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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융 심리학 입문] 1-12. 돈 키호테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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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6-16 15:18:04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 키호테』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인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근대 이전 기사도 로망스의 패러디일 뿐 아니라 근대 소설의 효시이며, 서사 양식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메타픽션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형식적 틀 안에서 『돈 키호테』는 비극과 희극, 풍자극과 아이러니라는 사실상 서구 서사장르의 모든 형식을 이 한 작품안에서 교묘하게 결합하고 비틀어서 그 독창성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제게는 이 작품이 산만하고 들뜬 분위기와 계산적이지 못한 허술함 때문에 마음에 꼭 드는 작품은 아닙니다. (차라리 저는 더 냉소적이거나 플롯의 아귀가 꼭 맞고, 우울질의 사색을 곁들인 작품 스타일을 좋아하지요. 세익스피어의 비극이나 말년의 작품, 혹은 괴테나 플로베르 같은, 좀 더 후대나 북쪽 지역의 작품들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와 근대를 통틀어서 『돈 키호테』보다 더 풍부한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서사 작품이 있느냐 하는 물음에는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이 작품은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술형식의 혁신성이라는 측면에서 누구나 최고라고 경배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작품입니다.  그 영향력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장하게 흘러와서,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처럼 노골적으로 모방한 작품이나,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처럼 메타소설적 특징을 심층적으로 탐구한 작품이 수도 없이 창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또한 이렇게 서사 양식을 특징짓는 혁명적 특징 말고도 시대를 초월한, 심오한 인간의 본질적 존재양식을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이제껏 제가 이 시리즈를 써오면서, 여러 문학작품들을 통해 다뤄 온 억압된 그림자의 문제와 중년의 위기에 대한 가장 복잡하고 자세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나이가 훌쩍 지나, 몹시 위험하고 격렬하게 중년의 위기를 겪어나가는 한 미치광이 노인의 이야기이죠. 늦은 사춘기를 힘겹게 겪는 소년처럼, 이 소심하고 불쌍한 노인은 자신의 욕망을 힘겹게 억누르다가 결국 한계에 부닥치고 병적인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그 못지 않게 미친 조력자와 함께 말이죠. 이런 상황이니 그가 겪고 극복해야 하는 '중년의 위기'는 다른 서사의 주인공보다 몇 배로 기괴하고 힘들어서 보는 사람도 진이 빠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도 결국 그는 형식적으로는 비극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희극인 형태로 자신의 모험을 완수합니다.(반대로 겉보기에는 희극이나 내용적으로는 비극이라고 해석하는 평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주인공, 돈 키호테가 비록 자신의 망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 임종을 맞이한다는 슬픈 결말에도 불구하고, 돈 키호테의 내면은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고 초탈해져서 죽음을 위해 준비하는 인생 후반의 여정을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플롯의 분위기가 상승하며 긍정적인 결말을 향해 나아가므로 희극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이재껏 제가 다뤄온 여러 서사 작품에서 발견되는 그림자와 중년의 위기의 모티프들, 즉 에난티오드로미(enantiodromie: 대극반전), 네키야(nekyia: 밤바다 여행), 모순적 요소들의 균형 같은 것들 뿐 만 아니라, 정신분열증 같은, 심한 정신적 위기를 겪는 인물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병리적 현상까지도 빠짐 없이 작품 속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묘사가 얼마나 정확하고 자세한지, 마치 세르반테스가 융에 앞서 분석심리학의 주제들에 대해 먼저 충분한 연구를 했던 것이 아닐가 할 정도입니다. 물론 세르반테스는 시대적으로도 그러한 연구가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에 살았고, 당대 기준에 비추어보아도 교양이나 학식이 탁월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에는 힘든 작가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돈 키호테』는 작가의 엄청난 직관과 관찰에 의해 쓰여졌던지, 아니면 그의 손을 빌려 창조된 신의 작품일 것입니다. 융은 신의 정의를, 우리의 정신 안에서 우리의 이성과 의식을 뛰어넘어, 우리의 정신적 통합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전일적 존재라고 내렸으므로 이런 진술도 그렇게 비합리적이라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에서 분석심리학적 주제, 그림자의 억압에 의한 중년의 위기와 통합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분석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스페인 라만차 지방의 시골 지주인 키하나 노인은 기사도 로망스(흔히 기사도 소설이라 번역하기도 하지만, 소설이라는 말이 우리의 문예 전통에서 말하는 잡다한 서사 양식을 통칭하는 것이 아닌, novel이라는 근대 서사양식의 임의적 번역어인 점을 감안해서, novel을 소설, romance는 음역 그대로 로망스라 지칭하겠습니다.) 의 광적인 애호가이자 굉장히 소심한 생활인입니다. 그는 가족으로 오래 그를 돌봐준 하녀 한 명과 질녀 한 명이 있을 뿐, 독신이기도 하죠. 지금에야 상황이 다르지만, 그 당시 남부 유럽에서 "재산 꽤나 있고 신분도 높은" 성인 남자가 독인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통사회에서는 어느 때가 되면, 남자는 자신이 가족의 삶을 건사하고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성인이 되면서 결혼할 자격을 인정받았죠. (우리 말에서 '어른' 이라는 말의 어원이 성교를 의미하는 '얼우다'에서 온 것을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자격을 어떤 결절점을 통해 부여하는 의례가 통과의례이며, 이 의례에 대해서는 전편인  1-7: 상징과 의례의 기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입문의례 말고도 소년을 성인으로 준비시키는 오래된 메커니즘이 또 있습니다. 바로 영웅사사입니다. 여러 영웅의 이야기는 사실 온전한 성인이 되기 위하여 거쳐나가야할 인생의 과업들에 대한 수 많은 은유들로 이뤄진 교육용 이야기들입니다. 아이들과 청년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자신과 영웅을 동일시하고 그 서사에서 인생의 장애물들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영감을 얻습니다. 예를 들어 흔히 기사는 공주를 구출하기 위해 용을 죽이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적절한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데, 여기서 용은 모성의 과보호나 미성숙한 젊은이에 대한 기성세대의 무시, 편견 같은 것들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영웅사사란, 한 개인이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고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 인생 전반부의 과업을 완수하는 것을 돕기 위한 예술의 형태인 것입니다. 

