저녁에야 길을 찾아 내려 왔었네요,
그때 그 황망함만 오래 기억에 남네요,
1825년이라... 지금 계시면 196세 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