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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스티븐 킹의 『그린마일』은 왜 20세기 최고의 비극론인가?(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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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5-31 02: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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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글을 쓰고 2~3일 내에 완결편을 올리려고 계획했지만 역시 모든 계획은 연기되기 마련인가봅니다. 이런 저런 일로 5일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결론을 내기에 앞서 『그린마일』을 한 번 쯤 다시 읽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역시 그러길 잘했다는 겁니다. 글을 더 정확하게 쓰기 위해서 읽었지만, 그 것 보다는 이 대단한 작품을 다시 한 번 읽을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쉽게 술술 읽히는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언제건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읽은지가 거의 4반 세기가 지나도록 다시 들춰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제목처럼 20세기를 대표할만한 걸작 문학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만약 스티븐 킹의 팬이면서 『그린마일』을 한 번 밖에 읽지 않은 분이 있다면, 꼭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다면 다른 작품들은 몰라도 이 작품과 『내 마음의 아틀란티스』 연작은 소장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내 마음의 아틀란티스』 연작이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동명의 중편 또한 소장가치가 충분한, 그러니까 언제건, 몇 번 이고 다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장르 소설이나 스티븐 킹의 팬으로서가 아니라, 세계문학사적 관점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만큼 이 소설은 훌륭한 작품입니다.

 

 그러면 예고한대로 『그린마일』이 왜 그렇게 대단한 작품인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비극'이란 장르는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인류의 문예사 초창기에서 부터 발전해온 장르이고(아마도 문자화되지 않은 구전을 포함한다면 더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만 년 이상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의 기원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 무고한 희생자나 희생물을 바치던 제의에서 연원되었습니다. 이러한 풍습이 점차로, 상징화 추상화되면서, 희생의 물질적 규모와 참혹함은 점점 줄고 상징적인 의례 행위로 남게 되었죠. 진짜로 인간을 희생물로 공양하는 행위에서(이삭의 희생제의), 희생양을 도축해 불에 태우는 행위를 거쳐, 포도주와 밀전병을 조금 맛보는 성찬식으로(미사 의례), 또는 사람의 머리 대신 만두를 빚어 강에 제사지내는 행위(삼국지연의)로, 직접 사람을 강물에 던져 제사지내는 행위에서 잠시 물에 던졌다가 건져내는 행위로(황석영의 소설 『심청: 연꽃의 길』), 또 거기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희생되는 것(그리스 비극)으로 대체되면서 동일한(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고 약화된) 속죄의 심리적 효과를 기대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비극은 그리스를 거쳐, 중세 유럽의 여러 전승으로, 그리고 세익스피어 비극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물론 여기서는 『그린마일』이 속한 서구의 문학전통에 주목하고 있지만 다른 지역이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죠. 자잘한 차이는 있어도, 대속의 의례를 위해 상징적 의례와 이야기의 전승과 창작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인간의 희생제의는 인신공양에서 동물희생, 상징의례, 비극 등으로 끊임 없이 추상화, 상징화 되어왔다.

 위로부터 차례로, 페루 고대 "치무"문명의 영유아 인신공양, 동물희생제의의 이미지(예수 그리스도의 상징), 천주교 미사 성찬식 전례, 현대적 그리스 비극.

 

