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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융 심리학 입문] 1-11. 프랑켄슈타인과 지킬박사의 후예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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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5-20 02: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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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글에서 지킬 박사와 그 현대적 변주라고 할 수 있는 헐크, 다스베이더 등의 대중문화 작품들을 통해 억압된 그림자의 표출 양상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예고드린 대로, 메리 셀리의 작품 『프랑켄슈타인』,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등에서 나타난 억압된 그림자의 표출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메리 셸리가 첫 장편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썼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열 여덟살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떠올릴 때 마다 셀리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감정적 묘사나 플롯의 얼개가 군더더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흡입력, 후대의 SF소설을 탄생하게끔 만든 문학적 영향력,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통찰 등등, 진정한 천재가 아니면 붙잡을 수 없는 영감과 탄탄한 구성력으로 쓰여진 불멸의 작품입니다. 이 소설이 나오고 어언 200년 가까이가 흘렀지만, 현대에도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한 나이의 작가가 저 비슷한 정도의 작품을 써낸다면 여전히 천재 소리를 들을 법한 창작물입니다. 때문에 이 소설의 주제에 대한 연구와 해석도 다양한 비평가들을 통해 충분히 저술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은 작품의 '파우스트적' 특징입니다. 괴테의 작품 『파우스트』를 통해 잘 알려진 파우스트 전설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악마와 거래한 한 마술사의 타락과 비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괴테는 이 설화를 변용해 구원의 이야기로 탈바꿈시켰지만 이 전설을 모티프로 한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거의 예외 없이 호기심과 사려없음의 댓가로 파멸을 겪습니다. 매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도 그러한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 셀리는 처음으로 주인공을 마법사가 아니라 중세의 연금술 전통을 이은 자연철학자(과학자)로 등장시켜 최초의 과학소설을 창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교만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통해 자신과 가족을 파멸시킨 비극의 주인공으로, 또 통제할 수 없는 현대 과학자의 이미지로 후대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괴물(the creature: 잘 아시다시피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이고 이 괴물은 이름 없이 단지 creature라고만 불립니다.)'의 성격을 보면 '교만한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악'으로만 규정하기에는 마땅하지 않은 섬세한 묘사가 있습니다. 괴물은 자신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보다 훨씬 도덕적이고, 선에 대한 갈망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만 프랑켄슈타인이 그의 모습을 그토록 위압적이고 흉물스럽게 만든 탓에 밝은 빛 아래 나서지 못하고, 선의를 베푼 대상들에게도 늘 오해와 핍박을 받게 되죠. 결국 이러한 일이 계속 되자 그는 박해자들을 살해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프랑켄슈타인을 만나 자신과 똑같이 혐오스러워서 자신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여자 괴물을 만들어달라고 협박하게 됩니다. 그 여자가 만들어지면 둘이 함께 영원히 인간 세상을 떠나겠다고요. 과연 이런 존재가 단순히 인간의 교만에 의해 세상에 나온, 나와서는 안될 흉물일 뿐이었을까요? 그렇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셀리는 이 작품에서 괴물에게 독자가 감정을 이입할 수 있고 동정심을 느낄만한 충분한 장치를 해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사실 저는 창작물을 작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접근하는 소위 '작가주의'적 비평방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작품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작품의 주제라는 식의 접근도 싫어하죠. 하지만 작가주의 비평론은 1950년대 미국에서 '신비평'이라는, 내재적 접근방법이 발명되고 나서야 이러한 관행이 사라졌을 만큼, 이전에는 문학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이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은 작가와 상관 없이 작품의 다양한 맥락에 따라 해석되어야한다는, 지금보면 너무나 당연한 테제가 자리를 잡은 이후로 빠르게 사라졌고 저는 이것이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발전이라고 봅니다. 사실 작가 자신도 자신의 의도가 뭔줄 모르고 작품을 창작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조금 더 곁길로 새자면 정신분석 비평이 바로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작가의 무의식을 반영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방법론입니다. 이제 더이상 작가는 독자 위에서 모든 의미를 담지한 절대적 존재가 아니게 된 것이죠. 이를 문학용어로 '작가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에는 여전히 작가주의적 접근방법이 소설의 주제를 밝히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다른 방법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특징들이 작가주의적 접근을 통해 이유를 알 수 있게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물론 여기에 다양한 사회과학적 접근, 심리적 접근이 덧붙여질 수 있습니다. 최소한 이러한 접근을 통해 밝혀진 이색적인 주장들은 다른 이론들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대등한 가설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시도하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작업입니다. 제가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다양한 외국의 비평을 살펴보지 못해서 지금 제가 하려는 주장과 비슷한 내용이 이미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적어도 한 두 편의 그런 접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살펴본 국내의 비평이나 해설, 도는 번역문에서는 그러한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한 번 간략하게 저의 주장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위에서 메리 셸리의 천재적 재능에 대해서 감탄했지만, 그의 가계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점이 있습니다. 일단 그의 어머니가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여성의 권리 옹호』를 쓴 메리 울스턴크레프트였습니다. 아버지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고드윈은 세계 최초의 근대적 아나키스트였고, 정치평론가이자 소설가였습니다. 그의 집에는 영국 최고의  시인이자 문예비평가가 되는 퍼시 비시 셸리 같은 지식인들이 드나들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소명을 인식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메리 셸리는 작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셸리의 부모였던 최초의 근대적 무정부주의자 윌리엄 고드윈과 최초의 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레프트