 

 자신의 서제에 틀어박혀 사회적으로 억제된 욕망과 환상에 몰두하는 돈키호테(구스타프 도레의 판화)

 

  키하나 노인(돈 키호테)이 도락으로 삼았던 기사도 로망스도 이러한 영웅서사의 한 장르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키하나 노인이 50이 넘은 중늙은이의 나이라는 겁니다. 당시의 중년에 대한 인식은 현대와 달랐습니다. 지금에야 50은 넘어야 중년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불과 몇 십년 전만 하더라도 30대 중반이면 중년으로 취급되었죠. 잠깐 이전에 다루었던 인간의 생애주기에 관해 간략하게 복습을 해보겠습니다. 소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에 남자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반듯한 직업을 가지고 자식을 키워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여러 특질 중 어떤 것은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강화해야 하고, 어던 것은 억눌러서 내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적 협동이 중요한 농경사회라면 겸손하고 남을 돕는 성향은 더욱 키워내야 하고,  자신의 우월함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억눌러야 합니다. 또 농경사회는 비교적 인구가 조밀해 불문율이든 성문율이든 사회적 제도가 잘 정비되어있는 경우가 많아 속임수가 잘통하지 않고 많은 경우 징벌이 됨으로 정직하고 근면해야 합니다. 반면 인구밀도가 낮은 유목 사회에서는 농경사회와 반대되는 특징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공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혹은 힘이 미약한 사회에서는 때에 따라서는 상대를 속이고 착취하는 등, 임기응변에 강해야 하고, 절대로 위신을 잃어서는 안되므로 뽐내기 좋아하고 폭력적이고 잔인한 면 마져도 미덕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근동의 구약의 창세기에서 가족을 속이거나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인물이 후계자로 선택되기도 하고, 오디세우스 같은 트릭스터 영웅이 선호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면 독일이나 일본의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은 그 반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죠. 이처럼 사회적으로 장려되는 특징들, 즉 사회적 협력이나 개인의 생존을 조화시킬 수 있는 특징들은 강화되에 한개인의 공적인 모습(페르소나)으로 자리 잡고, 억눌린 성향들은 그림자가 되어 무의식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사회적인 일원으로서의 과업을 완수하게 되면 억눌린 본성을 자신의 페르소나와 조화시켜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년의 위기를 겪게 되는 이유이고, 이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노력이 네키야, 즉 밤바다 여행이라는 신화적 에피소드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1-5번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퀴클롭스를 속이고 탈출하는 오디세우스 일행과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지위를 획득하는 야곱. 이처럼 생활환경에 따라 각 문화의 롤모델이 되는 영웅들은 사기꾼의 모습을 띠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융의 이론에 의하면, 이렇게 사회적으로 장려되는 모습은 페르소나(사회적 가면, 공적인 모습)로, 억제되어야 하는 특성은 무의식의 그림자가 되어 심리적 에너지가 축적된다.   

