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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스티븐 킹의 『그린마일』은 왜 20세기 최고의 비극론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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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5-25 09:42:30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제목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주장하려는 것이, 이 작품이 최고의 대중적 고딕 소설인 동시에, 순수문학의 가장 주요한 요소인 서사 양식 자체에 대해 논의하는, 메타픽션으로서의 특징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제목을  "스티븐 킹의  『그린마일』은 왜 20세기 최고의 순수소설인가?"나 "스티븐 킹의  『그린마일』은 왜 20세기 최고의 메타픽션인가?"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이 소설을 그렇게 정의하기에는 조금씩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게도, 『그린마일』은 순수소설이 아닙니다. 18세기 부터 전해오는 고딕 소설이라는  대중적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통속 소설'입니다. 

 

  통속소설과 순수소설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있고, 저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속소설이 가지지 못한 순수소설의 가장 큰 특징을 하나 꼽으라면, 순수소설이 '자기반성적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소설에서 자기반성적 양식이란, '작품이 소설이란 양식 자체에 대해서 반성하는(말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대중소설들은 이러한 특질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환상소설이나, 무협소설, 탐정소설들을 보면 이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최초의 양식을 만든 작품은 논외로 해야겠지만, 이런 통속적 장르 소설들은 대체로 그 어떤 장르양식에 대한 고민 없이 이미 만들어진 양식에 따라 작품을 양산하고, 그것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새로운 양식을 거북살스러워 하며 전통적 양식으로 제작된 비슷비슷한 작품들을 수 백 편 씩 읽어 치웁니다. 그래서 김성모나, 스티븐 에릭 시걸 같은 작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내걸고 일정한 품질을 보장하는 '작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돌리면서 이윤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영화나 음악, 미술 등 모든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폄하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산업이 탄생한다는 것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기성복을 만들거나 인스턴트 식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스턴트 식품 중에서도 소울푸드가 될 만큼 탁월한 것들이 있고, 기성복들도 문화의 한 휙을 그을만큼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리바이스 501 같은 것 말이죠. 

 

 

 

 통속 작품의 대가, 혹은 공장주들 위로부터 김성모, 에릭 시걸

 

 

 

 그러나 어떤 독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은 늘 실험을 원합니다. 이런 방식의 이야기를 만들어 봤으면 다음에는 그것을 비틀거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고, 저런 방식의 음악을 만들었으면 다음에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 봐야 합니다. 그 것이 바흐나 베토벤이 텔레만이나 클레멘티보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소니 롤린스보다 위대하게 생각되는 이유입니다. 이런 독자들은 그래서 통속형식의 그 완고한, 어찌보면 엄격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무비판적 형식의 계승을 견디지 못합니다. 몰론 통속적 형식이라고 해도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통속형식의 댄스음악이 몇 십년 단위로 변하는 현대음악보다 더 역동적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쏟아져나오는 결과물들의 양과 소비양식을 생각해보면 통속적인 예술형식은 실험보다는 취향에 대한 영합을 통한 이윤의 추구를 우선으로 합니다. 근대 이후 예술과 기술이 갈라진 것이 사실이라면, "대중예술은 예술이라기보다는 기술산업이다."라는 형용모순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즘 참신한 취향의 드라마로 각광받는 『나의 해방일지』마져도, 결국에는 주인공이 사실은 조폭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긴장감과 폭력적 활력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순수문학의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익숙하고 편한 휴식도, 지루한 일상을 잠시 잊게 만드는 활력과 상상력이 넘치는몽상도 아닌, 그 예술 양식 자체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돈키호테』에서, 『젊은 베르터의 격통』과 『보바리 부인』을 거쳐, 『읽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와 『율리시스』에 이르기 까지, 소위 위대한 고전문학이라고 평가되는 모든 작품들이 해왔던 작업이 바로 이것, 기존 양식에 대한 고찰과 새로운 양식의 창조였던 것입니다. 

