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살면서 만나 온 지성인들의 특징(파인만 동영상 추가)
아래 체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갑자기 생각난 것을 적어봅니다. 물론 체스를 잘 둔다고 해서 다 지성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체스나 바둑같이 수싸움을 해야하는 게임은 평소에 숙고를 거듭해 정확하거나, 혹은 상식을 깨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실생활의 상황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탁월한 판단력을 보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평소 흐릿하게 생각해왔던 것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인간 관계가 넓진 않지만, 이런 저런 인터뷰 기회나, 아니면 지인 찬스 들을 통해서 만나 본 지성인들이 꽤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젊은 분이든 나이가 든 분이든간에 단순하게 머리가 빠르다라는 말로는 부족한 아우라가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풍기는 아우라가 정말 닮고 싶은 부분이기도 해서 그 공통적인 특징들을 꼽아보고 분석해본 적이 있습니다. 다음은 그 몇 가지 성향들입니다.
1. 자기 절제력이 무시무시하게 강하다.
제가 본 가장 중요한 공통점입니다. 단순히 생활에서 보여지는 절제력이나 통제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스럽게 갈고 닦는 시간이 많아야 하기에 생활도 절제된 경우가 많겠죠. 그러나 제가 이런 분들과 대화를 해보면서 느낀 것은, 다른 종류의 절제력입니다. 보통 지적인 것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어느 정도 지식을 쌓았더라도 다른 의견이나 반대 의견에 부닥쳤을 때 감정적인 반응을 먼저 합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보면 표정부터 순식간에 변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경멸적인 조소를 흘리거나 얼굴이 욹으락 붉으락 하거나. 그러나 아우라가 풍기는 지적인 분들은 일단 상대가 말을 다 끝날 때까지 표정이 그다지 변하지 않습니다. 아주 특이한 사실들을 접할 때가 아니면요. 대화 중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면 불편한 이야기가 흘러나와도 미소를 끝까지 유지합니다. 예전에 리처드 파인만의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이 분의 태도가 제가 말한 분들의 태도와 거의 완벽하게 비슷합니다. 인터뷰어의 생각없는 질문에 약간 기분이 상한 듯 하지만 그 감정이 얼굴에 나타나려는 순간 바로 감추면서 억제력을 유지합니다. 신경과학적인 측면에서 억제력은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인 전전두엽의 여러 기능 중 하나인데 주로 분노나 공포처럼 부정적 감정을 처리하는 편도체와 상호연결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 마져도 편도체에서 전전두엽 억제력을 관장하는 부분으로 가는 출력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두 배 이상 많습니다. 인간도 결국은 감정적 동물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타고났든 훈련이 되었든 지성이 유독 빛나는 분들은 감정정을 표출하는 방식이 아주 세련되었습니다.
버나드 몽고메리는 그의 책, 전쟁의 역사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고도로 지성적인 인물로 봤는데, 그 이유는 바로 전쟁 상황에서 공포와 적개심을 잘 통제하고 전략적으로 아주 적절한 판단을 하는 것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기마대를 이끌면서 조금만 더 전진하면 다리우스 3세를 생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모루역할을 하는 좌익의 팔랑크스가 붕괴하자 추격을 중지하고 바로 수습하려고 돌아갔죠.
2. 여러가지 경우의 수에 대한 예측력이 탁월하다.