 

 

  그런데 뭔가 좀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키하나 노인은 이미 중년의 나이를 훌쩍 지난 나이임에도 여전히 아이들마냥 기사도 소설에 탐닉해서 그것을 진짜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고 그것이 생활의 중심이 됩니다. 거기다가 한 30년 전 쯤에 했어야 할 결혼도 못한 상태죠. 재산과 지위를 물려받았지만 누가 봐도 한 사람 몫을 하는 어른이 아닌 것이죠.  키하나 노인의 친구인 신부와 이발사가 그의 기사도 소설을 싹 치워버린 이유는 물론 그것이 카톨릭의 윤리와 어긋나는 위험한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진즉에 졸업했어야 할 행위에 여전히 탐닉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사실 그들이 그 책을 치워버리기로 결정한 것도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친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지 무슨 종교재판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죠. 현대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취직할 생각도, 연애할 생각도 안 하면서 허구언날 집에서 게임팩이나 모으고 레고를 조립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다 못해 어느날 자식이 외출한 틈을 타서 그것을 싹 치워버리는 부모의 심정과 비슷했을 겁니다. 이처럼 돈 키호테는 시작부터 인생의 전반기 과업을 완수하는데 실패한 노인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아마도 키하나 노인은 굉장히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의 특징이 소설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로망스 읽기 같은 개인적 취미에 몰두하는 것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에게 착하고 성실한 이미지였다고 하죠. 소설을 보면 모두들 키하나 노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가 정신이 나가 기사가되면서 숭배하는 귀부인이 되는 둘씨네아도 평범한 농부의 딸인데, 몇 년 전에 먼 발치에서 몇 번 본 것이 전부이고 말 한 번 붙여본 적이 없습니다. 보통 남자들이 연애와 결혼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무릅쓰고 도전을 해야 하죠. 거부의 괴로움과 창피함을 감수할 자신이 없어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어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이런 소심한 사람들에게 열정이라는, 자신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감정이 닥쳐서 물불을 가리지 않도록 만들기도 하고요. 