 

 

장르의 양식 자체에 대한 탐구를 주요한 주제로 삼는 이른바 순수소설 작품들, 위로부터 세르반테스의 『돈키로테』,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그러나  『그린마일』은 위에서 말한대로 전통 고딕 양식의 장르적 특징을 충실히 답습합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발생하는 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벽촌 오지에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되고, 사건의 전개도 그런 요소들이 개입됩니다. 이 작품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히치콕의 『싸이코』가 그 무시무시한 공포를 관객들에게 체험케 한 후, 후반에 정신분석가를 등장시켜 노먼 베이츠의 행동의 이유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제가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한 연재를 하고 있는데, 융의 이론에 비추어보면, 바로 이런 고딕 소설이 자칭 문명인들의 무의식 속에 감춰진 초자연적 사건들에 대한 욕구를 타자를 통해 투사하는 기능을 가진 장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 작품은  제가 비록 서사 양식에 대한 탐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순수문학' 이라고 말하기 주저되는 이유입니다. 순수소설의 특징을 공유하긴 하지만 전형적인 순수소설은 아닌 것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의 한 장면, 같은 공포를 다루지만 초자연적 설명이 필요한 고딕장르와 달리 정신분석에 의거한 합리적이고도 '과학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보통 메타소설이나 메타픽션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양식에 대한 탐구를 극대화하기 위해, 아예 작가가 소설에 개입하여 지금 독자가 읽는 이 소설이 작가에 의해 쓰여지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밝히는 소설입니다. 이는 특정양식에 대한 탐구 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서사 양식의 근본적 특징과 문제를 다룹니다. 아마 가장 위대한 메타픽션의 효시는 아마도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후편』일 것입니다. 애초에 기사도 로망스 양식에 대한 조롱을 이유로, 그러니까 특정 양식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 이 작품의 전편이 흥행을 거두자, 세르반테스의 이름을 빌린 위작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 상황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 후편』을 써서 전편이 돈 키호테의 무용담을 기록한 아랍 작가의 글을 세르반테스가 우연히 발견해서  기록한 것이라는 사실에 덧붙여, 위작이 형편 없는 작품이라는 것을 밝히기도 하고, 극 안의 극에서 돈 키호테가 인형극 속으로 뛰어들어 악당을 무찌르는 등, 허구적 소설을 작가와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20세기는 그야말로 메타픽션의 전성기로서, 밀란 쿤데라나 줄리언 반스, 폴 오스터, 오르한 파묵, 커트 보니것, 존 파울즈 등이 평단과 대중에게 모두 인정받는 성공적인 작품들을 쏟아냈습니다. 사실 신경숙의 대표작인 『외딴 방』도 이런 양식을 초보적으로 실험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그린마일』은 인간이 발명한 가장 근본적인 서사양식인 '비극'에 대한 정말 세련된 고찰을 주제로 다루면서도 이런 주제를 용이하게 다룰 수 있는 메타픽션의 양식을 차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린 마일』이 어떤 메타픽션보다도 메타픽션의 근본적인 주제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음에도 메타픽션이나 메타소설이라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어떤 순수소설이나 메타픽션 보다도 그것들이 다루는 주제를 독창적인 솜씨를 통해 묵직하게 던지는 작품입니다. 바로 이 것이 제가 이 글의 제목을 "스티븐 킹의  『그린마일』은 왜 20세기 최고의 비극론인가?"라고 정하게 된 이유입니다.

 

 메타픽션 스타일을 초보적으로 시도한 신경숙의 작품, 『외딴 방』  

 

 