 그리고 앞서 말했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도 이 자장 안에 있는 작품이죠. 지난 번 글에서 메리 셸리의 유년의 경험이 그에게 결핍감과 분노와 같은 무의식적 억압기제를 만들고, 아마도 『프랑켄슈타인』에 그런 자신의 그림자를 투영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말씀드렸습니다. 셸리는 이 작품을 가지고 무엇을 했던 것일까요? 비극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셸리는 작품을 통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게 자신의 그림자적 특질과 그 특질들이 세상과 갈등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죄를 저지르는 비극을 대신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셸리는 괴물의 비극을 대리 체험함으로써, 죄와 처벌의 경험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현실에서 그러한 일을 실제로 저지르지 않도록 균형을 잡은 것입니다. (이 논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전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 예를 통해 주장의 정당성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화학이나 분석심리학적 시각에서는 표준적인 설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다루는 작품, 스티븐 킹의 『그린마일』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이 작품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비슷한 점이 아주 많습니다. 『그린마일』의 중심인물인 존 커피는 세상에 마음 둘 곳이 하나도 없는 천애고아 흑인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여기 저기를 떠돌아 다니며 날품팔이로 연명합니다. 당연히 가족도 친구도 없어 늘 외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늘 도우려 노력합니다. 키가 2미터가 넘고 몸무게도 150킬로 이상 나갈 것 같은 거한으로 당시의 기준으로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격은 리트리버보다도 착하고 소심합니다. 그러나 1930년대 초의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 분위기 속에서 그는 무시당하고 멸시 받고, 의심받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로 돌아가 봅시다.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도 마음은 비단결 같고 육체적 능력도 인간을 훨씬 뛰어넘을 만큼 대단하지만(여기서 약간 딴지를 건다면, '괴물'의 존재가 어떻게 가능한지 불가사의 합니다. 육식을 하지 않고 나무 열매나 채소로 연명할 수 있으면서도 추위에 강하고 힘과 스피드에서 모두 인간을 압도합니다. 그러려면 아마 하루 종일 먹고 싸고 자는 것 이외의 활동을 기대하기 힘들겠죠. 『프랑켄슈타인』이 갗 성인의 문턱에 들어서 어린 여성의 데뷔작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걸작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 셸리가 이 작품을 쓴 나이가 만 18세 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완벽한 고증으로 이야기의 현실성을 불어넣기에는 한참 어린 나이죠. 당시에는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도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동물생리학적 지식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도 합니다.), 혐오스럽게 창조된 겉모습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오해를 사게 됩니다. 괴물은 처음에 존 커피 처럼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도 몰랐고(나중에 글을 읽을 수 있게되면서 프랑켄슈타인의 연구일지를 보고 짐작하게 됩니다.), 처음 본 빈곤한 가족들을 보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들을 남몰래 돕지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사람들의 혐오를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을 만나기 위해 숨어서 프랑켄슈타인의 고향인 제네바로 떠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물에 빠진 소녀를 구하다가 소녀의 아버지에게 총을 맞게 됩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이렇게 자신의 호의가 계속 배신당하자 결국 프랑켄슈타인의 가족들을 하나하나 살해하고 마지막으로 프랑켄슈타인까지 죽음에 이르게 하여 자신의 분노를 푼 후, 그 행동에 죄책감과 고통을 느끼며 자살하기 위해 북극으로 또나게 됩니다. 북극은 세상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세상과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괴물의 마음 속이 아마 북극이었을 겁니다. 아무도 없는 엄혹한 환경 속에서 자신을 화장하기 위해 떠나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의 처지는 너무 불쌍해서 동정심을 자아내고, 그 결말을 통해서 우리는 괴물이 저지른 범죄를 비록 용인 할 수는 없지만, 이해와 연민을 가지게 됩니다. 괴테가 자신이 『젊은 베르터의 고통』을 쓰지 않았다면 아마도 자신이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 처럼, 어저면 메리 셸리도 괴물로 하여금 분노로 죄를 짓고 그 댓가를 치뤄 자살하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비참한 심정과 울분을 가지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괴물은 메리 셸리를 대신해서 죄를 짓고,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메리 셸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마음의 균형을 회복해서 아마도 현실을 사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얻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품 『프랑켄슈타인』은 완벽한 비극이자, 사이코드라마입니다. 

 

