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칸타빌레의 지휘자 알론드라 델 라 파라.
제가 선호하는 지휘자들의 계보는 대략 세 부류입니다. 게오르그 솔티나 조지 셀, 안탈 도허티, 언더 게자 등의 헝가리 출신 지휘자들. 이들은 미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나 음악 감독을 역임하고 그 오케스트라를 유럽에 뒤지지 않는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키워내거나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독일 표준 레퍼토리 이외의 다른 음악들로 서구 전통 음악계를 풍성하게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을 몇 가지 꼽으라면, 칼 같이 정확한 박자, 명료한 구조 해석, 그리고 엄청난 연습과 리허설을 통해 아주 능숙한 연주를 선보인다는 겁니다. 또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주요 독일 레퍼토리는 물론이고, 헝가리 폴란드 등이 포함된 확장된 중부 유럽 레퍼토리, 러시아 낭만주의, 20세기 이후의 현대 음악에 두루두루 능숙하다는 겁니다. 편견일지는 모르지만 저는 평균적으로 헝가리 지휘자들이 가장 지적인 능력과 분위기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 보입니다. 수학이나 음악, 문학에서 헝가리 출신들의 독특함과 깊이는 모두 세계 최고 수분입니다.
두 번 째로 선호하는 지휘자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직을 역임한 인물들입니다. 주로 독일인들이고 오페라와 교향악에 두루 능하며, 전문 교향악단 뿐 아니라 오페라의 반주를 겸하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만들어 온 사람들입니다. 카를 뵘, 오이겐 요훔, 쿠르트 마주어, 볼프강 자발리쉬 같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특히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슈만 브람스, 브루크너로 이어지는 정통 독일 레퍼토리에 강합니다. 저는 특히 브루크너 연주에 일가견이 있는 지휘자들을 좋아합니다.
세 번 째는 토스카니니,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주세페 시노폴리, 클라우디오 아바도, 리카르도 샤이 같은 이탈리아 계통의 지휘자들입니다. 이들은 이탈리아인 기질 답게 즉물적이고 명확하면서도 지중해처럼 넘실대는 밝은 리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아바도와 샤이, 시노폴리는 위에서 말한 카펠마이스터 전통에 속하기도 하며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녹음했거나 주요 곡을 녹음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세 번째 그룹에서 가장 좋아하는 지휘자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입니다. 그는 이력이 특이합니다. 드물게 비올라 주자로 시작해 지휘자가 되었으며(주로 피아노나 바이올린, 타악기 주자가 지휘를 선택합니다. 바이올린 주자는 악단의 수석을 맡는 경우가 많고, 피아노나 타악기 주자는 음악의 전체를 볼 줄 아는 안목과 지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템포와 리듬을 조절하는 능력을 어렸을 때 부터 함양하기 때문입니다.), 토스카니니, 카라얀, 솔티 등의 이 분야 끝판 대장들에게 후계자가 되어 줄 것을 종용받았으나 항상 이런 저런 이유로 거절하고 주로 객원 지휘를 하거나 규모가 작은 악단의 상임으로 머물면서 만족하고, 그것도 기간이 길지 않았습니다. 또 각 작곡가의 대표적인 명곡 보다는 남들이 덜 주목하는 악보를 보고 거기서 최상의 것을 뽑아내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사람이지요. 줄리니는 또 브루노 발터의 칸타빌레(노래하듯이)의 전통을 이어받은 지휘자이기도 했습니다. 브루노 발터가 말하길, 곡은 억지로, 숙달되게 연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가 그랬듯이, 뛰어난 해석의 감각을 지닌 연주자가 곡 고유의 결을 발견하고 그 결이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것 처럼 음악을 조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평자들이 브루크너의 2번은 구성력에 있어서 산만하고 늘어지는 느낌이 있다고 했지만 줄리니는 이 곡을 빈 심포니(빈 필하모니닉이 아니라!)와 함께 녹음해 필청음반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칸타빌레의 정신을 살려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음악은 깊이와 진지함, 노련함도 모두 갖췄지만 무엇보다 우아함이 가장 귀에 들어옵니다.
