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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오스만제국 최대의 패착 프루스전투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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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10-22 21:20:37

 

오스만제국이라고 했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스웨덴의 결정적인 패착이었고 러시아로서는 역사상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만약 스웨덴 카를 12세가 자존심을 약간만 굽혔다면, 오스만제국 대재상이 조금만 능력있었다면 러시아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고 세계역사도 달라졌을겁니다. 

러시아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1, 2위를 다투는 표트르대제와 예카트리나여제가 모두 사라졌을테니까요. 표트르대제가 푸르스전투에서 전사/처형되었다면 무능하고 소심한 알렉세이가 황위를 이어받았을테고 배후의 구세력이 모든 개혁을 취소시켰을겁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카를 10세부터 북유럽 강자로 성장했고 카를 12세에 이르러서는 폴란드 등을 장악하며 유럽 최강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카를 12세는 용병술은 전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전사왕이었지만 정치력은 바닥에 가까워서 스웨덴을 몰락시킵니다. 

스웨덴판 항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항우는 그래도 우미인과 사랑이라도 나눴지만 카를 12세는 아예 무관심했고 일생을 전장에서 보내다가 전사합니다. 

어릴 때부터 머리속에는 오로지 군대와 전쟁 밖에 없었는데, 그가 콧대를 조금만 낮췄다면 프랑스나 신성로마제국과 맞먹는 국력이 되었을겁니다. 왕인데도 가장 앞서서 적의 참호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였고 스웨덴군은 정신나간(?) 왕을 보호하기 위해 무조건 돌격해 들어가는 가장 무서운 군대였습니다. 


돈Don일대의 불라빈Bulavin 코사크반란 그리고 스웨덴군 침공 당시, 표트르는 술탄이 아조프Azov를 탈환하려고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는 투르크나 타타르포로를 절대로 잡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며 오스만제국을 자극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주재 러시아대사인 톨스토이Tolstoy는 오히려 강경책을 주장했다. 심지어 위협적으로 나가야 오스만을 묶어둘 수 있다고 했는데 그의 말이 맞았다. 

 

 

 

아조프는 러시아가 흑해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요충지였습니다. 

 

 

 


1709년 폴타바Poltava전투 당시, 오스만은 스웨덴 편을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함대가 보스포러스Bosphorus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콘스탄티노플 거리는 공포에 질려 문을 닫았다. 
폴타바에서 패전한 카를Charles 12세는 국경을 넘어 술탄에게 의지했다. 그리고 술탄은 뒤늦게 러시아에 3년동안 4번이나 선전포고를 했지만 말뿐이었다. 

 

 

 

근대 러시아의 운명을 결정지은 폴타바전투입니다. 당시 전력은 러시아군이 압도적이었지만 스웨덴군에게는 천재지휘관 카를이 있었죠. 그렇지만 카를이 이전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최전선에서 지휘할 수 없었고 지휘관들의 반목과 무능으로 유럽최정예 스웨덴군을 전멸시킵니다. 만약 카를은 앞에 늘어선 진지는 절대로 상대하지 말고 무조건 돌격해서 표트르본진으로 난입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그대로 따랐다면 스웨덴군의 대역전승이었습니다.  

러시아 특유의 국뽕만 빼면 상당히 잘 만든 폴타바전투 영상입니다. 큰 화면으로 소리높여 즐겨보세요. 

 

 


카를 12세가 부그Bug강을 넘어 오스만의 손님이 되었다. 왕과 코사크족장Hetman 마제파Mazeppa는 피신처를 찾았고 이슬람교의 가르침대로 아흐메드Ahmed 3세는 환영하며 보호를 약속했다. 지역 파샤Pasha가 강건너에서 배회하던 코사크패잔병을 학살하며 쫓아버리자 술탄은 실크천(목졸라 죽이라는 뜻)을 보내 파샤를 처형하려고 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술탄은 유수프 파샤와 긴급물품 마차를 보내 카를을 공식적으로 환영했다. 굶주렸던 스웨덴군은 수박, 양고기,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180km 남쪽 베사라비아Bessarabia 강변에 근사한 텐트를 마련하고 3년 동안 스웨덴군을 수용했다. 

 

 

 


카를은 그렇게 오래 머물 지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는 발부상이 호전 되는대로 폴란드로 돌아가서 크라쿠프Krassow와 슈타니슬라우스Stanislaus군을 지휘하려고 했다, 페레볼루츠나Perevoluchna에 남겨둔 레벤하웁트Lewenhaupt군도 폴란드로 불러들이기로 했다. 스톡홀름Stockholm왕정에게도 새로 병력을 징집해서 발트해 너머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렇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상이 빨리 낫지 않아 6주가 지나서야 간신히 말에 오를 수 있었다. 큰누나인 홀슈타인Holstein공녀 헤드비그 소피아Hedwig Sophia가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카를은 소문이라며 믿지 않다가 스웨덴의회의 위로편지를 받은 후에야 며칠 동안 눈물을 흘리며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여동생 율리카Ulrika에게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카를에게 운명을 걸었던 마제파족장이 더운 여름을 못견디고 9월에 세상을 떠났고 카를은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관을 직접 들었다. 표트르가 마제파를 넘겨주면 포로가 된 피페르Piper백작을 석방하겠다고 했는데도 카를은 제안을 거절했었다. 