 다시 『그린마일』로 돌아가봅시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그랬듯이, 이 작품의 존 커피도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두 소녀를 도우려다, 떠돌이 흑인, 그것도 지능이 떨어지고 엄청난 체구를 가졌다는 것 때문에 오해를 받아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린마일』이 『프랑켄슈타인』과  갈라지는 지점은 여기서부터 입니다. 존 커피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복수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을 뒤집어 씁니다. 전기의자 사형집행 집행 전에 마지막 유언이 없느냐는 교도관의 물음에 존 커피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지만(그래서 어쩌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지만), 무고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메리 셸리가 저지를 수도 있던 죄를 대신 저지르고 처벌을 받습니다. 여전히 창작자의 죄와 벌을 대리한다는 점에서 괴물은 희생양이지만, 창작자와 독자 모두 그것이 우리의 요구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창작물의 등장인물이 선택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운명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괴물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을 죄를 지었고, 때문에 벌을 받았습니다. 만약 괴물이 소설 안에서 자신을 변명하고자 했으면, 작가와 우리는 도덕적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고 누군가가 괴물을 처치해야만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프랑켄슈타인』과 『그린마일』의 에피소드의 유사성, 『프랑켄슈타인』 의 괴물과 『그린마일』의 존 커피는 모두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처지로, 위기에 몰린 어린 소녀들을 구하려다 오해를 받고 폭력과 죽음에 노출된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온당한 평가일까요? 오히려 이것은 일종의 투사행위와 유사합니다. 사실 여지껏 인류가 지속해온 희생제의를 통한 대속이라는 유서깊은 전통 자체가 그러합니다. 투사란 우리의 어두운 면을 타인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스스로 믿는 행위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유럽에서 크고 작게 이루어져왔던 유태인 박해, 학살이 있죠. 유럽 역사에서 권력에 의해 유태인들이 주기적으로 박해받았던 이유는 주로 그들의 경제적 부를 강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상 유럽인들의 탐욕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역으로 유태인들의 탐욕과 기생본능 때문에 그들은 말살당해도 싸다고 자신들의 탐욕을 그들에게 투사해버렸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벌어졌던 수 많은 비극에서도, 최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반응에서도 이런 투사는 늘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의식적으로 경멸해 마지 않는 어떤 특질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보통 인간이 견디기 힘든 것이니까요. 사실 이런 투사는 특별히 인성이 좋지 못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평균 수준의 인간이 누구나 하는 것이라는 것을 늘 상기해야 합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가 지금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어둡고 비열한 면을 투사하는 중일 것이고, 남에게 발견한 그 더러움과 역겨움을 비난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을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디피의 몇몇 회원들을 염두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아니라요! 놀랍지 않습니까? 누구를 비난하는 뉴스가 뜨면 잘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섣불리 같이 비난했던 과거가 있음에도, 그러한 멍청함과 생각 없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 냉소적으로 비난하고 자신의 결백을 확신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희생제의의 논리와 아주 유사하지 않은가요? 다만 희생제의는 적어도 자신의 죄를 '흠없이 어린양'이 뒤집어 쓴다는 것을 자각하기라도 합니다. 물론 이것도 윤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죄를 누군가가 대신 뒤집어 쓸 수 있다는 사고 자체가 얼마나 비열한 일인가요? 마치 노비가 양반의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곤장을 맞고, 내시가 세자의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회초리를 맞는 것과 다를 바가 없죠.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이것보다는 진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죄를 저지르는 자의 행동이 피치 못한 것이었음을, 고결한 마음의 소유자도 환경 때문에 죄를 저지를 수 있음을 알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니까요. 그러나 여전히 충분히 윤리적이진 않습니다. 우리는 괴물이 작가와 독자의 죄를 뒤집어 썼음에도 불구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고, 자신의 죄를 변명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괴물이 동정받는 이유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댓가를 치르기로 결심한 영웅적 행동 때문이지, 그것이 우리에게서 강요된 것을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대속하기 때문이라고 의식적으로 느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나마 이것은 나은 편입니다. 아예 이정도의 윤리 감각도 없다면 세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 같은 작품이 나오게 됩니다. 유럽인들이 자신의 비열함을 투사한 샤알록이야 말로 진정한 희생양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해 아주 예민한 소수의 독자 말고는 샤알록의 최후가 정당한 것이었다고 느끼고, 누구도 그를 연민하거나 대속의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이 『베니스의 상인』에 희생양이 등장하면서도 그것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며, 이 희극이 비열한 작품인 이유입니다. (마이클 레드포드가 연출한 영화 『베니스의 상인』은 이 점을 아주 노골적으로 비판합니다.)