 이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 비극론 일반과 메리 셸리의 걸작,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말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이 원래,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숫염소를 바치는 희생제의에서 왔다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어로 각각 염소와 노래를 뜻하는 'tragos'와 'aoidia'가 합쳐져, 비극을 뜻하는 'tragoidia'라는 말이 된 것이죠. 그런데 고대 그리스 뿐 아니라 고대 근동에서는 희생물로 염소나 양을 바치는 행위로 희생물 공여자의 죄를 대속하는 의례 풍습이 있었습니다. 죄를 지은 자가 흠없이 정결한 희생물을 죄를 빌어야 할 신에게 바침으로써, 자신의 죄가 씻겨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신과의 거래 계약인 것이죠. (독일의 비판적 사상가 아도르노는 이러한 행위에서 인간의 도구적 이성의 싹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고대 사회에서 증거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특질인듯 합니다. 희생양 뿐 아니라, 때로는 인신 공양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부족 전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살해당하거나 추방되어 일정 기간 동안 부족과 격리되기도 했고, 인간 대신 가축을 바치거나 추방하기도 했습니다. 심리학에서 보면 이것은 일종의 투사행위로, 자신의 허물이나 죄악을 타자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신의 죄애 대해 결산이 이루어졌다고 믿고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입니다. 다만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타인에 대한 투사 행위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이 없지만, 이런 의례 에서는 희생자나 희생물이 자신의 죄를 대속한다는 명확한 인식이 있다는 차이가 있죠. 

 

 

현대적으로 재현한 그리스 비극의 공연모습. 

그리스 비극의 기원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희생제의로 추측된다.  

 

 

 이러한 기원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비극 또한 이런 의례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주로 영웅입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과 고결한 인품을 가졌지만, 바로 그런 자질들이 불러오는 교만(휴브리스:hubris)에 의해 곤경에 빠지고 끝내 파멸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이 교만은 명백한 악의와는 거리가 멀어서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뭔가 좀 과한 감이 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길에서 마주친 노인을 살해하고 스핑크스를 물리친 다음 테베의 왕이되어 미망인 신분이었던 왕비와 결혼합니다. 그는 현명하게 나라를 다스리지만 나라에 이해할 수 없는 재해가 계속 발생해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다 보니 여러분 모두 알고 있는 그 진상이 밝혀진 것입니다. 사실 오이디푸스가 마주친 노인과 언쟁끝에 그를 살해했거나 하는 행위는 물론 난폭하긴 했지만 마을을 벗어나면 곧장 무법지대인 고대 사회에서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핵심은 죄를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다는 것이죠. 이것을 늘 경계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력과 용기에만 의존하여 행동하는 것도 교만에 해당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의 전개로 인해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의 눈을 파내어 수염에 매달고 딸과 함께 방랑을 떠나게 됩니다.  

 

오이디푸스의 딸인 안티고네가 당하는 일은 어떻게 생각하면 더 끔찍합니다. 반역자로 죽은 형제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했다는 이유로 외숙부에게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좀 더 미묘한데 뒤에서 한 번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반역자이고 매장이 금지되었다지만 가장 가까운 혈육의 시신을 매장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도 안타깝죠. 그러나 이들은 비극 속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희생제물을 바치는 자들의 죄를 대속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비극의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자신의 죄를 대속한 존재들 덕분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최초의 대속을 위한 희생은 아마 인신공양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이 동물로, 그리고 의례적 추방으로, 또 비극 연출과 관람, 종교의례라는 제의로 점점 더 추상적이고 상징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일종의 진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천주교의 미사 제의형식을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러한 죄에 대한 대속의 의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인간의 사고는 현대에도 고집스럽게 남아있기도 합니다.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시작해서, 서사의 주인공이 작가를 대신해 죽는 경우는 근대의 경우에도 끊이지 않습니다.  괴테는 자신이 『젊은 베르터의 고통』을 쓰지 않았다면 자신이 자살했을 것이라고 말했고,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가 사실 자신의 여성적 모습이라고 밝혔습니다. 저는 융 심리학 연재에서, 메리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the creature)'이 메리 셸리의 억압된 '그림자(융 심리학에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억제한 무의식적 성격을 이르는 용어)'일 것라고 추측한 적이 있습니다.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설명하자면, 메리 셸리는 태어나자 마자 어머니를 잃고 4살 때 아버지가 재혼하여 계모 슬하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계모와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아서 결국 다른 친척 집에 맡겨져 양육되었다고 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의 처녀작 소설이고,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는 그의 유년시절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 화목한 가족간의 사랑에 대한 묘사가 지나칠만큼 강조되어있고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의 여리고 착한 심성과 존재를 거부당한 자의 광포한 분노가 극적으로 대비되어 있습니다. 작품에서 여자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는 프랑켄슈타인과 사촌 사이로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으면서도 서로 끔직하게 사랑하고 결혼을 열망하는 그런 사이입니다. 현대 인류학의 발전으로 이런 관계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수 있게 되었지만, 굳이 그런 과학적 발견이 없다고 해도 민며느리제 같은 풍습을 겪어온 사회에서는 그들 사이에 로맨틱한 감정이 피어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셸리는 유년시절의 결핍을 자신의 환상을 통해 충족하고자 했던 것이죠.  괴물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아이들이 어려서 가장 상처를 받는 이유가 자신의 애정이나 호의가 상대에게 무시당하거나 거부되었을 때입니다. 이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른들이 되어서도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겪은 어린 시절의 강렬한 경험을 한 두 가지 씩은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그야말로 마음 속에 괴물을 키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하거나 냉담하게 굴었던 존재에 대한 분노는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특히 그것이 자신의 양육을 절대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존재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라면요. 만약 메리 셸리가 그런 경험을 겪었다면, 자기혐오의 감정에 빠지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문득문득 자기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무의식에 사로잡히기 쉽죠. 바로 작품속에 등장하는 괴물이 이런 존재입니다.