카를에게는 세상이 완전히 자신을 버린 것같은 소식이 연달아 들어왔다. 레벤하웁트가 페레볼루츠나에서 항복했고, 멘슈코프Menshikov의 러시아군이 폴란드를 침공해 스웨덴군이 퇴각했으며, 아우구스트Augustus가 알트란슈타트Altranstadt조약을 깨고 폴란드로 들어와 왕위에 올랐고, 덴마크군이 스웨덴을 침공했다.
표트르의 러시아군은 발트해 일대를 진격하며 리가Riga, 페르나우Pernau, 레발Reval, 비보르크Vyborg 등의 전략요충지를 점령했다. 

 

 

 

강건왕이라는 별칭이 붙었지만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서 열심히 도망다니고 정력왕이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여자를 무지하게 밝힌 아우구스트 2세입니다. 

카를은 왜 귀국하지 않았을까? 그는 스톡홀름에서 2,000km 멀리 있었고 폴란드를 거치는 길은 러시아와 폴란드군이 가로 막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전염병 때문에 국경을 봉쇄했다. 루이 14세는 그를 귀국시켜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의 배후를 노릴 동맹으로 삼으려고 선박을 제공한다고 했지만 해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의 도움을 받으면 스페인왕위계승전쟁에서 어느 한쪽을 지원하느라 자신의 전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카를은 슬픔과 충격에서 벗어나자 차라리 오스만에 머물면서 기회를 보기로 했다. 술탄을 설득해 전쟁을 벌이고 러시아군을 격파하면 모든 손실을 한 번에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1709년 가을부터 카를과 측근은 콘스틴타노플의 복잡한 정치에 뛰어들어 러시아를 노렸다. 

쉽지 않았다. 오스만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이미 폴타바전투에 대해 알고 있었고 러시아함대가 언제 보스포러스에 나타날 지가 걱정거리였다. 술탄의 고문은 표트르가 원하는대로 해주고 스웨덴 골치덩이를 추방하자고 주장했다. ‘스웨덴왕은 숭고한 문Sublime Porte(대재상의 행정부)의 어깨에 얹어진 무거운 짐이었다.’ 
반대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크림반도 루소포베Russophobe칸인 데블레트 게레이Devlet Gerey는 1700년 조약 때문에 러시아로부터 공물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막대한 부를 안겨주던 우크라이나를 더 이상 약탈할 수도 없었다. 
아흐메드술탄의 어머니는 카를 12세를 전설적인 전사왕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사자(카를)가 차르를 잡아먹을 수 있다고 믿었다. 

 

 

 

크림반도 일대를 통치한 크림 칸국은 우크라이나 일대를 마음대로 약탈하며 오스만제국에 노예 등을 공물로 바쳤습니다. 

오스만제국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스웨덴군도 참전해야 승전 후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오스만군이 전쟁준비를 시작하자, 카를은 스톡홀름에 대규모 병력을 포메라니아Pomerania에 배치해서 바로 참전할 수 있게 하라고 재촉했다. 
스톡홀름의회는 경악했다. 덴마크군이 트라벤달Travendal조약을 위반하고 스웨덴 남부를 침공했다. 본토방어가 우선인데 이미 패전한 전쟁을 위해 폴란드로 병력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오스만군은 스웨덴군없이 행군을 시작했고 카를은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었다. 오스만군 지휘관과 예니체리는 카를을 전사왕으로 추앙했고 오스만제국 내에서 가장 능력있는 지휘관이었지만 오스만의 동맹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역할도 받지 못했다. 
그 덕분에 표트르는 흙속에 묻힐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표트르는 오스만제국에 있는 톨스토이에게 카를의 항복을 받아내거나 추방시키라고 명령했다. 시간이 지나도 소용없자 콘스탄티노플과 아드리아노플(현재의 에디른Edirne)에 직접 압력을 행사했다. 1710년 10월 10일까지 답변하라고 요구했고 오스만제국은 신의 대리인의 존엄을 무시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칸, 카를, 술탄의 어머니와 프랑스의 무게까지 더해져서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11월 21일, 오스만제국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톨스토이는 반나체로 노쇠한 말을 타고 거리를 끌려 다니다가 투옥되었다. 
대재상 메헤메트 발타지Mehemet Baltadji가 총사령관이 되었는데 군사작전을 해본 경험이 없었고 재능도 부족했다. 그는 공세를 선택했다. 겨울에 칸의 타타르기병이 크림반도에서 북쪽으로 진격해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족을 공격하고 포로와 가축을 대거 노획하기로 했다. 오스만 주력은 봄에 아드리아노플을 출발해 북서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대포와 군수품은 바다로 수송하다가 다뉴브강 이자체아Isaccea에서 본대와 합류하기로 했다. 타타르기병까지 합류하면 200,000명이 이르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1월, 타타르가 드니에페르Dnieper 중류와 돈Don 상류 중간 지역을 약탈하다가 코사크군의 강한 반격을 받고 아무런 성과없이 그대로 후퇴했다. 2월 말, 전쟁을 알리는 깃발을 앞세우고 예니체리 20,000명이 북쪽으로 향했다. 
아주 천천히 진군해 6월 초가 되어서야 다뉴브강에 도착했다. 대포와 군수품이 예정대로 도착했고 전군이 강 동쪽으로 도강했다. 
다뉴브강에 도착하자, 대재상은 술탄의 궁전에 있는 카를에게 손님으로 함께 할 것을 권했다. 카를은 자신이 지휘하지 않는 군대의 전투를 참관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고 더구나 낮은 신분인 재상의 손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두고 후회할 오판이었다. 