 

마이클 레드포드가 연출한 베니스의 상인』. 이 작품은 당시 유럽의 반 유대주의의 진짜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  

 

 그러나 『그린마일』은 『프랑켄슈타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달리, 『그린마일』의 작가 스티븐 킹은 존 커피가 완전히 무고한 존재임을 확실하게 알렸습니다. 완전히 무고한 존재이면서 우리의 죄를 대속했기에,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대속한 존재에 대해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낄 수 밖에 없으며, 앞으로 내가 저지를 죄는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한다고 느끼게 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 모두 짐작하셨다 시피 기독교 신약의 이야기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신 야훼의 아들로서, 아무 죄가 없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존재이지만, 오로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세상에 온 존재입니다. 그가 우리를 연민했기에 그 죄와 벌을 순순히 감당한 것이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나 샤알록처럼,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당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고, 그렇게 때문에 우리의 죄를 희생양에게 투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어두운 면을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습니다.(물론 기독교을 깊이 이해한 소수의 사람들만 그렇습니다.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제도권 기독교인들이야말로 투사의 귀제들인데, 이는 기독교의 배타적 성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상적인 기독교도 온전히 윤리적인 종교라고 보기 힘든 이유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의 정신은 최소한 희생제의를 행해왔던 종교들보다는 발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전의 종교와 제의, 비극들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투사의 문제를 의식 위로 끌어올려서, 그런 행위가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을 아는 기독교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이것을 진실로 아는 사람이라면 제도권 밖의, 예수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린마일』의 존 커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현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 킹은 작품에서 이것을 바보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러나 너무 노골적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공을 들여서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첫 째, 이니셜의 공통점입니다. 존 커피(John Coffey)의 이니셜은 에수 그리스도( Jesus Christ)와 같습니다. 이니셜을 같게 하여 기존 작품이나 현실의 인물을 오마주하거나 풍자하는 것은 현대 작가들이 자주 쓰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폴 오스터는 『뉴욕 3부작』에서 다니엘 퀸(Daniel Quinn)이라는 등장인물을 내세워 이 작품이 『돈 키호테(Don Quixote)』의 메타픽션 전통을 계승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둘 째, 존 커피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한 치유와 재생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 째, 작중화자인 폴 에지콤의 꿈을 통해 노골적으로 존 커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라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폴 에지콤 일행이 교도소장 할 무어의 아내를 치유하기 위해 존 커피를  할 무어의 집으로 데려간 다음, 잠깐 졸면서 꾸는 꿈에서 일행은 로마 군단의 백부장들이었고, 존 커피가 들라크루아와 윌리엄 워튼을 양 옆에 두고 십자가에 메달리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를 십자가에서 내리고 싶지만 사다리를 치워버려서 내릴 수 없는 꿈을요.

 

영화 『그린마일』에서 영화를 보며 넋을 잃은 존 커피. 소설에는 없는 장면이지만 프랭크 다라본드 감독은 이 장면에서 영사기의 빛을 마치 존 커피의 후광처럼 묘사해 그의 신성을 간접적으로 은유했다. 

 

 

이 밖에도 공통점은 많지만 이정도로 하겠습니다. 아마 앤간히 둔한 독자가 아니라면 이 상징적 비유를 깨닫지 못한 독자는 얼마 없었을 겁니다.  존 커피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이 세상의 구세주로 왔지만 비천한 출신이어서 조롱받고, 그러나 흠없는 어린양이며, 예수가 골고다의 언덕을 올랐듯이 전기의자 처형에 이르기 까지, 참관인들의 적의와 분노, 멸시를 받아냅니다. 그러나 존 커피는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은체 그들의 죄를 모두 감당하면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을 다시 읽으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사실 저도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훌륭한 작품들을 읽어봤지만 두 번째로 일그면서 눈물이 터진 작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스티븐 킹이 작품을 난해하지 않게 썼다는 이유로 그를 세계에서 가장 천재적이고 위대한 작가 중 하나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의 속물근성을 진정으로 존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ㅎㅎㅎ)  

 

 골고다의 언덕에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한 그림과 영화 『그린마일』에서 전기 의자에 앉은 존커피  

 