 

  그는 흉측한 외모를 지녔지만, 어떤 인간보다 더 선한 삶에 대한 갈구가 컸고, 좋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했습니다. (심지어 인간보다 훨씬 머리도 좋고 체력도 강했습니다. 못생겼다 뿐이지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이죠.) 그는 끊임없이 호의를 베풀었지만 사람들은 괴물의 흉측한 외모만 보고 그를 혐오하고 위해를 가하죠. 소설 속에 나타난 이러한 예 중에 인상적이고 결정적인 장면은 이런 것입니다. 숲 속에서 숨어지내다 우연하게 물에 빠진 소녀를 괴물이 구해냅니다. 그러나 괴물이 소녀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본 소녀의 아버지는 괴물을 총으로 쐬 치명상을 입히고 맙니다. 어쩌면 이 괴물의 심정이 셸리가 유년시절에 겪었던 감정적 고통을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고귀한 품성의 괴물은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을 창조하고 혐오한 프랑켄슈타인의 가족과 친구들을 차례로 살해하고 프랑켄슈타인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자실을 암시하며 북극 지방으로 떠나면서 소설이 마무리 되죠. 이러한 비극을 통해 셸리는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랑을 거절당한 참담함, 버림받은 세상에 대한 원한과 증오의 감정 말입니다. 괴테가  베르터가 죽지 않았다면 자신이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듯, 셸리도 자기 대신 괴물이 세상을 향한 분노를 표현하고 그 댓가로 파멸을 맞이하지 않았다면, 그 자신이 그런 상황을 겪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프랑켄슈타인』은 그리스의 전통을 계승한 전형적인 비극입니다. 동시에 고딕 소설의 전통 또한 충실하계 계승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개인적 트라우마와 초자연적 존재와 사건이라는, 두 그림자에 대한 소설입니다.(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정교한 해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이 최초의 SF소설, 즉 초자연적 해명이 아니라 갈비니의 실험이나 이레즈머즈 다윈의 풍문 등, 합리적 설명에 기댄 소설이라는 것을 압니다. 1818년 초판의 서문에서 이러한 설명 자체에 대해서도 자신은 믿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태도를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형식 자체는 명백하게 고딕적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영국이 아니라 해외의 산골지방이나 카톨릭 국가에서 일어나고, 단일한 화자에 의해 진행되지 않고 편지나, 문서, 소문 등의 다양한 출처를 제시하는 등의 고딕 표준형식을 준수합니다. 이는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쓴, 후대의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마도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서문에서 보였던 비과학적 믿음에 대한 강한 부정은 이런 고딕적 표현의 욕구를 은폐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작품이 최초의 SF라는 평가에도 조금 더 정교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메리 셸리의 원작을 케네스 브레너가 각색해 연출한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괴물의 모습. 아마도 이 괴물은 메리 셸리 자신의 일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린마일』에 대한 분석은 이 준비작업 보다 분량이 훨씬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글을 두 편으로 나누는 이유는 기대밖으로 준비과정이 너무 길어져서 본론을 쓰기 위한 집중력이 약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글을 너무 늦게 쓰기 시작한 이유로 지금 잠깐이라도 잠을 자지 않으면 저는 오늘 하루를 망치게 됩니다. 중간에 끊겼다고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다음 편을 기다려 주세요~.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심리적 분석과 추측은 다음 글을 참조해주세요.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23585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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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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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5-25 06:01:23