 

 그가 작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아주 외롭고 불행한 유년시절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메리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딸을 낳고 후유증으로 11일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메리가 네 살때,  메리 제인 클레어몬트와 재혼했지만, 계모는 메리에게 냉담했고, 아버지도 그다지 딸에게 정서적으로 버팀목이 되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메리 셸리는 발달에 결정적인 시기 동안 모성의 부재와 정서적 학대에 시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차우체스쿠 정권에서 벌어진 고아원의 참극(차우체스쿠는 인구를 늘리기 위해 피임이나 중절수술을 금지했고, 이렇게 출생한 고아들에게 위생상의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보모들로 하여금 접촉을 금지했습니다. 이 시기에 출생하고 양육된 아이들의 정서적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소시오패스 비율이 급증하고 사회적으로 적응을 못하는 등의) 이들은 '차우체스쿠의 아이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을 볼 때 메리 셸리의 정서적 발달에도 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메리 셸리가 '차우체스쿠의 아이들' 같은 심각한 정서적 학대를 겪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셀리의 전기를 보면 셸리는 조숙했지만 사랑스러운 아이였고 나중에 퍼시의 아이를 낳고 부모로서의 역할도 훌륭하게 해냈다고 합니다. 재차 강조하자면 메리 셸리는 의문의 여지 없이 정상 범주에 드는 훌륭한 성품을 가진 여자였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양육의 소흘로 인해 정서적인 문제가 생기는 경우, 즉 부모의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폭력에 시달릴 경우, 아이들은 정체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고 합니다. 자신감이 떨어지고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하죠. 때문에 특히 여자 아이들은 일찍 조숙해지고, 평균적으로 자신보다 못한 남자와 짝을 짓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미혼모가 되는 비율도 높고요. 또 다시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굴레를 답습하게 되죠. 

 

 일명 '차우체스크의 아이들'. 루마니아의 차우체스크 독재 아래서 이 고아들은 감염병을 에방한다는 미명아래, 최소한의 애정과 신체 접촉도 하지 못한 채, 양육되었다. 

 

 

