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글] 플레이 스테이션 탄생의 이야기
마소의 액티블 인수로 핫한 가운데 이슈에서 비껴가서 전부터 써볼까 생각했던 플레이 스테이션 탄생의 이야기를 한번 써볼까 합니다. 다소 긴 글이 될테지만 재밌게 읽어주세요
(플레이 스테이션2를 소개하는 쿠타리기 켄)
1. 플레이 스테이션의 뿌리는 닌텐도
플레이 스테이션의 개발 비사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이 사람을 빼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바로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SCEI)의 전 회장이자 이제는 소니를 떠난 사람 바로 쿠타리기 켄이죠.
이 사람은 플레이 스테이션 아니 소니가 게임산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이자 플레이 스테이션의 아버지이고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게임 콘솔 업계의 판도는 매우 다른 형태를 띄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쿠타라기 켄이 게임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80년대 초반 그당시 모든 아이들이 그러했듯이 그의 자녀들도 닌텐도 패미컴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가 선물한 패미컴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80년대 중반 소니 정보처리 연구소 소속이었던 그는 방송국에 방문 했다가 당시로서는 최첨단 장비였던 시스템 G를 접하게 됩니다. 이 장비는 방송국에서 자막이나 로고 간단한 그림을 실시간 3D로 만들어 내는 장비였죠. 그는 이 장비를 보고 매우 충격을 받았으며 동시에 이러한 기술이 만들어낼 미래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게임이었죠. 물론 당시로서는 초고가의 워크 스테이션에서나 가능한 기술이었기에 게임에 접목한다는 발상은 망상에 가까웠지만 그는 무어의 법칙(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은 2년마다 2배로 늘어난다는 법칙)을 떠올리며 10년쯤 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쿠타라기가 게임 업계와 직접적으로 인연을 맺게 되는 일이 시작됩니다.
바로 그가 게임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 패미컴의 주변 기기였던 디스크 시스템 때문이었죠
플로피 디스크에 게임을 수록해서 롬 카트리지를 대신할수 있게 만든 이 주변기기 개발 과정에
소니도 참가를 하게 되었고 여기서 쿠타라기는 소니가 개발한 2인치 디스크를 홍보했으나
최종적으로 선택된건 미쓰미 전기의 2.8인치 퀵 디스크였습니다.
비록 선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닌텐도의 여러 사람과 인연을 맺고 의견을 교환하는등
본격적으로 게임업계에 대한 지식을 쌓을수 있었고 이는 후에 슈퍼패미컴 개발 과정에서
소니의 SPC 700이라는 칩이 사운드 칩셋으로 선정되는 성과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사실 쿠타라기는 이때 이미 자신이 꿈꾸는 콘솔 기기에 대한 비전을 그려가고 있었습니다.
패미컴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80년 초중반 이미 시작되었던 슈퍼패미컴 개발 과정에 협력 업체로 참가한
쿠타라기는 차세대 패미컴의 매체는 CD롬이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어필했죠.
그러나 후에 밝혀진 닌텐도 회장 야마우치의 CD롬 이라는 매체에 대한 불신은 뒤로 하고라도 어차피 그는 외부인에 불과 했습니다. 거기다 당시로서는 CD롬을 주 매체로 삼는다는 생각은 너무나 이른 발상이었죠. 가정용 PC에서 조차 대부분 5.25인치 디스켓을 쓰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얼마안가 망상에 가깝게 여겨졌던 CD롬을 활용한 게임기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로 NEC가 발매한 게임기인 pc 엔진의 주변기기로 cd롬이 발매 된 것이었습니다.
다량의 동영상이나 노래 음성등을 수록해서 한층 더 풍부한 게임 플레이를 가능하게 했던 이 기기로
인해 CD롬 이라는 매체의 가능성이 부각 되었고 닌텐도의 라이벌이었던 세가 역시 메가 드라이브의
주변기기로 메가 CD의 개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에 슈퍼패미컴의 개발이 막바지를 달려가던 무렵 쿠타라기는 다시 한번 CD롬을 사용하자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이미 개발이 끝나가던 상황에 이제 와서 먹힐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닌텐도는 소니에게 슈퍼패미컴용 외장 CD롬 개발에 대한 권한과 그것을 활용해 소니만의 일체형 기기를 만드는 것을 승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당시 소니에서도 별로 탐탁치 않아 하던 사업이었습니다.