교향악 지휘에 있어서 '칸타빌레'의 전통을 확립한 브루노 발터와 카를로스 마리아 줄리니
이렇게 또 원래 이야기하려던 주제에서 한참 벗어나 줄리니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게 되었지만 사실 제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우연하게 칸타빌레의 느낌을 가장 잘 살리는 느김을 주는 지휘자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동시대의 지휘자들을 잘 모릅니다. 이제 유럽의 주요 악단의 음악감독이나 상임들의 나이가 40대로 낮아졌고, 이들은 대부분 70년대 생입니다. 안드리스 넬손스(보스턴, 게반트 하우스), 키릴 페트렌코(베를린 필), 테로도르 쿠렌치스(슈트가르트) 등등 유명한 지휘자들의 작업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언급한 지휘자들을 들을 때 처럼 한 지휘자에게 집중해서 음악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연히 음악을 듣다가 깜짝짬짝 놀라는 일이 매우 잦습니다. 아마도 제가 안목이 높지 못해서 그럴 겁니다. 예전 음악만 들어서 발전을 거듭한 테크닉 수준에 대한 감각이 없으니까요. 거기다가 부끄럽게도 여성 지휘자들에 대해서는 더 모릅니다. 성시연의 지휘 녹음이나 실황도 들어보지 못했고, 장한나의 작업들도 그렇습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주로 피아노 독주곡들을 듣고 교향곡에는 늦게 취미를 붙인 까닭입니다. (몇 년 전에 시몬 영이라는 뛰어난 지휘자의 브람스와 브루크너 녹음을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녹음의 질까지 더해져서 그런지 최고의 연주라고 느낀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유튜브의 추천을 충실하게 보다가 정말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스타일로, 드디어 곡과 악단에게 노래하도록 만드는 지휘자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멕시코의 1980년 생 지휘자 알론드라 델 라 파라입니다.
처음에는 시각적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거기에 사로 잡혀 너무 좋게만 들어주는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었는데, 영상을 보지 않고 음악만 들어도 분명히 음악은 노래하듯 특유의 결을 거스르지 않고 흘러나왔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카라얀이나 조지 셀, 솔티처럼, 악단을 '조련'시키는 지휘자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덕목이죠. (이들은 노래를 한다기 보다는 프로 선수들이 농구나 축구를 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공을 다루는 것처럼 곡을 다룹니다. 그들은 완벽하게 지휘자의 의중을 읽고 구현합니다. 반면 '칸타빌레'로 연주하는 악단은 서로 눈짓을 주고 받으며 만면에 웃음을 띄고 대화합니다. 지휘자는 볼륨 댄스를 하듯 우아하게 춤추며 곡을 이끌죠. 음악이 칸타빌레의 경지까지 갔는지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코로나 이전의 KBS상임이었던 요엘 레비의 마지막 공연에서 그가 춤을 추었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파라는 발매된 음반도 아직 두 장 밖에 없고, 둘다 독일 레퍼토리가 아니라 전혀 들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차이코프스키를 처음 접하면서 계속 더, 결국 끝까지 듣게 만드는 힘에 이끌려, 곡을 다 듣고, 그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봤습니다.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아마도 라틴 아메리카 혈통인듯 한데, 어머니 아버지가 전부 문인, 편집자, 사회학 전공자, 등의 경력이 있는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고, 할머니와 남동생도 작가이며, 이모는 배우라고 하더군요. 예술적이고 학구적인 전통이 있는 집안에서 자랐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파라의 가족들은 멕시코로 이주하는데 파라는 거기서 피아노로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하고 커가면서 지휘자를 꿈꿨다고 합니다. 인터뷰를 보면 자신이 지휘자를 꿈꿨을 때는 세상의 모든 지휘자가 늙은 독일인인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떻게 지휘자가 될 수 있을지 막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맨하튼 음대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모교에서 객원지휘를 시작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 호주 퀸즐랜드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호주 최초의 주요 악단 여성 음악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까지는 모국 멕시코의 전통음악이나 프랑스, 미국, 라틴, 슬라브 등 비독일 레퍼토리에 강점이 있지만 베토벤 교향곡 3번의 연주도 정말 이색적이고 흥겹습니다. 이런 베토벤도 가끔 듣고 싶어요. 그러나 역시 그가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곡들은 흥겹고 축제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곡들인 듯 합니다.
유튜브에 큰즐랜드 교향악단 고별 공연 영상이 올라오는 것으로 봐서 2019년 까지 재임한 듯 한데, 그 이후의 경력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파라의 지휘 중 인상 깊었던 몇 곡과 그의 생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링크하겠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찬찬히 이것저것 찾아서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연주하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밝고 가벼운 곡 부터 시작해 진지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곡으로 링크했으니 순서대로 들으시다가 나중에 이름을 기억해 놓으셨다가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첫 곡은 브라질 리우 올림픽의 ESPN중계 테마 곡부터 시작합니다. 마지막 영상은 52분짜리 다큐입니다. 다른 건 나중에 보시더라도 첫 번째 두번째 곡은 꼭 보세요. 곡들도 5~10분 내외로 짧고 얼마나 생동감 넘치게 지휘하며 음을 만들어내는지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음악의 기쁨을 말 그대로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https://youtu.be/4a9q_ofqisE
https://youtu.be/A7GlxiiB3HE
https://youtu.be/NbgAHpD4W_8
https://youtu.be/cmNEvSFWftc
https://youtu.be/KfdwgXSdcMw
https://youtu.be/rl5ALR5QESY
https://youtu.be/XWQree1vq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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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멋있네요. 물론 지휘도 잘하시지만 외모가 제 취향이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