  물론 메리 셸리의 삶이 이런 예시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일찍 결혼하긴 했지만 남편인 퍼시 셸리는 당대 가장 촉망받는 문인이었습니다. 바이런 경이 그 자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인정하는 문인이었다죠. 그러나 퍼시 셸리가 메리에게 완벽한 남자였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메리가 퍼시와 사랑에 빠졌을 때 이미 퍼시는 기혼자였습니다. 사실 『프랑켄슈타인』도 이런 상황에서 영국사회의 비판적 여론을 피하기 위해 유럽을 돌아다니는 와중에 쓰여진 것이고요. 메리 셸리 정도의 재능과 지위를 가진, 그리고 자유주의자였던 부모의 성향을 고려하면 메리는 좀 더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여러 남성들과의 교재를 즐기고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메리는 너무 어린 나이에 유부남과 간통사건을 일으키고 영국을 떠나있게 되는 신세였죠. 저는 퍼시가 굉장히 메력적인 인물이기도 했겠지만 메리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 부적절한 처신이었고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그러한 연애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이면에는 메리의 자존감 문제가 한 가지 이유였을 가능성이 있어보입니다. 자신이 충분히 매력적이고 타인의 사랑을 받을만 한 존재라고 느꼈다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사랑에, 아직 사랑의 권태가 뭔지도 모를 나이에 그토록 빠르게 온 몸을 던지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합니다. 메리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격정적인 여자였을 수도 있고(그러나 연애 사건 이후 그런 모습은 거의 발견하기 힘듭니다), 퍼시가 마성의 매력을 가진 남자였을 수도 있죠.(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른 나이에 재능을 인정받고 명성을 획득한 능력남이었으니까요.)

 

 

 

노년의 메리 셸리와 젊은 시절의 퍼시 비시 셸리. (젊은 시절의 정확한 메리 셸리의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작가 앤드류 에사오의 젊은 매리 셸리의 상상으로 그린 초상화(2010년 작). 작가는 젊은 시절의 셸리의 정신적 피폐함을 묘사하는 듯하다

 

 

 그런데 만약 메리의 자존감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가 『프랑켄슈타인』을 썼던 나이는, 지금으로 치면 아직 청소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유년시절의 정서적 결핍과 다소간의 학대에서 벗어나 충분히 치유되기에도 아직은 이른 나이였죠. 만약 『프랑케슈타인』의 '괴물'이 메리 셸리의 내면의 형상화였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18세의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모두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비극적이고 복잡한 내면을 가진 존재를 형상화했을 수 있었을까요? 만약 메리가 이런 인물을 순수한 상상을 통해서 만들었다면 아마도 세계 역사에서 그를 능가하는 인물 조형능력을 가진 소설가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물론 괴물의 내면 창조가 자신의 내면을 참조한 것이라고 해서 메리의 천재성이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쪽이 더 가능성 있는 가정이 아닐까요? 

 

  융 심리학의 시각으로 보면, 소설에서 괴물은 명백하게 한 인격의 그림자의 반영으로 보입니다. 남에게 내놓을 수 없어서 숨기고, 그것이 노출되면 오해와 분노, 비극적 상황을 만들게되는 것이죠. 아마도 내면은 너무나 따뜻한데 사회성이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을 주위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괴물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점이 사실 독자들로 하여금 이 작품의 비극성에 높은 평가를 하도록 만드는 요인이겠죠. 인간에게는 누구나 타인과 따뜻한 유대관계를 맺고, 사랑받고 사랑하면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회적 인정욕구는 그러한 욕망의 한 종류로 불특정 타인에게서조차 그런 사랑을 받기를 바라는 종류의 것입니다. 무리 생활에서는 그러한 욕구와 성향이 큰 이점으로 작용함으로 이러한 욕구를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한 사회적 상황에서는 이모두가 이러한 욕구들이 충족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어떤 객관적 기준으로 평가하고 서열화시키는 사회에서는 평균보다 못한 사람이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면 비웃음을 면치 못하고 자존감에 더 큰 상처를 입게 되죠. (저는 이러한 점을 교묘하게 건드린 결혼 정보회사의 광고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메리 셸리가 남보다 못한 처지도 아니고 그가 살았던 시대가 현대와 같지도 않았겠지만, 메리 셸리의 유년 시절을 감안한다면 그가 열등감과 수치심에 사로 잡혔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저는 주변에서 그런 여성들을 많이 봤거든요.  