  사실 기독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가 전형적인 비극의 구조에 포함된다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애초에 그리스도의 상징이 "흠없는 어린 양" 것 부터가, 이 이야기가 일종의 희생제의임을, 그러나 그 희생제의의 부도덕한 성격을 드러내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 이야기 이후에는 희생제의는 불필요해졌고, 또 불가능해졌습니다. 인간이 벌이던 희생제의가 전능한 신에 의해 마지막으로 행해졌고, 이후로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투사와 같은 행위를 스스로 금해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우리의 죄와 우리의 어두운 면을, 온전히 우리의 내면 안에서 해결하고 녹여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린마일』에서 존 커피는 타인의 병을 자신이 녹여서 벌레로 뱉어내고 그것은 무해한 흰색 가루로 변화해서 녹여내줬지만, 이제 우리는 존 커피에게 그런 일을 시킨가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어쩌면 존 커피를 닮아 타인의 병과도 같은 죄와 어두운 면을 우리가 녹여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이 장면에 대한 연금술적 해석도 흥미롭지만 이 글이 이미 한 없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에 다루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위업이고, 스티븐 킹이 예리하게 간파해낸 비극의 논리인 것입니다. 

 

 스티븐 킹은 기독교의 출현 이후에도, 우리가 그 의미를 제대로 의식화 시키지 못하고, 여전희 희생양을 통한 대속을 자행해왔으며, 그것이 사실은 비겁한 투사, 윤리적으로 용납하기 힘든 이기적 행위라는 것을 『그린마일』이라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알린 것입니다. 기독교 이후에 희생제의가 불가능하게 되었듯이, 『그린마일』 이후의 비극은 그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비극의 투사적 성격을 마침내 이 작품으로 인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도처에서 비극은 창작되어지고,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어두운 면을 투사하며 살아가겠죠. 대부분은 몰라서 그러겠지만 아는 사람도 그러한 고결한 윤리관을 체화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간이라도 『그린마일』이 밝힌 비극의 성격을 이해하고, 나의 죄를 온전히 나의 몸과 마음 안에서 녹여낼 수 있는 경험을 단 한 번이라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바로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바로 구원의 순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이고,  『그린마일』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비극론인 이유입니다. 21세기에 또 어떤 혁신적인 비극론이 등장할지 모르지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다시 융 심리학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진실로 우리시대의 짱 위대한 작가 스티븐 킹. 그는 위대한 이야기꾼인 동시에 예리한 문예이론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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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2-05-29 09:50:18

책도 아니고 영화를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봤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근간 4K 블루레이를 받아 화질의 관점에서나 다시 본 영화지만
이게 다는 아닐 것 같았던 느낌이 있었는데 덕분에 작품에 덮여있던
막이 한꺼플 벗겨지는 느낌이네요.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또 다른 각도에서의 감상이 되겠네요.
항상 좋은 글 고맙습니다.^^

WR
Updated at 2022-05-29 10:09:38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소설과 영화를 다 본 경험자로서 말씀드리지면 이 작품을 영화만 보고 소설을 보지 않는 것은 정말 큰 아쉬움입니다. 아무쪼록 소설도 보실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1
2022-05-29 10:00:47

그걸 알면서도 아직 기력은 남아있지만 할배 티를 내느라
책까지 욕심내긴 힘들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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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5-29 10:16:36

"인간이 벌이던 희생제의가 전능한 신에 의해 마지막으로 행해졌고, 이후로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투사와 같은 행위를 스스로 금해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우리의 죄와 우리의 어두운 면을, 온전히 우리의 내면 안에서 해결하고 녹여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정말 생각지 못했던 것이네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바에 따르면 대속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점이 불교의 인과응보와 크게 다른 점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말씀처럼 이해하면 결국 둘이 통하는 부분이 있군요. 의미심장합니다.

WR
Updated at 2022-05-29 10:32:16

탈리샤샤님은 제 글을 항상 좋게 평가해주시는 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쭙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이 글이 혹시 지루하거나 난해한 구석은 없었는지요? 명료하게 쓰느라 노력은 했는데, 이어지는 글의 후편이라 읽는 분들이 어떻게 느끼셨을지 궁금합니다.