이 분들의 카리스마랄까요, 여튼 아우라를 더하는 큰 특징 중에 하나가 반응이 즉각적이지 않고 한 박자나 반박자 쉬고 반응한다는 겁니다. 그게 알고보니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느려서 그러는 것도 아니더군요. 머리속에서 생각은 같이 자리한 그 누구보다 더 빨리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일단 말을 시작하면 막힘 없이 핵심이 정리된 이야기가 사람들 뇌리에 쏙속 꽃히니까요. 미리 준비한 내용이 아니고 질문에 대한 답이나 계획 없이 흘러나오는 화제에 대한 반응이 그렇다는 겁니다. 아마도 이런 특징을 보이는 한 요수는 위에서 말하는 절제력도 큰 몫을 차지할 겁니다. 반응을 유예하고 생각을 정리하느라 즉각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도 절제력이 필요한 행동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억제력을 유지하는 상황에서도 그 분들은 머리 속으로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순간적으로 동원해서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만들어 냅니다. 저도 이런 좋은 특질을 가지려고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하나하나의 판단을 내리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쉬운 행위지만, 기억 속에 기존의 판단을 기억하고 그 판단에 의해 가정된 상황에 대한 판단을 또 내리면서 순차적으로 기억하고 모순을 찾고 정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머리의 한계가 오는 복잡한 상황에 자주 부닥치고 그럴 경우에는 생각을 포기하기도 하고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메모를 하기도 하죠. 그러나 그냥 포기하는 편이 많습니다. 포기하면 편하거등요.ㅎㅎ
보통 이렇게 지적인 것과 거리가 멀고 자기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경우의 수를 추출하는 판단이 상당히 부족합니다. 그런 실례를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상황이 바로 음모론 만들기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음모론을 만드는 줄도 모르는 채, 부지불식간에 정보의 부재, 경우의 수 추측을 위한 논리의 부재, 참을성의 부족이 환장의 콜라보가 되어 말도 안되는 음모론을 만들고 또 그걸 스스로도 강하게 확신한다는 겁니다. 슬픈 이야기지만 우리 생활에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모습들을 가장 많이 봅니다. 좌우 가릴 것 없이요. 이런 나태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의심하고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 발생하는 상황을 예측하기 위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논리력으로 귀결됩니다. 논리력이 그 과정을 오래 진행할 수 있는, 즉 숙고를 견딜 수 있는 억제력과 결합해 지성이 만들어 지는 것이죠.
3.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는 것이 많다. 혹은 자기가 뭘 모르는지 안다.
위에서 말한 지성의 필수적인 특징들, 자기 억제력과 논리력 이 갖춰지더라도 그러한 사고과정에 동원할 수 있는 자료들이 빈곤하면 지적이기 쉽지 않습니다. 단 이런 경우에도 지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드문 경우가 있는데, 자기가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잘 구분해서 선선하게 자신이 내린 판단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낼 때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상대에게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의 앎에 대한 앎', 즉 메타인지 능력이 뛰어나다는 징표일 것입니다. 보통 수도 없이 마주치는 사람들, 즉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자기가 똑똑한줄 아는 수 많은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 메타인지 능력이 부족한 경우입니다. 이들은 주장만 강하고 자기 주장의 한계를 모릅니다. 지식과 사고 과정 모두가 부족하니 부지불식간에 편견을 만들고, 뭐가 부족한 줄 모르니 그냥 의심 없이 그 결과물을 스스로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억제력도 부족하니 그 의견에 반대되는 주장과 부닥치면 고집을 피우거나 화부터 내죠.
그리고 보통 나이가 지그시 든 분들 중에 창의적이고 신기하면서도 납득이 가는 이야기를 하는 분(널리 알려진 분들 중에는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가 있습니다. 이 분이 말슴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겸손한 지성인의 표본입니다.)은 위의 특징에 덧붙여 오랜 자기 수련을 통해 풍부한 지식도 쌓은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젊고 영민한 분들의 두드러진 특징인 날카로움이 둥글게 잘 숨겨져 있으면서도 벼려지고 풍부한 지식으로 다채로운 향기를 풍겨서 정말 오래된 코냑이나 딱딱한 치즈와 같은 맛과 향을 냅니다. 아직 나이가 40대에 이르지 못한 분들 중에는 직접 이런 분을 만나본 일은 없습니다. 물론 이는 제가 젊었을 때 만난 젊은 지성인들을 제가 알아볼만한 능력이 부족해서였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수 많은 기보들을 공부하고 사계를 정리할 수 있는 체스나 바둑판과 달리, 실제 세계의 다양한 지식들을 단시간 내에 깊이있게 소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좁은 음악판으로만 한정해도 클래식 작곡가나 지휘자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은 너무 많아서 현시대에 40대 이전에 명 지휘자나 작곡가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하는 것과도 일맥상통 한 이야기겠죠.
아마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나 찰스 다윈 처럼, 젊은 시절부터 엄청나게 전공과 인접분야에 대한 지식을 축적했으면서도 다방면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던 소수의 천재들이 젊었을 때도 이미 '똑똑하다'를 넘어 지성인의 아우라를 풍기는 분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각 분야간의 골이 깊어지고 전문분야끼리 거리가 멀어져서 이렇게 이른 나이에 통찰력을 갖추기가 쉽지 않죠. 이것은 시대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추가: 위에서 말한 리처드 파인만의 동영상입니다. 다시 봐도 감탄만 나옵니다. 앞에서 언급한 절제력, 논리적으로 경우의 수를 최대한 멀리 추적하는 능력, 풍부한 지식을 이 짧은 동영상에서 모두 유추할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3smc7jbU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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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것들이 많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에 추천 꾸욱 누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