 

 그렇게 타인을 향한 사랑하고 받고 싶은 감정을 보이다가 여러 차례 거부되면, 혹은 미쳐 보이기도 전에 열등감으로 포기하게 되면, 마치 신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처럼 세상에 대한 증오를 키우게 되기도 하죠. 저는 헤비메틀의 세상을 향한 폭력적이고 강한 메시지를 가장 즐기는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조사가 납득이 갑니다. 물론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나, 스티븐 킹의 소설 『그린 마일』에 나오는 존 커피 처럼, 그러한 상황에서도 성자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도 있습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은 세상과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 괴물의 선택은 전형적인 비극적 주인공의 길을 따르는 겁니다. 괴테가 말하길, 자신이 만약에 『젊은 베르터의 고통』을 쓰지 않았다면 자신이 자살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죠. 플로베르도 『보바리 부인』은 사실상, 자신의 인격에 대한 여성적 형상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증언들을 보면, 괴테도, 플로베르도 자신의 그림자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해서 자신이 겪어야 할 비극을 의례적으로 처리하고 위기를 넘긴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이 불멸의 걸작들은 사이코 드라마였던 것이죠. 저는 『프랑켄슈타인』도 메리 셸리가 자신의 열등성을 느끼고 억제한 인격, -그러니까 충분히 타인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그림자를 어루만지고 통제하기 위해 쓴 사이코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지시나요? 

 

 사실 이번 글에서 세르반테스의 작품 『돈 키호테』도 같이 다루려고 했지만,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분석이 길어지다보니 다음 기회로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한 가지,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은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위에서 잠깐 이름을 언급한 스티븐 킹의 소설 『그린 마일』입니다. 저는 『그린마일』이 『프랑켄슈타인』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격통』,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의례로서의 기능을 가진 사이코드라마라는 이야기를 했죠. 사실 이러한 기능은 그리스 비극의 기원에서부터 유래한 유서 깊은, 가장 본질적인 전통입니다. 그리고 스티븐 킹의 『그린 마일은』, 『프랑켄슈타인』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고딕소설의 대중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면서도, 비극의 기원에 대한 심원한 고찰을 포함하고 있는 엄청난 작품입니다. 저는 이 소설이 거의 니체의 『비극의 탄생』만큼이나 비극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간단하게라도 꼭 문예비평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때문에 저는 스티븐 킹의 『그린 마일』의 문학사적 의의를 다루기 위해 잠시 융 심리학의 관점에서 벗어나 독립된 글을 한 꼭지 쓰고자 하는 욕망에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ㅎㅎ 이 글은 이 시리즈에서 벗어난 상자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화와 그 밖의 서사가 가지는 의례적 성격을 감안한다면 아주 관련이 없는 글은 아닐 것입니다. 다음 번에서는 연재를 한 회 쉬고, 그린 마일에 대한 짤막한 비평을 올리고, 그 다음글에서 『돈 키호테』 를 통한 그림자의 표출양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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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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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02:19:56
비밀글입니다.
WR
2022-05-20 02:21:25

정말 감사합니다. 퇴고 안하고 바로 올리니 역시.바로 수정하겠습니다.  니코데무스님은 저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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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02:23:27

매 편 마다 생각해볼 거리들이 계속 늘아가다보니... 다시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다음 편은 언제 올라오나~ 하고 기다리게 됩니다.

 

특히 7, 8편의 '그림자'의 내용들은 저의 현재진행형 고민과도 연결되어 있어 제 스스로도 정리가 안되고 있고 그래서 댓글도 제대로 쓰지 못한 상태인데... 자꾸 새로운 글 만 기다려집니다

 

그런 제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신 듯 시리즈 글 한편 쉬고 다른 글을 올려주시는 거죠?

WR
Updated at 2022-05-20 12:27:54

저에게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글을 읽고 니코데무스님 자신의 고민과 글을 연결시켜 생각해보시고, 다음에 또 다시 읽어보겠다고도 하시고, 다음편 을 기다리신다니,  글 쓰면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이네요. 정말 감사드리면서 더 재미있게 쓸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오늘도 괜찮으셨어요?ㅎㅎ 

1
2022-05-20 02:24:48

그린 마일 영화가 끝나고 뭔가 후처리가 덜 된 느낌을 받았었는데 

아무래도 영상으로 표현되는 부분만으론 갈증이 생길 수 밖에 없던 것 같군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WR
2022-05-20 02:33:58