애초에 게임 회사가 아닌 가전 회사 전자 회사인 소니 입장에서 게임기는 별로 관심 없는 영역이었고 쿠타라기 켄은 제멋대로 날뛰는 이단아 트러블 메이커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사업을 추진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소니의 회장이었던 오가 노리오가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소니에서는 이건 게임 사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자제품을 만드는 사업이라고 못을 박으며 사업을 추진할수는 있게 되었죠.
2. 닌텐도와의 결별 그리고 소니 플레이 스테이션의 출항
(4억원이 넘는 가격에 팔린 소니 닌텐도 스테이션. 당시 개발에 참여한 누군가의 집에서 잠자고 있었다고. 한 수집가가 120만 달러에 팔라고 제안한 것을 거부하고 경매에 부쳤다는 슬픈 이야기가 )
그렇게 닌텐도 스테이션(?)의 프로토타입까지 개발을 한 1991년5월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닌텐도가 소니와의 CD롬 개발 사업 제휴를 철회한다는 소식이었죠.
이는 미국에서 열리는 CES쇼에서 제품 공개를 불과 며칠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이에 놀란 쿠타리기와 당시 홍보이사였던 마루야마 시게오는 미국으로 날아가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의 사장 아라카와를 만났으나 여기서 돌아온 답변은 소니와의 협력은 유효하지만 CD롬 관련 사업은 다른 회사와 하기로 했다는 말뿐이었죠.
그래도 설마하는 심정으로 CES에서 제품 공개를 결정한 소니였지만 닌텐도는 바로 다음날 필립스와 제휴해 슈퍼패미컴용 CD롬을 개발한다는 발표를 하며 소니의 통수를 제대로 갈겨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쿠타라기 켄의 입지는 상당히 좁아질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술한대로 당시 회장이었던 오가 노리오의 눈에 든 사람이었고 오가 노리오는 그를 잠시 소동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산하의 뉴 미디어 사업부로 보내게 됩니다.
닌텐도가 어째서 소니와의 제휴를 철회해 버렸는지에 대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한때는 닌텐도가 팩 제조로 얻는 막대한 수익을 포기하기 싫었다 라는 말이 정설처럼 돌기도 했지만 이후 바로 필립스와의 제휴를 선언하고 한동안 개발 했다는걸 보면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닌거 같고 애초에 하드웨어 제조만 하기로 했던 소니가 본격적으로 게임 개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닌텐도의 야마우치 사장이 분노해서 라거나(실제로 소니는 CD롬 발매에 맞춰서 함게 판매할 게임 몇개를 준비중이었습니다.) 좌충우돌 무대포로 일을 밀어 붙이는 쿠타리기의 스타일이 역시 만만찮은 꼰대력을 자랑하는 야마우치의 심기를 건드렸다거나 혹은 소니내에서 쿠타라기를 고깝게 보던 일부 사람들이 이당시 이미 게임 사업에 제대로 참전할 야심을 보이던 쿠타라기의 속내를 닌텐도에 찔렀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었지만 어느것도 확실한건 아닙니다.
어쨌거나 겉으로 보기에는 좌천의 형식이었지만 오히려 임원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쿠타리기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소니만의 콘솔을 개발할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쿠타라기는 좌충우돌 날뛰고 그의 부하 직원들이 사고의 뒷수습을 하느라 진짬을 뺐다는게 이당시 상황이었죠.