박해영 작가가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보다 먼저 써놨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대중적 성공을 거듭한 이후에 천편일률적인 작품으로 실망을 주는 모습이 보통인데 나의 아저씨보다 높게 평가하고 싶은 작품이 이전에 씌여졌다는 것은 묘한 역설적 결론에 도달하게 만듭니다.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부숴버릴거야'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뻔한 비틀기, 뻔한 결과, 뻔한 노희경을 반복합니다. 통속적 반복을 자각했다면 '김성모'화한 것이고 아니라면...... 이병헌의 연기가 좋지만 대미를 장식할 역시 뻔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기분 좋지만은 않습니다. 

2022-05-25 08:15:22

참신한 글을 쓰다가 빛을 못 본 사람이 공식에 맞춘 상업용 글로 뜨면 거기 자신을 맞춰 버리는... 그런 걸로 이해하면 될까요?

Updated at 2022-05-25 08:22:00

비장의 글을 썼는데 매체가 나서지 않으니 대중이 좋아할 또 오해영 같은 것을 쓴 게 박해영이라고 생각하고요, 노희경은 전지적 작가시점에 너무 심취한 것 아닌지, 배우 동원력이나 업계 영향력을 볼 때 작품이 좀 아쉬운 수준이 됐으나 그의 과거 업적이 있지 않겠어요. 우블 보면서 저 뻔한 것이 대중성의 이유이긴 하다.......많은 사람이 재미있게 보면 되지않나....자조했답니다. 

 

앗, 이거 제 글 아니네요. 민폐가 이만저만이....

WR
1
Updated at 2022-05-25 10:21:59

제가 『나의 해방일지』를 언급하긴 했지만 유튜브를 통해서 짧은 하일라이트 동영상 몇 개를 본 것이 전부입니다. 언급하신 다른 작품들도 제대로 본 것이 없네요.^^;;

2022-05-25 10:07:19

학창시절 시화전 느낌의,
드라마가 영상시 수준입니다.
참여, 철학, 치유... 해석할 여지가 많은 분이 보시고 심층분석 의뢰드리고 싶네요.

WR
1
Updated at 2022-05-25 10:40:26

좋은 작품인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리고 짧은 클립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작가가 신화적 서사에 매우 능통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중년의 위기와 네키야, 여성을 통한 구원, 타인의 구원을 통한 자신의 구원, 신마르크스주의 철학,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불교철학 등등 이야깃거리가 많아보여요. 그리고 대중성을 위해서 통속적 측면(조폭)을 교묘하게 섞으면서도 그것을 미화하지 않은 것도 훌륭하고요. 하지만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죠. 제가 일전에 책을 읽기 위해서 대부분의 영상물 보기를 포기했다는 말씀을 드린 걸로 이해 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대신 다른 문학 작품들을 더 다뤄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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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5 08:15:34

WR
2022-05-25 09:45:02
1
2022-05-25 08:22:31

아, hubris.. 본인이 아니고서야 납득이 되지 않지만 hubris로 인해 파멸하게 되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 '운명'이란 게 참 재밌죠. 이건 21세기에도 여전하네요, 결국은 '그렇게 되어질 것', 그것을 지금은 모른다는 게 인생의 묘미일 수도 있고요^^ 한편 셰익스피어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본인이 그 모든 범죄들을 저질렀을 거라고요, 어쩌면 박찬욱 감독의 상상력도 셰익스피어의 경우와 같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해봅니다ㅎㅎ 정성스런 글 잘 읽었습니다!