 

 

 

타타르기병과 격전을 벌이는 코사크족입니다. 

표트르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폴타바전투 승리에 기세가 올라 기꺼이 오스만군의 선전포고를 받아들이면서 1711년 프루스Pruth전투가 벌어졌다. 폴란드의 러시아 용기병연대 10개를 오스만국경으로 보냈다. 발트해의 쉐레메테프Sheremetev에게는 보병연대 22개를 이끌고 우크라이나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중과세를 거둬 군수품을 조달했다. 
1711년 2월 25일, 크레믈린Kremlin 대성당광장에는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와 세묜노프스키Semyonovsky근위대가 집결했다. 표트르는 기독교의 적을 상대로 성전을 선포하며 차르가 직접 참전했고 심지어 황후인 예카트리나Catherine도 동반했다. 
그렇지만 바로 병에 걸렸고 하루 종일 발작을 하다가 간신히 회복했다. 표트르는 낙승을 확신했다. 아프락신Apraxin에게 아조프와 타곤로그Tagonrog 등의 돈강 하류지역을 위임하고 자신은 아들 알렉세이Alexis과 볼펜뷔텔Wolfenbuttel의 샤를로테Charlotte의 결혼계약을 서두를 정도였다. 
그리고 폴란드의 아우구스트가 스웨덴령의 슈트랄순트Stralsund를 점령할 수 있도록 러시아군 12,000명과 100,000루블을 약속했다. 

 

 

 

표트르가 불우한 어린시절에 놀이부대를 만들고 전쟁놀이를 했는데, 그 놀이부대가 레오브라젠스키와 세묜노프스키연대로 성장했고 근대 러시아의 최정예부대가 되었습니다. 

표트르의 전쟁계획은 무모할 정도로 대담했다. 우크라이나지역은 스웨덴군 침공과 마제파의 배반으로 황폐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야 했다. 다뉴브강 하류까지 진격해 불가리아를 관통하고 오스만의 제2 수도인 아드리아노플을 위협할 생각이었다. 병력은 보병 40,000명에 기병 14,000명으로 오스만군에 비해 지나치게 적었다. 
그렇지만 러시아국경을 맞댄 기독교지역에 해방자로 들어서면 왈라키아Walachia 30,000명과 몰다비아Modavia 10,000명이 합류해 총병력은 94,000명이 될 것으로 계산했다. 
막연한 계산이 아니었다. 발칸반도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인 대표가 계속 찾아와 차르의 지원을 간청했었다. 1698년에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아조프를 점령하자 발칸반도의 동방정교인이 독립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을 보내주면 지역군대와 군수품이 합류할 뿐만 아니라 전 지역이 들고 일어나겠다고 약속했다. 1704~1710년 동안 세르비아 지도자 4명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동방정교 표트르차르 외에는 다른 왕을 섬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시대가 다르지만 대략 이런 위치입니다.

표트르는 스웨덴군의 처리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오스만을 자극시키고 싶지 않았고 비밀리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폴타바승전 후에는 노골적으로 발칸반도의 봉기를 자극했고 1711년 봄에 그 약속을 지킬 시간이 되었다. 
발칸기독교인의 해방자를 자처하며 가톨릭과 동방정교인은 모두 오스만에 저항하라고 외쳤다. 
‘선지자라는 모하메드는 원래의 영토인 아라비아 사막과 스텝으로 쫓겨갈 것이다’라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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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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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2 22:10:09

2천년의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

2021-10-23 08:58:59

좋은 글 잘봤습니다 ^^

2021-10-27 00:22:16

시간이 없어서 손만 빨다가 이제 정주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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