1992년 닌텐와의 제휴는 완전히 깨져버리고 소니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에 들어간 비용 약 150억원 가량을 손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골치아픈 사업을 정리해 버릴려는 최종회의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쿠타라기가 나타납니다. 쿠타라기는 "이대로 물러나면 세간에서 우리를 조롱하게 될거다"라며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애초에 게임 사업을 따위로 생각하던 임원들은 '화투나 만들어 팔던 회사에 개망신 당하고도 정신을 못차린거냐?'며 사업 철수를 주장했지만 쿠타라기는 '그런 닌텐도 따위에게 망신 당하고 끝내도 좋은거냐?'라고 되받아 칩니다. 그리고 결국 회장인 오가 노리오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독자노선으로 할수 있을지 증명해봐라 DO IT'이라고 선언하며 쿠타라기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3. 계속되는 난항
이렇게 사업에 대한 승인을 받은 쿠타라기는 그가 오래전 부터 꿈꿔오던 게임기의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매체는 당연히 CD롬 주프로세서는 32비트 그리고 무엇보다 3D를 원활히 구동할수 있는 그래픽을 탑재한 그런 기기였죠.
그러나 전자회사로는 일류였던 소니였지만 게임기를 개발해 본적은 없었던 소니였기에 쿠타라기는 함께 협력할 상대를 물색하게 되니 바로 세가였습니다.
당시 세가도 메가 드라이브의 뒤를 잇는 차세대 게임기 개발을 시작한 상태였으나 메가 드라이브(북미판은 제네시스)의 흥행을 주도한 세가 오브 아메리카에서는 현재 개발중인 기기가 너무나 난해한 개발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이에 소니가 적절한 제안을 해오자 이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소니가 한 제안은 기기를 공동개발 발매하고 세가의 게임에서 얻는 수익은 세가가 소니의 게임에서 얻는 수익은 소니가 가겨간다 였는데 이는 게임회사로서는 압도적인 ip를 보유한 세가측에게는 리스크는 줄이고 이득은 얻을수 있는 매우 좋은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세가 본사에서는 '소니는 게임기도 만들어 본적도 없고 게임도 모른다. 우리가 왜 그들과 협업해야 하나?' 라는 말로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는데 이는 사실 메가 드라이브가 일본에서는 닌텐도에 참패하고 북미에서는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자칫 주도권을 북미 세가측에 넘겨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실무개발진들간의 회의에서 역시 2d를 고집하던 세가와 3d를 주장하던 소니측의 의견이 갈리면서 결국 협업은 무산되고 말았죠.
결국 소니는 완전 독자 노선으로 변경 게임기에 탑재할 메인 프로세서 개발과 생산을 위해 LSI 로직스와 계약을 맺고 그래픽을 담당할 칩셋은 도시바와 함께 개발 생산을 결정합니다. 선주문한 100만대 분량의 칩까지 들어간 비용은 1400억원 이상 이제는 더이상 후퇴가 불가능한 상황까지 가게 된거죠.
그러나 난관은 계속 됩니다.
게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됐지만 문제는 소프트 였습니다.
소니는 세가도 닌텐도도 아니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만드는 소프트 만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는 불가능했죠. 그래서 서드파티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게임 회사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들 절대 다수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웠죠. 그도 그럴것이 몇몇 게임의 개발 유통을 해본 적은 있으나 본격적으로 게임 사업을 해본적 없는 소니가 자체적으로 게임기를 개발한다는 것도 황당한 일인데 그 게임기가 3D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3D는 이제 막 업소용의 고가 머신이나 헐리웃의 영화 산업에서나 겨우 쓰이기 시작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가정용으로 만든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렸죠.
무엇보다 개발자들도 3D에 대한 이해도나 경험이 절대 부족했습니다. 태반은 손도 대본적이 없는 상황인데 게임기가 몇대나 팔릴지도 모르는 회사를 믿고 개발을 하라니 얼척 없는 소리로 들린 겁니다.
'아 네 열심히 해보세요' ' 100만대쯤 팔리면 그때 생각해보죠' '200만대쯤 보급되면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이런 냉대가 계속되던 와중에 쿠타라기는 의외의 지원군을 얻게 됩니다. 그건 바로 게임업계의 중견인 남코 였습니다.
(릿지 레이서1 아케이드 1993년작)
남코는 1993년 릿지 레이서1을 아케이드용으로 발매 하면서 당시 일본의 아니 전세계에서도 제대로 된 3D 게임을 개발해본 몇 안되는 회사였습니다.