 

  그러나 키하나 노인은 결국 이렇게 인생에서 필수적인 과업을 완수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습 지주로서 딸린 식솔을 건사하고 재산을 보존해야할 의무는 여전히 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도전이나 어떤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물려받은 조건에서 자연적으로 따라 온 것이기에 회피할 수 없는 것이었죠. 이런 살황에서 그는 결혼을 하지도 못하고, 어떤 적절한 입문의례를 통해 자존감을 가질 수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더 기사도 로망스의 환상 속으로 도피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증명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훌륭한 여인과 사랑을 완성하고 싶지만, 그것은 소심한 키하나 노인에게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그러한 욕구들을 억압하고 인생 전반기의 과업도 완수하지 못한 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웃자란 쭉정이 처럼, 아무 가치 없는 중년의 귀기를 겪은 가련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 상황에서 억압을 견디는 힘은 점점 약화되고 에난티오드로미. 즉 대극반전(억압된 그림자가 축적된 에너지를 분출하여 페르소나와 자리를 뒤바꾸는 것)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융의 임상적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내향적인 사람이 대극반전을 일으킬만큼 심리적 에너지가 축적되어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같은 병리적 현상이 일어나는 빈도가 더 빈번하다고 합니다. 물론 정신분열증(조현병)은 아직까지도 명확한 발생기작이 밝혀진 증상도 아니고 내향적 성향이나 스트레스가 증상의 원인이 되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최근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조현병 환자들이 대체로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인 높은 피질 각성수준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작품 속에서 기사 수행을 떠난 돈 키호테(키하나 노인)는  격렬한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대극반전이 일어나 원래의 성격과 정 반대의 모습을 보이며 정신분열증 까지 겪는 전형적인 환자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으며 용기도 없었던 키하나 노인은, 온갖 오지랖을 부리며 만나는 사람마다 시비를 걸거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하는가 하면, 자신을 헤치려는 마법사나 악마가 있다는 망상에 빠지고, 현실과는 전혀 다른 상상을 통해 자신 앞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처합니다. 망상과 환각, 자신의 현재에 대한 카섹시스(대상에 대한 집중력)이 소실됩니다. 그 결과 그는 마치 꿈을 꾸거나 심하게 마약이나 술에 취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죠. 

 

 

 

풍차를 향해 돌격하거나 양때를 왕국의 대군으로 착각하고 전투를 벌이는 돈 키호테. 이러한 돈 키호테의 행동은 정신분열증으로 인한 망상증과 카섹시스(대상에 대한 심리적 에너지, 혹은집중력 유지)소실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내향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은 심리적 스트레스에 의해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이 동반되는 경우가 더욱 빈번하다.  

 

 

 당연하게도 돈 키호테는 그를 주목하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현실과 상상은 점점 거리를 벌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인물들을 우리 주위에서도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유명한 예로는 허경영이나 지만원 같은, 심각한 경우도 있지만, 때에 다라서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는(주로 영웅적으로), 수 많은 인물들을 보게 됩니다. 가끔은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도 보게 됩니다. ㅎㅎ 물론 이것을 분열증이나 망상증 같은 심각한 병리적 증상과 동일선상에서 볼 수는 없지만 융은 이러한 증상들이, 동일한 원인과 기전을 가진 다양한 수준의 일관된 스펙트럼을 형성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심각한 현실과 환상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돈 키호테가 된 키하나 노인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자신이 진즉에 완수했어야 할 정신적 사건들을 경험함으로써, 거인과 마법사를 무찌르고, 공주의 왕국을 구원하는 등, 상징적으로 과업을 경험하고 완수해 나갑니다. 한평 생 남의 눈치만 보면서 이야기의 환상 속에서만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시골노인이 젊은이의 굉장한 경험을 때 늦게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현진건의 소설 「B사감과 러브레터」에서, 주인공이 학생들의 편지에만 머무르지 않고 돈 키호테와 같은 상황에 빠졌더라면 어떤 일을 겪게 될 지를 예상하는데 그다지 큰 상상력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환상과 현실의 괴리는 충돌을 불러일으키가 되고, 망상증이나 분열증을 겪는 정신증 환자의 자아는 현실을 왜곡해 받아들이므로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계속되는 한 그는 현실과의 접점을 완전히 잃고 저승의 세계를 떠돌게 되는, 심리적으로는 죽은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 『셔터 아일랜드』의 주인공 처럼 말이죠. (마찬가지로 경증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계속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수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죽지도, 그렇다고 살아있지도 않은 상태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동네 친구인 학사 삼손 캬라스코의 노력 덕택으로, 밤 바다의 백사장에서 결투를 벌이고 패배한 후 자신이 창조한 압도적인 환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결투의 장소가 밤바다의 백사장인 곳이 의미심장합니다. 제가 네키야(밤바다 여행)을 다룬 글에서, 그 여정은 주로 바다 괴물이나 고래(욥, 피노키오), 혹은 동굴(예수, 단군신화)처럼 심리적 퇴행을 상징하는 장소에서 벌어진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들이 그 안에서 모험을 치르고 심리적 문제를 해결한 후 도착하는 곳이 바로 밤의 바닷가입니다. 오디세우스가 파이아키아에서 손살같이 빠른 배를 타고 잠 든 채로 이타가의 해변에 도착한 것처럼 말이죠. 저는 세르반테스가 이런 은유들을 명확하게 아는 상태에서 작품을 썼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이 작품이 집단무의식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돈 키호테가 겪은 모험은 객관적 사실이라기 보다, 키하나 노인의 심리적 모험이라는 측면에 더 중점을 두고 봐야 합니다. 즉 그는 자신의 마음 속이라는 고래 뱃속에서 격전을 벌이고 심리적 과업을 완수한 끝에 네키야의 목적지인 밤의 바닷가에 도달한 것입니다. 