아무래도 읽은지 오래되고 소설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정밀한 분석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린 마일의 문학적 의의에 대해서는 간명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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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5-20 03:51:28

전에 프랑켄슈타인 읽고 괴물이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했고, 작가의 재능에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WR
2022-05-20 11:57:53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Updated at 2022-05-20 07:55:51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드릴 것은 추천 뿐입니다...^^

WR
2022-05-20 11:58:10

추천 감사합니다!ㅋㅋ

1
Updated at 2022-05-20 09:40:22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어릴 때 아동용으로 각색된 것만 읽어서 이런 내용이나 작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원문으로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그건 그렇고 다음은 그린 마일에 대한 얘기라니 귀가 솔깃해집니다. 도대체 이 작가는 어떤 경험을 하고 살았길래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일까 감탄하면서 봤거든요. 특히 마지막 문장은 너무나 강렬해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네요. rockid님의 비평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WR
2022-05-20 12:00:07

스티븐 킹도 앞으로 삼백 년 이상 읽힐 천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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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10:15:31

이천년 초반 케네스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을 봤었는데
지금 다시 이 글을 생각하며 보면 어떨까 궁금해 블루레이 주문을 했네요.^^

WR
2022-05-20 12:00:22

즐겁게 감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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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5-20 10:37:28

프랑켄슈타인을 아동용 소설과 영화로만 접하고 나중에 작가를 알았을 때 괴이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뒷 배경이 있었군요. 

융 심리학의 시각으로 보니 이해가 가네요.

작가가 내면을 참조했던 건 가능성이 매우 높을 거 같아요. 

작가의 첫 작품인데 그 이후의 작품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둔 걸 봐도 그럴 거 같고요. 

자존심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자존심도 유전적 영향이 크고, 겉으로 보면 자신 없어 보이고 내성적이라고 해도 자존심은 강할 수 있는 거라서요. 어린 나이에 첫 사랑이라면 그럴수도 있을거 같아요.

WR
2022-05-20 12:03:53

자존감(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입니다. 이 구별은 중요해요.)이 유년기의 경험에 좌우된다는 것은 발달심리학 분야의 조사들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물론 개인별로 양상은 차이가 나겠죠. 일반적 추세가 그렇다는 겁니다. 

Updated at 2022-05-20 14:08:51

아, 자존감이 맞겠네요.

타고나는 자존감과 유년기의 경험에 좌우되는 자존감은 그 성향이 다를거 같아요.

타고난 강한 자존감없이 저런 작품활동이 힘들거 같거든요.

더군다나 유년기에 자존감에 손상을 입었다면 더 그럴거 같긴합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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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5-20 16:46:21

그건 아마 양육 vs. 본성 문제라기 보다는 종류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자기의 실력은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그 실력을 통해서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이런 오해도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


  그런데 셸리는 이러한 천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생 전 단 두 편의 소설만을 내 놓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선집으로 간행된 프랑켄슈타인 1831년판 서문에서 밝힌 바가 있는데, 자신은 글 쓰기 보다 가정을 유지하고 배우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프랑켄슈타인 이후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셸리의 상황을 이렇게 추리했어요. 아마도 셸리는 부모의 후광과 집안 분위기, 그리고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자신이 글을 쓸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글을 쓰자니 남편(퍼시 셀리)과 남편의 친구(바이런 경)이 너무 넘사벽인 거에요.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 운동은 영국을 넘어 전 유럽에서 추앙받는 최고의 문학예술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두 명의 천재가 자기 곁에 있었으니 자기가 문학적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실제로 프랑켄슈타인도 메리 셸리가 적극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아이디어를 퍼시 셀리와 바이런 경이 들은 후, 꼭 작품으로 내라고 여러 차례 강권해서 쓴 책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셀리는 누가 봐도 분명한 자신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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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18:29:58

과거엔 이런 양질의 글의 창작자들이 이곳에 참 많으셨는데 

오래오래 아곳에 뿌리 내리고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

WR
1
2022-05-20 18:30:49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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