문제는 릿지 레이서용으로 개발한 시스템22라는 기판이 너무나 고가여서 보급에 지장이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남코는 닌텐도의 갑질로 인해 이시기 자체 콘솔을 개발해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소니가 가져온 새로운 게임기는 비록 시스템22에 비하면 성능이 떨어지지만 계획대로만 나온다면 훨씬 저가에 게임을 개발하고 보급할수 있는 스펙이었죠.
이미 대세는 3D다 라는 것을 알아챈 남코였고 설사 게임기 자체가 실패한다고 해도 이를 기반으로한 기판을 제작해 아케이드에 보급한다면 남코로서는 손해볼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남코의 이 생각은 적중해 플레이 스테이션을 기반으로 한 시스템11 기판은 후에 철권 시리즈 소울 엣지와 칼리버 시리즈등 명작을 탄생시키며 플레이 스테이션과 아케이드 양쪽을 견인하는 성과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어쨌건 이건 후에 일이고 서드 파티 확보에 계속된 실패를 맛본 소니의 게임 사업이 큰 위기에 봉착한건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대 이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키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것도 아주 엉뚱한 곳에서요
4. 세가가 꽃다발을 건내다
1993년 8월에 열린 아케이드 게임쇼에서 게임업계의 역사를 바꾸놓은 게임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가의 AM2 에서 개발한 버츄어 파이터 였죠.
지금 보면 애개 뭐야? 하겠지만 거의 30년 전의 일입니다. 불과 두달전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이
개봉되며 전세계에 컬쳐 쇼크를 준 해였죠.
바로 그때 폴리곤으로 만들어진 3D 캐릭터가 실제 무술 동작과 유사한 움직임을 보이며 격투를 하는 이 게임이 준 충격은 실로 엄청 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넋을 잃고 게임을 지켜봤으며 어떤 사람들은 사실 이미 만들어진 화면을 틀기만 하는거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아케이드 센터에 처음 등장한 버파1을 보고 넋 나간듯 몇시간을 그냥 지켜 보기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대 이 게임을 본 업계 관계자들은 곧 어느 회사를 떠올립니다.
바로 얼마전에 자체적으로 3D 구현이 가능한 황당한 게임기를 만든다며 게임을 개발하자고 찾아온 소니였죠. 이들은 곧 소니로 달려 갑니다. '당신들이 했던 그 소리 그거 진짜 가능한 겁니까?'
그렇게 몰려든 게임업계 관계자들에게 구타라기는 마치 이때를 위해 준비했다는 듯 비장의 카드를 꺼냅니다.
(ps1 테크 데모)
바로 실시간으로 구현되는 ps1의 테크데모였죠.
쥬라기 공원의 엄청난 이슈를 노린듯한 티렉스가 움직이는 실시간 테크 데모는 수많은 개발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충분했습니다.
이런 화면이 워크 스테이션이 아닌 고작 가정용 게임기에서 구현 가능하다니(물론 테크 데모죠 데모)
이미 마음이 흔들린 수많은 게임사 관계자들에게 구타라기는 준비한 떡밥을 연이어 뿌립니다.
1. 소니가 제시한 ps1용 개발킷의 가격은 150만엔 정도였는데 이는 동시기의 새턴 보다 저렴한건 물론이고 한세대 이전의 슈퍼패미콤용 개발킷 보다 월등히 저렴했습니다. 심지어 이후 발매한 닌텐도64용 개발킷은 거의 억대를 호가할 정도였으니 개발에 들어가는 초기 비용의 문턱을 확 낮춘거죠.
2.아직 낯선 3d 게임 개발에 대한 기술지원을 위해 방대한 라이브러리를 제공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했습니다. 이는 개발 난이도를 많이 낮추는 효과를 낳으면서 후에 캐릭터를 한발 움직이게 하는 것도 고역이라는 평가를 받은 닌텐도64와 그보다 더 악명 높았던 새턴의 개발 환경과 비교되며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회사들이 개발에 참여할수 있게 해주었죠
3.당시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닌텐도와 비교해 게임 제작과 라이센스 비용을 3분의1 이하로 낮추었습니다. 슈퍼패미컴은 게임팩 제조와 라이센스 비용을 합쳐 최소 3000엔이라는 비용이 발생했고 이는 후기로 갈수록 게임 가격이 급상승해 기본 9800엔에 만엔도 넘어가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데 비해 상대적으로 소비자들의 접근을 유리하게 하고 게임사의 이익도 보전해 주는 역할을 했죠.