 

돈키호테는 밤의 해변에서 벌어진 학사 삼손 캬라스코와의 최후의 결투에서 패하고 현실로 돌아온다. 삼손 캬라스코가 그와 갈등하고 현실로 되돌라는 행위는 분석가들의 전형적인 행위에 준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키하나 노인은 입문의례의 때를 놓치고 인생의 과업을 완수하지 못한 미성숙한. 나이만 먹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내면의 자연스러운 요구를 통해, 퇴행을 겪고 거기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전형적인 사이코드라마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다만 그의 사례는 너무 때가 늦어 상당한 심리적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병리적 증상도 겪어야 했으나, 조력자의  도움으로 결국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 심리적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돈 키호테의 조력자가 되어 그 환상을 공유해온 산초 판사와, 의도적으로 돈키호테와 갈등을 일으켜서 돈키호테의 현실감을 되찾아 준 학사 삼손 캬라스코의 역할은 전형적인 분석가의 행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심리적 과업을 완수하고 현실의 키하나 노인으로 돌아온 돈 키호테는 비로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융은 네키야가 결국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의 여정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세상과 작별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관심사에 어느 정도 초탈해져야 할 필요가 있고, 그 초탈은 자연스럽고 근본적인 세상을 향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만 획득할 수 있는 자질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서사에서 한 인물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완수하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는 모습이 자주 그려지는 이유도 그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융이 자신의 환자들과 해왔던 작업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프로이트와 비교하여 융의 환자들이 명확하게 보이는 특징은, 그들이 신경증환자라기 보다는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고 의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아마도 이는 그들이 주로 경제적으로 유한계층인 것과 연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인생에서 공허함을 느끼고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는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계층에게는 사치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융 심리학은 주로 이렇게 사회적이기 보다는 개인 내면에 집중하는 측면이 있었고, 이러한 측면이 정신의학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신경과학적 기반이 없는 정신분석 운동 내에서도 비판이 집중된 지점이었습니다. 키하나 노인의 신분(경제적 여유가 있는 유복한 시골 하급귀족)을 감안했을 때, 키하나 노인이 겪은 심리적 문제와 해결은 융 심리학의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해도 무방해보입니다. 