WR
1
2022-05-25 09:45:53

세익스피어도 그런이야기를 했군요. 그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2022-05-25 08:32:27

돈키호테 2부가 메타픽션적인 성격이 특히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1부 역시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경하던 기사도 소설의 세계에 직접 뛰어든 돈키호테 자신이 이미 메타픽션적이지요.
(2부는 말씀하신 것 외에도 돈키호테가 원탁의 기사에 등장하는 대마법사 멀린을 직접 만나는 등 거의 완전한 메타픽션이 된 게 사실입니다만...)
1부의 기사도 소설 화형식이 뒤집어 보면 사실상 기사도 소설에 대한 돈키호테와 신부의 애호를 드러내는 걸 보면 애호와 비판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외적으로야 가사도 소설을 현대의 양판소 마냥 부정하고 비판하고는 있습니다만 수많은 기사도 소설의 클리셰를 굳이 재현하고 묘사하는 걸 보면 기저에는 기사도 소설에 대한 애호가 깔려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결말은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메리 셀리의 욕망과는 상반된 또다른 욕망을 드러내는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괴물의 복수가 자신을 배척하고 외면한 세상에 대한 대리적인 복수라면 결말은 그런 세상과 화해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복원하고픈 욕망이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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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5-25 10:36:00

핵심을 짚은 이야기를 해주셨네요. 제가 '메타픽션적' 소설과 '메타픽션'을 구분한 이유기도 합니다. 사실 본론에서 이야기할 『그린마일』도 메타픽션은 아니지만 메타픽션적 요소들이 있죠. 본문에서 밝힌 『프랑켄슈타인』이나,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같은 작품들의 모티프들이 인용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소설이 메타픽션은 아닐지언정 '메타픽션적'이긴 한 것이죠. 『돈 키호테』 전편의 경우, 구성이 철저하게 액자소설로 되어 작가(세르반테스)가 원작자(베넨헐리)의 이야기를 번역 의뢰해 옮겼을 뿐이라고 시치미를 떼어, 현실과의 이음매를 완벽하게 숨겼습니다. 때문에 그  작품이 매우 '메타픽션적'이긴 하지만 메타픽션이라고 보기에는 불충분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후편에서는 작가의 이름(세르반테스)이 작품의 돈 키호테 이야기 안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전편과 후편을 하나의 연작으로 본다면, 전작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언급되기 때문에 명백하게 메타픽션이죠. 제가 돈키호테를 언급한 것은 그린마일이 메타픽션적 특질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메타픽션이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어서 예로 든 것이기 때문에, 1편과 2편의 차이를 구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편에서 돈키호테가 편력기사 수행을 떠난 것 자체가 소설(양식) 속으로 뛰어든 것이라는 말씀에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맞습니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로망스 양식 안으로 뛰어들어서 그 양식을 모조리 흽쓸고 다녔죠.ㅎㅎ 그런의미에서 정말 '메타픽션적' 이고 이런 정도의 구상이라면 굳이 메타픽션과 메타픽션적 소설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도 완벽하게 동감합니다. 다만 저는 그 두 욕망이 상반되었다기 보다는 '세상과 화해하고 관계를 복원하고픈 욕망'이 거절된 것에 대한 반응으로 복수가 행해졌고, 그 행위를 통해 괴물의 운명이 파멸을 향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과 거부에 대한 복수가 동전의 양면이고 모두 그림자적인 성격인 것이죠. 아시다시피 여성주의 비평에서 괴물의 여성적 성격에 대한 언급은 꽤 많습니다. 국내 번역작품에서도 대부분 그런 프레임을 소개하고 있으니까요. 괴물의 부드러운 성격과 타인의 존재를 갈망하는 관계지향적 성격이 아마도 메리 셸리 자신의 성격의 반영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하나 더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이미 알고 게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글을 쓰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된 것이라 혹시나 해서 알려드립니다. 저는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면서 돈 키호테의 모티프 일부를 차용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두 소설에 나오는 공통인물의 특징이 너무 비슷하거든요. 프랑켄슈타인에서 펠릭스의 정혼자인 터키 여인인 사피는 돈키호테의 등장인물 소라이다와 너무 비슷합니다. 둘 다 무슬림이었지만 유모나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접하고 기독교인에 대한 선망을 간직한 채, 아버지를 배신하고 기독교인 남자를 따라 개종을 하게되지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구글링을 해 본 결과, 메리 셸리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랑켄슈타인을 구상할 당시, 남편인 퍼시 셀리가, 프랑켄슈타인 서문에 언급된 프랑스어로 번역된 독일 괴기 소설 이외에도 돈 키호테를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고 하더군요. 1831년 서문에서 메리 셸리가 소설의 구상과 관련하여 남편의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한 것을 보면, 메리도 그 작품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앞으로도 문학 관련해서 탁견 많이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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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5 11:07:44