결국 버츄어 파이터1이 게임업계에 일으킨 커다란 충격은 아이러니 하게도 소니가 그 최대 수혜자가 되버리며 단숨에 200개가 넘는 서드 파티를 확보하게 됩니다.
버파1의 흥행에 웃고 있던 세가는 뒤늦게야 이런 상황을 파악했지만 이미 새턴의 개발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고 이제 와서 플레이 스테이션 처럼 3D 중심으로 노선을 갈아탄다는 선택은 불가능 했습니다.
이에 차선책으로 세가는 폴리곤을 소프트웨어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메인 프로세서인 SH-2와 그래픽 프로세서를 하나씩 더 넣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제조 단가의 상승을 불러왔고 소니가 플레이 스테이션을 39800엔에 발매하겠다고 발표하자 원래 49800엔에 발매 하기로 한 새턴을 발매 프로모션이라는 이름으로 5000엔 할인해서 판매했고 이는 팔수록 손해나는 구조를 만들어 세가의 재정 악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두개의 메인 프로세서와 두개의 그래픽 프로세서를 탑재하면서 극악의 개발 난이도를 가지게 되었고 세가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던 AM2연구소의 스즈키 유 마저 새턴의 성능을 제대로 끌어낼 개발자는 100명의1명도 있을가 말까다 라는 말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렇게 칩셋을 우겨넣은 새턴은 스펙상으로는 2D 3D 모두 플레이 스테이션을 앞서는 성능을 가졌으나 그 성능을 이끌어낼 개발자가 없었던 거죠.
2D 성능은 원래 새턴의 강점이었고 이는 플레이 스테이션과 새턴에 이식된 2D 아케이드 게임을 비교해 보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었지만 문제는 대세가 3D로 전환되는 시점에 어떤 발버둥을 쳐도 플레이 스테이션의 3D 성능을 넘어서는건 불가능하게 되며 주도권을 완전히 소니에 넘겨주게 되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새턴과 플레이 스테이션 발매 초기는 자사의 강력한 아케이드 게임 이식을 기반으로 한 세가의 우세였지만 서서히 소니의 서드파티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게 되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고 이는 결국 새턴의 완패로 끝나게 되버리고 맙니다
5.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어준 닌텐도
세가가 만들어준 바람을 타고 이슈와 서드파티 두마리를 동시에 확보한 플레이 스테이션은 마침내 1994년 11월 발매했고 생각외의 흥행을 거둡니다.
비록 100만대 200만대 선점은 모두 세가의 몫이었지만 발매 당일 출하한 30만대 전량을 완판시키며 그때까지만 해도 소니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 진출에 대해 회의적이던 언론도 그제서야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죠.
그러나 문제는 역시 소프트 였습니다.
뒤늦게 서드파티들이 가세하긴 했지만 발매 초기에 충분한 소프트를 공급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소니는 아크 더 래드, 와일드 암즈 등 호평받은 RPG 게임을 발매하고 남코는 릿지 레이서1을 이식했지만 아직은 소프트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발매 초기인 1995년 2월말부터 4월초까지 약 40일 동안 단 한개의 게임도 발매하지 못한 암흑의 시기까지 있을 정도였죠.
이에 소니는 발매 1년도 되지않은 1995년 7월 1만엔 인하라는 파격적인 가격을 선보였고 서서히 소프트들도 발매궤도에 오르며 조금식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1996년 2월 파격적인 소식이 날아듭니다. 바로 스퀘어의 플레이 스테이션 이적이었죠.
스퀘어는 닌텐도 자신을 제외하면 에닉스와 더불어 닌텐도 진영을 떠받치던 양날개 같은 존재였죠.
그런대 어쩌다가 스퀘어가 닌텐도와 결별을 하게 된걸까요?