 

  지금까지 개인의 심리적 전체 안에서 벌어지는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대립, 그리고 그 대립에서 오는 중년의 위기 문제를 다양한 문학적 사례들을 통해서 살펴봤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립의 문제는 오로지 개인 안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 글에서 한 번 간단하게 언급한 것처럼, 이런 대립과 그 긴장을 해결하기 위한 심리적 방편, 그것도 아주 큰 부작용을 가진 방편인 투사의 문제는 개인의 마음 속 뿐 아니라,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사회와 사회 사이에서도 늘상 벌어지는 일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림자 투사의 사회적 양상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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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2-06-04 12:47:07

디피에서 제일 멋진 분중 한 분이 아닐까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 읽겠습니다

WR
2022-06-04 13:04:54

관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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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6-04 14:19:43

요즘 제가 난독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택스트 읽기가 힘이 드는데, 님의 글을 술술 읽혀지는게 신기 합니다.

WR
1
Updated at 2022-06-04 14:32:45

참 격려가 되는 말씀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느끼시는 이유가 될진 모르지만 글을 쓸 때, 거의 자동적(무의식적으로)으로 읽는 호흡을 염두하면서 씁니다. 일부러 노력하는 건 아닌데 그 운율을 무시하면 제가 답답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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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4 18:36:31

잘 읽었습니다.

돈키호테는 동화책으로만 봐서 이런 내용인줄은 몰랐네요.

결말이 그렇게 끝나는 것도 몰랐고요. 그저 웃기는 얘기가 아니었군요.


오래 전에 들었던 노래가 생각나네요. ^^

https://youtu.be/eZDZ_G80X6s

WR
2022-06-05 06:34:03

우와 40년이 넘은 노래네요. 돈키호테는 수 많은 독법이 있습니다. 분량이 많아서 저도 3 번정도 밖에 못읽어봤지만 앞으로 몇 번은 더 읽게 될 것 같아요. 읽을 때 마다 새롭습니다.  

1
Updated at 2022-06-04 20:10:25

오늘도 생각거리를 안겨주셔서 감사합니다...^^

WR
2022-06-05 06:34:19

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2022-06-04 20:27:43

볼때마다 느끼는 건데 글을 정말 쉽게 읽히도록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돈키호테는 분명히 어렸을 때는 그냥 웃기는 할아버지였는데 나이를 먹고 지식이란게 쌓이면서 자꾸 뭐가 육수처럼 흘러나오는 것이 신기합니다. 

WR
2022-06-05 06:37:08

그런데 왜 조회수는 갈 수록 떨어져만 가는지..ㅠ.ㅠ

 

돈키호테는 정말 여러 번 읽어볼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완성되는데는 운도 상당히 작용했을 것 같아요. 완벽한 작품이라고는 못하겠지만 한 인간이 이런 소설을 혼자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용적으로도 다체롭고 형식적으로는 균형잡힌 작품입니다. 작가가 이 모든 걸 다 의식적으로 고려해서 썼다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을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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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5 08:45:46

유튜브 영상을 만들다 보면 각종 논문과 저서를 참고한 영상보다는 낄낄깔깔 영상이 조회수가 더 높더라구요....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4920765

 

요 책...이미 보셨을거 같은데 다시 머릿속에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습니다...

WR
Updated at 2022-06-05 08:54:35

책 소개 감사합니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 책은 정말 겸손하고 알기 쉽게 쓰여지는 저작들이라 몇 권 읽어봤는데, 이 책은 못봤네요. 저도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주제도 관심 있어서 조만간 읽어볼 기회가 있겠네요. 반지성주의 ㅂㄷㅂㄷㅂㄷ.ㅋㅋㅋ

 

*추가: 우치다 타츠루가 쓴 책이라고 지레짐작했는데 엮은 책이군요. 그래도 편저자를 믿고 한번 빌려봐야겠네요.^^

1
2022-06-06 16:43:51

그러고보니 성장기의 영웅담에 대해 생각해보면 저 때의 영웅담은 포켓몬, 디지몬, 유희왕, 탑블레이드 이런 거였네요. ㅋㅋㅋ 

WR
1
2022-06-07 14:37:05

그렇죠. 그 윗대 분들은 아마 일본의 거대 로봇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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