프랑켄슈타인이 돈키호테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습니다.(* *)
핑계 김에 프랑켄슈타인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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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5 08:45:17

 원글님글 다 이해는 못하지만 잘 읽고 있어요~~ 점심시간에 정독할께요^^

WR
2022-05-25 10:27:08

말씀 감사합니다. 더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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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5 09:30:22

소개되는 작품들을 절반도 경험해보지 못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런 보물같은 고전이나 명작들을 모르고 여지껏 무얼 보고무엇을 듣고 느끼고 살아왔을까요

읽으면서 점점 제 뇌용량이 처리할수있는 한계가 느껴지던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WR
2022-05-25 10:28:39

저도 소위 필독도서중 못읽은 책들이 많고 그나마 이 정도라도 읽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니코데무스님은 다른 값진 경험들을 해 오셨겠죠. 저는 놓친 것이 많습니다. 좀 더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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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5 09:38:42

문학박사님이신가 보군요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WR
2022-05-25 10:29:24

아닙니다. 진짜 박사님들이 눈살을찌푸리시겠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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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5 09:43:48

겉으로 드러난 줄거리만 봤을 때 그린마일이 스티븐 킹의 다른 작품에 비해 딱히 비극적이라고 느끼지는 않았는데 대속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그렇게 되는군요. 

새삼 느끼는 거지만 비평이라는 것이 참 심오한 것 같습니다.

본편이 기대되네요.

WR
2022-05-25 10:30:29

그린마일은 정말 잘 다뤄야 하는 횟감 생선 같습니다. 망치지 않고 잘 요리할 수 있을지 걱정되네요. 일단 스끼다시는 최상은 아니더라도 구색은 맞춘 것 같습니다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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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5 09:58:48

드라마 완결되면 몰아서 보는 취향이라 일부러 안보고 있었는데 글 초반에 '나의 해방시대' 거론된 부분에서...

뭐 그거야 드라마 안 본 제 불찰이라고 치고, 수준 높은 글 잘 봤습니다.

속히 2부 올려 주세요. 

WR
2022-05-25 10:32:53

말씀감사하고 나의 해방일지 스포는 아직 안 본 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네요. 꼭 필요한 정보도 아니고 구작으로 대체해도 되는데 마땅히 생각이 나질 않아서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마 2편은 3일 안에는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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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5 11:22:54

그린마일 영화를 10 여 년 전에 봤다가, 최근에 다시 봤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든 첫 번 째 감상은, 이 시대의 예수를 그린 영화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성이 악한 인간들에 지쳐서 세상을 등져버리는 예수의 모습. 

WR
2022-05-25 13:42:03

그러시군요. 글을 쓸대까지 스포는 자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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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5 11:30:14

DP의 킬러 컨텐츠 반열에 올라 서신듯 ^^ 

WR
2022-05-25 13:42:35

과찬이시지만 재밌게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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