이는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94년 4월 슈퍼패미콤으로 파이널 판타지6를 발매한 메인 디렉터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곧장 7편의
개발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당시 스퀘어는 파이널 판타지에 버금가는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기 위한 초대형 프로젝트를 진행중이었고 이로 인해 파이널 판타지 제작팀의 대부분이 빠져나가며 개발팀에 커다란 공백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오게 된 게임이 바로 크로노 트리거 였습니다
(지금도 북미 유저들 사이에 최고의 JRPG로 꼽히는 크로노 트리거)
크로노 트리거는 드래곤 퀘스트의 메인 디렉터 호리이 유지와 파이널 판타지의 메인 디렉터 사카구치 히로노부가 공동 제작하고 토리야마 아키라가 일러스트를 담당한다고 홍보되긴 했으나 호리이 유지는 원안을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사실상 이름만 빌려준 상황이었죠. 어디까지나 홍보를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시간의 공백을 가지게 된 사카구치는 전부터 그가 생각해온 야심을 실행할 때가 되었다고 느낍니다. 그건 바로 영화와 같은 비쥬얼 연출을 보여줄수 있는 게임이었죠.
(파이널 판타지6의 오프닝은 당시 슈퍼패미컴의 한계를 시험하는 비쥬얼을 보여줬습니다)
(이제는 전설이 된 파판6의 오페라 씬)
사카구치는 이미 파판6의 오프닝이나 그 유명한 오페라 씬을 통해 그 가능성을 시험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거 슈퍼패미컴이 아닌 차세대 기기에서 그걸 보여줄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죠. 여기에 시나리오 작가인 키타세 요시노리 역시 시대의 대세는 3D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도태되고 말거라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닌텐도가 개발하는 차세대 기기가 여전히 롬 카트리지를 사용하겠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스퀘어와 닌텐도의 관계는 단순히 서드파티의 관계를 넘어서 사실상 세컨 파티나 다름 없었습니다.
닌텐도는 스퀘어에 개발 자금을 투자 하거나 빌려줬고 스퀘어는 파이널 판타지를 시작으로 수많은 히트작을 오직 닌텐도 기기로만 발매하고 있었습니다.
파판3의 발매이후 개발하던 패미컴용 파판의 차기작이 완성을 80%를 넘긴 시점에서 닌텐도의 요청으로 개발을 전면 폐기하고 슈퍼패미컴용 파판4만 발매하게 된 일도 있었죠.
사카구치는 야마우치 회장까지 만나서 차세대 기기의 미디어는 CD롬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야마우치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사카구치는 파판 차기작의 기술시험을 위한 데모를 만들어 닌텐도64의 개발킷으로 구동을 했으나 롬 카트리지의 용량으로는 불가능 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설상가상 야마우치 회장이 닌텐도64 발매후 추가하겠다고 한 대용량 주변기기의 정체 역시 롬팩처럼 64메가의 한계를 가진 64DD라는 기기란걸 알게 된 사카구치는 결국 자신이 만들고 싶은 새로운 파판을 구현할수 있는 유일한 기기였던 플레이 스테이션으로의 전격 이적을 결정하게 됩니다.
뜻밖의 대어가 자기 진영으로 오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소니는 반색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당시 닌텐도는 새로운 파판의 개발을 위한 자금을 스퀘어에 빌려주고 있었는데 이 돈을 전부 소니가 떠안겠다고 하는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죠.
여기 까지는 그래도 흔히 있을수 있는 일이었고 야마우치 회장도 아쉽지만 잘해 보라는 격려를 해주었다고 합니다.(사실 당시만 해도 야마우치 회장은 소니를 경쟁사 취급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퀘어의 임원 일부가 언론에 닌텐도64는 글러먹은 기기다라고 험담을 했다는 사실을 전해받은 야마우치 회장은 격분했고 다시는 스퀘어의 게임을 닌텐도 기기에 발매 못하게 해라 아니 아예 스퀘어 직원은 닌텐도에 발도 들일수 없다라고 선언해 버립니다. 이렇게 닌텐도와 스퀘어의 밀월 관계는 최악의 파국을 맞이했죠.