 

사실 부끄럽지만 이 글은 말슴하신 부분처럼 제 개인적인 해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존의 정통적 해석들을 전부 되집은 다음 논증하는 과정이 길어서 읽는 분들에게 어려움을 끼쳐드리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기존의 해석과 표면적으로 상충하는 부분도 있을 거고요. 그게 너무 과하지 않고 설득력이 있게 느껴졌다면 안심하고 약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2022-05-29 10:31:57

내용이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에서 난해한가 물으시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쓰신 노력이 엿보입니다.

지루하냐고 하신다면 전편과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는 점에서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원래 한 편으로 계획하신 것을 나눠서 쓰시느라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궁금한 점이 생기는데 이렇게 물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혹시 제가 글의 내용을 영 딴판으로 오해해서 그런 것인가요? ^^;

WR
Updated at 2022-05-29 10:54:04

아무래도 복습겸 해서, 전편을 못읽은 분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쓰느라..

 

아뇨, 최소한 탈리샤샤님처럼, 제글을 선해해주시는 분 마져도 제가 납득을 못시키면 이 글은 실패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그렇진 않아서 다행입니다.
1
2022-05-29 10:31:16

 헐...........이런글을 방대한글을 일목요연하게 쓰시다니!

저도 그린마일 다시볼래요!!!!!!!

WR
2022-05-29 10:34:01

오 앙코르님도 재미있게 읽으셨어요? 궁금궁금~

1
2022-05-29 10:37:08

음........졸재미있게 읽었..............어요 크흡 고백했답

WR
2022-05-29 10:38:39

우왕 감사합니다.^---------------^ 그린마일은 여러 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잘 쓴 소설입니다. 

1
2022-05-29 10:45:30

대속의 행위가 점점 순한맛이 되어온 것은 종교적?관점으로는 분명 마이너스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인류의 문명의 발달과정과 함께 본다면 그 대속의 행위조차 원하지않는 사람이 대신 져야하는 짓들이 자행되었을 것이 확실하기에(현대의 자본주의 시대를 본다면 더더욱)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신께서 그 짐을 해방시켜주신것은 아닐까(노비문서 소각과 같은)..
하는 뻘 생각도 하 보았습니다

이어질 융의 이야기.. 기대됩니다

WR
2022-05-29 10:50:02

그런 점도 있겠죠. 그러나 뒷부분에 말씀하신것이 저 또한 핵심적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대속이라는 행위 자체가 비윤리적인 측면이 있고, 기독교는 그 더 이상 그 행위를 필요 없게 만들었습니다. 두 번 다시 신의 아들이 인간을 위해 대속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예수의 대속 이후 저질러지는 죄는 개인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이 되었죠. 스티븐 킹은 이러한 대속 행위가-인간이 여태껏 해온 이 행위가- 사실은 못할짓이라는 것을 감동적으로 설파했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2022-05-29 11:05:33

'기독교는 그 더 이상 그 행위를 필요 없게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서 본다면 '원죄'에 대해서는 십자가의 보혈로 씻기워졌다고 '믿는' 행위 혹은 신앙고백으로 그것이 유효하게 되는 것인데 그런 의미가 많이 퇴색해버렸거나 변질되어 버린 느낌입니다

그리고 소소하게? 짓는 죄에 대해서는 여전히 죄사함의 절차가 남아있어야할 것 같은데.. 현대의 기독교신학에서는 더이상 그런 것들을 다루지않는것 같아요 혹은 너무 어려운 용어로 다루다보니 제 이해의 수준이 다다르지 못하고 있던지요

WR
Updated at 2022-05-29 11:15:35

인용하신 말은 예수의 대속이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인류의 원죄를 대속함으로서,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그것을 믿음으로서 죄사함이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는 제로베이스에서 오로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쓴 것입니다. 이후의 죄 사함은 개인의 속죄를 신이 가납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저것은 기독교의 죄사함의 의미에 대한 제 개인적인 해석이고 정통적인 교리와 다른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자분들이 느끼시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독교가 진일보한 종교라고 생각하거든요. 

 

1
2022-05-29 11:16:04

이해하신거 맞습니다

다만 현실의 기독교인들(어쩌면 저도 포함)에게 그런 인식도 점점 약해지고 교회에서도 정확히 가르치지않고.. 어둡고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요

WR
2022-05-29 11:17:30

그렇군요. 답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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