하지만 그런 내부 사정과는 별개로 스퀘어의 플레이 스테이션 이적은 시장과 유저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됩니다. 닌텐도를 대표하던 RPG 게임인 파판을 이제는 플레이 스테이션으로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수많은 유저들이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옮겨가기 충분한 동기였고 더불어 시장의 지배자 닌텐도 아래에서 숨죽이며 눈치를 보던 여러 개발사들까지 잇달아 플레이 스테이션의 서드 파티로 참여를 시작하게 된거죠. 거기에 될놈될 이라고 스퀘어 이적 선언이 있은 불과 1개월 뒤인 1996년 3월 정말 누구도 생각못한 뜻밖의 게임이 대박을 치게 됩니다.
(쌈마이 티가 팍팍 나는 바이오 하자드1편의 오프닝)
캡콤조차 이런 게임이 팔리겠어? 그냥 기술 개발 한걸로 만족하자는 심정으로 발매한 바이오 하자드1이 뜻밖의 대박을 치며 3D를 강조한 플레이 스테이션이 다시금 주목받았고 여기에 얼마안가 소니는 1만엔 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인하를 한지 얼마안가 연말까지 연이어 가격인하를 하며 닌텐도64가 발매한 1996년 연말에는 이미 닌텐도64보다 더 낮은 가격에 시장에 기기를 공급하였고 이는 플레이 스테이션이 닌텐도64를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스퀘어의 이적이나 콘솔 가격 경쟁의 승리가 플레이 스테이션이 승리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닌텐도는 패미컴 시절부터 제작사들에게 여러가지 불합리한 조건을 강요하기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대표적으로 팩 제조와 라이센스 비용을 합쳐 높은 금액을 책정해 두고 이를 사전에 완납 해야만 게임팩 제조에 들어가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패미컴 후반기에 가면 3000엔에 달했다고 합니다.
즉 10만개의 게임을 발매하기 위해서는 3억엔 이라는 금액을 사전에 닌텐도에 입금해야만 게임을 발매할수 있었던거죠. 이같은 정책은 대형 개발사라면 모를까 항상 자금에 쪼달리는 중소 개발사들에게는 쉽게 감당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제로 금리를 향해 가는 시대라고 하지만 80년대 금리가 어땠는지 생각해보면 은행대출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조차 쉽게 할수 있는게 아니었죠.
이는 필연적으로 게임 소프트 가격의 인상으로 이어졌고 패미컴 후반기인 80년대 말에 이미 8000엔이 넘는 게임이 나왔으며 슈퍼 패미컴 시절 부터는 10000엔이 넘는 게임이 나오는것도 더이상 놀랄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게임 가격의 인상은 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부담이 되었고 제작사들 입장에서도 게임 소프트 판매량에 영향을 주는 결코 반길 상황이 아니었죠.
거기에 이렇게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게임을 발매해도 게임 판매후 수익을 정산 받기 까지 최소 6개월이 걸렸으며 설령 비용을 감당할수 있다고 해도 생산물량을 정하는 것 조차 제작사의 맘대로 할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닌텐도 유통 갑질의 상징인 '초심회'라는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초심회는 대형 게임 유통업체들의 연합체로 우리로 치면 총판 모임 같은것이었는데 닌텐도는 이 초심회에 막대한 실권을 쥐어 주고 유통의 전부를 책임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초심회는 이 지위를 이용해 소매점은 물론 개발사에도 갑질을 일삼았는데 대표적으로 A라는 게임사에서 우리가 야심차게 개발한 이 게임은 반드시 성공한다 자금도 준비 되었으니 50만개 발매를 원한다고 해도 초심회에서 '에이 니네 게임 재미없어 그 정도는 아니야 30만개만 찍어' 라고 하면 그렇게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CD롬이 아닌 롬팩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게임이 잘 팔려 추가 물량이 필요하다고 해도 실제 생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겨우겨우 수개월 후 추가물량을 확보해서 출하해도 이미 중고가 유통되며 시장이 잠식되어 원하는 만큼의 판매를 할수가 없었던 겁니다.
거기다 초심회는 보험비 라는 명목하게 이렇게 판매되지 않은 게임으로 발생한 비용의 상당부분을 제작사에 떠넘겨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면 아예 개발 과정에까지 관여해 이 게임은 시장성이 없으니 개발하지 마라. 발매해도 우리가 소화 못해준다 라고 하거나 반대로 이 게임이 잘 팔렸으니 다음 게임은 이 게임의 후속작으로 만들어라 식의 얼척없는 요구까지 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잘팔리는 게임을 받기 위해 인기없는 게임도 같이 떠안아라 식의 요구를 소매점에 하는건 놀랄일도 아니었고 나중에는 소매점들을 선별해 가맹비를 받고 게임 소프트 공급에 차별을 두는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렇게 가맹된 소매점들은 매장 입구에 커다란 '황금마리오'를 전시해 두었는데 이런 매장의 경우
아예 비 닌텐도 게임은 취급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결국 이 초심회는 소니에게 시장의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준 1997년에 가서야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이후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비슷한 일을 해온 조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닌텐도가 이 초심회의 해체를 공식 선언한건 2016년이 되어서인데 물론 유통의 주도권이 디지털 다운로드가 된 시기이기도 하지만 스위치가 급부상 하게된 시점과 맞물리는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닐겁니다
이에 대응해 소니는 제작사에 굉장히 친화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게임 제작 비용과 라이센스 비용은 닌텐도의 3분의1도 되지 않는 900엔 이라는 비용을 책정했고, 일부 저가판 게임에는 그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을 책정해서 심플 시리즈라는 1500~2000엔 가격의 게임까지 나올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악성 재고를 방지하기 위해 초기 출하 물량은 소니가 전부 통제하는 대신 거기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소니가 책임을 졌고 CD라는 매체의 특성과 이미 음악 사업을 하고 있던 덕에 추가 물량이 필요할 경우에도 발빠르게 대응하는게 가능했습니다. 즉 소니가 직접 도매상의 역할을 한 것이었죠. 이는 거대 전자 메이커이자 음악 사업자 로서의 경험과 유통망을 십분 활용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정책이 완벽한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거대 게임사들이 직접 유통을 하겠다는 요구를 받아들이며 더이상 적절한 물량 통제가 힘들어지고 했고 시장의 지배자가 되고 나서는 소니의 영업사원들이 소매점에 갑질을 하다가 문제가 되어 법적으로 제제를 받는 일까지 발생했으니까요.
여기서 알 수 있는건 결국 누군가가 지배자가 되면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그걸 막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경쟁이 필요하다는 진리일겁니다.
6. 마치며
플레이 스테이션의 시작은 쿠타라기 켄 이라는 트러블 메이커의 몽상에 가까운 발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거의 40년전에 3D 중심의 게임기를 만들겠다는 허무 맹랑해 보였던 발상은 10여년후 현실이 되었고
그 현실을 만들어준 계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큰 라이벌들이었습니다.
세가는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게임을 만들어 놓고도 정작 자신들은 그 배에 올라타기를 거부 하다가 결국 시장에서 완전히 도태되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닌텐도는 한 시대의 제왕이었지만 지나치게 그 자리에 안주했으며 장인정신 이라고 포장된 고집을 꺾지 않다가 그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대가 흘러 한때 마이크로 소프트 본사 한 구석의 사무실에서 뭐 하는지 모를 이상한 놈들 취급을 받던 게임부서는 수십조원을 들여 회사를 인수하고 수천만의 가입자를 보유한 서비스를 하는 초대형 공룡으로 성장 했고 이제는 명백히 게임 시장의 돌풍의 최중심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닌텐도는 한쪽에서 자신들만의 철옹성을 쌓고 조용히 경쟁사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죠.
한동안 시장을 지배하던 소니는 과거의 세가가 닌텐도가 그러했듯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고 또 자리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이며 서서히 주도권을 넘겨주고 있습니다. 소니가 지금 조여오는 위기를 진정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앞으로 그들의 운명역시 누구도 장담할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게이머로서의 저는 모든 회사가 언제나 적당히 긴장을 유지하고 계속 경쟁하는게 가장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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